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산맥(天山山脈) 북(北)쪽, 그 서(西)쪽 지방의 몽고(蒙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의막(意邈)이고 천산산맥(天山山脈)이다.
○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대해서는, 우리 카페(Cafe)에서 여러 번 논의(論意)가 된 주제(主題)이고, 소위(所謂) 대륙사(大陸史)와 더불어 연행(燕行)기록(記錄)에서 빠짐없이 등장(登場)하는 유서(由緖)깊은 곳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왕(帝王)들이, 이곳을 요충지(要衝地)로 관리(管理)해 온 곳이기도 하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어디에 있었는가? 또는 오늘날의 어떤 산(山)인가?〉 만 알아도, 조선(朝鮮)의 땅을 확실(確實)하게 알 수 있어, “더 이상(以上)의 조선사(朝鮮史) 찾기는 필요(必要)치 않다.”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重要)한 산(山)의 이름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 역사(歷史)설명(說明)에서,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녕성(遼寧省) 북진현(北鎭縣)에 있는 해발고도(海拔高度) 867m의 산(山)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심양(瀋陽) 서(西)쪽에 있는데, 아주 흔하디흔한 야산(野山)이다.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기를 : 〈계산기정(薊山紀程)〉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보면 : 《무려(巫閭)는 주례(周禮) 직방(職方)에 보인다. 순(舜)이 기주(冀州)의 동북쪽을 갈라서 유주(幽州)로 만들었는데, 이 산이 그 주의 진산(鎭山)으로, 순(舜)이 봉한 열두 군데 산(山) 가운데 하나다. 산세(山勢)는 동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서(西)쪽으로 달려갔다. 동(東)쪽으로 가서는 우리나라의 장백산(長白山)이 되었고 서(西)쪽으로 가서는 산해관(山海關)의 요해지(要害地)가 되었다. 2,000리에 연달아 뻗어 있는데 북진묘(北鎭廟)에 올라가면 그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요녕성(遼寧省) 북진현(北鎭縣)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 라는 이야기가 절대(絶對)로 이해(理解)될 수 없는 것들은? 바로 지형지세(地形地勢)다.
➊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는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다른 산(山)이며, 그 맥(脈)이 전혀 다르다는데 있다.
➋ 해발고도(海拔高度) 867m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산세(山勢)가 서(西)쪽으로 뻗어 내리지도 않았고, 산해관(山海關)의 지세(地勢)는 대흥안령(大興安嶺)이 서남(西南)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支脈)의 연장일 뿐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➌ 의무려산(醫巫閭山) 산세(山勢)가 2,000리에 달했다고 하며, 또 주변일대(周邊一帶)가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것인데, 오늘날의 의무려산(醫巫閭山)주변은 사막(沙漠)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지형(地形)이다.
○ 지형지세(地形地勢) 몇 가지만 보아도,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등장(登場)하는, 반도(半島) 북방(北方) 요녕성(遼寧省) 북진현(北鎭縣)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대표적(代表的)인 「짝퉁 지명(地名)」 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왜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위치(位置)가 중요(重要)한 것일까?
첫째로는 : 〈이 산(山)의 바깥(外)에는 흉노(匈奴)들이 살았고, 바로 몽고(蒙古) 곧 달단(韃靼)들이 살았다.〉고 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 산(山)의 남(南)쪽은 조선(朝鮮)의 땅”이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이 산(山)이 하늘이 이적(夷狄)과 중화(中華)를 한계지어 준 것이다.(此 天 所 以 限 夷 夏 也.)”라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외몽골 땅은 옛 몽고인(蒙古人)들의 고향(故鄕)이 아니다. 이곳은 대대(代代)로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옛 몽고인(蒙古人) 즉 달단(韃靼)들이 살았던 “의무려산(醫巫閭山) 바깥(外)” 으로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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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록(燕行錄) / 북원록(北轅錄)【著者 李義鳳】 제5권 / 1,761년(영조37, 신사) : 6일(병자) 맑다. 북경에 머물렀다. :
《중략(中略). 또 “중국 북(北)쪽에서 서(西)쪽으로 뻗은 일대는, 구라파(歐羅巴 유럽)의 동쪽 경계와 바로 맞닿아 있는데, 이 일대를 모두 ‘달이단(韃而靼 타타르)’이라 부른다.” 이 지역에는 강이 거의 없고 편평한 땅에 모래가 많으며 대부분 모두 산이다. 큰 산은 의막(意邈 : 천산(天山)산맥)으로, 아시아의 남과 북을 중간에 가르고 있고, 그 북쪽은 모두 달이단(韃而靼)의 종자이다. 중략(中略).》라고 하였다.
《➊ 중국(中國) 북(北)쪽에서 서(西)쪽으로 뻗은 일대(一帶)는, 구라파(歐羅巴)와 맞닿아 있는데, 이 일대를 달이단(韃而靼) 곧 달단(韃靼)이라고 부른다. ➋ 이 지역에는 강이 거의 없고 편평한 땅에 모래가 많으며 대부분 모두 산이다. ➌ 큰 산(山)은 의막(意邈 : 천산산맥(天山山脈)으로, 아시아의 남과 북을 중간에 가르고 있고, 그 북쪽은 모두 달이단(韃而靼)의 종자이다.》라고 하였으니,
➊「중국(中國) 북(北)쪽에서 서(西)쪽으로 뻗은 일대(一帶) + 구라파(歐羅巴)와 맞닿아 있는 곳 = 이곳을 몽고(蒙古) 곧 달단(韃靼)이라고 불렀다.」고 하였고,
➋「강(江)은 거의 없고, 편평한 땅에 모래가 많고, 대부분 산(山)인 곳〉
➌「또 산맥(山脈)이 “남(南)과 북(北)을 갈라놓았다”고 하였으니 산맥(山脈)이 동서(東西) 또 서동(西東)으로 뻗은 곳」
이러한 중요(重要) 조건(條件)을 충족(充足)시켜주는 곳은, “천산산맥(天山山脈)”이다. 이 산맥(山脈)의 바깥(外 : 北)으로부터 구라파(歐羅巴)와 맞닿아 있는 우랄산맥(Ural山脈)과 모스크바(Moscow) 일대(一帶)까지, 이곳이 달단(韃靼)들이 살았던 곳으로 판명(判明)된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의막(意邈)이고, 천산산맥(天山山脈)이다.〉라는 것을 증거(證據)해 준다. 또 ‘화이(華夷)를 나눈다.’고 하였다.
우리가 중국(中國)의 왕조(王朝)라 하고, 천조(天朝) 또는 제(帝)를 칭했던 많은 나라(王朝)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예(例)를 들면 : 서력(西曆) 581년 양견(楊堅)에 의해 수(隋) 왕조(王朝)가 개황(開皇)되고, 동북방(東北方)에 있던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북진(北鎭)”을 설치(設置)했다고 설명(說明)한다.
A.D 581년 양견(楊堅:文帝)에 의해 개황(開皇)된 수(隋)나라는?
● 그렇다면 「‘수(隋)’나라는 천산(天山)의 서남(西南)쪽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지도(地圖)를 놓고 보면 : 파키스탄(Pakistan) 서(西)쪽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이란(Iran)”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고, 그 동방(東方) 땅과 동북방(東北方) 땅엔 ‘조선(朝鮮)의 여러 나라들인 “부여(夫餘)·예(濊)·맥(貊)·옥저(沃沮)·고구려(高駒驪)·백제(百濟)·신라(新羅)·가야(伽耶)” 등의 여러 왕조(王朝)들이 있었다는 설명(說明)이 되는데, 이게 팩트(Fact)다.
○ ‘연행록(燕行錄)과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바깥(外)에 살고 있는, 몽고(蒙古) 곧 달단(韃靼)에 대한 기록(記錄)을 살펴보자.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주장(主張)하는 역사(歷史)논리(論理)론 절대(絶對)로, 결코 풀 수 없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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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산기정(薊山紀程) : 의무려산(醫巫閭山) : 《무려(巫閭)는 ‘주례(周禮) 직방(職方)’에 보인다. 순(舜)이 기주(冀州)의 동북쪽을 갈라서 유주(幽州)로 만들었는데, 이 산이 그 주의 진산으로, 순이 봉한 열두 군데 산 가운데 하나다. 산세는 동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서쪽으로 달려갔다. 동쪽으로 가서는 우리나라의 장백산(長白山)이 되었고 서쪽으로 가서는 산해관(山海關)의 요해지(要害地)가 되었다. 2000리에 연달아 뻗어 있는데 북진묘(北鎭廟)에 올라가면 그 전체를 볼 수 있다. “一脈祖長白 : 한 산맥은 장백산의 조종이 되고 / 千里鎭沙漠 : 천 리에 걸쳐 사막을 누르고 있다 / 拔地復亘天 : 땅에서 치솟아 다시 하늘로 뻗어나가 / 積氣凝槖籥 : 쌓인 기운 천지에 엉킨 거라 / 중략(中略).”》
… 계산기정(薊山紀程) 5 / 부록(附錄) / 산천(山川) :《醫巫閭山.堯封十二山之一也.自我國長白山分脉而走.橫遮大漠.西北行七八百里.散漫扶輿.不見窮際.山外則古凶奴地.明稱韃靼.今稱蒙古.此天所以限夷夏也.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堯) 임금이 봉한 12산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갈라져 내달아, 큰 사막을 가로질러 막았다. 서북(西北)으로 7, 8백 리를 가도, 산만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의무려산 밖은 옛 흉노(凶奴)의 땅인데, 명나라에서는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이적과 중화를 한계지어 준 것이다.》
…담헌서(湛軒書) / 내집 4권 / 보유(補遺) / 의산 문답(毉山問答) : 《이에 의무려산(毉巫閭山)에 올라 남쪽으로 창해(滄海)와 북쪽으로 대막(大漠)을 바라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노담(老聃)은 ‘호(胡)로 들어간다.’고 했고, 중니(仲尼)는 ‘바다에 뜨고 싶다.’고 했으니, 어찌 알건가, 어찌 알건가.” 하고는 드디어 세상을 도피할 뜻을 두었다. 수십 리쯤 가니 앞에 돌문[石門]이 나왔는데 실거지문(實居之門)이라고 씌어 있다. 허자가 말하기를, “의무려산이 중국과 조선의 접경에 있으니”, 중략(中略).》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제1편 / 마자인정기(馬訾軔征紀) ○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일-16일] / 10일(기사) : 《遼野八百里.未見培塿.而獨此地有山.路出山腰.下車登頂.俯覽四野.胸襟爽然.北望毉巫閭山.橫亘千餘里.卽周禮幽州之鎭.皇明時.賀欽先生之所隱處.起伏天際.馳騖雲端.其北則蒙古鮮卑之地.可謂天限南北.中略. : 요동벌 800리에 언덕 하나 보지 못했더니, 유독 이곳에 산길이 산 중턱에 나 있다. 수레를 내려서 산마루에 올라가서 사방 들판을 굽어보니, 가슴이 쾌활하다. 북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바라보니 1000여 리를 가로 뻗쳐 있는데 즉 주례(周禮)에 있는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명나라 때에 하흠(賀欽) 선생이 은거하던 곳이다. 하늘 끝에서 일어나 구름까지 치솟았다. ‘그 북쪽은 몽고 선비(鮮卑)의 땅이니 하늘이 남북을 한계 하였다.’ 고 할만하다. 중략(中略).》
…기언 제47권 속집 / 사방(四方) 1 / 贈李侍郞奉使如燕序 : 이 시랑(李侍郞)이 사명(使命)을 띠고 연경(燕京)에 갈 때 주는 서(序) : 《漠南諸國.古北戎遺種.周時.爲獫狁,葷粥,犬戎.至秦.漢時.爲凶奴.善彎弓射獵.食肉衣皮.以攻伐爲能. : 막남(漠南)의 여러 나라는 옛 북융(北戎)의 유족(遺族)이다. 주(周)때에는 험윤(獫狁)ㆍ훈육(葷粥)ㆍ견융(犬戎)이라 하였고, 진한(秦漢)때에 와서는 흉노(凶奴)라 하였다. 그들은 활쏘기와 사냥을 잘하여 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가죽옷을 입었으며 공격과 침벌(侵伐)을 능사로 삼았다. 중략(中略). 周官職方.東北爲幽州之地.其山鎭曰醫巫閭.玄菟在醫巫閭下.朝鮮檀君,箕子之治.今平壤有箕子畎. : 주례(周禮) 직방(職方)에, “동북이 유주(幽州)의 땅이 되는데 그곳 산진(山鎭)은 의무려(醫巫閭)이다.” 라고 하였다. 현도(玄菟)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아래에 있으며, 조선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통치한 곳으로 아직도 평양에 기자견(箕子畎)이 있다. 중략(中略)》
● 〈현토(玄菟)가 의무려산(醫巫閭山) 아래에 있었다.〉 는 말은, “우리 카페에서 진작부터 주장(主張)하던 사실(史實)이다.” 진서(晉書) 재기(載記) 서두(序頭)에서 :「천산(天山)의 지맥(支脈)을 끊고, 현토(玄菟)를 감싸고, 하(河)로 이어 장성(長城)을 쌓는 것이, 이적(夷狄)으로부터 중화(中華)를 지키는 것」이라는 기록(記錄)과 잘 어울리는 구절(句節)이다. 곧 〈의무려산(醫巫閭山)이 곧 천산(天山)이며, 그 아래에 현토(玄菟)가 있었다.〉는 거다. 다음 회(回)의 주제(主題)로 할 예정(豫定)이다.
…연원직지 제5권 / 회정록(回程錄) ○ 계사년(1833, 순조 33) 2월[7일-30일] 22일 / 北鎭廟記 / 《醫巫閭山.虞封十二山之時.爲幽州之鎭.夏,商,周,秦皆因之.唐開元時.封醫山神爲廣寧公.遼,金時.始加王號.元大德中.封貞德廣寧王.明洪武初.只稱北鎭醫巫閭山神.歲時降香祝.有天子姓諱.國有大典.遣官告祭.今淸肇基東北.故崇奉之典尤有加焉. : 북진묘기(北鎭廟記)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우(虞)가 12산을 봉할 적에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는데, 하(夏)ㆍ상(商)ㆍ주(周)ㆍ진(秦)도 다 그대로 따르더니, 당(唐) 개원(開元) 때에는 의산신(醫山神)을 봉해 광녕공(廣寧公)을 삼고, 요(遼)ㆍ금(金) 적에는 비로소 왕호(王號)를 더하고, 원(元) 대덕(大德) 연간에는 정덕광녕왕(貞德廣寧王)으로 봉했다. 그리고 명(明) 홍무(洪武) 초년에는 북진의무려산신(北鎭醫巫閭山神)이라고만 일컫고 세시(歲時)에 향(香)을 내렸으며, 축(祝)에는 천자의 성명을 쓰고 나라에는 대전(大典)을 두어서 벼슬아치를 보내어 제사 지내더니, 지금 청(淸)은 동북에서 개국했기 때문에 높이 받드는 전례(典禮)를 더욱 더하였다.》
…연행기사(燕行記事) / 문견잡기(聞見雜記) / [잡기(雜記)] / 《醫巫一山之後.盡屬蒙古之地.茫茫大漠.北海環之. : 의무려산(醫巫閭山) 뒤는, 모두 몽고(蒙古) 땅에 속하며, 망망한 큰 사막(沙漠)인데, 북해(北海)가 둘러 있다.》
…연행록(燕行錄) / 일기(日記) / 계사년(1713, 숙종 39) 3월 30일 : 《仍蜿蜒東走至廣寧.爲醫巫閭山.作幽州之北鎭.仍北走至止於何方.而以山之前後.分夷夏之境.卽今則北爲蒙古地.南爲關內.東爲遼野. : 다시 꾸불거리며 동쪽으로 광령(廣寧)에 달려가서, 의무려산(醫巫閭山)으로 되었다. 유주(幽州)의 북쪽 진산(鎭山)을 만들면서, 잇따라 북쪽으로 달려갔는데, 어느 쪽에 와서 그쳤는지, 산의 앞뒤로써 이(夷)ㆍ하(夏)의 경계를 분간하였다. 지금은 북쪽이 몽고 지역이고, 남쪽이 관내(關內)이며, 동쪽이 요동(遼東) 들로 되어 있다.》
…잠곡유고(潛谷遺稿) 제2권 / 시(詩)○오언 율시(五言律詩) 68수 / 영안위(永安尉)홍주원(洪柱元) 가 북쪽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 《苦厭燕山路 : 괴롭고도 괴로워라 연산 가는 길 / 長爲恨別人 : 길이길이 이별한 이 한 되게 하네 / 醫巫連朔漠 : 의무려산 북쪽 사막 연하여 있고 / 중략(中略).》
…강한집(江漢集) 제7권 / 서(序) / 연경에 들어가는 신 부사사건 를 송별하며 쓴 서〔送 申 副 使 思 建 入 燕 序〕: 《동북쪽은 땅이 넓고 평원이 많은데 의무려산이 대막(大漠) 한가운데 우뚝 솟아 웅장하고 수려하며 높고 깊으니, 회계산(會稽山) 등 여러 산과 함께 사진(四鎭)이 되어 망질(望秩)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합니다.》하였다.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 권2 / 1751년(영조27, 신미) 9일(병자) 아침에는 흐리고 바람 오후 늦게 비 : 《의무려산(醫無閭山)은 하늘이 남북(南北)을 가르는 경계였다. 산 바깥쪽은 모두 몽고(蒙古) 땅이었다. 두 경계의 접점은 광녕(廣寧)이 가장 가까워서 백 리가 된다고도 하고 백 리가 채 되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관연록(觀燕錄) 권상 / 1804년(순조4, 갑자) 초4일 :《눈이 조금 내림. 20리를 가서 백탑보(白塔堡)에 이르고, 20리를 가서 심양(瀋陽)에서 묵었다. 중략(中略). 고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하늘 끝에 떨어져 있는 듯하고, 동쪽과 북쪽과 남쪽의 여러 산들을 바라보니 수풀 사이에서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바로 백두산의 여맥이 이어진 것이니 폐사군(廢四郡)과 영고탑(寧固塔)이 모두 그 경계였다. 다시 돌아나가 북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서로 출몰하였는데, 바로 몽고의 사막 땅이라 한다. 중략(中略).》하였다.
○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의무려산(醫巫閭山)과 몽고(蒙古) 곧 달단(韃靼)」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몽고(蒙古)나 달단(韃靼)’은 그 종족(種族)이 그 종족(種族)이요, 그 부족(部族)이 그 부족(部族)인 동류(同類)다.
이들은 〈오늘날의 알타이산맥(Altai山脈) 서(西)쪽으로부터, 천산산맥(天山山脈) 북(北)쪽과 우랄산맥(Ural山脈)과 모스크바(Moscow)까지에 걸쳐 살았던 종족(種族)이 바로 옛 ‘몽고(蒙古) 곧 달단(韃靼)’이라고 부르던 자(者)들이다.〉
이 ‘종족(種族) 또는 부족(部族)’들은, 조선(朝鮮)에 의해 서(西)쪽으로 밀려났던 무리들이다.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옛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된 역사(歷史)와 똑같은 이야기고, 신원사(新元史)에서도 서방에서 리해(裏海:카스피해)를 건넜다고 하여, 이를 증거(證據), 고증(考證)해 준다.
〈이러한 자(者)들을, 옛 조선(朝鮮)과 동격(同格)으로 말하는 일부(一部) 주장(主張)은. 크나큰 오류(誤謬)다. 조선사(朝鮮史)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는 증거(證據)없는, 고증(考證)없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철저(徹底)하게 배척(排斥)해야 한다.〉
이러한 자(者)들이 「오늘날의 외몽골(Mongolia) 땅에서 살았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100%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것으로, 20세기(世紀)에 출현(出現)한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에 의한 것이다. 오늘날의 외몽골(Mongolia)은, 20세기 초(初)인 1924년, 구(舊) 소련(蘇聯)에 의해 만들어졌다.
옛 몽고(蒙古) 땅은 지들이 다 먹어치우고, 조선(朝鮮)의 땅에, 지들 맘대로 “여기가 너희들 땅이다.” 하고 줘버린 것이다. 이게 사실(史實)이다.
2018년 09월 1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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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9.16 오늘날 사학계는 반도조선을 확고히 정립하기 위해 별으별 짓을 다한다고 본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유물들을 삼국시절이니, 고려시대니, 근세조선 초기의 것등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정황들이 많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소위 알만한 인테리계층 중에서 수천이 넘는 자들이 매국노 짓을 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 자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의무를 다하는 척 하지만 뒤로는 미국등 다른 나라를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프락치역할을 한다지 않는가!
이런 자들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조선사 문제 역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죽어도 부활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 이것 말이다.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9.16 검은 머리 미국인들!
정치계, 경제계, 문화계, 체육계, 가요계등등......암약하는 프락치들! 정보계 거물은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 사람들 정신 차려야 한다"고 까지 충고했다고 한다. 언론기사에 따르면 386명까지 추적하다가 상부의 지시로 손을 뗏다고......이게 오늘날의 대한민국 현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친일파에 친미파까지 가세하여 대한민국을 말아 먹으려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거기에는 '옛 조선의 영광을 결코 죄시않겠다'는 것이, 분명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다.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이라고 본다.
정신혁명이 일어나야 하자 않을까!
조국을 위해 멸사봉공하는....일장춘몽이다. -
작성자로터스 작성시간 18.09.18 그리고 오늘날의 몽고는 1924년 구 소련에 의해 만들어졌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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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9.17 안녕하세요. <로터스>님!
오늘날의 중앙아세아와 서남아세아의 나라들과 그 영토선은 대부분 20세기에 열강들의 땅뺏기와 식민지 정책의 영향에 따라 이들이 멋대로 그은 선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영토분쟁이 바로 열강들이 남겨 놓고 간 후유증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알면서도 부국강병에 게을리하는 그곳 사람들은, 종교때문에 또 한번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