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씰
어린 시절, 겨울이 오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얼음이 얼고, 첫눈이 오고, 수정 고드름이 지붕 아래 투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한 학년의 끝과 손가락을 꼽아 가며 기다리던 설이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다리던 것이 겨울 방학이었다. 여름 방학보다는 겨울 방학이 더 많이 기다려지고 더 신이 났었다. 일하는 시간보다 놀 시간이 많은 겨울이었던 거다.
국민학교 때, 겨울 방학이 되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사고 받았다. 방학 책은 경제적 여력이 있는 아이들만 사도 되고, 크리스마스 씰은 가정 형편과 무관하게 모든 학생들이 구입해야만 했다. 책값을 못내는 것보다 씰값을 못내는 것이 더 부끄러웠다. 나눔이 좋은 것이라는 걸 아이들도 알았다.
선생님에 따라 크리스마스 씰의 유래와 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마치 우표와 같은 것으로 알고 샀다. 기침을 자주 한다는 폐결핵이란 병 퇴치 기금으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돌이켜 보면 화학 물질인 인쇄 잉크 냄새였던 그 묘하고도 신비로운 냄새와 함께 선생님이 나누어 주던 크리스마스 씰은 한 해를 마감하는 멋진 장식품이었다. 크리스마스 씰은 당시 우표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모던하면서도 멋졌다. 방학 책과 씰을 들고 학교에서 집으로 곧장 달려와 보낼 곳도 없는 어설픈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 엽서를 만들었다.
교회 종소리는커녕 커다란 굴뚝도 없는 산골마을에 성탄절 선물을 들고 올 산타 할아버지는 없었다. 아무도 보낼 리 없는 크리스마스카드인데도 동사 앞에 서서 우체부 아저씨가 올 때까지 까치발로 동구 밖을 바라보곤 했다.
차가운 겨울 골바람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고 처마 밑에서 고드름이 녹기 시작할 때쯤 자전거를 탄 우체부 아저씨가 나타났다. 마치 누군가 편지를 보낸다고 약속이나 있었던 듯 아저씨와 눈길을 맞추면 지나가듯이 하는 한 마디......
“너도 크리스마스 카드 기다리나? 아니면 편지라도 올 데가 있나?”
검정 고무신 끝으로 애꿎은 언 땅만 툭툭 걷어차면서
“아입니더. 울 누나 편지 오는 거 있나 싶어서......”
그 시절 겨울은 추웠고 호기심 많던 아이들은 몹시 심심했다. 성탄절 징표인 크리스마스 씰을 멋들어지게 장식해서 카드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보낼 친구도 주소도 없었다. 당연히 카드를 보내올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호롱불 아래 살았어도 도시 냄새가 풀풀 나는 크리스마스 씰에는 아련한 추억의 기억들이 묻어있다. 씰은 밀봉하거나 도장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다.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은 결핵 퇴치 기금 모금을 위해 크리스마스 때마다 발행되었다. 우편 요금과는 관련이 없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주고받는 우편물에 우표와 함께 붙여 기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1904년 덴마크의 우체국 직원이던 아이날 홀벨(Einar Hollbelle)이 처음 발행하였다고 한다. 산업 혁명 이후 결핵이 전 유럽에 만연했던 19세기 말, 덴마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많은 어린이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우체국 직원 아이날 홀벨은 연말에 쌓이는 크리스마스 우편물과 소포를 정리하면서 동전 한 닢짜리 씰을 우편물에 붙여 보내도록 한다면 판매되는 동전을 모아 많은 결핵 기금을 마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국왕인 크리스찬 9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마침내 1904년 12월 10일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한다.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1932년 12월 일제 강점기 때 캐나다 선교의사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처음으로 씰 운동을 시작했다.
홀은 1893년 11월 10일 당시 처음으로 평양에서 서양의학과 기독교를 전한 감리교 부부 선교사 의사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로제타 셔우드 홀 (Rosetta Sherwood Hall)을 부모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가난한 결핵환자들과 일반 서민들을 돌보고 깨우치려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캐나다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25년부터 해주 구세 병원에서 일하다가 1928년 해주 결핵요양원을 설립한다. 셔우드 홀은 1932년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면서 발행 동기를
첫째, 한국 사람들에게 결핵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둘째, 만인을 항결핵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 즉 씰 값을 싸게 하여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 모두 사도록 하고
셋째는 재정적 뒷받침을 너무나도 필요로 하는 결핵 퇴치사업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1932년 이후 1940년까지 9차례에 걸쳐 씰이 발행되지만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그는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강제로 추방되어 씰 발행도 중단되었다.
셔우드 홀은 1991년 4월 5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98세로 타계하였고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부모가 묻혀 있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해 9월 19일 역시 그곳에서 타계한 부인 메리언 홀(Marian Hall) 역시 같은 장소에 안장되었다.
해방 후 1949년 과거 해주에서 셔우드 홀을 도왔던 문창모 박사가 주동이 되어 한국복십자회에서 씰을 발행하였다.
1952년에는 한국기독의사회에서 씰을 발행하였으나,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범국민적인 성금 운동으로 된 것은 1953년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대한결핵협회는 매년 크리스마스 씰 판매 운동에 온 국민이 참여케 함으로서 결핵 퇴치 재원 모금운동으로 정착하게 된다.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인들이 한 해를 마감하는 아쉬움과 더불어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카드와 연하장을 사회관계망을 통해 보내온다. 마을 사람들에게 세상 소식을 가장 먼저 나르던 고향 우체부 아저씨의 크리스마스카드 배달 추억은 이제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하다.
정성스럽게 그린 카드를 봉투에 넣고 크리스마스 씰로 봉인한 다음 우편배달부 아저씨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기억도...... 윗마을 친구에게 전해줄 수 없냐는 말이 입술까지 매달렸지만 끝내 내뱉지 못했던 아쉬움도 아스라하다.
멀리 동녘에서부터 여명이 밝아오며 서서히 동살이 퍼진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겨울방학을 하고 크리스마스 씰을 받아 집으로 갈 때 요동치던 그 꿈같던 시간들을 되짚는다. 크리스마스 씰 도안 속 복십자가 전봇대인 줄 알았던 산골 소년도 이제는 그 멋진 그림이 가난한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라는 뜻인 줄 안다. 성탄절 인장을 사던 천진한 마음으로 병든 사람과 가난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할 세모(歲暮)다.<끝>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이덕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2.21 새삼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저는 지금도 복십자가
하늘나라로부터 복을 전해오는 복줄 복봇대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오영록 작성시간 25.12.22 그 푸근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속에 찾는 공허함 잘 감상하였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이덕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2.24 생활은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시절이었지요
연하장이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친구들 손에 살그머니 쥐어주던 그 풋풋함
그립습니다 -
작성자최수현 작성시간 25.12.24 예전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글 잘 읽고 갑니다.
즐거운 성탄절 되십시오. -
답댓글 작성자이덕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2.24 고맙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