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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지중해(地中海) 東쪽의 해동(海東)지방에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7.09.25|조회수794 목록 댓글 7


            원전(原典)朝鮮王朝, 지중해(地中海) 쪽의 해동(海東)

               부제(副題)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산동(山東)편의 조선(朝鮮)

 

 

   한반도(韓半島)와 아세아(亞細亞) 주변도(周邊圖) : 1740년경의 아시아왜곡(歪曲) 또는 조작(造作)여부(與否)는 알 수 없음. 다만 참고로 볼 뿐이다.

 

   위의 지도(地圖)에서 지중해(地中海)의 이탈리아반도(半島)’를 보자. :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속의 곽박(郭璞)의 주석(註釋)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又東五百里,曰丹穴之山,其上多金玉.丹水出焉,而南流注于渤海 1. 주석(註釋) :郭 璞 云 渤 海, 海 岸 曲 崎 頭 也. : 곽박이 이르기를 : 발해(渤海), 해안(海岸)이 길게 뻗어 휘어진 땅의 상층부이다.라고 하였다. : 험할 기() - 바다로 길게 뻗은 육지(陸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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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38 산동(山東) 9 조선등부(朝鮮等附) / 산동(山東) 9 외국부고(外國附考)에는 조선(朝鮮)을 포함(包含)한 나라()등에 관한 기록(記錄)이다. 그렇다면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란 역사(歷史)지리서(地理書)는 어떤 책이며, 어떤 평가(評價)를 받고 있을까?

 

   쉽게 말해서,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역사(歷史)지리서(地理書)냐 하는 거다.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지형지리(地形地理)나 기후(氣候), 방향(方向)등의 자연환경(自然環境)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두산백과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중국의 역사지리서 / 저자 : 고조우(顧祖禹)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고조우(顧祖禹:1631~1692) 찬술. 본편 130. 1659년에 착수하여 1678년에 완성하였다. 내용은 중국 전역에 걸쳐 역대 주역(州域)의 지세(地勢)를 약술하고, 이어 성별(省別)로 부주현(府州縣)의 연혁 ·위치 ·산천 등을 적었으며, 끝에는 천독(川瀆:하천 등)으로 하도(河道) ·조운(漕運)의 변천과 분야(分野:천문)에 관한 것을 실었다. 또 한()민족을 중심으로 한 강렬한 민족의식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정치에의 참고를 목적으로 한 측면도 지니고 있다. 청본(淸本)은 수권(首卷)4권으로 묶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사방여기요 [讀史方輿紀要] (두산백과)

 

   두산백과 / 고조우[顧祖禹 : 1631 ~ 1692]

 

   명나라 말 청나라 초의 역사, 지리학자. 사학자 유겸의 아들. 지리학에 정통하였다. 벼슬하지 않고, 20년에 걸쳐 여도요람,독사방여기요를 완성했다. 서건학·진덕화 등과 함께대청일통지편찬에 참여했다.

 

   자 경범(景范). 호 낭하(廊下). 장쑤성[江蘇省] 출생. 사학자 유겸(柔謙)의 아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지리학에 정통하였다. 청나라에서 벼슬하지 않고, 20년에 걸쳐 여도요람(輿圖要覽)(4)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130, 1678)를 완성하였다. 서건학(徐乾學) ·진덕화(陳悳華) 등과 함께 칙명에 따라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편찬에 참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조우 [顧祖禹] (두산백과)

 

   중국역대인명사전 / 고조우[顧祖禹 : 1631~ 1692]

 

   명말청초 때 강남(江南) 무석(無錫)사람. 역사지리학자. 자는 경범(景范) 또는 복초(復初), 호는 낭하(廊下). 상숙(常熟) 완계(宛溪)에서 살아, 학자들은 완계(宛溪)선생이라 부른다. 사학자 고유겸(顧柔謙)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지리학에 정통했다. 청나라에 벼슬하지 않고 유민(遺民)을 자처했다. 일찍이 서건학(徐乾學)의 초청을 받아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편찬에 참여했다. 책이 완성된 뒤 천거를 한사코 사양했다. 사지(史地)에 밝았다. 20년에 걸쳐 여도요람(輿圖要覽)4권과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130(1678)을 완성했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매 지명마다 반드시 역대에 걸친 여러 사실들을 정밀하게 해설을 달아, 군사지리학의 명저로 꼽힌다. 그 밖의 저서에 완계집(宛溪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조우 [顧祖禹]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위의 설명(說明)을 보면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매 지명마다 반드시 역대에 걸친 여러 사실들을 정밀하게 해설을 달아, 군사지리학의 명저로 꼽힌다. 라고 논평(論評)하고 있다. 또한 ()민족을 중심으로 한 강렬한 민족의식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정치에의 참고를 목적으로 한 측면도 지니고 있다. 고 하였으며, 지리학에 정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결과적(結果的)으로 후대인(後代人)들이 말하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내용(內容), 사실(事實)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단 우리가 보고 있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당시(當時) 1,678년의 원본(原本)이다.” 라는 전제(前提)하에 말이다.

 

   ! 그렇다면 산동(山東) 곧 산()의 동()쪽이 있다면, ()의 서(西)쪽에는 산서(山西)가 있게 되고, 이것은 곧 산동(山東)지방과 산서(山西)지방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때 동()쪽과 서(西)쪽을 가르는 산()은 어떤 산()일까?

 

   오늘날의 산동(山東)과 산서(山西), 지들 멋대로 만들어 놓은 이름일 뿐이다. 근거(根據)없는, 유래(由來)가 없는만들어진 산동(山東), 산서(山西)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마저도 방향(方向)이 서로 다르고, 하북성(河北省) ()쪽 땅과 하남성(河南省) 동북(東北)쪽이 산동(山東)과 산서(山西)를 갈라놓았으니, 억지로 꿰맞춘 것이다.

 

   그러면 산동(山東) 9 / 조선(朝鮮)등부(等附) 또는 외국부고(外國附考)”라고 했으니, 중국(中國)의 동()쪽 땅, 산동(山東)지방에, 조선(朝鮮)과 또 다른 나라()들이 있었다는 이야긴가? 내용(內容)을 보면, 전혀 그게 아니다. 지형지리(地形地理)속으로 들어가 보자.

 

   ()나라에서는 조선(朝鮮)의 한성(漢城) 및 팔도(八道)에 대한 지형지리(地形地理), 기후(氣候), 방향(方向), 토산물(土産物), 도회지(都會地)등등에 관한 정보(情報), 당시(當時)의 조선인(朝鮮人)들 보다도 더 정확(正確)하게 알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임란(壬亂)때 출병(出兵)한 명군(明軍) 때문이다. 군사작전(軍事作戰)과 지형지리(地形地理), 기후(氣候)등등은 전쟁(戰爭)의 승패(勝敗)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요소(要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要素)들을 부정(否定)한다면 : ‘임진왜란(壬辰倭亂)’이란 ()들의 난동(亂動)’도 없었으며, 더더구나 소위(所謂) ‘천군(天軍)’이라는 명()나라 군사(軍事)의 출병(出兵)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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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史方輿紀要 卷 三十八 山東九 朝鮮等附 / 山東九外國附考

 

  本文 : 碧蹄館,在王京西三十里.其東有橋曰大石橋,萬曆中李如鬆與倭戰處. : 벽제관(碧蹄館), 왕경(王京)의 서(西)30 리에 있다. 그 동()쪽에 대석교(大石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만력(萬曆)중에 이여송(李如松)과 왜()가 싸웠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벽제관(碧蹄館):경기도 고양시 벽제역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객관(客館)으로, 중국(中國) 사신(使臣)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벽제역(碧蹄驛)의 객사(客舍)에 유숙(留宿)하였다. 그리하여 벽제역(碧蹄驛)의 객사(客舍)를 곧 벽제관(碧蹄館)이라 하였다.고 설명(說明)한다.

 

   그런데 현재(現在)의 경기도(京畿道) 고양시 덕양구에 있었다는 옛 벽제관(碧蹄館) 또는 벽제역(碧蹄驛): 서울 곧 한성(漢城)=왕경(王京)’ 어디에서 보아도 북()쪽이지, (西)쪽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형도(地形圖)를 놓고 보면 : ‘한성(漢城)=왕경(王京)’서울에서, (西)쪽 방향(方向)에는, 김포(金浦)국제공항(國際空港)이 있고, 그 서(西)쪽은 바다()이다. 그런데 현존(現存)하는 많은 고전(古典)에서는,조선왕조(朝鮮王朝) 왕경(王京)에서 중국(中國)을 가려면, (西)쪽으로 가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임란(壬亂)때도 선조(宣祖) 서행(西行)했다.”고 기록(記錄)되어 있고, 연행기(燕行記) 역시(亦是)도 이와 다름이 없다.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없는 땅은, 행성(行星)에서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심지어 바다() 깊은 곳에도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생생(生生)하게 살아있다는 점이다.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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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全羅道 ; 日本對馬諸島,偏在朝鮮海洋之東南,與慶尚之釜山相對,倭船止抵釜山,不能越全羅至西海,故八道之中惟全羅一道,直北正南,其迤西則與遼東對峙.日本所以隔絕遼,,不通海道者,恃有朝鮮. : 전라도(全羅道) : 일본(日本)의 대마(對馬) 여러 섬()들은, 조선(朝鮮) 해양(海洋)의 동남(東南)쪽으로 치우쳐 있어, 경상도(慶尙道)의 부산(釜山)과 서로 대()하고 있어, ()선박이 부산(釜山)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전라도(全羅道)의 서해(西海)로 넘어갈 수가 없다. 팔도(八道)중에서 전라(全羅) 일도(一道)가 유일하게, 그 서(西)쪽에 비스듬하게 요동(遼東)과 대치(對峙)하고 있어, 일본(日本)과 요(), ()는 사이가 서로 동떨어져 끊어져 있어, 바다 길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조선(朝鮮)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현재(現在)의 반도(半島)와 열도(列島)의 지세(地勢)를 말하고 있지 않다.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열도(列島)에서 전라도(全羅道)는 시간(時間)이 조금 더 걸릴 뿐, 망망대해(茫茫大海)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돛을 펄럭이며 갈 수 있는 곳이다. 황당(荒唐)한 이야기일 뿐이다라고 말하기엔 뭔가 꺼림칙하지 않은가!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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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淸道,洪州山,在忠州西境海中.一統志洪州建於山下,稍東有東源山,產金.又有富用山,亦在洪州海中上有倉谷,故名.俗訛爲芙蓉山. : 충청도(忠淸道). 홍주산(洪州山), 충주(忠州) (西)쪽 지경의 바다가운데(海中)에 있다. 일통지(一統志)에 따르면 : 산 아래에 홍주(洪州)를 세웠다. 조금 동()쪽에 동원산(東源山)이 있는데, ()이 산출된다. 또 부용산(富用山)이 있는데, 역시 홍주(洪州)의 해중(海中)에 있으며 그 위에 창곡(倉谷)이 있다. 옛 이름이다. 속설의 부용산(芙蓉山)은 그릇된 것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홍주(洪州) : 지금의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이다.라고 설명(說明)하는데,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속군(屬郡)3, 속현(屬縣)11개이다.라고 말한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는 홍주(洪州) 곧 홍성(洪城)은 결코 바다가운데(海中)에 있지 않으며, 홍성(洪城)으로부터 서(西)쪽으로 약 20km 이상(以上) 떨어져 있다.

 

   해중(海中)이란 말은 :바다 속 또는 바다 가운데를 말한다.고 한자사전에서 뜻풀이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주(洪州)는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더더구나 홍주산(洪州山)이라는 산()이 있어, 그 산 아래에 홍주(洪州)”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홍주산(洪州山)에서 홍주(洪州)라는 지명(地名)이 유래(由來)하는 것이다.

 

   충주(忠州)의 서(西)쪽에 있다고 하였으나, 실제(實題)서남(西南)’쪽에 있으며, 내륙(內陸)에 있는 홍주(洪州)와 바다 가운데에 있었다.는 홍주(洪州)? 해중(海中)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가 핵심(核心)이 될 것이다.

 

   바다 가운데

   넓고 넓은 평원(平原)의 한 가운데

 

   둘 중의 하나임은 분명(分明)할 거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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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馬江,在清州南.圖經矜州南有白馬江,南流入清江界,折而東,又東北經天安郡界,折而北,其下流合於漢江. : 백마강(白馬江), 청주(淸州)의 남()쪽에 있다. 긍주(矜州)의 남()쪽에 백마강(白馬江)이 있는데, ()쪽으로 흘러 청강(淸江) 경계로 들어가서, ()쪽으로 꺾여, 또 동북(東北)쪽을 지나 천안군(天安郡) 지경에서, ()쪽으로 꺾여, 그 하류(下流)는 모두 한강(漢江)에 합쳐진다.

 

   백마강(白馬江)은 청주(淸州)의 서남(西南)쪽에 있으며, 이 강()은 금강(錦江)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마강(白馬江) : 충남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으로, 백강, 사하(泗河), 백촌강(白村江)이라고도 한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긍주(矜州)의 남()쪽에 백마강(白馬江)이 있는데, ()쪽으로 흘러 청강(淸江) 경계로 들어가서, ()쪽으로 꺾여, 또 동북(東北)쪽을 지나 천안군(天安郡) 지경에서, ()쪽으로 꺾여, 그 하류(下流)는 모두 한강(漢江)에 합쳐진다.고 하였으니, 이 이야기대로라면, 백마강(白馬江)은 한강(漢江)의 큰 지류(支流)이다. 과연 그럴까?

 

   백마강(白馬江), 부여(扶餘)부근(附近)을 흐르는 금강(錦江)의 별칭(別稱)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금강(錦江)이라는 얘기다.

 

  백마강(白馬江) () 금강(錦江)의 물은, 충주(忠州)의 서남(西南)쪽 바다로 들어가는 하천(河川)이다. 그러나 위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설명(說明), 동북(東北)으로 흘러, 다시 북()으로 흐르다가 한강(漢江)에 합쳐진다고 하였으니,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말하는 백마강(白馬江), 반도(半島) 땅의 하천(河川)일 수 없으며, 곧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는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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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龍府城,在會寧西北.遼志在勃海扶餘府.阿保機末有黃龍見於此,因名.中略. : 황룡부성(黃龍府城), 회령(會寧) 서북(西北)에 있다. 요지(遼志)에 따르면 : 발해(渤海) 부여부(扶餘府)에 있는데, 아보기(阿保機) ()에 황룡(黃龍)을 본 곳으로, 이로 인하여 이름이 되었다. 중략(中略). 五代史自幽州行十餘日,過平州,出渝關,行沙磧中七,八日,至錦州. : 오대사(五代史)에 따르면 : 유주(幽州)로부터 십여(十餘)일을 가, 평주(平州)를 지나, 유관(渝關)투관(渝關)이라고도 하는데, 유관(楡關) 곧 산해관(山海關)이라고도 한다.을 나와, 사막(沙漠) 가운데로 7, 8일을 가면, 금주(錦州)에 닿는다. 又行五,六日,過海北州.又行十餘日,渡遼水,至勃海鐵州.又行七,八日,過南海府,遂至黃龍府. : 5, 6일을 가, 해북주(海北州)을 지나, 또 십여(十餘)일을 가서, 요수(遼水)를 건너, 발해(渤海)의 철주(鐵州)에 다다른다. 7, 8일을 가서, 남해부(南海府)를 지나면, 마침내 황룡부(黃龍府)에 다다른다.고 하였다.

 

   위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황룡부성(黃龍府城) 해설(解說)을 보면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유주(幽州)로부터 평주(平州)을 지나, 산해관(山海關), 다시 산해관(山海關)을 나와, 금주(錦州), 다시 해북주(海北州), 요수(遼水)를 건너, 철주(鐵州), 다시 남해부(南海府)를 지나, 마침내 황룡부(黃龍府)에 다다른다.고 하였는데,

 

   눈길을 끄는 구절(句節)이 바로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유관(渝關)을 나와, 사막(沙漠) 가운데를 78일을 가서야, 바로서 금주(錦州)에 닿는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로 보면 :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경계(境界)의 발해(渤海) 바닷가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동북(東北)쪽으로 발해(渤海) 바닷가의 내륙(內陸)을 따라 78일을 가면, 요녕성(遼寧省) 금주(錦州)에 다다르는데, 이곳 모두가 사막(沙漠)이다.라는 얘기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 설명(說明),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이야기며, 가능했다면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가 기록(記錄)편찬(編纂)된 후()된 후(), 이곳은 천지개벽(天地開闢)에 버금가는 지각변동(地殼變動)등의 격변(激變)을 겪은 곳이다.라고 해야 한다.

 

   [특히 78일을 사막(沙漠)을 걸어야 했다면, 최소한(最小限) 수백(數百)리에 걸쳐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설명(說明),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사신단(使臣團)들이 오고 갔던 그곳 이야기와 똑같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기록(記錄)연행사신(燕行使臣)이 기록(記錄)한 연행기(燕行記)유학자(儒學者)들의 문집(文集)속에 등장(登場)하는 이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똑같다. 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런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남()쪽에 발해(渤海)”가 있었고, 이 발해(渤海)의 동()쪽과 동남(東南)쪽 지방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이야기며, 그래서 발해(渤海)의 동()쪽을 해동(海東)이라고 불렀고, 해동(海東)은 곧 조선(朝鮮)과 같이 통용(通用)되었다.고 한다면 아주 자연스러운 역사(歷史)이야기가 된다.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는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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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中略,陳壽曰三韓凡七十八國,百濟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與高句麗相匹,俱在遼東之東千餘里. : 백제(百濟)는 중략(中略). 진수(陳壽)가 이르기를 : 삼한(三韓)은 무릇 78개 나라인데, 백제(百濟)는 그 한 나라이다. 뒤에 점점 강대(强大)해져, 여러 작은 나라들을 아울러, 고구려(高句驪)와 서로 맞섰는데, 함께 요동(遼東)의 동()쪽 천여(千餘)리에 있었다. 李延壽曰百濟之先,以百家濟海,後遂以百濟名國,晉世高麗略有遼東,百濟亦分據其地,置遼西,晉平二郡. : 이연수(李延壽)가 이르기를 : 백제(百濟)의 선대(先代),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넜는데, 뒤에 마침내 백제는 이름난(소문난) 나라가 되었다. ()나라 때에 고구려(高句驪)가 요동(遼東)을 다스릴 때, 백제(百濟) 역시 그 땅을 나누어 의거하고는, 요서(遼西), 진평(晉平) 2()을 설치하였다. 蕭齊永明六年後魏遣兵擊百濟,爲百濟所敗.中略. : 소제(蕭齊) 영명(永明) 6년에, 후위(後魏)북위(北魏)가 병사들을 보내어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중략(中略).

 

   진수(陳壽 : Ch'en Shou : AD 233297) : 다음백과 인용(引用) : 서진(西晉)사람으로 삼국지(三國志)의 저자(著者)이다. 그밖에 고국지(古國志익도기구전(益都耆舊傳촉상제갈량집(蜀相諸葛亮集)등도 편찬했으나 모두 망실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 이연수(李延壽) : 중국 당나라 때의 사학자(?~?). 진서(晋書)와 수서(隋書) 편찬에 참여하였고, 아버지인 이대사(李大師, 570~628)의 유지(遺志)를 계승하여 643년부터 659년까지 17년 동안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국가들의 사서(史書)와 기록들을 연구, 정리하여 본기(本紀) 12, 열전(列傳) 88권의 북사(北史)와 본기(本紀) 10, 열전(列傳) 70권의 '남사(南史)'를 편찬하였다.

 

   요동지동(遼東之東) 천여(千餘)리에 고구려(高句驪)와 함께 백제(百濟)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보면 :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 선양) 서쪽에 있는 하천(河川)이 바로 요수(遼水)’라고 하니, 심양(瀋陽 : 선양)은 요동(遼東)이요, () 건너는 바로 요서(遼西)지방이다.

 

   지형도(地形圖)를 놓고 보자. 심양(瀋陽)주변에서 동()쪽이 어느 쪽인가? 바로 백두산(白頭山)과 함경북도(咸鏡北道)지방이다. 그렇다면 요동(遼東) ()쪽 천여(千餘)리라면 : 백두산(白頭山) 주변에 고구려와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고구려(高句驪)가 요동(遼東)을 점거(占據)하여 다스릴 때, 백제(百濟)도 요서(遼西)지방을 차지하고는, 이곳에 요서(遼西), 진평2()을 설치(設置)하고 경략(經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백제(百濟),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지방에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으로부터 약 800km 정도(程度) 떨어져 있던 요서(遼西)지방을 차지하고 다스렸다고 했을 때, 백제(百濟)()은 자신(自身)의 군대(軍隊)를 육로(陸路)로 보냈을까? 해로(海路)로 보냈을까?

 

   당연하게도 육로(陸路)로 군대(軍隊)를 보내어, 요서(遼西)지방을 점거(占據)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래의 경우(境遇)가 존재(存在)하기 때문이다.

 

   ➌「蕭齊永明六年後魏遣兵擊百濟,爲百濟所敗.中略. : 소제(蕭齊) 영명(永明) 6년에, 후위(後魏)북위(北魏)가 병사들을 보내어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원전(原典)에도 기록되어 있다. 후위(後魏)가 수십만(數十萬) 기마(騎馬)를 보내어 백제(百濟)를 쳤으나, 사전(事前)에 이를 눈치 챈 백제(百濟) (), 군대(軍隊)를 매복(埋伏)시켜 기습(奇襲)하니, 후위(後魏)의 수십만(數十萬) 기마(騎馬)는 궤멸(潰滅)당했다.고 전해지는데, 바로 이것이다.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에 기마(騎馬)을 앞세워 진군(進軍)할 수 있는 길은, 딱 한군데 육로(陸路)가 있을 뿐이다. 바로 충청도(忠淸道) 북쪽의 고구려(高句驪) 땅이다. 고구려(高句驪)가 후위(後魏)인가? 후위(後魏)가 고구려(高句驪)인가?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몫이다.

 

   ➍「以 百 家 濟 海 :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넜다.라는 이 구절(句節)속의 바다()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오늘날의 발해(渤海) 또는 황해(黃海)를 건너 반도(半島) 북방(北方)으로 와서, 여의치 않자, ()쪽으로 내려왔다고 이야기한다.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稱頌)한 것은 중국(中國)에서다. 백제(百濟) 땅의 경기(京畿) 남부(南部)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는 황해(黃海)의 동()쪽이지 발해(渤海)의 동()쪽 땅이 아니다. 발해(渤海)의 동()쪽 땅은 고구려(高句驪) 또는 발해(渤海) 땅이었다.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황해(黃海)의 동()쪽에 있었을 뿐이다. 분명(分明)하게 말하는 것은, 해동(海東)이란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어, 해동(海東)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황해(黃海) 또는 동해(東海)의 동()쪽도 해동(海東)이 되어야 하는가? 이건 아니다. 왜냐하면 분명(分明)하게 말하는 것이 발해(渤海)의 동()쪽이라서 해동(海東)이라고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곧 백제(百濟) ()을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稱頌)했다면, 백제(百濟)는 발해(渤海)를 건넜고, 그 동()쪽 땅에 웅거(雄據)하였으며, 발해(渤海)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던 요서(遼西) 땅도 경략(經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해(渤海)가 어디냐?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에 등장(登場)하는 발해(渤海)는 세 군데에 있다.

 

   -1) 지중해(地中海)의 대진(大秦 : 이탈리아 반도)과 발칸반도(半島) 사이의 바다()를 서발해(西渤海)와 동발해(東渤海)로 불렀다는 북사(北史)의 이야기

 

   -2)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자이산호()와 발하슈호() 주변 일대(一帶)

 

   -3) 신강성(新疆省)의 포창해(蒲昌海)주변(周邊) 일대(一帶)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도, 똑같은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을 보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엄청난 차이(差異)가 있는가? 또 무엇이 다른가? 사고(思考)의 자유(自由), 그리고 세뇌(洗腦)된 고정관념(固定觀念), 이것의 차이(差異)일 뿐이다.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는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

 

  休忍國,在新羅之東,亦二韓之屬.東晉時有休忍國,服屬於燕,苻秦滅燕,遂屬秦. : 휴인국(休忍國), 신라(新羅)의 동()쪽에 있는데, 또한 두 한()에 속해 있다. 동진(東進)때에도 휴인국(休忍國)이 있어, ()나라에 복속되었는데, 부진(苻秦)이 연()을 멸()하자, 마침내 진()에 속하게 되었다. 太元四年苻路以龍城叛,徵兵於鮮卑,烏桓,高句麗,百濟,新羅,休忍諸國,是也.後並於百濟. : 태원(太元)4년 부로(苻路)가 용성(龍城)에서 배반(背叛)하여, 선비(鮮卑), 오환(烏桓),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 신라(新羅), 휴인국(休忍國)등의 여러 나라에서 징병(徵兵)하였는데, 바로 그 나라이다. 뒤에 백제(百濟)에게 병합되었다. 라고 하였다.

 

   휴인국(休忍國) : 신라(新羅)의 동()쪽에 있는데, 두 한()에 속했다는 말은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말한다고 보아진다. 신라(新羅)의 동()쪽에 있다고 한 휴인국(休忍國)”, 경주(慶州)의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에서는 그곳에 또 장인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면 휴인국(休忍國)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거다.

 

   이게 또 황당(荒唐)한 것이, 뒤에 백제(百濟)에 병합(倂合)되었다.는 이야기다. 반도 남부(南部) 땅의 동()쪽에는 신라(新羅), (西)쪽 땅에는 백제(百濟)가 있었다고 하면서그런 형편(形便), 신라(新羅)의 동()쪽에 있는 휴인국(休忍國), 백제(百濟) (), 무슨 재주로 이들을 병합(倂合)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좋다! 뭐 공수부대(空輸部隊)를 동원(動員)했던, 낙타(駱駝)군단(軍團)을 보냈든 여하간(如何間)에 백제(百濟)가 그 나라를 병합(倂合)했다고 했으니 그렇다 치자. 그러면 지금 휴인국(休忍國)”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었다는 거냐?

 

   휴인국(休忍國): 경주(慶州) ()쪽 땅에, 아니면 동해(東海) 가운데 섬(), 그렇다면 울릉도(鬱陵島)?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독도(獨島)?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나라()?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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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流鬼東夷也.唐貞觀十四年入貢,去京師萬五千里,其地直黑水鞂鞨東北,少海之北,三面接海,南與拂涅,鞂鞨鄰. : 유귀(流鬼)는 동이(東夷). () 정관(貞觀) 14년에 입공하였는데, 경사(京師)로부터 15천리 떨어져 있고, 그 땅은 곧바로 흑수말갈의 동북(東北)이며, 소해(少海)의 북()쪽으로, 삼면(三面)이 바다와 접하고, ()쪽에는 불녈(拂涅), 말갈(靺鞨)과 가깝다. 東南航海,行十五日乃至.人依島嶼散居,多沮澤.初附百濟,後附新羅.杜佑曰流鬼國在北海之北.是也. : 동남(東南)으로 항해하여 15일 정도를 가 이에 이르면, 사람들은 크고 작은 섬들에 의지하여 흩어져 산다. ()이 많다. 처음에는 백제(百濟)에 기대었으나, 뒤에는 신라(新羅)에 기대어 살았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유귀국(流鬼國)은 북해(北海)의 북()쪽에 있다. 옳다.고 하였다.

 

   ()의 경사(京師)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로부터 “15천리:서북(西北)으로 모스크바(Moskv) ()쪽의 백해까지 : ()쪽은 북극해(北極海)까지 : 동북(東北)은 알래스카(Alaska)까지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동북(東北)에 있다고 하며, 소해(少海)의 북(), 삼면(三面)이 바다라고 하는데, 남쪽은 불녈(拂涅), 말갈(靺鞨)과 가깝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쪽은 땅이고, ‘((西()’쪽은 바다()라는 뜻일 게다.

 

   이런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갖춘 곳은 현재(現在)의 러시아 우랄산맥(山脈) ()쪽에 있다. “타이미르반도와 야말반도, 카닌반도, 가단반도등이 있다. ()이 많고, 크고 작은 섬들에 기대어 산다.는 것을 감안(勘案)하면 타이미르반도와 야말반도지역이 가능성(可能性)이 많다.

 

   우랄산맥(山脈) 가장 북()쪽 이곳에 야말반도가 있고, 서북(西北)에 노바야젬랴섬()이 있는데, 그 사이를 카라해(: Kara Sea )라고 부른다. 이곳은 서(西)시베리아분지(盆地)의 최 북()쪽 지방이다. 이곳으로는 오브강()과 예니세이강()등의 여러 하천이 카라해(: Kara Sea )’로 유입(流入)된다.

 

   이곳 지방의 기온(氣溫): 북부(北部)에서는 연중 9~10개월간, 남부(南部)에서는 연중 7~8개월간이나 영하(零下)에 머무른다. 1월 평균기온은 20~28이며, 최저기온은 46이다. 반면 7월 평균기온은 1~6이며, 최고기온은 16이다. 겨울에는 강풍과 눈보라가 빈번하며, 여름에는 눈, 눈을 동반한 돌풍, 안개 등이 자주 일어난다. 수면은 연중 대부분 얼음으로 덮여 있다.고 전()한다.

 

   이러한 지역(地域), () 이근행(李謹行) ()과 고구려(高句驪) 및 말갈(靺鞨)병사로 이루어진 고구려(高句驪)부흥군(復興軍)’의 격전지(激戰地)였다는 호로하(瓠蘆河)”가 있다면 :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의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곳에 글란(契丹)족들의 선대(先代)들이 살았다고 한다면 충분(充分)히 이해(理解)되는 역사(歷史)이야기가 된다.

 

   통전(通典)의 저자(著者) 두우(杜佑)는 말하기를 : 유귀국(流鬼國), 북해(北海)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고, 이곳의 유귀(流鬼)가 백제(百濟)에 속했다는 말은, 북해(北海)의 북()쪽까지도 백제(百濟)의 영토(領土)였다는 말이며, 백제(百濟)가 망()하고 난 뒤에는, 신라(新羅)가 이 땅을 차지했다는 말이 된다.

 

   반도(半島) 서남(西南)쪽에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뭔가?

 

   반도(半島) 동남(東南)쪽에 신라(新羅)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뭐지?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냐?

 

   또 북해(北海)가 오늘날의 발해(渤海)라고 하는 자()나 바이칼 호()를 말한다고 하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원전(原典)을 보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主張)을 할까?

 

   유귀(流鬼)’는 경사(京師)로부터 15천리 떨어져 있는데, 북해(北海)의 북()쪽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 발해(渤海)는 북해(北海)가 될 수 없고, 바이칼 호() 역시 북해(北海)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의 경사(京師)로부터 발해(渤海)까지는 겨우 950km 떨어져 있으며, 바이칼 호()까지는, 1,950 km 떨어져 있을 뿐이다. (-글 어스 : 직선거리(直線距離))

 

   삼국지(三國志북사(北史자치통감(資治通鑑통전(通典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해국도지(海國圖志)등등에서 말하는 조선왕조(朝鮮王朝)”, 우랄산맥(山脈)을 포함(包含)하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를 넘어 동구라파(東歐羅巴)까지도 영역(領域)으로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해동(海東)이란 말은, 발해(渤海)의 동()쪽 땅을 말하며, 넓게는 북사(北史)에서 말하는 대로, 서발해(西渤海)와 동발해(東渤海)를 나누는 지중해(地中海) ()쪽 지방을 일컫는 말이 된다.이것은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팩트(Fact).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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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산동(山東)편 중에서, 관심(關心)을 끄는 몇 구절(句節)을 인용(引用)했을 뿐이다. 총칭(總稱) “조선왕조(朝鮮王朝)”반도(半島) 땅에 있을 수 없는 대제국(大帝國)이었다는 것은, 원전(原典)을 보면서, 나라(종족(種族부족(部族지형지리(地形地理기후(氣候인종(人種)등등을 세밀(細密)하게 하나하나 고찰(考察)해보면, 놀랍게도 그 영역(領域)은 지중해(地中海)까지로 확대(擴大)된다.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영구(永久)하게, 그곳 땅을 다스렸다는 것은 아니다. 부침(浮沈)에 따라 확장(擴張)과 축소(縮小)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장(主張)하는 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풍속(風俗)과 문명(文明)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를 건너 구라파(歐羅巴)로 전해졌으며, 그 영향력(影響力)은 막대(莫大)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극동(極東)의 조그마한 반도(半島) 땅에 던져 놓고, 이곳은 니들은 선대(先代)들이 살았던 곳이라면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로 무장(武裝)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가르치고, 배우게 하여, 달달 외우게 만들어 놓았다. 이게 오늘날의 한국사(韓國史).

 

   조선사(朝鮮史)에 관한 한, 우린 우물속의 개구리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20170925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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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대부여 | 작성시간 17.09.26 웬지 佰擠(백제)가 大帝國이 아니였을까? 생각해봅니다. 대륙사관을 보면 北擠, 南擠가 있는데 혹시 佰擠가 아닐런지……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9.26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백제왕조(百濟王朝)라고 봅니다.
    독사방여기요에서 보듯이 당의 경사(京師)로부터 1만 5천리 떨어져 있던 곳까지도 백제의 영토였다고 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백제였다고 봐야 겠지요.
    조선사는 우리들의 역사상식을 뛰어넘는 상상을 초월하는 영토 개념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물속에서 자란 우리들은 전혀 보질 못하고 있죠. 우물 바깥 세상을 모르니까요.
    우물 바같 세상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들을 세뇌시킨 자들은, 충격적이지만 바로 조선인의 후손들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게 현실이고, 팩트입니다.
    그래서 조선사의 진실 밝히기가 더욱 어렵죠.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9.26 성원과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기원합니다.
  • 작성자로터스 | 작성시간 17.10.01 발해가 과연 어디냐? 이는 조선사의 요체입니다.
    본문에서 첫째는 지중해, 둘째는 중앙아시아의 자이산호 와 발하슈호,
    세번째는 신강성의 포창해가 발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지중해 동쪽의 해동지방...." 은
    박용숙 교수의 저서 '샤먼제국 샤먼전쟁'의 내용과 바로 상통합니다~~
    문무님의 옥고(玉稿)에 감사드리며 추석절 잘 보내십시요!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0.01 안녕하세요. <로터스>님!
    발해의 동쪽, "해동"이란 말은 많은 곳에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산해경 주석편에서, 사기 및 한서, 후한서, 북사,통전, 등등 소위 정사라고 하는 많은 고서속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애써 외면합니다. <발해는 현재의 발해요, 북해는 바이칼 호수>라고 하면서, 조선사의 중요한 획을 긋은 지명들에 대해 무던히도 외면해 버립니다. "샤먼제국"의 저자께서도 이런 주장을 하신 바 있죠. 이런 것들에 대한 고서의 고증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원과 관심,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즐거운 추석을 행복하게 건강하게 지내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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