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哈密:Ha-mi:伊吾), 朝鮮의 屬國, 그 논거(論據)
조선(朝鮮)의 이오(伊吾)토벌(討伐)과 소륵(疏勒)수비(守備) (제3편)
○ 전회(前回)에 “소륵(疏勒:카슈가르)과 이오(伊吾:합밀哈密:하미)”【조선(朝鮮)의 이오(伊吾)토벌(討伐)과 소륵(疏勒)수비(守備) ‘제1편(2018년 05월 12일)’과 ‘2편(05월 21일)’으 로 게재(揭載)함.】에 대한 조선사(朝鮮史) 기록(記錄)을 가지고,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동(東)쪽으로부터 서(西)쪽 파미르(Pamir : 帕米爾)고원지대(高原地帶)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조선(朝鮮)영토(領土)였음을 확인하고, 그 논거(論據)제시(提示)하고 설명(說明)하였다.〉
※ 신강성 지도 / 하미(Ha-mi, 哈密) 와 카슈가르(Kashgar,疏勒)
㈠ 소위(所謂) 25사 또는 대륙(大陸)측의 기록(記錄)이 아닌 조선인(朝鮮人)들의 기록(記錄)을 어떻게 확신(確信)할 수 있겠느냐? 할 것임에 틀림없다.
㈡ 그렇다. 오늘날 한국사(韓國史)는 이게 문제(問題)다. 조선사(朝鮮史) 연구(硏究)에 조선인(朝鮮人)이 기록(記錄)한 고전(古典)을 믿지 못하겠다면… …꼭 대륙(大陸)측의 기록(記錄)이어야 한다면, 믿을 수 있다면, ➠ ‘명(明)’나라 사람 ‘마문승(馬文升)’이 지은 “흥복합밀국왕기(興復哈密國王記)”와 ➠ ‘명사(明史) 열전(列傳)’등 대륙(大陸)측의 고전(古典)을 가지고, 주장(主張)에 대한 논거(論據)를 제시(提示)하고자 한다.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대륙(大陸)에 있었는가? 황해(黃海) 건너 반도(半島) 땅에 있었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深刻)한 문제(問題)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現實)은, 한 번 쏟아지고 지나가는 소나기인 냥 지나쳐버린다.
※ 반도(半島) 서울(漢城)로부터 대륙(大陸)을 지나 신강성(新疆省) ‘하미(Ha-mi, 哈密)’까지 ‘구 –글 어스’ 직선거리(直線距離)로 2,900 km 떨어져 있다.
하미(Ha mi)는 옛 이오로(伊吾盧)이자, 이오(伊吾)라고도 하며, 합밀(哈密)이다. 이곳은 신강성(新疆省)의 동(東)쪽에 있으며, 감숙성(甘肅省) 돈황(燉煌)에서 천산(天山)북로(北路)를 따라 약간 서북(西北)쪽으로 올라가면 곧 하미(Ha-mi)에 닿는다.
이곳 ‘하미(Ha-mi)=합밀(哈密)’은 반도(半島)의 ‘한성부(漢城府)’로부터 직선거리(直線距離)로 ‘2,900’km 떨어져 있다. 직선거리(直線距離)로 7, 8천리요, 반도(半島) 북방(北方)으로부터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을 거쳐 하북성(河北省)등지로 간다고 하면 “1만(萬) 리”도 넘는 거리에 있는 조그만 옛 봉건국가(封建國家)였다.
이런 곳에 있는, 조그만 왕조(王朝)가 조선(朝鮮)의 속국(屬國)으로 있었다고 할 때, 〈누가 반도(半島) 땅에 조선(朝鮮)이 있었다고 했는가?〉하는 원론적(原論的)인 문제(問題)가 제기(提起)된다.
멸망(滅亡)하지 않고, 소멸(消滅)되지 않고, 역사(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비록 제후국(諸侯國)이라고 놀림을 당하더라도, 속국(屬國)이었다고 놀림을 당하고 있더라도, 그저 〈반도(半島) 땅에라도 존재(存在)한다는 것이 영광(榮光)이지 않느냐!〉 하는 것일까? 그럴 가능성(可能性)이 농후(濃厚)하다. 현재(現在)까지 존재(存在)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重要)하지 않는가? 반문(反問)할 수도 있다.
◆ 식민지(植民地) 시절(時節)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인한 공교육(公敎育)의 탓으로 설명(說明)하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다. 지금 이 시간(時間)에도, 스스로 앞장서서, 스스로 자칭(自稱)하여, 제후국(諸侯國)이 되고, 속국(屬國)이 되는, 반도인(半島人)인들이 많다. 반도인(半島人)들의 가슴속에 숨어있는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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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興復哈密國王記 (作者:馬文升. 明)【관심부분(關心部分) 발췌(拔萃)함】
《我太祖高皇帝膺天眷命,掃除胡元,統一寰宇,中略.乃即保密地封元之遺孽脫脫為忠順王,賜金印,令為西域之襟喉,以通諸番之消息.中略.脫脫故,其子孛羅帖木兒襲封.孛羅帖木兒故.無嗣.王母理國事.成化九年吐魯番鎖檀阿力王虜王母.金印以去.本國番夷離散.皆逃居苦峪.肅州.亦有陰隨吐魯番者. 中略. : 乃教誘阿黑麻詐稱領夷兵一萬,用雲梯攻肅州城並蹂甘州.報至,朝野頗驚.【朝野頗驚,[野]原作[鮮],據明朱當㴐國朝典故本改】中略.》라고 하였는데,
➊〈조야 朝 野〉와〈조선 朝 鮮〉의 차이(差異)는?
〈乃教誘阿黑麻詐稱領夷兵一萬,用雲梯攻肅州城並蹂甘州.報至,朝野頗驚.【朝野頗驚,[野]原作[鮮],據明朱當㴐國朝典故本改】: 아흑마(阿黑麻)가 잘 달래어 가르친 사칭(詐稱) 이병(夷兵) 일만(一萬)을 거느리고는, 높은 사다리(雲梯)등을 이용하여 숙주(肅州)를 공격하고 더불어 감주(甘州)를 짓밟았다. 이를 보고받자마자, 조야(朝野)는 놀라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그 주석(注釋)에 :【朝野頗驚,[野]原作[鮮],據明朱當㴐國朝典故本改】라고 하였는데, 《[朝 野 頗 驚]에서 [野(야)]는 원작(原作)에는, [鮮(선)]자였으나, 명(明) 주당면(朱當㴐)이 지은 국조전(國朝典)고본(故本)에 의거 ‘鮮(선)’을 ‘野(야)’로 고쳤다.》고 하였다.
쉽게 말해서 〈‘鮮’자를 ‘野’자로 고쳤다(改).〉는 얘기다. 그까짓 글자 하나 고쳤다고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하지만 이는 엄청난, 놀라운 결과(結果)를 나타낸다.
➋《報 至, 朝 ‘野’ 頗 驚. : 보고 받자마자, 조야(朝野)가 놀라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니 곧 ‘명(明)나라의 왕(王)과 그 신하(臣下)들과 백성(百姓)들이 놀라고 두려움에 떨었다.’는 이야기고,
➌《報 至, 朝 ‘鮮’ 頗 驚. : 보고 받자마자, 조선(朝鮮)은 놀라 두려워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곧 ‘조선(朝鮮)의 왕과 신하(臣下)들과 백성(百姓)들이 두려움에 떨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➍ 위 설명(說明) ➋의 것에 따르면 : 오늘날 대륙(大陸)은, 명(明)의 것이었고,
➎ 위 설명(說明) ➌의 것에 따르면 : 오늘날 대륙(大陸)은, 조선(朝鮮)의 것이다.
곧 「조선(朝鮮)」이란 : 나라 이름(國名)을 뜻하는 것이므로, 곧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뜻하는 말이므로, 당시(當時) 「합밀(哈密)의 동(東)쪽에 “명(明)”나라가 아닌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글자 ‘한 자(字)’로 인하여, 대륙(大陸)의 땅으로, 또는 반도(半島)의 땅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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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열전(明史列傳)본문(本文)【明史 列傳 第216外國9 / 瓦剌.朵顏(福余.泰寧)】:
《瓦剌,四年,脫懽死,子也先嗣,稱太師淮王.於是北部皆服屬也先.中略.也先攻破哈密,執王及王母,既而歸之.又結婚沙州,赤斤蒙古諸衛,破兀良哈脅朝鮮. : 와랄(瓦剌), 4년. 탈환(脫歡)이 죽자, 야선(也先)이 그 뒤를 있고, 태사회왕(太師淮王)이라고 불렀다. 이때 북부(北部)는 모두 야선(也先)에게 복속(服屬)되었다. 중략(中略). 야선(也先)이 합밀(哈密)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왕(王)과 왕모(王母)를 잡아 되돌아갔다. 또 사주(沙州), 적근(赤斤)몽고(蒙古)등 여러 위(衛)들과 혼인(婚姻)으로 결속을 다지고는, 올량합(兀良哈)을 깨뜨리고, 조선(朝鮮)을 위협했다.》고 하였다.
➏ 명사열전(明史列傳) 와랄(瓦剌)편에서는 「와랄(瓦剌) 야선(也先)」이…라고 했고, 흥복합밀국왕기(興復哈密國王記)에서는 「토노번(吐魯番) 왕(王)」이라고 한 것이 다를 뿐이나, 토노번(吐魯番)은, 이때 야선(也先)의 땅이었다.
➐《破 兀 良 哈 脅 朝 鮮 : 올량합(兀良哈)을 깨뜨리고, 조선(朝鮮)을 위협(威脅)했다.》는 내용(內容)과 《報 至, 朝 鮮 頗 驚. : 보고 받자마자, 조선(朝鮮)은 놀라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다. 이 두 기록(記錄)을 놓고 보면, 똑같은 내용(內容)이다. 곧 야선(也先)이 하미【ha-mi:합밀(哈密):이오(伊吾)】를 다스리던 국왕(國王)의 어머니(王母)를 사로잡아 돌아가고,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 서(西)쪽의 사주 위(沙州 衛) 및 적근몽고(赤斤蒙古)등 여러 위(衛)들과는 혼맥(婚脈)으로 결속(結束)을 다지고, 그 동(東)쪽의 조선(朝鮮)을 위협(威脅)하고, 협박(脅迫)했다는 이야기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무작정 이해(理解)하려 하지 않을 테고… …그러나 이런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나!
➑ 첨언(添言)하면 :〈조선(朝鮮)〉의 “선(鮮)”자(字)와 〈조정(朝廷)〉의 “정(廷)”자(字)는 : 비슷하다거나, 오인(誤認)하여 잘못 쓸 수 있는 글자(漢字)가 아니다. 전혀 다른 글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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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時間)을 내어, 고전(古典) 원문(原文)을 찾아, 그것을 하나하나 보고 있노라면, 생각지 않게 도움 될 만한 기록(記錄)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問題)가 가장 시급(時急)하다 보니, 고전원문(古典原文)을 찾는 것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
자연환경(自然環境)과 지형지세(地形地勢)등으로 살펴보면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있을 수가 없다. 자연환경(自然環境)이나 지형지세(地形地勢)가 모두 대륙(大陸)의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을 보면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은 수십(數十)리 사이에 나란히 있다고 하였다. 곧〈咸鏡監司李昌庭馳啓曰:臣巡到三水,審視關防形勢,則白頭,長白兩山,皆在眼前.問于父老則,白頭去我境,僅四五日程,長白則尤近 : 함경감사 이창정(李昌庭)이 치계하기를, “신이 순행 차 삼수(三水)에 도착하여 관방(關防)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백두(白頭)·장백(長白) 두 산이 모두 눈에 들어왔습니다. 부노(父老)에게 물어보니, 백두산(白頭山)은 우리 지경에서 거리가 겨우 4∼5일정(日程)이고, 장백산(長白山)은 더욱 가깝다.”〉고 하였다.
이런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갖은 곳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었던 곳이다.
2018년 06월 01일 〈글쓴이 : 문무(文武)〉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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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성지 작성시간 18.06.10 오타 문맥 수정 등 편집을 거쳐 대조선역사학회 특별모임 밴드에 알리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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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6.10 안녕하세요. <성지>님!
조선사 연구는 활짝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궁금한 것은 "대조선역사학회"란 곳은 무엇하는 곳이고, 또 "특별모임 밴드"란 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요?
대조선사연구회와 관련이 있는 곳인지, 아니면 또 다른 단체나 카페인지......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비슷 비슷한 이름들이 너무 많아서......궁금하군요. -
작성자화무십일홍 작성시간 18.06.24 위 글에서 합밀을 하밀이라 칭한 것으로 구자는 쿠처, 쿠차로 표기되었으며, 우륵, 언기, 선선등 타림분지에 크고, 작은 소 부족구가가 있었으니, 쿠샨제국의 소월지국(작은 달의 나라들)으로 그중 쿠차는 '소가야'의 한 나라가 되었다. 대저 6가야는 인도 북부에서 그 시원이 되었으며, 그중 소가야는 타림분지의 소월지국이었다. 금관가야(김수로 가야)는 타림분지의 구자국에서 한나라의 질자제도를 피해 도망쳤던 왕자의 일행이며 사천성 성도에 도읍하였다라고 발표하였다. 그 당시에 허황후는 아유타국(네팔, 인도 접경의 국가)의 공주로 본가야(6가야 연맹체, Kekayas) 집단의 일부이며 , 6가야 정체성을 이어 받은 아유타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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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화무십일홍 작성시간 18.06.24 필자는 '색불루단군(Sekblu -스키타이의 광명)이 쿠테타를 일으켜, 고조선의 단군을 추방하고 대신 칸에 취임하였다. 이 당시의 기록이 인도의 서사시인 리그베다(Rigveda), 마하바라타(Mahabharata), 프라나등에 상세히 전하고 있다. 그럼에 한단고기의 기록이 아주 상세한 면이 있다는 것이 필자에 의해 증명되었다. 또한 필자는 인도의 리그베다 연구와 힌두교 연구, 인도에 퍼진 음력왕조(달의 왕국), 6가야 연맹체 연구를 아주 상세히 연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