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陶淵明)은 중국 동진(東晉)시기 시인인데. 이름은 잠(潛)이고, 자는 원량(元亮)이며 호는 정절(靖節)이다.
몰락된 사족(士族)가정 출신인 도연명은 강서성 구강서남의 사람으로서 진나라 개국공신이며 대사마 직까지 오른 도간(陶侃)의 증손이다. 비록 명문의 후손이었지만 도연명이 태어날 무렵 진나라의 국운이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도연명의 가문도 이에 따라 쇠락했다.
도연명은 선후로 강주제주(江州祭酒),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威參軍)을 지냈으며 41살에 80여일간 팽택령(彭澤令)을 담임했다. 팽택령으로 도연명은 벼슬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조정에서 관리가 나오면 현령은 모자를 바로 쓰고 허리띠를 잘 맨 후에 마중 나가야 했다.
도연명은 "내 어찌 다섯 말의 녹봉을 위해 허리를 굽히고 권신을 맞을 소냐."라는 유명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관직을 버리고 전원생활로 돌아갔다.
도연명은 학문 높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인생은 푸른 하늘의 뜬구름처럼 덧없다고 여겨 전원에 은거하여 칠현금을 타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으며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도연명이 전원생활로 돌아가는 심경을 토로한 것이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작품은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생활로 돌아가는 해방감을 가을 정경 속에 그리면서 다가오는 노년의 삶을 천명에 맡기는 심경을 봄의 정경 속에 묘사했다.
"돌아 가련다 이제.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려고 한다.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명구로 시작된 이 시는 전체적으로 영탄조가 강하나 신선한 정경 묘사와 청아한 풍취가 넘쳐흐르는 걸작이다. 이 시에는 관직을 내놓고 은거생활을 하겠다는 도연명의 선언이 담겨있다. 도연명은 그 후 63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은거생활을 했다.
의희 말년에 황제는 그를 저작좌랑으로 불러들이려고 하였지만 도연명은 끝내 그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거해 시와 글을 지으면서 생을 마쳤다. 그의 작품으로서 120여수의 시와 10여 편의 글이 남아있다.
도연명의 작품은 백성을 구하려는 큰 뜻을 담았으며 사회모순을 폭로하였고 암흑한 정치와 잔인한 통치자를 규탄하였다.
"금강노목(金剛怒目)", "산해경을 읽고서(讀山海經)", "형가를 읊노라(吟荊軻)", "술주(述酒)", "음주(飮酒)", "양장사에게 드리노라(贈羊長史)"와 같은 작품들이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귀원전거(歸園田居)"와 같은 시편들은 도연명이 장기적으로 전원생활을 하면서 순박한 농부들의 생활을 찬미하고 벼슬에 대해 비난한 작품이다. 그의 "도화원시(桃花源詩)"와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두 시는 진시황의 폭정을 피하여 한 나라와 진나라, 위나라 존재를 모르고 사는 세외(世外) 도화원을 동경한 작품이다. 세속을 떠난 도화원 생활은 도연명이 동경한 이상세계였다. 도화원에 대한 도연명의 동경은 암흑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불만이 안받침 되어 있다. 이밖에도 "가난한 선비를 읊노라(吟貧士)"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과 같은 작품은 도연명의 자서전적인 작품이다.
도연명은 천성이 술을 좋아해서 그의 시는 "편편(篇篇) 술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그 중에도 가을밤의 지루함을 달래며 술을 마시고 취중에 썼다고 하는 "음주(飮酒)"라고 제목 붙인 20수의 연작은 도연명의 독특한 시경(詩境)을 남김없이 전하고 있다.
도연명의 아주 가난하게 전원생활을 보냈다."여름에는 주린 창자를 달래고 겨울에는 이불 없이 잠잔다."는 시 구절은 그의 가난한 생활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도연명은 정신적으로는 아주 여유로웠다.
도연명의 문학상의 성취를 본다면 5언 체고시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민가의 소묘수법을 발전시켰고 소박하고도 세련된 언어로써 자기의 심후한 감정을 토로한데 있다. 그의 사부와 산문작품도 서진(西晋)이래 일시 풍미하던 변체화의 경향과는 거리를 멀리하였으며 미사려구로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소탈하고 자유롭게 쓰는 특점을 갖고 있다. 도연명의 반항정신과 소박하고 세련된 필법, 전원생활에 대한 찬미 등은 후세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전원시에 대한 영향과 도화원에 대한 동경은 특기할만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도연명집", 혹은 "정절선생집"에 수록되어 있다.
중국의 창 2010-08-11 10: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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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과 그의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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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国际广播电台 도연명은 도잠(陶潛)이라기도 한다. 그는 기원4세기의 동진(東晋)시기에 살았다.중국 저누언시파의 개척자로서 그는 평생 안빈낙도하고 자연을 숭상하였다 고결하고 소박하며 솔직한 그의 성격은 중국 력대 문인묵객들의 참양과 숭배를 받았다.도연명의 증조부인 도간(陶侃)은 동진의 개국원훈이였으며 조부와 부친은 벼슬을 했었으며 도연명이 8살때 부친이 세상뜨고 가문은 날로 몰락하였다 소년시기의 도연명은 벼슬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큰 발전이 없었다. 하지만 동진시기는 동란한 년대였으며 종실투쟁이 그칠줄 모르고 조정이 부패하였다 천성이 순박한 도연명은 29살에 처음으로 벼슬의 자리에 앉은 후 관리사회의 부패와 암흑에 불만을 품고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 도연명은 생활의 압력에 못이겨 여러번 작은 벼슬을 하였으나 선후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귀가하였다 그후 갈수록 가난해진 도연명은 농사를 짓는 것으로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 41살이 되던해 하는수 없이 또다시 관부에 가서 관직을 모색하여 팽택현의 현지사로 되였다 도연명이 평상시에 공명과 부귀를 멸시하고 `권세있는 자에게 아부하며 빌붙지 않은 것으로 하여 현지사를 담당한지 80여일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이때로부터 도연명은 관리사회와 영원히 고별하여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는 은거생활을 하였다 도연명의 전원생활이 매우 가난했다. 그가 44살이 되던 해 가정에서 불행하게도 화재를 입어 생활은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였다 <여름에는 줄인 창자를 달래고 겨울에는 이불없이 잠잔다>는 시구적이 그의 가난 생활처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도연명은 정신적으로는 아주 태연하고 편안하다.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창작풍작기로서 그는 이때 대량의 전원시를 창작하였다. 그의 필하에서 농촌생활과 전원경치는 처음으로 중요한 심미대상으로 되였다 그는 시가로 전원생활을 고도로 청결화하고 미화하였으며 고통스러운 현실세계의 정신피난소로 만들었다. 도연명의 만년은 가난하고 슬슬하였다 어떤때 그는 지어 구걸에 의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때 그는 또다시 조정의 징용을 거부하고 정치와 관리사회를 회피하였다 도연명은 만년에 저명한 산문인<도화원기와 시>(桃花源記幷詩)를 창작하여 유토피아사회를 조성하였다 <도화연기>에서는 한 어민이 도원에 잘 못 찾아들어 거기에서 한 무리의 사람을 발견하였는데 이 들의 조상은 전란을 피하기 위해 도원에 은거해 살면서 세세대대 도원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외부세계의 물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천생적으로 순진하고 소박하며 근면하게 일하여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도화원기.는 아름다운 상상으로서 그당시 동란한 나날에 태평사회에 대한 광범한 민중들의 지향을 대표하였다. 도연명은 백여수의 시와 10여편의 산문밖에 남겨놓지 않았지만 중국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당시 도연명이 처하고 있던 동진시기는 형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창작에서 화려한 문채만 추구하였으나 도연명은 전원시란 이 새로운 제재를 개척하였다. 도연명의 시는 중국 전통적인 시가의 옛스롭고 소박한 작풍을 계승한것으로서 생기로 충만되여 있다 그의 작품은 언어가 소박하고 청신하며 유창하다. 도연명의 시는 이정표와도 같이 옛스롭고 소박한 시가가 도달할수 있는 고도를 표식하고 있다 |
출처 - http://korean.cri.cn/chinaabc/chapter15/chapter15010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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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은 작성시간 10.09.26 '도연명의 아주 가난하게 전원생활을 보냈다."여름에는 주린 창자를 달래고 겨울에는 이불 없이 잠잔다."는 시 구절은 그의 가난한 생활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도연명은 정신적으로는 아주 여유로웠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지냈지만 예순이 넘도록 살았다는 것은 그가 마음은 풍요로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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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주 작성시간 10.09.27 "내 어찌 다섯 말의 녹봉을 위해 허리를 굽히고 권신을 맞을 소냐." 도연명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구절 중 하나인 것 같네요. 그가 명예나 부귀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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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숙영 작성시간 10.10.14 도연명이 정치세계에 입문했다면 그 좋은 작품들이 창작될 수 있었을까요?
전원생활을 추구하였던 그였기에 좋은 작품들을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
작성자미정 작성시간 10.10.18 "도연명의 문학상의 성취를 본다면 5언 체고시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민가의 소묘수법을 발전시켰고 소박하고도 세련된 언어로써 자기의 심후한 감정을 토로한데 있다. 그의 사부와 산문작품도 서진(西晋)이래 일시 풍미하던 변체화의 경향과는 거리를 멀리하였으며 미사려구로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소탈하고 자유롭게 쓰는 특점을 갖고 있다. 도연명의 반항정신과 소박하고 세련된 필법, 전원생활에 대한 찬미 등은 후세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전원시에 대한 영향과 도화원에 대한 동경은 특기할만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도연명집", 혹은 "정절선생집"에 수록되어 있다." 도연명의 매력을 많이 느끼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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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경완 작성시간 10.12.14 정말 소설이나 신화에 나올법한 인생을 살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