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와 선춘령[先春嶺]
고려[高麗] 예종[睿宗] 1107년, 윤관[尹瓘] 장군[將軍]은, 고려[高麗]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고려[高麗]의 서경[西京]인 평안도[平安道]의 동북방[東北方]에 있는, 함경도[咸鏡道]의 북방[北方]을 치고 들어갔다. 이 지역에서 활거하며 고려[高麗]의 변경[邊境]을 어지럽히던 여진[女眞]은 바람에 쓸리듯 초토화 되었으며, 남은 여진[女眞]들은, 고려[高麗]에 귀순[歸順] 하였다. 윤관[尹瓘] 장군[將軍]은 이 지역에 구성[九城]을 축조[築造]하였으며, 이 지역의 북[北]쪽인 선춘령[先春嶺]에 경계비[境界碑]를 세웠으니, 이 비[碑]는 고려[高麗] 선춘령[先春嶺]의 경계비[境界碑]로 불리어 왔다.
이 선춘령[先春嶺]의 비[碑]에 대해서는 온갖 수많은 설들이 횡행[橫行]하고 있다. 지금의 동북삼성[東北三省] 어느 강바닥에서 석비[石碑]를 발견 했는데, 글자는 모두 마모되어 없으나, 이것이 선춘령[先春嶺]에 세운 고려[高麗]의 경계비[境界碑]라고 추정하는 설에서부터, 오늘날의 항카호가 흥개호[興凱湖]이며, 이 흥개홍[興凱湖]의 지역에 선춘령[先春嶺]이 있었으며, 윤관[尹瓘] 장군이 설치한 구성[九城]이, 이 항카호가 있는 지역이라는 주장 등, 실로 많은 설들이 설왕설래[說往說來]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소위 고지도[古地圖]라는 것에 의거하고, 반도[半島]에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주장과 맞물리는 것으로서, 고려[高麗]의 선춘령[先春嶺]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오도[誤導]일 뿐이다. 대륙사[大陸史]인 이십오사[二十五史]를 읽어보고, 조선사[朝鮮史]의 여러 기록[記錄]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본 사람이라면, 감히 반도[半島]에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가, 반도[半島]의 동북방[東北方]에 있었을까 ? 오늘날의 항카호가 어찌 고려[高麗]의 흥개호[興凱湖]가 될 수 있겠는가 ? 조선[朝鮮]의 그 많던 역사[歷史]의 자료[資料]와, 당시[當時]의 지도[地圖]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 고려[高麗]의 당시[當時]에, 선춘령[先春嶺]에 경계비[境界碑]를 세우던 모습을 그린 그림과, 선춘령[先春嶺]의 지세[地勢]를 그린 지도[地圖]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지도[地圖]를 자세히 살펴보면, 교묘[巧妙]히 변조[變造]가 된 지도[地圖]임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담고 있는 당시[當時]의 지도[地圖]들은 모두 사라지고, 수 많은 사이비[似而非]의 고지도[古地圖]들이 세상에 나돌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이다. 백두산[白頭山]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서북[西北]에서 선비산[鮮卑山]이 천리[千里]를 뻗어내려 백두산[白頭山]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를 보면, 서북[西北]에서 내려온 선비산[鮮卑山]은 분명히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地圖]는, 철저히 반도[半島]의 백두산[白頭山]에 맞추어져 그려져 있어서 누가 봐도, 반도[半島]와 반도[半島]의 북방[北方]을 그린 고려[高麗]의 지도[地圖]로 보여 지고 있다. 반도[半島]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의 지형[地形]과 지세[地勢]는, 서북[西北]에서 천리[千里]를 달려온 산맥[山脈] 자체가 아예 없다.
이 지도[地圖]를,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아시아 산맥[山脈]의 지형도[地形圖], 그리고 위성지도[衛星地圖]와 자연환경[自然環境], 인종[人種], 물길의 흐름, 역사[歷史]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지세[地稅]와 사막[沙漠]의 형태, 호수[湖水]와 염호[鹽湖]의 상태 등을 두루 살펴서 비교하고 대입시켜 보면,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백두산[白頭山]이 그려진 이,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는, 허구이며 조작[造作]과 변조[變造]된 지도[地圖]라는 것이 그대로 들어나게 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지도[地圖]의, 이러한 지형[地形]과 지세[地勢]를 이루고 있는 곳은, 지구[地球]를 천 바퀴를 돌며 찾는다 해도 , 지구[地球]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當時]의 원본[原本]을 변조[變造]하고 조작[造作]하여, 억지로 반도[半島]의 백두산[白頭山]에 맞추어 놓다보니,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도 관계가 없고, 자연[自然]의 지형[地形], 지세[地勢]와도 연관이 없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지도[地圖]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묘[巧妙]히 조작[造作]된 거짓 지도[地圖]들의 진위[眞僞]를 살피지 않고, 그러한 것을 고지도[古地圖]라고 믿는다면, 역사[歷史]는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이며, 그러한 것을 어떻게 역사[歷史]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본래의 원본[原本]인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는, 지도[地圖]의 이름이 말해 주듯이,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설명하는 대로, 오늘날의 알타이산맥과 벨루하산을 그린 것은 의심[疑心]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지금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라고 하는 이 지도[地圖]에,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대로, 서북[西北]에서 천리[千里]를 달려 내려온 산맥[山脈]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이 지도[地圖]는, 조선사[朝鮮史]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하나의 예에 불과 하다. 지금 세상에서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것들 중에, 반도[半島]에 고조선[古朝鮮]과 삼국[三國]이 있다고 그린 고지도[古地圖]는, 모두 위조[僞造]와 변조[變造]된 거짓 지도[地圖]일 뿐이다.
그것은 그러한 지도[地圖]의 자체가 모순[矛盾]을 않고 있으며, 출처도 불분명[不分明]하고, 사서[史書]와 맞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역사[歷史]의 지도[地圖]가 아니라는 사실[事實]이 모두 그대로 들어나게 되는 것이다.
반도[半島]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의 지형[地形]과 지세[地勢]에, 서북[西北]에서 천리[千里]를 달려온 산맥[山脈]이, 어느 지역 어느 곳에, 어느 시대에 있었는가 ?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백두산[白頭山]에 대한 지형[地形]과 지세[地勢]를 두루 갖춘 곳은, 지구상[地球上]에서 오직, 오늘날의 알타이산맥과 벨루하산이 있을 뿐이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의 이 하나만을 근거로 든다 고 해도, 반만년[半萬年]의 조선사[朝鮮史]가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라고 주장하는 위선[僞善]과 거짓이, 만천하[滿天下]에 여실히 들어나게 된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가 말해주고 있듯이,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왜곡[歪曲]과 변조[變造] 된 사이비[似而非]의 지도[地圖]들 뿐이다. 이 지도[地圖]의 표제가,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이다. 이 지도[地圖]의 이름은, 이 지역에 대한 역사서[歷史書]의 설명과, 역사[歷史]의 흐름과 일치[一致]되고 있으며,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들과 부합[符合]되고 있음에 어긋남이 없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成宗] 153권[卷], 14년[年] 계묘[癸卯]
4月 25日 정해[丁亥]
全州府尹李封陪陳慰箋到京, 上疏曰 [중략]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봉(李封)이 진위전(陳慰箋)을 받들고 서울에 이르러 상소(上疏)하기를 [중략]
且王都與建州衛, 相去不遠, 不過數百餘里耳, 脫有不虞之變, 必當朝夕而至, 可畏之甚也。 若夫永安之道, 以言乎道路, 則萬餘里之遠矣, 以言乎險夷, 則有鐵嶺焉, 有咸關嶺焉, 又有磨天嶺、磨雲嶺焉。 所謂百二重關 [중략]
또 왕도(王都)와 건주위(健州衛)는 상거가 멀지 않아 수백리(數百里)에 지나지 않으니, 갑자기 뜻하지 않은 변고[不虞之變]가 있게 되면 반드시 조석(朝夕) 사이에 당도할 것이니 매우 두려워할 만합니다. 만약 저 영안도(永安道)의 경우 도로(道路)로 말하면 만여리(萬餘里)나 멀고, 험이(險夷)한 것으로 말하면 철령(鐵嶺)이 있고 함관령(咸關嶺)이 있으며, 또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이 있어, 이른바 백이(百二)의 중관(重關)입니다. [중략]
兵制則我國軍卒, 統合八道, 名色殆近一百數十萬, 而無一可用, 寧不寒心乎? 自今定制校院生取才, 而書講優等, 差校院生, 軍校取才, 而武藝、兵書優等者, 亦差軍校, 而璿派及忠義之減省代數者, 考籍詳覈, 無使僥濫。 士夫家墓奴、各宮山直, 使有定數, 申明法制, 則軍摠充補, 庶無苟艱之患矣 [중략]
병제(兵制)의 경우 우리 나라의 군졸은 팔도(八道)를 통합하여 명색은 거의 1백 수십만에 가까우나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부터 제도를 정하여 교생(校生)과 원생(院生)을 취재(取才)하되 서강(書講)에서 우등한 자를 교생·원생으로 차출하고, 군교(軍校)를 취재하되 무예(武藝)와 병서(兵書)에서 우등한 자를 역시 군교로 차출하며, 선파(璿派) 및 충의위(忠義衛)로서 감축(減縮)에 대신할 자를 부적(符籍)을 상고하고 상세히 조사하여 부정(不正)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노(墓奴)와 각궁(各宮)의 산지기[山直]에 일정한 수효가 있게 하여 거듭 법제(法制)를 밝히면 군총(軍摠)의 충보(充補)에 거의 구간(苟艱)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중략]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成宗] 134권[卷], 12년[年] 신축[辛丑]
10월17일 무오[戊午]
惟我大東, 居遼水之東、長白之南, 三方負海, 一隅連陸, 幅員之廣, 幾於萬里。 自檀君與堯竝立, 歷箕子、新羅, 皆享千年, 前朝王氏亦享五百。 庶民則男女勤耕桑之務, 士夫則文武供內外之事, 家家有封君之樂, 世世存事大之體, 作別乾坤, 稱小中華, 凡三千九百年于玆矣 [중략]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 단군(檀君)이 요(堯)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箕子朝鮮)·신라(新羅)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前朝)의 왕씨(王氏)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서민(庶民)은 남녀가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대부(士大夫)는 문무(文武)가 내외의 일에 이바지하여 집집마다 봉군(封君)의 즐거움이 있고 대대로 사대(事大)의 체제가 있으며, 따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소중화(小中華)하고 부르면서 3천 9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중략]
我高皇帝明見萬里, 以遼東之東百八十里, 連山把截爲限, 豈不知東八站地廣土沃, 便於畜獵哉? 然捐數百里之地, 以空其處者, 以兩國封疆, 不可相混, 萬一奸細, 彼此構釁, 或假(達子)〔㺚子〕之名, 或作倭人之形, 潛行草竊, 誠難測度 [중략]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만일 간사한 무리들이 흔단(釁端)을 일으켜 달자(達子)나 왜인(倭人)을 가장하여 도적질한다면 실로 예측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중략]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는, 만리[萬里]의 멀고 먼 서북방[西北方]의 변경[邊境]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만약에 반도[半島]에 조선[朝鮮]이 있었다고 한다면, 만리[萬里]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더구나 왕[王]에게 진언[進言]을 하는 신하[臣下]가 이러한 말을 한다면, 그러한 자는, 제왕[帝王]을 능멸한 죄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함경도[咸鏡道]의 북관[北關]을 대황[大荒]의 지역이라고 역사[歷史]는 말하고 있는데, 반도[半島]의 함경도[咸鏡道]가 어찌 대황지중[大荒之中]이 될 수 있겠는가 ?
이 대황지중[大荒之中]에는 불함산[不咸山]이 있으며, 불함산[不咸山]은 사시사철 빙설[氷雪]이 쌓여 있는 곳이다. 굳이 산해경[山海經]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불함산[不咸山]의 북[北]쪽으로는 숙신[肅愼]의 지역이며, 조선[朝鮮]의 북관[北關]은 숙신[肅愼]과 맞닿아 있었다. 사서[史書]에서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로 보더라도, 숙신[肅愼]은, 고조선[古朝鮮]과 같은 나라이며, 또한 이곳은,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내지[內地]였다.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도, 임금의 명[命]을 받고 함경도[咸鏡道]에 부임하게 되면, 함경도[咸鏡道]가 대황[大荒]의 지역임을 거론 했으며, 산천[山川]과 자연[自然]과 변경[邊境]의 실상[實相]을, 마음에서 일어나는 회포[懷抱]와 심성[心性]]을 담아, 그 감회[感懷l를 노래하고, 이를 시[詩]로 지어 길이 후세[後世]에 남겼다.
그러므로 함경도[咸鏡道]의 백두산[白頭山]을 둘러보고, 그 감회[感懷]를 노래하고 읊은 시편[詩篇]에는, 설산[雪山]이 등장하고, 만년설[萬年雪]이 그려지며, 층층첩첩[層層疊疊]의 태고적[太古的] 빙설[氷雪]이, 시[詩]의 노래 속에 녹아나와 시편[詩篇]과 어우러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遼東]의 동[東]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병제(兵制)의 경우 우리 나라의 군졸은 팔도(八道)를 통합하여 명색은 거의 1백 수십만에 가까우나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만약 저 영안도(永安道)의 경우 도로(道路)로 말하면 만여리(萬餘里)나 멀고, 험이(險夷)한 것으로 말하면 철령(鐵嶺)이 있고 함관령(咸關嶺)이 있으며, 또 마천령(磨天嶺)과 마운령(磨雲嶺)이 있어, 이른바 백이(百二)의 중관(重關)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반도[半島]의 사관[史觀]이라는 것은, 나라를 잃었던 침략[侵略]자들의 거짓과 위선[僞善]의 추잡[醜雜]하고 악랄[惡辣]한 식민[植民]의 산물[産物]일뿐, 우리의 역사[歷史]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 이하[以下]도 그 이상[以上]도 아니다.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도, 조선[朝鮮]은, 만리[萬里]의 광활[廣闊]한 국토를 지니고 있었으며, 일백수십만[一百數十萬]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할 수 있는 역사[歷史]의 사료[史料]들은, 수도 없이 많고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것을 외면하고 식민사학[植民史學]인 반도사관[半島史觀]에 함몰되어 있는 한국[韓國]의 역사[歷史] 학계[學界]는, 역사[歷史] 학계[學界]라는 단어조차도 어울리지 않는다.
조선[朝鮮]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칭[稱]하기도 했는데, 조선[朝鮮]이 반도[半島]땅에 있어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렀겠는가 ? 역사[歷史]를 폄하[貶下]하고 왜곡[歪曲]하는 자들의 행태[行態]는, 그 끝이 없을 지경이다. 자기 선대[先代]의 일이며, 자기 자신들의 조국[祖國]의 일이며, 우리들의 선조[先朝]인 우리 조상[祖上]님들의 일이다. 대명천지[大明天地]의 천하[天下]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자들인가? 말이다.
조선[朝鮮]의 서북[西北] 지역이며, 숙신[肅愼]의 지경[地境]과 접경[接境]하고 있었던 함경도[咸鏡道]에 대하여,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설명하는 내용들은, 이를 보고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아득히 깊은 암흑[暗黑]속에서 한 줄기 서기[瑞氣] 조차도 비추지 않던 우리 역사[歷史]의 웅혼[雄渾]했던 서광[瑞光]이, 기나긴 천년[千年]의 깊은 잠을 깨고, 어두운 그림자만이 천하[天下]에 가득히 드리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미명[微明]의 어둠을 헤치며 서서히 떠오르는 광명[光明]의 태양[太陽]과도 같기 때문이다.
월사집[月沙集],........... 관북(關北)은 고구려의 옛 땅으로, 북쪽으로는 두만강(豆滿江)에서 남쪽으로는 철령(鐵嶺)에 이르기까지 사방[四方] 천여리[千餘里]에 이른다........... 조종조(祖宗朝)부터 방백(方伯)이 유영(留營)하는 부(府)를 설치하였는데, 이 지역은 오랑캐 땅과 인접하고 경사(京師)와는 멀어 방어를 잘못하면 불행히도 자주 분란이 일어나곤 한다. 라고 하였고.
농암집[農巖集]의, 정이가음전이광이광풍제월금성옥색분운을축[定而家飮餞 以光風霽月金聲玉色分韻 乙丑]에서는,............ 머나먼 만리 길도 지척이라네 萬里猶咫尺, 말 달려 중중첩첩 관문 넘어가 躍馬越重關, 국경 저쪽 설산을 웃으며 보리 笑看雪山白, 라고, 이렇게 시[詩]를 통하여 함경도[咸鏡道]의 북관[北關]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농암집[農巖集]의, 교함경도관찰사이세화서[敎咸鏡道觀察使李世華書]에서는,...........철령(鐵嶺)과 함관(咸關)에서 백두산까지 수천여 리의 땅을 태조(太祖)와 세종(世宗) 때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개척해 왔다. 지리는 몽고와 인접한 것이 한(漢)나라 때 안문(雁門)의 항주(恒州), 대주(代州)와 같고,........... 라고 하고 있으며, 목은집[牧隱集]의, 송동북면한만호득월자[送東北面韓萬戶得月字]의 시[詩]에서는,..........장백산은 높다랗고 長白山穹窿, 철령관은 우뚝하여 鐵嶺關峍屼, 몇천 리를 가로로 뻗치어서 橫亘幾千里, 천연의 요새를 넘을 수 없는데 天險不可越, 해단의 잡종이 조수들과 함께 살면서 奚丹雜種鳥獸居 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성종[成宗] 130권[卷], 12년[年] 신축[辛丑], 6월 9일 임자[壬子]의 기록[記錄]에서는,......... 함흥군(咸興郡)은 영안도(永安道)의 중앙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본영(本營)이 된 지 오래이며, 지난번 난적(亂賊) 때문에 강호(降號)하여 군(郡)으로 하고, 감사를 영흥(永興)으로 옮겼으나, 그 폐단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영흥은 오진(五鎭)에서 1천여 리나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왕성령(王城嶺)·함관령(咸關嶺)·마운령(磨雲嶺)·마천령(磨天嶺)의 네 고개가 있으니,........ 1. 영안도는 지세(地勢)가 긴 뱀[長蛇]과 같아, 동쪽은 바다에 붙고 서쪽은 큰 산을 옆에 두었으며, 동서의 너비는 1, 2식(息)이고, 남북의 길이는 거의 2천 리나 됩니다. 서울부터 육진(六鎭)까지는 길 하나가 있을 뿐이며, 라고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순조[純祖] 23권[卷] 20년[年] 경진[庚辰], 7월23일 정축[丁丑]에서는,............ 군사로 말하면 본도는 남쪽 철령(鐵嶺)으로부터 북쪽 육진(六鎭)까지 2천 리에 뻗쳐 있는데, 호구가 수십 만이나 되며 산천이 험준한데다 군사가 강하고 말이 튼튼하니, 진실로 전쟁하기에 적당한 땅입니다. 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데, 함경도[咸鏡道]가 남북[南北]으로, 이천리[二千里]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함경도[咸鏡道]의 동서[東西]의 넓이는, 조선[朝鮮]의 여러 문집[文集]에서, 이를 알 수 있는데, 대략 이천오백리[二千五百里]에 이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現在],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성곽[城郭]의 유지[遺址]와 일치[一致]되고 있는 기록[記錄]들이다.
사가집[四佳集]의, 송정종성지임[送鄭鍾城之任], 즉 함경도[咸鏡道]의 종성[鍾城]에 대해서는,............. 천리라 관산을 말 몰아 뛰어 넘어가네 千里關山躍馬過,........... 백두산은 개어서 천층의 눈을 눌러 있고 白頭晴壓千層雪,........... 흑수는 깊어 만 길 물결을 흔들어대겠지 黑水深掀萬丈波,........... 훌륭한 변방 계책은 무사하기에 있나니 妙略籌邊無事在, 라고, 이렇게 종성[鍾城]의 지세[地勢]와 산천[山川]에 대하여 시[詩]로 표현하고 있다.
성호전집[星湖全集]의, 해동악부[海東樂府], 사준행[射樽行]에서는,......... 좌상 김종서(金宗瑞)가 북도 도절제사(北道都節制使)가 되어서 네 곳의 진(鎭)을 개설한 뒤에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그 지역을 채우고는 날마다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벌여 장수와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공이 말하기를 “모래 바람 부는 동떨어진 변방에서 장수와 병사들이 굶주리고 고생하는데 내가 처음에 인색하게 굴면 후에 반드시 잘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시[詩]에 이르기를,........... 대장군이 세운 계책은 하늘과 합하고 元戎運籌天與合, 드높은 위엄은 백두산을 내리눌러라 威稜直壓白山北, 백두산은 우뚝이 하늘로 솟구쳐 있고 白山嵯嵯揷天衢, 오랑캐는 밤도망 가 얼굴 가리고 통곡하네 胡兒夜遁掩面哭,. 선춘의 고사를 사람들이 아직도 말하니 先春故事人猶說, 국경의 한 줄기 강 물결은 푸르구나 提封一帶江濤碧,............ 용흥의 옛 터전을 다 개척하길 기약했나니 龍興舊境期盡拓,........... 숙신의 돌화살이 수레를 꿰뚫었던 것을 肅愼砮石穿笠轂, 라고,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농암집[農巖集]의, 김종성수오만[[金鍾城粹五挽]의 시[詩]에서는,.......... 수주에서 북쪽으로 황야를 바라보면 愁州北望大荒隈, 아스라이 장백산 만년설이 덮인 곳 長白山高雪不開, 라고, 하였고,.............농암집[農巖集]의, 종성객관[鍾城客館]에서는,........ 수주성 밖 아스라이 들판이 펼쳐진 곳 愁州城外野茫茫, 하늘 닿은 사막 초원 석양 아래 누렇구나 磧草連天落日黃, 나그네 길 어느덧 오랑캐 땅 닿고 보니 客路已臨胡地盡, 라고, 시[詩]를 읊으며 노래하고 있다.
완당전집[阮堂全集]의, 송종성사군이수[送鍾城使君 二首]에서는,......... 가을 바람 객을 보내 변방으로 떠나가니 秋風送客出邊頭, 개마산 푸른 빛에 먼 시름 엉기리다 蓋馬山光着遠愁,.......... 이끼 글자 부스러진 아득한 옛 터전에 苔篆剝殘漫古墟, 고려 나라 지경은 묻노라 어떠하뇨 高麗之境問何如, 라고, 하고 있으며,.......... 公嶮碑爲人剝去。石根尙有高麗之境四字, 공험비(公嶮碑)는 사람이 갉아 버렸으나 돌뿌리에는 아직도 고려지경(高麗之境) 넉 자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예사인 양 행인이 석노 촉을 주어가니 尋常石砮行人得, 라고, 숙신[肅愼]과 함경도[咸鏡道]의 지역적[地域的]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택당집[澤堂集]의, 송종숙이여복부종성진[送宗叔李汝復赴鍾城鎭]에서는,.........수주의 험준함은 동제와 비교도 안 되는데 愁州關險壓銅鞮, 파목께서 궁궐 나와 거기로 떠나신다네 頗牧今聞出紫閨, 대막[大漠]의 동남[東南]쪽으로는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고 大漠東南江入海, 높은 성곽 서북쪽은 사다리 타고서 넘을 험로로구나. 高城西北路爲梯, 라고, 시[詩]에서 말하고 있다.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 수주[愁州]인 종성[鍾城]이 대막[大漠]의 지역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장백산[長白山]인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오는 물이, 대막지대[大漠地帶]인 동남[東南]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실지로 지금도 이곳은, 당시[當時]와 비슷한 대막[大漠] 지역과 어울리는 자연환경[自然環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동명집[東溟集]의, 함경도[咸鏡道], 경성[鏡城]에 대한, 송윤이원명은적경성[送尹而遠 鳴殷 謫鏡城 四首]에서는,........... 세모라서 변방 성의 길 가기가 힘들 건데 歲暮邊城行路難, 누런 모래 막막하고 바다는 또 드넓으리 黃沙漠漠海漫漫, 장백산 앞은 오월에도 날 춥다오 長白山前五月寒,............ 윤관 장군 공 이루어 대막 지방 열었는데 尹瓘功成大漠開, 지금 와선 그 사당에 이끼 길게 자랐으리 至今遺廟長蒼苔, 라고, 시[詩]로서, 함경도[咸鏡道], 경성[鏡城]의 지역에 대한 자연환경[自然環境]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아서 발길을 옮기며, 지나온 역사[歷史]를 논[論]하고, 멸실[滅失]된 역사[歷史]를 찾아서 이를 복원[復原]시키며, 역사[歷史]의 참화[慘禍]로 왜곡[歪曲]과 변조[變造]와 조작[造作]으로 얼룩져 무너져 버린 조선사[朝鮮史]의 도도히 흐르던 역사[歷史]의 맥[脈]을 다시 잇고, 우리 역사[歷史]의 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천하[天下]에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바로 세우는 일은, 오늘날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후예[後裔]들에게 내려진 숙명[宿命]과 같은 것이며, 사명[使命]이라고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는 사막[沙漠]이 펼쳐진 지역 이었으며, 바다로 불릴 만큼 큰 호수[湖水]가 있는 지역 이었으며, 소금이 생산되는 염호[鹽湖]가 있는 지역[地域] 이었다. 함경도[咸鏡道]는, 서북[西北]쪽으로는 만년[萬年]의 빙설[氷雪]이 사계절 내내 층층첩첩[層層疊疊]으로 쌓인 불함산[不咸山]이 하늘높이 솟아 있고, 북[北]쪽으로는 장령[長嶺]의 태산준령[泰山峻嶺]이 첩첩[疊疊]이 이어지고, 동[東]쪽으로는, 대막[大漠]에 연이어 있고, 고산준령[高山峻嶺]이 휘감아 돌고 있었다.
남[南]쪽으로는 나는 새도 쉬어 넘는다는 높고 험한 천험[天險]의 요새[要塞]인 철령[鐵嶺]이 가로질러 수[數] 천리[千里]에 서리어 있었다. 함경도[咸鏡道]는, 남북[南北]의 길이가 이천리[二千里]에 이르렀으며, 동서[東西]의 넓이는, 이천오백리[二千五百里]를 넘어서는 지역[地域]에 걸쳐 있었다. 이러한 것은 역사[歷史]의 수많은 기록[記錄]들과, 이 기록[記錄]들을 따라서, 당시[當時]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을 조사[調査]하고,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일치[一致]되고, 부합[符合]되어 확인[確認]된 사실[事實]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와 똑같은 첨성대[瞻星臺]가 높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산위에 있고, 하나는 평지에 세워져 있는데, 산위에 있는 것은 모습이 조금 다르나, 평지에 있는 것은 같은 유형이다. 이곳에 있는 첨성대[瞻星臺]와 같은 이 석조물[石造物]은, 경주[慶州]에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작은 돌들을 정교하게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와 아주 똑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크기도 비슷하다. 고대[古代]의 유적[遺跡]으로 통하는 이 성단[星壇]을, 현지[現地]의 주민들은 매우 신성시[神聖視]하고 있다.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서 서[西]쪽으로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 이곳에, 이러한 똑 같은 유적[遺跡]이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동서[東西] 일만리[一萬里], 동[東]쪽의 끝자락에 있는 경주[慶州]의 첨성대[瞻星臺],............. 만리[萬里]의 서[西]쪽 끝자락인 조선사[朝鮮史]의 서관[西關] 지역이 분명한 벨루하산의 장령[長嶺] 남[南]쪽에 있는 또 하나의 첨성대[瞻星臺]는, 우리의 지나온 역사[歷史]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겠는가 ?
함경도[咸鏡道]의 정평부[定平府]에는, 비백산[鼻白山]이 있었다. 조선팔도[朝鮮八道]의 유명한 산악[山岳]에 세우는 사전[祀典]을 논[論] 할 때, 정평부[定平府]의 비백산[鼻白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비백산[鼻白山]의 위치에 대하여,....... 지수재집[知守齋集]의, 백두산사전당부의[白頭山祀典當否議]에서,....... 自長白南距九百里之鼻白山, 비백산[鼻白山]은, 장백산[長白山]의 남[南]쪽 구백리[九百里]에 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실록[實錄]의 정평부[定平府]에 대한 기록[記錄]을 보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종[太宗] 26권[卷], 13년[年] 계사[癸巳], 7月 20日 정유[丁酉]에서, 改東北面定州爲定平府, 嫌與西北面定州同也, 동북면[東北面] 정주[定州]를 고쳐 정평부[定平府]로 하였으니, 서북면[西北面]의 정주[定州]와 이름이 같기 때문에 의혹이 일어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비백산[鼻白山]은, 벨루하산의 남[南]쪽 900리 지역에 있는, 높이 37000미터에 이르는 울라산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산도, 산의 정상에는 여름철 몇 개월을 제외하고, 항상 눈이 쌓여 있는 산이다. 비백산[鼻白山]이라고 불리게 된 이면에는, 그에 걸 맞는 산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이 작용하는 것이다. 반도[半島]에는, 비백산[鼻白山]이라고 불릴만한 산이 아예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함경도[咸鏡道]의 북관[北關] 지역인 공험진[公險鎭]에 성[城]을 쌓고, 그 북[北]쪽의 선춘령[先春嶺]에 세운, 윤관[尹瓘] 장군[將軍]의 선춘령[先春嶺] 경계비[境界碑]는, 백두산[白頭山]의 동북[東北]쪽, 두만강[豆滿江]의 북[北]쪽 700리에 세웠다고 하였다, 흥개호[興凱湖]는, 당시[當時]의 지도[地圖]라는 것에만 표시가 되어 있을 뿐 기록[記錄]에는 어찌된 일인지 등장하지 않는다.
반도[半島]의 동북방[東北方]에 있는 항카호가 흥개호[興凱湖]라면, 이렇게 바다와 같이 큰 호수[湖水]에 대한 기록[記錄]이 빠질 수가 있겠는가 ? 이 에 대한 의문[疑問]은, 공험진[公險鎭]과 선춘령[先春嶺]의 위치를 찾으면서 스스로 풀리게 되었다. 선춘령[先春嶺]의 북[北]쪽에 그려진 흥개호[興凱湖]는, 그렇게 큰 호수[湖水]가 아니었다는 사실[事實]이다. 알타이산맥의 거대한 준령[峻嶺]에는 수 많은 산중 호수[湖水]가 있는데, 이 흥개호[興凱湖]도, 그 수많은 호수[湖水]중에, 그저 작은 한 산중의 호수[湖水]에 지나지 않았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에도, 흥개호[興凱湖]가 이름과 같이 그려져 있다. 이 지도[地圖]를 반도[半島]의 북방[北方]에 맞추어 변조[變造]하고 왜곡[歪曲]시켜 놓았으나, 이 지도[地圖]에서 분명한 것은, 서북[西北]에서 뻗어내린 천리[千里]의 선비산[鮮卑山]과, 당시[當時] 흥개호[興凱湖]의 위치와 모습을 정확히 알게 해준다는 사실[事實]이다. 이렇게 조선사[朝鮮史]는 전부문에 걸쳐서,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기언[記言]
변새[邊塞]
咸州。今咸興府。英州在蒙羅骨下。雄州在吉州火串嶺下。福州古禿魯兀。今端川郡。宜州在定州南。公險鎭在會寧府蘇下江濱。先春嶺東南豆滿江北七百里。三年。立石記功於先春嶺以爲界 [중략]
함주는 지금 함흥부(咸興府)이고, 영주는 몽라골 아래쪽에 있으며, 웅주는 길주의 화관령 아래쪽에 있다. 복주는 옛 독노올(禿魯兀)로 지금의 단천군(端川郡)이며, 의주는 정주 남쪽에 있다. 공험진은 회령부(會寧府)의 소하강(蘇下江) 가에 있는데 선춘령(先春嶺)의 동남쪽 두만강(豆滿江) 이북 700리 지점이다. 예종 3년에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해서 이곳으로 국경을 삼았다. [중략]
미수기언[眉叟記言]
남북도 풍토지[南北道風土誌]
高麗初定女眞。拓地浸廣。以鐵嶺爲界。女眞。靺鞨遺種。高句麗部落。睿宗二年。遣尹瓘,吳延寵。擊逐女眞。至先春嶺。立石記功以爲界 [중략]
고려 초기에 여진(女眞)을 평정하고 땅을 점차로 넓혀서 철령으로 국경을 삼았다. 여진은 말갈의 혈통을 이은 종족이며 고구려의 부락이었는데, 예종 2년(1107),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을 보내어 여진을 격퇴시켜 쫓아 버리고 선춘령(先春嶺)에다 윤관의 업적을 기록한 비를 세워 그곳으로 국경을 삼았다. [중략]
置九城。曰咸州。今咸興府。曰英州。在蒙羅骨下。曰雄州。在吉州火串嶺下。曰福州。古禿魯兀。今端川郡。曰宜州。在定州南。公險鎭。在會寧府蘇下江濱 [중략]
그리고 9성을 설치하였으니, 함주(咸州)는 지금의 함흥부(咸興府)이며, 영주(英州)는 몽라골(蒙羅骨) 아래에 있고, 웅주(雄州)는 길주(吉州) 화관령(火串嶺) 아래에 있고 복주(福州)는 옛날의 독로올(禿魯兀)이며 지금의 단천군(端川郡)이다. 의주는 정주(定州) 남쪽에 있고 공험진(公嶮鎭)은 회령부(會寧府) 소하강(蘇下江) 연안에 있다. [중략]
성호사설[星湖僿說]
천지문[天地門]
윤관비[尹瓘碑]
윤관의 비는 선춘령(先春嶺)에 있으니 두만강(豆滿江) 북쪽으로 7백 리가 되는 곳이다. 그 비에 새긴 글은 비록 호인(胡人)이 긁어버리기는 했으나 옛날 흔적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윤관이 육성(六城)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는데, 고령진(高嶺鎭)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蘇下江)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치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金宗瑞)로부터 시작되었다. [중략]
연전에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경계를 정할 적에 우리의 대표로 나갔던 사람이 윤관의 비를 가지고 옛날에 서희(徐熙)가 소손녕(蕭遜寧)에게 항쟁하듯이 해보았는지 모르겠다.
윤관이 병사령할(兵使鈴轄)인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그때의 일을 기록하되, “이 땅은 동으로 대해(大海)에까지 연접했고, 서북으로 개마산(蓋馬山)까지 들어갔으며, 남으로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고을과 연접했으니 산천도 수려하고 토지도 비옥하다.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땅으로 고비(古碑)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다. [중략]
순암집[順菴集]
동사문답[東史問答]
麗史云。尹瓘立碑公嶮鎭。以爲界。又恭愍王五年。柳仁雨等拔雙城。趙小生逃入伊板嶺 今磨天嶺。北立石之地。於是按地圖。收復舊地。以此言之。則伊板之北。本非麗地。而立石之地。豈非尹瓘立碑定界者乎 [중략]
고려사[高麗史]에, “윤관(尹瓘)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공민왕 5년에 유인우(柳仁雨) 등이 쌍성(雙城)을 탈환하니 조소생(趙小生)이 이판령(伊板嶺) 지금의 마천령(磨天嶺)이다. 북쪽 입석(立石)의 땅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그래서 지도를 상고해서 옛 땅을 수복했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판의 북쪽은 본래 고려의 땅이 아니고 입석의 땅은 윤관(尹瓘)이 비를 세워 국경을 정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지금의 벨루하산에서 동북[東北]쪽으로 비스듬이 세워 나간 입석[立石]을 따라서, 동북[東北]으로 700리의 지점과, 벨루하산에서 동북[東北]으로 흐르다가 다시 꺽이어 함경도[咸鏡道]의 종성[鍾城]인 수주[愁州]앞을 흘러, 외몽고[外蒙古]의 바다와 같은 호수[湖水]들이 늘어서 있는 반사막[半沙漠] 지대의 대택[大澤]으로 흘러 들어가는 이 강[江]이 바로 조선사[朝鮮史]의 두만강[豆滿江]이다.
이 두만강[豆滿江]에서 북[北]쪽으로 700리 지점에 이르면, 밸루하산에서 입석[立石]을 따라 비스듬이 동북[東北]으로 올라오는 700리 지점과 만나게 된다. 바로 이곳에,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회령부[會寧府]의 공험진[公嶮鎭] 옛 성[城]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성[城]터의 유지[遺址]가 온전히 남아 있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서북[西北]쪽의 100리 지역의 산령[山嶺]에 선춘령[先春嶺]의 경계비[境界碑]가 있었던 것이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이 선춘령[先春嶺]의 동남[東南]쪽에 공험진[公嶮鎭]의 성[城]이 있으며, 소하강[蘇下江]이 동[東]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 선춘령[先春嶺]의 동북[東北]쪽에 산중 호수[湖水]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호수[湖水]의 물은 동[東]쪽으로, 선춘령[先春嶺]의 북[北]쪽 산 기슭에서 발원[發源]하여 흘러드는 수원[水源]들과 합수[合水]하여 북[北]쪽으로 흘러간다. 왜곡[歪曲]되지 않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변조[變造]하지 못한 당시[當時]의 지도[地圖]속에 남아 있는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자로 잰 듯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히 일치[一致]되고 있다.
북관[北關]의 공험진[公嶮鎭]이 있는 이 지역은, 러시아의 투바공화국, 하카스공화국의 경계선[境界線]이 되고 있으며, 벨루하산의 동북[東北]쪽은, 알타이공화국이 자리 잡고 있다. 알타리[斡朶里]의 종족[種族]은, 조선[朝鮮] 함경도[咸鏡道]의 북관[北關]에 수 없이 등장하는 종족[種族]이다. 이 알타리[斡朶里]의 공화국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비운[悲運]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이 지역에서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을 따라서, 북관[北關]에 축조[築造] 했던 당시[當時]의 성곽[城郭]들을 모두 찾아서 확인 하였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말하고 설명하는 지역[地域]에는, 어김없이 성곽[城郭]의 유지[遺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성곽[城郭]의 유지[遺址]들 중에 일부는, 지금도 성벽[城壁]이 온전히 남아 있다.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는, 오늘날의 몽고[蒙古]땅 서[西]쪽]의 지역으로, 대략 몽고[蒙古] 면적의 의 3분 2정도가,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 지역[地域] 이었다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는, 성호사설[星湖僿說], 천지문[天地門], 윤관비[尹瓘碑]에서,............ 윤관이 병사령할(兵使鈴轄)인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그때의 일을 기록하되, “이 땅은 동으로 대해(大海)에까지 연접했고, 서북으로 개마산(蓋馬山)까지 들어갔으며, 남으로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고을과 연접했으니 산천도 수려하고 토지도 비옥하다.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땅으로 고비(古碑)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이 지역에는, 수많은 고대[古代]의 석상[石像]들과 고비[古碑]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특히 고비[古碑]들은, 작거나 크거나 모두, 고구려[高句麗] 석비[石碑]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자갈 같은 작은 돌을 쌓아올려 만든 거대한 왕릉[王陵]에 버금가는 무덤들이 그 옛날의 위용[威容]을 자랑하고 있으며, 고대[古代]에 돌로 성벽[城壁]을 만든 유적[遺跡]들과 거대한 왕릉[王陵]에 버금가는 크기의 무덤들이 지금도 중요[重要]한 지역에 모두 남아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이서린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에 함몰되어 있는, 오늘날 한국[韓國]의 국사[國史]라는 것은, 조선사[朝鮮史] 오천년[五千年]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역사[歷史]를 단절 시키고,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의 정신[精神]과 도도히 흐르는 위대[偉大]한 역사[歷史]의 혼[魂]과 맥[脈]을 내부[內部]로부터 무너트리는, 암흑[暗黑]의 존재[存在]일 뿐이다.
우리가 진실[眞實]로, 찬란[燦爛]하고 위대[偉大]한 오천년[五千年]의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는 후예[後裔]들이라면, 어찌 분발[奮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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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시간 15.01.28 위의 글 내용으로 봐서, 이미 답사한 결과 지형지리, 특이지형등등의 지세가 사료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군요. 조선(통칭)왕조의 영역은 많은 사료에서 말하는 것이 진실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게 되는군요. 많은 부분이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와 신강성과 외몽골 접경지대로 쏠립니다.> 만주지방, 숙신지역이 밝혀지고, 서토의 정체도 밝혀지고.....하나 하나 정리가 되어갑니다. 여기서 욕심이라면 유물유적으로 그 증거를 찾다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면 욕심일까요.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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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맑은영혼 작성시간 15.01.28 <특히, 이 지역에는,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와 똑같은 첨성대[瞻星臺]가 높이 세워져 있다.> ...라고 하셨는데...보고 싶군요.... 혹시 사진 가능한지 모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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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환국고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1.29 현지의 나라들에서 보는 역사의 자료와 시각, 그리고 현지 주민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역사에 대한 시각에 차이가 있습니다. 카자흐스탄만 하더라도, 조선사의 역사에 대한 300페지의 분량에 달하는 자료 등, 개인이 혼자 번역하고 정리 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카자흐스탼, 키르키즈스탄, 러시아, 몽골의 언어와 , 또한, 조선사와 관련된 지역에 사는 부족들의 언어에, 지역적 차이가 있습니다. 유적과 유물들이, 조선사와 한줄기의 맥으로 흐르고 연결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이들 지역의 언어를 모두 번역하고,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그들의 역사와, 조선사와 맥을 같이하는, 이에 대한 규명 작업과 고증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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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환국고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1.29 이러한 여러가지 우리 역사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유적과 유물, 그리고 현지에서 그들이 말하고 설명하는 이에 대한 역사의 고증과, 조선사 역사에 대한 부인 할 수 없는 정리 자료의 작업이 완료 되는데로, 생생한 현지의 자료들을 올릴 예정 입니다. 혼자 하는 일이라 여러가지 일 때문에 제약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 입니다. 딱딱하고 메마른 글로 대하는 것 보다는, 생생한 현지의 역사에 대한 자료들이, 학생들로부터, 기성세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사 역사의 혼과 맥을, 마음과 감성으로 받아 들이고, 일치 되게하는, 무언의 힘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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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환국고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1.29 비록 조선사의 역사에서, 상고사의 기록들은 미미하고 소략하나, 환국으로 부터 시직되는 조선사의 역사는, 자료가 방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잘아시다시피 조선사의 역사가 펼처진 강역이 너무나 광대하기 때문이 아니 겠습니까 ? 조선사 역사의 대강만을 정리하여 역사와 유적과 유물들을 결부 시킨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분량이 될 것 입니다. 장구한 조선사의 역사를, 한 줄기로 볼 수 있는, 그러한 체계의 완성을 위해서, 미력하나마 성심을 다하고 있을 뿐 입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