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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 ||||
| 상주목(尙州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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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고려 김득배(金得培) 고을 아전 김조(金祚)의 딸이 만궁(萬宮)인데, 나이 일곱 살에 부모가 거란(契丹)의 군사를 피하여 백화성(白華城)으로 가다가, 군사가 쫓아오자 길 옆에 버리고 달아났다. 사흘 뒤에 수풀 밑에서 찾았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밤이면 무슨 물건이 와서 안아주고 낮이면 갔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는데 곧 호랑이였다. 15세가 된 뒤에 호장(戶長) 김밀(金謐)에게로 출가하여 록(祿)을 낳았고, 록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득배(得培)이다. 과거에 올라 예문 검열(藝文檢閱)이 되고, 전객 부령(典客副令)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하였는데, 왕이 즉위한 뒤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제수하고, 6년에 서북면 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고, 조금 뒤에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제수하고, 인하여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삼아, 서경윤 상만호(西京尹上萬戶)를 겸하였다. 7년에 홍두적(紅頭賊)의 위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의 무리가 의주(義州)를 함락시켜 부사(府使) 주영세(朱永世)와 고을 백성 천여 명을 죽이매, 득배가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군사를 거느려 진격하였는데, 모두 아홉 번 싸워서 개가(凱歌)를 아뢰고 돌아와서, 수충보절 정원공신 정당문학(輸忠保節定遠功臣政堂文學)을 제수하였다. 10년에 홍두적이 또 삭주(朔州)를 공격함에, 득배가 도병사(都兵使)가 되어 안우 이방실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쳤다. 적이 서울을 함락하매 군사를 내어 머리 10여 만을 베니, 적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김용(金鏞)이 득배의 무리가 큰 공을 이루어 왕이 총애할까 두려워하여 안우(安祐)의 무리를 시켜 정세운(鄭世雲)을 죽이고, 이로써 죄를 만들어 득배를 죽이니, 듣는 자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선치(金先致) 득배의 아우이다. 낭장(郞將)으로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유탁(柳濯)을 따라 왜적(倭賊)을 쳐서 손으로 수십 명을 죽였다. 여러 번 옮기어 호부 낭중(戶部郎中)이 되었고, 공민왕(恭愍王) 때에 원수 이암(李嵒)을 따라 적을 쳐서 일등으로 녹공(錄功)되어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뽑히었다. 홍두적이 서울을 함락하여 여러 장수를 따라 수복(收復)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나아가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고,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승진하였다. 신우(辛禑) 때에 낙성군(洛城君)으로 봉하여졌다. 김득제(金得齊) 득배(得培)의 아우이다. 벼슬이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이르렀다. 김수자(金守雌) 과거에 합격하여 금양현위(金壤縣尉)에 조용(調用)되었다. 인종(仁宗) 때에 사관(史館)을 맡았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궁궐이 연소되자, 수자가 금중(禁中)에서 받들다가 국사(國史)를 지고 산호정(山呼亭) 북쪽에 땅을 파고 감추어서 불타지 않았다.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겼는데,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고을을 나가 예주 방어사(禮州防禦使)가 되었다가 죽었다. 의종(毅宗) 때에 이부(吏部)에서 아뢰기를, “수자가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국사를 옮겨 감추었는데, 현저한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매우 아까운 일이라.” 하였다. 명령하여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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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2(恭愍王二) | ||||
| 신축 10년(1361), 원 지정 21년 |
중간생략...
밑으로도 홍건적에 관한 부분만 복사...
○ 정유일에 홍두적(紅頭賊)의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ㆍ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주원수(朱元帥) 등 10여 만의 무리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삭주(朔州)를 침범하니, 추밀원부사 이방실(李芳實)을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 삼고, 동지추밀원사 이여경(李餘慶)을 보내서 절령(岊嶺)에 책(柵)을 세웠다.
주고, 궁(宮)ㆍ사(司)의 노예는 양민으로 삼든지 돈과 비단을 상주든지 그들의 소원에 따르리라." 하였다.
○ 을축일에 안우가 군사를 수습하여 김용 등과 함께 금교역(金郊驛)에서 둔을 친 다음, 김용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최영을 왕께 보내어 서울 군사를 청하니, 왕이 일이 급함을 알고서 피난을 생각하여 먼저 서울에 사는 부녀들과 늙고 약한 자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 날, 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 황해 우봉(牛峯))에 이르렀다.
○ 병인일에 왕과 공주가 태후를 모시고 장차 남쪽으로 파천하려 하는데, 날이 밝기 전에 김용ㆍ안우ㆍ이방실 등이 달려와서 모두 아뢰기를, “경성은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최영이 가장 통분하여 크게 부르짖기를, “주상께서는 조금 더 머무르셔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사를 지키소서." 하니, 재신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날이 밝자, 왕의 일행은 민천사(旻天寺)로 거둥하였다. 근신들을 각각 거리로 나누어 보내서 큰 소리로 의병을 모집하게 하니, 서울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모집에 응한 자는 겨우 몇 사람뿐이었다. 안우 등도 어찌할 수 없어 왕에게 아뢰기를, “신등이 여기 머물러 적을 막을 것이오니, 주상께서는 출행하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숭인문(崇仁門)을 나서니,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어미는 자식을 버리고, 짓밟히고 깔린 자가 들판에 가득하였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왕의 일행이 통제원(通濟院)에 이르자 경성에서 오는 자가 아뢰기를, “적이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하니, 임진강을 건넜다. 공주는 연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씨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하여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 왕이 신하를 돌아다보며 원송수(元松壽)ㆍ이색에게 이르기를, “풍경이 이와 같으니, 경 등은 마땅히 연구(聯句)를 지을 만하다." 하였다.
○ 신미일에 눈이 내리는데 이천현(利川縣)에 다다르니, 왕의 옷이 젖고 얼어서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녹였다. 이날 적이 경성을 함락시켰는데, 여러 달 동안 둔병하면서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성(城)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음을 얼리니,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했다. 또 사람을 잡아서 굽거나 임부(姙婦)의 젖을 구워서 먹는 등 잔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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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궐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7.19 그럼...이성계도 왜(倭)고...이성계가 세운 조선조 왜(倭)고...우리도 왜(倭)고...
서대문 로타리도 로자 들어가니 왜놈들 사거리고...우리 노인네들도 노자 들어가니...왜노란 말이고...
온 세상이 다 왜(倭)이고...그러니 역사연구 할 필요없고...진보꽁통들...밑도 끝도 없이 언제 어디서나...중궈 조센주만 욕하는 주문만 왜우며...살면 그만이다... 이게 결론이군여... -
작성자궐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7.19 그냥 골아프게 역사연구 하지 마시고...
해무님이 젤 맘에 드시는데다가 조선 중국을 결정지으시고...
젤 맘에 드는 종족들을 원조 조선족으로 정하십시요. -
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7.19 허기야 이미 다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서...주문을 외우고 기신줄로 압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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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시간 13.07.19 <태조 이성계> 가계에 대해서 <고려로 귀화한 여진계 몽고인>이란 설은, 그의 선대 고조부가 몽고의 달로화적을 지냈기 대문이며, 고조 이상의 가게에 대한 기록은 애매모호하며, 고조부로부터 지방의 호족으로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조모등의 혼인 인맥을 보면, 모두 고려 명문가들입니다. <虜>를 나라로 인식하고, 비하한 것은 "북위" 때 부터입니다. 중요한 것은 근대조선의 지리적 영토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풀리면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풀리게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고려 땅이 근대조선의 땅이요, 그곳은 옛 신라의 땅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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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시간 13.07.19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장의 뼈대가 되는 것>입니다. 뼈가 있어야 그것을 의지해 살을 붙일 수 있습니다. 지나간 일들은 <기록과 유적유물>외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 한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경상도(慶尙道)
고려사절요 제27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