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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7.04.09 ○ 왜적이 전라 감사를 칭호하여 의령(宜寧)의 정진(鼎津)으로 몰려 닥쳐오니,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해서 그를 물리치다.
○ 전라 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다. 좌도는 전 부사인 첨지 고 경명(高敬命)을 대장에 모셨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從事)로 하고, 정랑(正郞) 이대윤(李大胤)과 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양희적(楊希廸)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로 삼았다. 우도는 전 부사인 김천일(金千鎰)을 대장으로 모셨다. 고경명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전에 동래사(東萊府使)를 지냈고, 김천일은 나주(羅州) 사람 -
작성자 신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7.04.09 임진년 6월 24일, 임실 운암에서는 양대박(梁大樸)이 이끄는 소수의 의병이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세를 끼고 왜군의 대부대를 섬멸했다. 이후 웅치, 이치, 금산 등지에서 조선군이 선전하면서 마침내 왜군은 전라도 공격을 포기하게 된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보여준 전공은 조총이 조선의 승리를 허락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무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재미있는 기록은 실록에도 있다.
…상이 ‘신립 은 어찌하여 패했는가?’ 하고 물으니, 종신 이 아뢰기를, “새재[烏嶺]를 미처 지키지 못하고 있다가 적이 새재를 넘어 와 밤중에 돌격해 왔으므로 패배한 것입니다.”…‘
‘…“병가(兵家)는 제각기 장기(長技)가 있습니다 -
작성자 신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7.04.09 호남인들의 강한 민족의식과 자주성, 외세에 대한 저항정신은 조선조에 들어와 국가와 민족의 존립이 크게 위협받은 임진왜란을 맞아 더욱 빛을 발하였다. 당시 호남인들은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총체적인 구국투쟁을 전개하였는바 경상도 의병이 향토방위적 지역성격을 띤것과 달리 호남의병은 경기,충청,경상지역까지 진출,지역을 초월한 국가방위적 차원에서 대일 구국항쟁을 벌였다.
나주출신 김천일과 이종인,광주출신 고경명 고종후부자,김덕령과 정충신, 보성의 임계영,능성의 최경희, 남원의 김익복과 양대박,화차를 제작한 변이중,고흥출신 정명세, 장흥출신 위대기 등 수많은 의병장들이 위기에 처한 나라 -
작성자 신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7.04.09 고령 의병장 정인홍은 무계와 성주를 탈환하였고 김면은 일본군의 거창 침입을 좌절시키고 지례를 확보함으로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하였다.
호남지역에서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은 5월 22일에 선조의 파천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5월 26일에 김천일(金千鎰)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5월 29일에 담양에서 유팽노, 안영, 양대박 등과 함께 기병하여 6월 11일에 진주로 이동하였다.
6월 22일에는 7천명의 병력으로 여산에 도착한 고경명은 일본군이 금산, 무주지역으로 침입함에 따라 북상계획을 바꾸어 방어사 곽영군과 합심하여 전라도로 침입하는 일본군을 먼저 섬멸하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
작성자 신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7.04.09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진(士眞), 호는 송암(松巖)·죽암(竹巖)·하곡(荷谷)·청계도인(靑溪道人).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관(學官)으로서 아들 양경우(梁敬遇)와 가동(家僮) 50명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6월 고경명(高敬命)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고 유학(幼學)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달 7일 군대를 정비하고, 이튿날 출정에 나서자 전주로 가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과로로 발병하여 진산(珍山)의 진중에서 죽었다. 1786년(정조 10) 10월 전라도 진사 이진희(李鎭熙) 등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병조참의 -
작성자 천산 작성시간17.04.12 임란 초기에 선조는 도성을 비우고 도망갔고 호남을 제외한 지역의 관군은 무너졌기 때문에 선조는 호남의 관군을 징발하여 왜적을 추격하여 자신을 지켜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호남 민심은 완전히 이반하였고 관군은 곧 반군이 되었습니다.
반군이 된 관군은 흩어지기도 하였지만 무리지어서 도적떼가 되었고 왜군을 가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충장공께서 위대하셨던 것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흩어진 관군이 의병으로 모이게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충장공께서 흩어진 관군을 다시 의병으로 규합하지 못 했다만
호남이 무너지고 조선도 무너졌겠지요. -
답댓글 작성자 천산 작성시간17.04.12 또한 무리를 지어다니며 왜적을 가정했던 도적떼들을
해산시키지 않았다면 백성들은 몇 배나
더 힘들었겠지요.
운암전투가
왜적을 격파한 것이던
아니면 왜적을 가장한 반란군을 소탕한 것이던
충장공이 진정으로 위대하셨던 것은
반란군의 된 관군조차 의병으로 돌리셨다는 것이겠지요.
운암전투에서
적들은 왜적으로 가장을 했고
충장공의 아드님께서는 그래서 왜적으로 기록을 하였지만
충장공께서 규합하신 의병들의 상당수가
반란군의 되었던 관군이었고
운암지역에 출몰한 왜적은
반군이 된 관군의 무리들이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임란 초기에는 왜적이 호남 깊숙히 침공한 적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