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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영화]<리뷰>엉클 분미 :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

작성자柳進|작성시간11.03.24|조회수739 목록 댓글 4

 

엉클 분미

 

 



줄거리 :
극심한 신장 질환을 앓고 있는 엉클 분미는 자신의 마지막 나날들을 시골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보내기로 한다. 불현듯 죽은 아내의 유령이 그를 돌보기 위해 나타나고,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들이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다. 자신이 앓는 병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며, 분미는 가족들과 함께 정글을 통과하여 언덕 위의 신비로운 동굴까지 오랜 도보 여행을 한다. 바로 자신이 처음 생을 시작했던 곳으로...

 

 

"이 영화는 내가 태어나서 자란 태국 북동부 지방의 풍경을 충실히 담기 위해 기획됐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된 곳이라는 배경에 평소 관심 있었던 전생과 환생이라는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잠시 감독님과의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해 알려달라.

▲ '엉클 분미'는 여러 단편과 예술 작품들이 포함된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그 중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태국 북동부의 풍경을 충실히 담으려 했다. 그 곳에 오래 된 수도원이 있는데 그 곳 수도승이 쓴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한 이 작품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변모된 과정을 담으려 했다.

- 영혼이나 환생에 대한 이야기가 근간을 이룬다.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 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신화와 유령이 나를 사로잡았다. 신체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지만 환상이라는 요소가 나를 끌어 당겼다. 영화도 같은 의미다. 영화라는 것도 환상적 경험 아닌가.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태어나서 다른 삶을 취한다는 것이 내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태국 북동부를 배경으로 택한 것은 정치·사회적으로 억압되는 역사가 형태를 달리하며 사이클이 반복된다는 형태가 영화적으로 매력으로 느꼈다.

- 당신의 영화는 어렵다. 대중적으로 쉬운 구조 택할 생각은 없나.

▲ 오히려 할리우드 영화가 더 어렵지 않나. 플롯 뒤에 서브 플롯이 있고 다양한 뒷얘기가 나온다. 관객을 2시간 잡아두기 위해 갖가지 구조를 섞었다. 반면 나는 매우 올드하고 단순한 구조로 영화를 만든다. 또 '엉클 분미'는 내 전작에 비해 매우 친절한 영화다. 적어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러티브 구조는 갖췄지 않나.

- '엉클 분미'가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헌사라고 했는데 어떤 부분에서인가.

▲ 관객은 잘 몰라도 상관 없지만 내 나름의 규칙을 담았다. 이번 영화에 35mm 필름 총 6개 릴이 소요됐다. 각 릴에 장르를 달리 했다. 첫 릴에는 내 영화의 전통 방식을 담았고, 식사 장면에는 강한 조명과 앵글 방식 등으로 드라마 장르의 형식을 담았다. 세번째 릴에는 다큐적인 방식을 네번째 릴에는 태국 아침드라마의 한 형태인 로얄 코스툼 형식을 썼다. 이 장면이 공주와 메기가 나오는 장면이다.

- 엔딩신에서 두 인물이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장면은 무슨 의미인가.

▲ 클리셰적인 얘기 같지만 모든 것이 환상이고 환영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화라는 매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주인공들의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 나와 층위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두 개의 시간을 보내는데 이 겹은 두 겹이 될 수도, 세 겹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 창조될 수 있다는 점이다.

- 극 중 공주와 메기 이야기는 태국 전래 동화인가.

▲ 태국 아침 드라마에서 콘셉트 따왔지만 대부분 내가 지어냈다. 말하는 동물이 나오고 원숭이 유령이 환경에 적응을 못해 숲으로 도망가고 하는 부분에는 정치적 비유가 담겼다. 태국 북동부는 군대와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을 몰살시키려 한 곳이다. 정치적 견해 다른 사람들이 숲으로 도망쳐 산 슬픈 역사가 있다. 그런 비유도 담았다. 공주가 다른 세상을 위해 장신구와 순결을 다 버리지 않았나. 영화에는 못 넣었지만 공주가 메기와의 정사로 임신을 해 물고기와 인간이 혼합된 아이를 낳게 될까봐 걱정하는 장면도 원래 포한돼 있었다.

 

감독과 작품에대해 더 알고싶으시다면 밑의 링크도 참조 해보세요

http://olv.moazine.com/daum/?a_id=41QBp23IMS84u1lAS0RNkPW1&s_t=%BE%FB%C5%AC%20%BA%D0%B9%CC 

http://olv.moazine.com/daum/?a_id=vZnn74QIMmn2y8wOi2yPZqI2&s_t=%BE%FB%C5%AC%20%BA%D0%B9%CC

 

 

 

 

 

 

MacGuffin Effect님의 리뷰

 

정성일은 언뜻 보기에도 십여 장이 넘어 보이는 일반노트 크기의 메모들을 들고 있었다. 멀리서 넘겨다본 그 메모들에는 뭔가가 손글씨로 적혀져 있는 듯 했다. 그는 그러나 그 종이들을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이야기를 해나갔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 종이를 하나하나 탁자에 내려 놓는 것을 보니, 분명히 이 이야기들의 진행과 관련된 메모들일 것이다. 오래전 정성일의 음성해설이 들어간 DVD를 보며, 정성일은 도대체 이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까, 뭔가 적어놓고 대본을 읽는 것일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몇 개의 메모들을 들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 메모를 거의 보지 않은 채로,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해나갔을 것이다. 그는 조금은 이상한 문장들을 썼다. 구어체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그렇다고 문어체로 보기에도 적절치 않은 그런 문장들. 그가 쓴 비평들을 그대로 읽어주는 듯한 느낌. 그러나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는 엄청나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애써 말하고 싶어하는 화자가 있던가. 1시간이 예정되어 있는 시네마톡이었지만, 그는 1시간을 조금 넘겼고, 몇 장의 종이들은 끝내 내려놓지 못하고, 여전히 손에 쥔 채로 이야기를 끝냈다. 정성일의 <엉클분미>에 대한 영화적 간증과 그것에 압도되어 버린 신도들. 내 머리 속에 남은 것은 그런 이미지였다.

<엉클 분미> 상영과 정성일 평론가의 시네마톡. 그 때 들었던 이야기 몇 개를 지금 뒤늦게 옮겨 본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시네마톡은 11월 중순에 있었고, 이것은 여차저차첫차막차한 이유로 12월도 한참 지난 지금에야 몇 개의 단어들에 의지해 이야기를 옮기는 무리한 시도라는 것이다. (영화를 본 이후에,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뭔가를 끄적거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몇 개의 단어들만 휴대폰 '그림메모'를 이용하여 남겨두곤 하는데, 이 글도 온전히 그 단어들의 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들은 분명히 처음에 들었을 때와는 조금은 달라져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비슷하게 옮기려고 노력해 본다. 그러므로 당연히, 밑에 있는 모든 내용들은 모두 정성일 평론가가 그날 했던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밑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그'는 당연히 정성일이다.)

1.
그는 이 영화 <엉클분미>가 끝나고 났을 때의 대부분의 관객들이 경험하는 '멍~'해지는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이것이 영화의 내용 뿐만 아니라, 감독 아핏차퐁 위타세라쿤의 형식적인 시도와도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많은 다른 매체들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이 영화는 아핏차퐁 위타세라쿤의 설치미술 작업과 크게 연관이 있다. 아핏차퐁 감독은 설치미술에서 멀티스크린을 사용하여 여러가지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동시에 체험하게끔 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영화에 가져왔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전의 영화들과 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데, 영화의 스크린이 여러 개의 스크린을 쓸 수 있는 설치미술과 다르게, 하나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핏차퐁 감독은 개의치 않고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나의 스크린에서 동시에 해버린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에 분미의 아들이자, 오래전 집을 나가 원숭이 인간이 된 분쏭과 오래전 죽은 분미의 아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나, 분미 및 통, 젠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점은 원숭이 인간 분쏭과 죽은 아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그 사실이 아니라, 이들이 오랫만에 만나고서도, 분쏭과 죽은 아내는 서로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그것은 이 두 가지가 별개의 이야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즉 원숭이 인간 분쏭이 나타나는 것과 죽은 아내가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이다. 실제로 영화 내내 이들 두 사람이 말을 섞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다. 아핏차퐁 감독은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나의 스크린 위에 그냥 풀어놓는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관객이 멍해지는 것은 단지 두 개 이상의 스크린을 동시에 하나의 스크린에 투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아핏차퐁의 형식상의 일종의 실험이 있다. 그 실험이란 영화의 고정선(線)을 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영화의 중심에 어떤 고정선이 있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 고정선을 따라가며 영화를 즐긴다. 물론 이 고정선은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일부러 고정선을 여러개 두는 경우도 있고, 그 중 고정선 하나를 갑자기 잘라내 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 고정선을 비틀어버리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반전(反轉)이라 부르는 것). 그러나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관객이 어떤 고정선을 따라가다가 그것이 아닌 것 같아 그 고정선을 버리면, 영화가 한참 진행되다가 어느샌가 그 고정선이 다시 나타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변태와 환생(전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환생(전생)이 A가 A'가 되는 것이라면 변태는 A가 B가 되는 것이다. 즉 영화 속에서 분미의 경우가 환생(전생)이라면, 통이 스님이 되는 것은 변태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아핏차퐁의 영화도 변태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즉 이 <엉클분미>라는 영화는 A로 시작했다가, 그것이 B가 되었다가, 그것이 다시 C가 되기도 하고 다시 A로 문득 돌아오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멍해지는 것이다.

3.
이 밖에도 이 영화에는 내용상의 대구(對句)가 있다. 공주가 물(수분)로 들어가는 꿈(혹은 전생)의 내용과 분미와 젠, 통이 아내 유령을 따라 건조한 동굴로 들어가는 장면은 내용상으로 대구를 이룬다. 그리고 분미는 건조한 동굴에서 수분이 빠져나온 채로 죽음에 이른다. 이 장면들은 왜 대구를 이루는가.

4.
영화의 중간에 갑자기 메기와 공주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이를 누구의 꿈 혹은 전생으로 보아야 할까. 분미의 전생일까, 통의 전생일까, 아니면 젠의 전생일까. 아핏차퐁 감독은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 메기와 공주 에피소드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분미가 모기를 전자모기채로 잡는 장면임을 상기시키며(이 장면은 또한 이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죽은 모기들과 죽은 공산주의자들), 왜 모기의 전생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전제로 하여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은 분명 이상하게 찍혔다. 즉 대부분 모기를 잡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을 잡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반면에, 이 장면은 특이하게도 잡히는 모기들이 화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5.
그가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이 영화의 래디컬한 정치성에 대해서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영화를 본 평론가 및 기자들은 이 영화의 급진적인 정치적 메시지에 대해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석에서 아핏차퐁 감독 역시 자신이 죽을 때까지 태국은 국왕 및 군부 독재에 둘러싸여, 민주화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분미가 젊은 날 공산주의자를 너무 많이 죽인 자신의 업보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미래 이야기라고 하면서 보여지는 사진들도 있다. 이 사진들에서 원숭이 인간 분쏭과 총을 든 사람들(공산주의자들?)이 나란히 찍은 사진들도 있고, 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들도 있다. 마치 이 사진들은 이 영화 촬영 현장을 스케치한 사진들 같기도 하다. 즉, 이 영화 속에서 '미래'라고 소개된 사진들은 현재에 가깝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이 <엉클분미>라는 전체 영화의 내용이 공주와 메기의 에피소드라는 대과거 및 이 미래 사진 사이에 있는 전과거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미래 사진 속의 현재는 희망적인가. (나는 그렇다고 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사진 속 사람들은 웃고 있지만, 사진 속에는 쓸쓸한 공기가 감돈다. 그가 이 영화는 우리나라로 치면 80년 광주가 아니라, 한국전쟁 뒤 지리산에서 찍힌 것으로 봐야한다고 했던 것으로도 미루어 볼 때, 이 사진들에는 절망 속에서의 한 때의 휴식과도 같은 것들이 비춰진다.)

6.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마지막에서 스님이 된 통은 사원이 무섭다면서 잠을 잘 수 없다고, 젠의 숙소로 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젠과 함깨 TV를 보다가 일어선다. 그리고 이 때, 익히 알려졌듯이 두 가지 행동으로 그들은 분리된다.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왜 통은 스님이 되었으면서도 사원이 무서운가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장면을 아핏차퐁이 매우 공들여 찍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총 4가지 구도로만 찍혔고, 그 중 2가지 각도만을 마지막에 번갈아 보여주며, 그들을 두 가지로 분리시킨다. 하나는 TV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젠과 통이고, 다른 하나는 TV 앞을 떠나 세븐 일레븐으로 무엇인가를 먹으러간 젠과 통이다. 아핏차퐁은 여기에서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TV를 그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외면하고 떠날 것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TV에는 태국 시민들의 시위와 그것을 제압하는 정치가와 군부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외면할 것인가, 그것을 바라볼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강조해서 말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아핏차퐁 감독의 전작들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쉬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쉬워진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바라볼 것인가의 정치적인 단호한 질문을 하는 이 영화를 단지 형식적인 문법이 조금 쉬워졌다고 해서 쉬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엉클 분미", 미술관 영화를 대하는 솔직한 자세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힘입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정식 개봉된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장편.

예전에 <디지털 삼인삼색>(2005)에 포함된 단편 <세계의 욕망>을 통해 그 이름 만큼이나 익숙해지기가 어려운 - 거의 실험영화에 가까운 작품들을 만드는 감독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바, 이번 <엉클 분미>에 관한 지인들의 관심어린 언급들과 드디어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단독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저 곳은 내가 갈 곳이 아니다"라며 진작에 마음을 접고 있었데 이 놈의 인연은 나중에 대체 뭐가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결국 감상을 하고야 말았다.

영화를 보러 들어가기 전에 상영관 앞 소파에 앉아 약 20분 정도 단잠을 자두었음에도 상영시간 동안 자주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 쉽게 말해 졸지 않으려고 - 애를 써야했음도 솔직하게 밝혀두고 싶다.

<엉클 분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 한 편을 보고 재미가 있다/없다, 잘 만들었다/못 만들었다는 식으로 감상평을 하는 범주의 바깥에서 태어난 영화다.

물론 여전히 <엉클 분미>가 무지하게 졸린다,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왜 중간에 다른 이야기가 끼어드는 것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식의 직관적인 반응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애초에 이 영화를 선택해서 감상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니 (특히 나와 같은 경우 뻔히 알면서도) 그 선택을 했던 스스로를 탓하는 수 밖에 - 라고 쓰고 누워서 침 뱉는다고 읽습니다 - 없는 일이다.

<엉클 분미>는 내가 알던 그런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둘러 단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 <엉클 분미>가 깐느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화는 언제든지 다시 나타나고 경우에 따라 기존의 영화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장 <엉클 분미>가 고민스러운 것은 그 새로움이 내가 알던 세계와 너무 동떨어진 곳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




분미 아저씨의 시골 농장처럼 느릿한 시간 위를 걷는 영화 <엉클 분미>의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신장 질병을 앓고 있는 농장주 분미(타나팟 사이새마르)를 도시에 사는 처제(제니라 퐁파스)와 조카 통(사크다 카에부아디)이 방문했는데, 저녁 식사시간에 19년 전에 죽은 분미의 아내와 비슷한 시기에 집을 나갔다가 숲 속의 유인원이 되어버린 - 검은 털과 붉은 눈의 츄바카 - 아들 분쏭이 나타난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분미는 가족들과 함께 밤늦게 숲 속 동굴 안으로 들어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남겨진 가족들은 분미의 장례식을 치른 후 (아마도)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메인이다.

그 중간에 오랜 옛날 못생긴 공주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몸에 걸친 장신구들을 모두 물 속에 남긴 채 메기와 한 몸이 된다는 이야기의 단편, 숲 주변의 젊은이들과 군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컷들, 그리고 분미의 장례식이 끝나고 처제와 딸이 조의금을 정리하던 호텔 방에 스님이 된 조카가 찾아와 야식을 먹으러 나가자고 하는데 이때 유체이탈을 하듯 등장 인물들은 호텔 방 안과 식당 안에 동시에 존재를 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분미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환생에 관한 나레이션과 함께 소 한 마리가 숲으로 도망왔다가 주인에게 끌려가는 장면도 있다. 마지막 식당에서 흘러나오던 현대적인 팝 음악은 엔딩 크리딧으로 이어지는데 영화 전편에 가득하던 원시적인 적막함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말로 정리된 <엉클 분미>의 내용은 핵심이 되는 분미의 죽음을 중심으로 의문의 이벤트와 그 맥락을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현상들이 중첩되면서 완전한 이해 불가의 영역으로 날아가버린 느낌이다.

사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영화 관객들과 약속된 문법의 범위 내에서 이야기를 서술하고 감정을 표현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 그리하여 주어진 시간 동안 얼마나 재미있게 관객들의 흥미를 유도해나가느냐로 판가름되는 작품이 아니라 -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 개인의 독자적인 정의와 표현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기준으로 감독이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만 문제는 어느 세계가 진실에 좀 더 가까운 것인지는 아마도 영원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가 영화인 것이 아니라 <엉클 분미>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표현되는 영화들이 좀 더 영화답다고 받아들여지게 될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마디로 <엉클 분미>와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영화들의 옆에 나란히 서기 보다 그 영화라는 매체, 또는 예술 형식의 존재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나름의 새로운 정의에 따라 창조된 세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영화에 대한 지식을 통해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를 나름대로 해석해보려는 시도들조차 어쩌면 무의미한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한 시도 속에서 작가의 이력이나 인터뷰 내용들, 그리고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장르(설치 미술 등)의 작품들에 관한 정보, 심지어는 완전히 생소한 세계관에 대한 해설이 곁들여지게 되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의미를 묻고 새로운 정의를 시도해나가는 작품이 아무리 위대한 작품으로 추앙을 받는다 한들 지금 내가 추구하는 영화 감상의 목적에 부합하는 면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굳이 내키지 않는데 거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서사의 골격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표현 방식 안에서 기존의 것들로부터 조금씩 색다른 재미 찾기를 추구하는 것이 좀 더 유익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감독이나 평론가로부터 별도의 부연 설명을 들어야만 하는 영화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재미없는 노릇인 것은 사실이다.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 <옥희의 영화>(2010) 와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엉클 분미>는 매우 낯선 구조를 통해 -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지 않는 에피소드의 모음 - 새로운 영화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닮은 꼴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엉클 분미>와 달리 <옥희의 영화>를 비교적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오랜 시간 동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봐오면서 감독이 이야기하는 방식에 나름대로 익숙해진 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엉클 분미>는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서사가 가장 명확한 편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서사 방식을 취하고 있으면서 마침내 두 작품이 어떤 경계선에서 맞닥뜨린 셈이 아닌가 싶다.

영화관 보다 미술관이나 실험실이 좀 더 어울릴 법한 영화 보다는 내게 익숙한 언어로 말 걸어주는 영화가 훨씬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영진공 신어지

 


영화적 전형성을 탈피한 '앗치파퐁' 영화들에대한 소견. 

.                                                       http://iris7756.blog.me/40120378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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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주영미 | 작성시간 11.03.24 감독님 존함 만큼이나 어려운 영화였어요.ㅎㅎ 감독님 말씀처럼 영화의 구조적 어려움이라기 보단 논리적 구조를 초월한 이야기 전개 방식. 근데 은근 잼있었지요.ㅋ 참고로 잠 안 올 때 봐야 함돠. ☆
  • 작성자柳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3.24 제가 느끼기에 이영화는 전생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감독의 자신의 찰나찰나 느끼고 꺠닮음의 순간을 고스란히 카메라로 담았다고 보입니다. 즉, 영화적구조에대한 반항으로 영화의 씬, 시퀀스를 가지고 이리저리 실험하는 영화를 가지고 노는 듯 했습니다. 또, 이영화의 단순한 플룻은 감독이 전하려는 의도를 좀더 확실히 전달케하는 장치처럼 보이면서 전작 "징후와 세기" 에서의 평화롭고 단조로운 화면의 흐름도 보이지만 이 작품엔 감독의 상상력과 새로운 영화적 구조가 더 많이 발휘 되어 또 새로운 아핏차퐁적 영화 라고 할수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전 필름과 종이의 차이를 알수있었던 영화라서 정말 좋았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柳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3.24 이영화를 혼자 다시 봤는데요 그 결정적 원인은 바로 마지막 엔딩곡때문입니다... 전에 봤을때는 자고 일어나니 엔딩곡이 흘러 나왔는데 그곡이 쉽게 잊혀지지가 않네요 ㅎㅎ
  • 작성자너구리 | 작성시간 11.03.26 보는 동안.....
    음....
    영화와 내가 같이 미쳐갔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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