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영의 시인탐방 5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 박형준시인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2년 2월호(2012, Febr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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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커피 향 가득한 홍대 앞 한 카페어서 박형준 시인을 만났다.
커피 한 잔에 첫 만남의 어색함이 이내 녹아내렸다.
사진 : 배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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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준(朴瑩浚) 시인
196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하고 현재 명지대와 동국대에서 강의 중이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구의 힘〉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 하련다』(1994) 『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1997)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2002) 『춤』(2005)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2011)가 있고, 산문집으로 『저녁의 무늬』(2003) 『아름다움에 허기지다』(2007)가 있다. 제15회 동서 문학상, 제10회 현대시학 작품상, 제 24회 소월시문학상, 웹진 시인광장 선정 제2회 '올해의 좋은시' 賞 , 제 1회 꿈과 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 김후영 시인
2006년 계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中.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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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영의 시인탐방 5 -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박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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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사람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머물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누구나 어느 한 시기는 행복하고 따듯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유년의 기억이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고착되어 거기 머물면서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승화시킨다.
내가 만난 박형준 시인은 유년과 고향에 집착한다. 그것은 그가 가진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그 기억을 혼자 누리려 하지 않고 나누고 싶어 한다. 그 나눔의 장을 펼친 것이 그의 시다.
그는 세상에 선뜻 발을 내딛지 않는다. 늘 창밖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인천의 수문통에서 세 살던 시절,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안방의 텔레비전을 훔쳐보던 시절부터 그의 앞에는 늘 창(窓)이 있다. 창은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다. 그 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은 고요하다. 이제 시인은 창을 열고 바라보기만 했던 세상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어 한다. 세상의 바람과 맞서고 싶어 한다. 그 창가에 서 있는 시인을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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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후영: 선생님 안녕하세요? 방학 중인데 요즘 무슨 일을 하면서 지내시나요?
□ 박형준: 뭐 다른 일 없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시간 강의 하고 있으니까 아이들 성적내고, 반성하고, 시를 써볼까 이 궁리 저 궁리 하고 있습니다.
■ 김후영: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20년 동안 왕성한 시작활동을 해 오신 흔적으로 다섯 권의 시집을 내셨네요. 평소 창작활동은 어떤 방법으로 하시는지요? 시가 안 써질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 박형준: 91년도에 등단해서 다섯 번째 시집을 내기까지 꾸준하게 썼던 것 같아요. 시집을 3년에서 5년 사이에 한권씩 낸 것 같고, 이번에는 6년 만에 냈고요. 보통은 일 년에 스무 편 남짓은 꼬박꼬박 썼던 것 같아요. 하여튼 주어진 거니까 열심히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요. 제가 특별하게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든지 경륜이 있다든지 이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항상 내 안에 뭐가 있는지 이십년 동안 열심히 들여다보는 훈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시를 썼고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는 행위라고 하는 것은 현재의 삶하고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문득 깨어나는 것도 있겠지만 자기 삶과의 연관 속에서 깨어난다고 저는 생각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자기 내부에 빠져드는 행위라고 하는 것은 현재 내 삶을 솟구치게 하기 위한 하나의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나름의 굉장한 노동이기도 하고요. 대개 우리들이 흔히 ‘필’ 받았다고 할 때 그 ‘필’을 저는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뭐냐면, 나한테 온 그런 것들, 영감이라면 영감일 수도 있고 환상이라면 환상일 수도 있을 그것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현실적인 구조를 거기에 부여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 김후영: 현실적인 구조라면……
□ 박형준: 이를테면 상상적인 원천 같은 것들이 흐를 수 있도록 작업을 해줘야 된다는 거죠. 시 쓰는 행위라고 하는 것이 자기한테 오는 어떤 순간들을 걸어 다니게 혹은 뛰어다니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추락이 있으면 추락의 순간이 다시 솟구침의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시인은 그 중간역할을 해줘야 되죠. 영감은 나하고 상관없이 올 수 있지만 나한테 온 그것이 정말 의미 있어지게 하려면 그것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줘야죠. 그래야지 하나의 시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네. (웃음)
■ 김후영: 최근에 나온 시집 중에서 “아버지 돌아가신/ 날 새 시집이 나왔다/(...)/ 관 내려갈 때 던져주었다”라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선생님 시에 아버님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님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으신지요?
□ 박형준: 제가 시골에서 전학을 왔는데 성장기에 부모님하고 같이 지내지를 못해서, 아마 시골이든지 아니면 도시에서 같이 살았다면 부모님에 대한 생활을 많이 알았겠죠. 농사짓는 분들이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육체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고요. 특히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냥 흘려보냈던 기억들이 소중하게 체험되었다고 할까요? 사실 저의 아버지는 일제 때 징용도 갔다 오신 분인데 별로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런데 부지런하셔서 마당에 나뭇잎 하나 떨어져 있는 것도 못 보셨고, 키도 굉장히 작달막하셨는데 지게에 아버지 키보다도 더 높이 나무를 해오시고 그러셨어요. 주어진 땅덩어리 조그만 것 밖에 없지만 아버지가 해 오신 일에서는 누구보다도 성실한 농부셨어요.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저도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다보니까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 저 자신을 좀 돌아보게 되고. 제가 쓰는 시라는 것이 아버지가 가꾸는 조그만 텃밭 정도에요.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마당에 나뭇잎 하나 떨어져 있는 것도 못 보시고 밭에 가서 배추라든지 고추 이런 것을 가꾸실 때도 풀 하나 없을 정도로 부지런 하셨어요. 제가 앞으로 써 나가야 할 시가 있다며 그런 것을 본받아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가 말씀이 없으셨으니까 어떻게 보면 침묵을 통해서 배운 것이 많죠. 삶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거죠.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가구의 힘」전문
■ 김후영: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가구의 힘」이 어머니 때문에 쓰게 된 시라고 하셨네요. 어머님이 시 쓰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 박형준: 글쎄요 어머님이 시 쓰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어머니는 아들이 시 쓰는 사람이니까 어머니도 시 쓰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글을 알아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셔서 글자도 혼자 깨치셨어요. 예전에 아들 집에 올라오시면 제가 말을 잘 안 듣기 때문에 집에 있는 온갖 종이에 어머니가 글씨를 써 놓고 가셨어요. 오셔서 해주신 수많은 이야기보다 떠나신 후에 집에 마분지 조각에 쓰여 있는 글씨가 오히려 저를 더 많이 교육 시킨 것 같아요. 저의 어머니는 여장부세요. 저의 집 식구들이 2남 6녀이고 제가 막내인데 거의 혼자 키우셨다고 할 수 있죠.
■ 김후영: 선생님은 유년의 삶과 가족에 대한 기억이 특별할 것 같습니다. 유년의 원체험이 선생님 시세계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선생님의 유년은 어떠셨나요? 선생님 시를 보니까 인천으로 이사 온 후의 이야기들도 많이 있던데요, 이사하기 전과 후는 어떠셨나요?
□ 박형준: 사실 행복하다는 느낌은 별로 없는데요, 유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상처를 통해서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는 시기인 것 같아요. 모든 첫 경험들이 다 그렇습니다마는 매우 강렬하고 하나의 색채 같은 걸로 다가오기도 하고, 어떤 원초성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단순히 돌아가야 할 따뜻한 공간으로서의, 자궁으로서의 유년도 있지만 상처를 통해서 삶이 어떤 식으로든 지속된다고 하는, 새로 시작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시기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들이 자라게 되면 굳어버리잖아요? 타성화에 젖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유년을 회복하려 하고, 유년을 회복하기만 하면 뭔가 폭발할 수가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유년이라고 하는 것은 저한테는 하나의 원체험이었던 같고, 거기에 가족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울타리 속에서는 보호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어른이 되도 피난처가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좀 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잠시 쉴 수 있는 바위나 댓돌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시에서 유년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죠.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유년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 대한 상처가 제일 처음 이루어지는 공간인 것 같고, 또 도시로 올라왔을 때도, 수문통 이런데서 사는 것도 저한테는 대단한 상처였거든요.
■ 김후영: 그렇겠죠. 부모를 떠나 살게 되셨으니.
□ 박형준: 부모님은 당연히 떠나야죠.
■ 김후영: 오학년에 전학하셨다고 했는데 오학년이면 부모를 떠나기에 너무 이른 나이 아닌가요?
□ 박형준: 오학년이면 다 알만한 나이죠. 옛날 오학년이면 정신적으로 이미 상당히 나이가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부모를 떠나야죠. 그런데 떠난 곳이 수문통이라고 하는 인천의 도시였는데 변두리예요. 그 밑에 공장도 굉장히 많고요. 거기가 매립한데예요. 그 밑이 예전엔 바다였는데 갯골이 흘러 다녀요.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수체구멍으로 서해바다가 올라옵니다.
■ 김후영: 집안으로요?
□ 박형준: 예, 그래서 아침에 학교 가려면 거기서 물 푸고 가야된다니까요.(웃음) 거짓말 더 보태면 물고기가 올라와요. 학교 갈 때도 바지 걷고 가거든요. 학교 가면 수업시간 시작하기 전에 물고기들이 먼저 와서 수업준비하고 그러거든요. 여름에 홍수 나고 이럴 때는 온 동네가 물에 거의 잠기죠. 그러니까 도시 올라와서도 마찬가지로 삶이라는 게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 김후영: 일종의 유학이잖아요?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 온 건데 누구랑 사신 거예요?
□ 박형준: 그때는 형, 누나들. 그렇게 살았죠.
■ 김후영: 5학년 때부터 홀로서기를 하셨네요?
□ 박형준: 예. 실패했습니다.(웃음)
■ 김후영: 선생님은 선생님의 시를 “상징주의와 자연주의 양쪽에서 서성”인다고 하셨던데. 선생님 시에서 상징주의가 무엇인지요?
□ 박형준: 저에게 자연주의라고 하는 의미는 그런 거예요. 좀 범박하게 얘기하면 인간들이 갖게 되는 칠정오욕이 있잖아요? 본능적인 것으로부터 시가 자유로울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뛰어 넘어서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적 감각을 연금술적인 시간 속으로 옮겨내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거죠. 이를테면 저에게는 변경될 수 없는 ‘불멸’ 같은 것을 얻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를 서성거린다는 말로 한 것입니다. 대개 시인들이라면 일상적인 의미로서의 기의를 완전히 벗어나서 자기의 사고라든지 혹은 감정 이런 것들이 완벽하게 성화된 경지에 오르기를 꿈꾸죠. 그런데 그것을 해낼만한 정신적인 강함 같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삶을 따듯하게 보듬어 안거나, 제가 시에서 늘 연민한다고 하는 소외된 사물이라든지 이런 것을 제대로 끌어 안을만한 서정의 폭 같은 것도 갖지 못한 존재가 저다 이런 거겠죠.
■ 김후영: 시인뿐만 아니라 사람이 다 그렇지 않나요? 완벽하지 않으니까 자기 승화를 온전히 이루어내기가 쉽지 않겠죠. 최근에『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라는 시집을 새로 발간하셨네요. 네 번째 시집이 나온 후로 6년 만인데요, 다른 시집들에 비해 두껍네요. 오랜만에 시집을 내시면서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셨거나 애착을 두신 부분이 있으신지요?
□ 박형준: 이 시를 쓰게 된 하나의 원동력이 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어요. 아버지의 죽음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는 과정들이 시로 쓰이고, 그걸 쓰면서 다른 시들도 같이 쓰게 됐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시를 쓰게 해 준 원동력이 돼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제 나름대로 시로 쓰면서 다른 시들도 써졌다는 것이 저한테는 각별한 느낌을 줘요. 앞으로도 저한테 사물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이 와줬으면 좋겠어요.
■ 김후영: ‘미당 시에 나타난 동물이미지’를 연구 하셨네요. 미당을 연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미당의 영향을 받으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박형준: 미당에게 영향을 받은 좋은 시인들이야 많죠. 미당이 가지고 있는 잠재영역이라든지 아니면 미당의 언어감각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계승하거나, 미당의 언어를 가지고 세상을 쟁기 날처럼 잘 가는 훌륭한 시인들이 많이 있는데 저는 물론 그 정도는 아니고요, 단지 미당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원초성 같은 것을 좋아해요. 미당의 언어를 보고 있으면 생땅 냄새를 맡는 것 같아요. 쟁기로 땅을 갈아엎었을 때 나는 그런 냄새. 어느 선생님께서 미당의 시를 그렇게 표현하신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런 것이 참 좋아요. 미당의 후기 시 같은 경우 점점 현실인식이 탈각됐다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미당은 매순간 삶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시를 썼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거기 보이는 영원주의 같은 것들이 현실과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뿐이지 사실 저는 미당의 시가 풍겨내고 있는 의미보다 매순간 만난 가파른 삶을 최적의 언어로 표현해냈다는 것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이 미당의 시에서는 동물성을 통해서 많이 발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쓰게 되었고, 또 원초적인 것들은 매혹으로 변환되는 것도 많잖아요?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 삶과 맞선다든지 삶을 이겨낸다든지 이런 것도 가지고 있지만 원초성은 그 자체로 매혹적이죠. 그래서 미당 시에서 동물들이 보여주는 낯섦과 매혹이 저한테는 큰 매력으로 느껴졌고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세계와 맞서지를 않으면 어떤 매혹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이미지라고 하는 것도 운동하는 삶의 하나의 결정체잖아요? 시인이 배워야 될 운동들이 있는데 그걸 미당에게서 보았고 그걸 제 나름의 작은 운동장에서 조금 실천해 본 것이 제 시라고 할 수 있죠.
■ 김후영: 특별히 미당 말고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시인들이 있으신가요?
□ 박형준: 시인들을 저는 근본적으로 다 좋아하는데요. 많이 좋아합니다. 보들레르로부터 박재삼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은 매순간에 흘러가는 삶 하나하나를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시는 분들인 것 같아요.
■ 김후영: 선생님이 선생님 시에 대해 ‘강물이 고향과 도시를 이어주는 것’이라고 했고 강물을 통해서 귀향의 본질을 규명 하고자 하셨잖아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영원한 휴식처는 가족이나 유년의 기억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서 보니까 고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선생님 시에서 고향이나 강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 박형준: 제가 시골에서도 살아봤고 도시에서도 살아봤잖아요? 저는 근본적으로 수동적이긴 하지만 삶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강물처럼.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가야된다고 생각해요. 마치 강물주변에 퇴적된 곳들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 정착지를 이루고 사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도 앞으로 부딪치면서 나아가야 그런 것들이 생기는 거죠.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행위가 어떻게 보면 근원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행위라고 저는 생각해요.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를 통해 어린 시절의 기뻤던 또는 슬펐던 어떤 한 순간이 내 앞에 잠시 현현하는 걸 느끼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들에게는 늘 고향적인 것이 필요하죠.
■ 김후영: 영원한 휴식처로서의 고향을 의미하는 거죠? 제가 선생님 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과거 회상에 대한 시들이 많다는 것이었는데요, 특별히 과거를 많이 회상하는 것도 시의 전략인가요?
□ 박형준: 박형준 : 간신히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 저는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스스로는 나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굉장히 나약한 것 같아요. 그래서 유년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한 토대가 제 안에 쌓여 있을 때 간신히, 가끔, 현실의 어떤 면과 만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제가 쓴 그런 유형의 시들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그렇지만 저도 제 감각에 의지해서 헤쳐 나가고 싶은 욕망 같은 것들을 갖고 있죠.
■ 김후영: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내시면서 “다 털어버리고 싶었다”이런 말씀도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다 털어버리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어요. 지금까지의 시 쓰기 방식을 털어버리고 다른 시 쓰기에 도전 하시려나 이런 생각도 했었는데, 털어버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 좀 해주세요.
□ 박형준: 홀가분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은 것 같아요. 저는 과거에 얽매어서 사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데 시적으로는 그 얽매여 살아가는 것에 대해 되도록이면 말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죠. 어떤 시인들 보면 자기 삶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 시인들이 있거든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웃음) 저도 그런 시인이 되보고 싶은데 이미 다 들통이 났으니 그건 하기 어렵겠지만, 다만 어찌 되었든 제 주변에 있는 것에 대해서 저는 한편으로는 부담감도 많이 갖고 있고요. 또 한편으로는 제 나름대로 뭔가 해보고 싶은 생각도 많이 갖고 있어요. 제 나름대로 이웃동네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를 쓰고 싶었어요. 물론 그것이 이웃 마을에 당도하기는 어렵겠지만.
■ 김후영: 독자는 시를 통해서 시인을 만나니까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을까요?
□ 박형준: 그런 점에서 보면 시는 유리병 편지죠.
■ 김후영: 유리병 편지요?
□ 박형준: 예, 많은 시인들이 그렇게 비유를 했습니다만, 누군가에게 띄워 놓은 거죠. 제가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해있는 건데, 유리병 편지를 바다에 띄웠다고 해서 그것이 건너 마을에 도착한다는 보장은 없죠. 그렇지만 카프카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하나의 부정적 초월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불완전연소랄까, 일차적으로는 제가 누군가를 향해 있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생각으로 씌어진 시가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부족함. 그렇지만 누군가를 향해 있기에는 언제나 미달인 제 시쓰기가 제 자신에게 위로를 줬다면 일단은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시 쓰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늘 연민에만 얽매여 있을 수는 없고요, 그러나 아무리 그것을 털어버린다고 하더라도 털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망설임과 의지가 뒤섞인 상태로서의 털어버림이라는 거죠. 이제는 그럴 정도의 미약한 힘은 생기지 않아나 싶기도 하고요. 언제나 수동적으로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의지해서 쓸 것이 아니라 한번쯤은 맨몸으로 내던져져 있는 상태에서, 보호처나 피난처도 없는 상황 속에 자기를 내던져보고 싶은 그런 의미로서의 털어버리고 싶은 것이지 새로운 시를 쓰겠다 이런 것은 아니에요. 이제까지는 어찌되었던 제 주변에는 아버지도 있었고 연로하시지만 어머니도 계시고 저를 보호해 주는 수많은 사물들이 있었는데 이제 거기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전문
■ 김후영: 평론가들이 선생님 시를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유년, 고향, 설화’ 이런 것들 중심으로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제가 보니까 간간히 연시도 많이 나오던데요.
□ 박형준: 예,(허허허)
■ 김후영: 연애 시는 어떻게 쓰셨는지 그것이 더 궁금하네요?(웃음)
□ 박형준: 상상력으로 쓰는 거죠.(웃음) 아주 조그마한 연애 사건을요, 막 상상해봅니다. 저한테 아주 사소한 연애감정 하나를 대단한 것이 될 때까지, 대단한 것이라고 해봤자 현실적으로 해보지 못한 연애를 상상으로 해보는 건데, 머릿속에서 실제가 될 때까지 헛짓을 해보는 거죠. 지금은 세대들이 쿨 해서 참 좋은데요, 저희 때만 하더라도 만나는 것이나 헤어지는 것이 힘들었잖아요? 사실 삶이라든지 연애라든지 그 자체로 보면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요. 시가 좋은 건 뭐냐면 그것을 행복으로 바꿔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궁상의 극치일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 가장 성스러워 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시이기 때문에 시 속의 연애가 그래서 실제 연애보다 더 행복한 거죠. 시 쓰는 것 중 하나가 그런 것 하고 만나고 싶어서, 그것을 해 낼 수 있는 장치가 시 밖에 없으니까 시를 쓰는 거죠.
■ 김후영: 이별도 있으셨죠? 대답하기 곤란한 사적인 질문을 자꾸만 하네요.(웃음)
□ 박형준: 물론 뭐 당연히 있죠. 시에서는 이별이나 만남이나 다 궁극적으로는 생산적인 것이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봐요.
■ 김후영: 선생님은 문학평론「우리시대의 ‘시적인 것’, 그리고 기억」에서 “ ‘낀 세대’는 선배시인들만큼 강력한 ‘아우라’도 부족하고, 후배세대에 비해 새로움도 많지 않으니 현장비평에서는 딱 외면받기 십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낀 세대’는 어떤 세대를 의미하는지요? 선생님은 나이 상으로 낀 세대라는 생각이 안 드는데요. 그리고 비평가와 시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 박형준: 결국 저한테 해당되는 이야기겠죠? 선배들 같은 경우에 보면 강력한 열정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시로 뭘 해볼 수 있었던 시대도 있었는데, 시로 ‘무엇’을 해볼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무엇’이라고 하는 의미를 시에서 지우려고 하잖아요? 그렇지만 저는 삶에는 분명히 하나의 ‘무엇’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설령 시와 병행될 수 없는 신념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도 굉장히 중요하죠. 시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고 어떤 때는 신념을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는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이데아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굉장히 소중한 거라고 생각해요. 낀 세대라고 한 의미는, 지금 세대들처럼 감각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르고, 또 앞 세대처럼 무엇에 대한 확고함 같은 것들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런 것에 대한 어정쩡함 그런 것을 말한 거고요.
비평가와 시인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시인하고, 사물이나 사람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 합니다. 시인이 사물이나 인간을 바라보고 나름으로 재해석 해내듯이 비평가역시도 시인이라고 하는 자연을 가지고 재해석해 내겠죠. 시 쓰는 사람들이 사물이나 사람을 재해석해 낼 때 자기 주관을 가지고 해내듯이 비평가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단지 시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이론의 종속물이 되지는 않겠죠. 마치 시인하고 사물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시인은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기억들하고 만날 수 있겠고, 또 사물은 시인을 통해서 마찬가지로 자기 기억의 어떤 측면을 만날 수가 있겠죠? 비평가나 시인의 관계도 창조적인 생산 행위가 되어야지 비평이 단순히 자기 이론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시가 있으면 곤란하겠죠, 그리고 시인 스스로가 직업적인 비평가하고는 다른 비평적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를 제대로 보려면 객관적인 시선 같은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내부를 분석해보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 김후영: 선생님의 시 쓰기를 평론가들은 “폐허에서 꿈꾸기” 또는 “기억의 힘”이거나 “설화의 공간 속에서 생의 의미를 깊게 탐구”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본에 반하는 시 쓰기”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를 살아내는 삶의 양식”이라고 했는데요,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 박형준: 제가 이런 어려운 것을 실천하면서 살수는 없고요. 궁극적으로 내 기억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남들 속에 있는 기억이나 슬픔 이런 것하고 만날 수 있도록 시를 통해서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바꾸어 내고 싶어요. 자본주의에 반하는 삶을 살려면 실천 행위가 필요한데, 제가 그런 것을 직접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에 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되도록 이면 시도 열심히 쓰고 그러는 것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방식이면서 반하는 방식이 되는 거죠.
■ 김후영: 『문학의 전설과 마주하다』는 가상인터뷰를 묶은 책인데요, 거기서 선생님은 ‘아르튀르 랭보’를 인터뷰 하셨네요. 랭보를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하면서 시작되는 인터뷰가 소설적으로 쓰여서 참 재미있던데요? 랭보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랭보를 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랭보의 「모음들」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표현방법이었는데 이 「모음들」을 현대시와 비교한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 박형준: 랭보를 선택한 것은 잡지에서 지정해 준 것이었고요. 랭보 같은 시인은 그야말로 극적인 삶을 살다간 시인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흥미를 느낀 것 중 하나는 랭보라고 하는 이 탁월한 소년이 시골에서 살았다는 것이죠. 중소도시쯤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이 친구의 꿈은 파리에 가서 시로서 성공하는 거잖아요? 그것이 일차적으로 저의 유년시절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누구나 시골은 다 떠나고 싶어 하잖아요?(웃음) 일단 그것이 흥미를 끌었고요. 다음은, 자기가 갖고 있는 감각으로 이 세상을 바꾸어 내고 싶어 했던 것, 그것이 랭보라고 하는 시인이 갖고 있었던 최고의 매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랭보의 시는 감각으로 바꾸어낸 미지의 세계들과 조우하는 것이죠. 랭보는 사십 전에 죽은 걸로 알고 있는데, 랭보의 매력은 삶이 어떤 식으로든 편안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랭보의 시를 읽다보면 삶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가 아니라,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저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보여주죠. 그런 점이 참 대단하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스스로 그것을 겪어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충격적인 사건에 가까운 거죠. 랭보라고 하는 시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랭보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고요.(웃음), 역설적으로 랭보라고 하는 시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겸손함이죠. 어떻게 보면 이런 시인들이 있으므로 해서 자기 그릇이 얼마만한 크기인지도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동시에 이런 시인들이 멀게도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사실 저는 혼자 있으면 이런 시인들 하고 많이 대화를 해요. 대화한다는 것이 뭐 중얼거린다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해봐요. 어떻게 이 시인이 이런 시를 썼을까.
랭보가 만나는 삶의 모든 감각들은 기존의 이론이나 방식으로는 불가해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의 객관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써낸 것이 시죠. 랭보는 그런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착란이 필요하다고 얘길 하거든요.
■ 김후영: 감각적 착란이요?
□ 박형준: 이 말은 다르게 얘기하면 내가 지금 겪은 하나의 순간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죠. 감각적인 착란은 다르게 얘기하면 굉장히 객관적인 것이죠. 자기가 느꼈던 것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법들이고, 그게 아마 「모음들」이라든지 이런 걸로 구축됐다고 볼 수가 있겠죠. 우리 시에도 이런 형식적인 실험들은 계속 있어왔는데, 요는 자기가 느낀 것을 표현하는 것이겠죠? 자기가 느낀 것을 표현해야지 배운 것을 표현해서는 안 되겠죠. 흉내를 내는 것하고 자기 삶을 실천하는 방식으로서 하나의 착란상태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죠.
■ 김후영: 예전에는 지식층들이 문학을 많이 했고 또 시대를 선도하는 역할도 했었는데 요즘에는 모두 어느 정도의 지식들을 가지고 있잖아요? 선생님은 현대에 문학이 어떤 기능이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 박형준: 뭐, 기능하는 것이 이제 갈수록 없어지겠죠?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 시를 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죠. 내가 쓰는 시 한 구절이 미지의 독자의 가슴에 울림을 주면 저는 그 사람과 만나는 거잖아요. 그런 통신행위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하면 전 그 자체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굳이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라고 하는 문학사적 정의로서의 의미보다는 미지의 존재하고 작가가 포개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하나의 영역으로서 시가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 김후영: 혹시 문학을 예술로 보시나요?
□ 박형준: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다른데요.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이기 보다는 하나의 생체 리듬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우리 심장 소리나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의식하면 들리지만 대개는 의식하지 않을 땐 들을 수 없는 것이죠.
■ 김후영: 표현이 멋지네요. 『아름다움에 허기지다』라는 산문집도 내셨는데요, 선생님은 “아름다움에 허기져서” 시를 쓰신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 박형준: 미를 여러 가지로 정의내릴 수 있겠죠. 제가 어렸을 때 쓴 시 중에 「몽상가」라고 하는 시가 있는데요, 아주 자그마한 컵 속에 온 우주가 담길 수 있는 것들이 저 아래 많은데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 마치 필름에 빛이 들어가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게 되죠.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것 같아요. 남들한테 보여주게 되면 부끄러워서 숨어버리고 싶은 하잘 것 없는 것이 제 안에서는 얼마든지 풍성히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과 만날 수 있는 여지들을 제가 많이 갖고 있으면 좋겠는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허기진다는 의미이고, 또 누구에게나 다 아름다움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요.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도저히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오래 자기 속에 파묻어둘 수밖에 없어요. 세상과 대화도 하고 남하고 만나기도 해야 되는데 그런 것이 갈수록 사라져가요. 말은 점점 잘하고 있지만 사람들하고 만날 수 있는 통로를 상실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요.
■ 김후영: 고향 하늘에 별이 빛나는지 보려고 하늘 올려보다 낙상해서 팔을 다치셨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어떻게 보면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하나의 행위일 수 있겠네요.
□ 박형준: 뭐 좋게 이야기하면 그렇죠.(웃음) 그런데 고향도 복수하는 것 같습니다. 고향에게 제가 해준 것이 뭐가 있겠어요, 어떻게 보면 고향이 저한테 해 준 것이 더 많죠. 그런데 실제로 가서 만나는 고향은 시 속에 그리는 고향하고는 많이 다르죠. 이미 다 도시화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하나의 복수로서 저의 팔을 부러뜨린 것이 아닌가. 또 때로는 고향이 어느 순간 굉장히 냉혹해지고, 어떻게든지 멍들었음을, 그리고 병듦으로부터 자기가 벗어나야 됨을 알려 주기 위해서 복수해요. 그런 복수들하고 만날 때 뭔가 깨닫는 바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베일 속의 고향만을 노래해선 안 되고 베일을 확 걷어 젖히고 진짜 병든 어머니나 고향이나 침묵과도 시인은 만나야 되는 건데요. 그래서 이제 그런 것들하고도 좀 싸워보고 싶고 직접 대면해보고 싶다는 거죠. 이제까지 세상 살아오면서 늘 커튼 자락 너머로 어른대는 고향이라든지, 도시에 대해 많이 얘기했고 또 거기서 상당히 매혹을 느낀 것도 사실이죠. 때로는 그 너울거리는 영사막을 확 제쳐버리고 맨얼굴을 보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 있죠. 단지 그럴 자신이 없는 것이 문제인 거죠.
■ 김후영: 선생님 시를 보면 항상 구멍이라든지,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 같아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항상 앞에 뭔가 가려져 있는 느낌이 들어요.
□ 박형준: 그걸 어느 순간에 좀 치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죠.
■ 김후영: "내 영혼이 투명하기보다는 진흙투성이"라는 표현도 하셨던데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 하시나요?
□ 박형준: 저는 사람의 내면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데, 한편으로는 내면이 아름답지 않아야 표면이 아름답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면이 아름답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호수에 비유 하자면, 호수의 밑바닥에는 진흙도 있고 생물들도 살고 있죠. 그 진흙이 물고기도 키우고 물풀들도 흔들리게 하잖아요? 그래야 물이 맑아지고 그 위에 아름다운 백조도 떠다니고 연인들도 있고.
■ 김후영: “시인은 우주적으로 쓸쓸하다”고 하셨는데 선생님이 쓸쓸하다고 느끼시는 때는 언제인가요?
□ 박형준: 서정 시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왜 항상 떨어져 있어야 되는지 그런 것이 좀 역설적인 것 같아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거친 호흡으로 서로 만나고 그래야 되는데 사람이나 사물하고 만나려면 꼭 떨어져 있어야 되니 쓸쓸한 거죠.
새벽마다 불이야 하는 소리를 들었다
밤새도록 비가 퍼부었다
공사장 한 귀퉁이에 물웅덩이가
고였다, 나뭇잎처럼 죽은 새가 떠 있다
아침 공기를 마시며
웅덩이가 아직 낯선 온기로 떤다
여행 가방을 손에 든 채
물웅덩이를 바라본다
공사장 건너편 개척교회 후문 지하에서
주여 하는 소리가 울려나온다
새벽마다 주여 소리를 왜 불이야로 들었을까
이 동네에 방화범이 사는가, 싶어도
이제껏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밤마다 짐승이 목덜미에 올라탄 것처럼
나는 피곤과 살았다
땅 밑에서 벌어지는 불놀이,
주님은 비 그친 땅 밑 불 속에 있다
물에 푹 젖은
새의 목덜미가 숟가락처럼
웅덩이에 박혀서
짓다 만 집의 그늘을 마신다
웅덩이 안쪽에서 불이 떨린다
「파도」 전문
■ 김후영: 새벽마다 교회에서 기도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주여’라는 큰 소리가 ‘불이야’라는 말로 들린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상상력이 굉장히 재미있었거든요. 이런 상상력이 시편 곳곳에 숨어 있어요. 상상력도 훈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인가요?
□ 박형준: 저는 뭔가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이나 그림을 잘 그린다든지 이런 것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어렸을 때 빛도 안 들어오는 산동네에 살던 땐데, 낮에 집에 혼자 있는데 새로 산 시계가 궁금해서 그것을 분해해버렸죠. 다 뜯어냈는데 어떻게 결합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 김후영: 혼나셨겠네요.
□ 박형준: 엄청 혼났겠죠. 마치 이런 것도 그런 것과 비슷해요. 설마하니 ‘주여’라는 소리를 처음부터 제가 ‘불이야’로 들었겠습니까? 매일 옆에서 들려오는 소린데요. 어느 순간 그것이 불이야로 들렸던 것은 뭐냐면 그런 거죠. 종교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주’라는 말 속에는 세계의 원리가 들어있죠. 특히 새벽에 주를 찾는 것은 얼마나 큰 갈망이겠어요. 다급함이죠. 희한하게도 마치 그 주라는 말을 분해했더니 불이야로 들리는 거예요. 마치 시계를 분해하고 나서 조립할 수 없었던 것 같은 다급함. ‘불이야’라는 말이 갖고 있는 엉뚱함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시계를 분해를 했는데 조립을 할 수가 없으니까 불난 것처럼 소년은 당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주’라는 말을 ‘불이야’로 들었다는 것은 나름대로는 시계를 분해하고 시계의 원리를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는 점, 혹은 그것을 조립할 수 있는 힘이 조금은 생겼다는 뜻이겠죠. 시에서 그와 같은 상상력이 나오는 것은 시계 뜯어놓고 당혹해하거나, 엉뚱해하거나, 이거 어떻게 해야 되지?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주’가 ‘불’이 되는 것처럼 엉뚱하고 재미도 있고. 묘하게도 거기에서 놀이 같은 것이 발생하고 쾌감 같은 것들이 생겨나죠. 저는 시 쓰는 행위를 통해서 세계의 원리 하나쯤은 골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골몰이나 몰두는 수습이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나름 진지한 건데, 그래서 제게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원리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스스로 수습해내지 못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용어 일수도 있고요.
■ 김후영: 선생님 시를 보면서 생활의 동선이 참 단조로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특별히 좋아하는 운동이나 취미가 있으신가요?
□ 박형준: 예, 단조롭죠. 동선이라고 하는 것은 방, 학교 그렇죠. 특별하게 무슨 취미생활이라든지 이런 것은 없는데 요즘에는 야구 좀 하고요. 대개는 별로 그렇게 활동적이거나 그러지는 못하고요, 또 사람들하고 섞이는 법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단조로운 것이 저한테는 시 쓰는 힘이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 김후영: 하시는 일 중에 가장 보람되거나 흥미롭게 여기시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박형준: 학생들 가르치는 것은 참 좋은데요, 글을 가르친다는 것은 왠지 미안한 느낌도 들고. 개인적으로 보람되고 흥미로운 거라고 하면 할 줄 아는 것이 시 쓰는 것 밖에 없어서 좋은 시를 쓰면 보람이 되고 그렇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도 있겠지만 뭔가를 발견하게 되면 마음이 확장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죠.
■ 김후영: 학생들한테 미안한 것은 왜 그런가요?
□ 박형준: 시라고 하는 것이 환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물질화되는 것이 아닌데, 시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세상살이를 가르치는 거잖아요? 제 스스로가 세상을 잘 못 사는 사람인데 학생들한테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특히 환산이 안 되는 걸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학생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학생들한테 배우는 것도 있고요.
■ 김후영: 좋아하는 책이나 학생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 또는 시 쓰기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책 몇 가지 소개 해주실 수 있을까요?
□ 박형준: 글쎄요. 요즘에는 다들 알아서 책을 잘 읽기 때문에 특별하게 권하거나 그렇지는 않고요, 읽어봤으면 하는 책은 좀 소박한 책들인데요. 만남의 순간들을 기록한 책들, 만남의 의미나 이런 것 보다는 순간들을 기록한 책을 많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책 읽으면서 대개 의미나 추상화 작업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냥 드라마처럼, 기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처럼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내 경험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는 책 이런 것 보지 말고 내가 남한테 뭔가를 조금이라도 줄 수 있을 때, 씨앗하나라도 줄 수 있을 때 울림도 생기는 것이니까, 남한테 나 자신을 공감시키려고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울림이 되는 시를 썼으면 좋겠어요.
공중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
말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저곳」 전문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 김후영: 아직 미혼이신데 결혼을 미루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 박형준: 특별한 이유는 없고요, 결혼 한다는 것은 사람이 된다는 걸 의미하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을 때 하려고요.(하하)
■ 김후영: 혹시 신년계획 세우셨어요? 올 해 계획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 박형준: 소망이 있다면 시를 좀 한 열편 정도 써보고 싶고요. 기회가 되면 장가도 가야 되겠고, 그것은 매년 계획 중에 하나였고요.(웃음)
■ 김후영: 혹시 만나고 있는 분은 계시나요?
□ 박형준: 예. 또 내년에는 산문집도 하나 펴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여기저기 써낸 것들 중 편하게 쓴 것들로 해서 한 권쯤 묶었으면 하고요, 무엇보다도 긴 글을 한 번 써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논문이라도 상관없고 시론이어도 좋고 두어 개 쯤 써 봤으면 싶어요. 시집 내고 한동안 쉬었어요. 이십년 동안 그래도 일일 일수는 못하더라도 한 달에 한편씩은 꼬박꼬박 썼었는데, 이제 자신을 조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중언부언으로서의 시도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은 시가 반복적이면 안 된다고 그러는데 뭐 사는 것이 다 반복적인 것이죠. 그래서 중언부언 하든 어쨌든 쓰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은 자기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름대로 보여주는 행위인데 한 몇 개월 한 편도 안 썼더니 이제 그런 것 더 안 써도 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구두끈을 조일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방학 때 글쓰기 위해서 여행을 다닌다든지 이런 것은 없더라도 방안에서 그런 정도의 어떤 실험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 김후영: 중요한 계획들을 많이 가지고 계시네요.
□ 박형준: 그렇죠. 대단히 욕심이 많은 거죠.
■ 김후영: 모두 다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결혼할 때 꼭 불러주세요.(웃음)
박형준 시인을 만나러 약속 장소로 가면서, 사진으로만 보던 시인을 알아볼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사진과 똑같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키가 멀쑥이 큰 시인은 그의 시처럼 소박하면서 진솔했다. 간간히 형식적인 절차에 대해서 시니컬해지기도 하지만 그 또한 소박하다. 삶과 시가 일치함을 그를 만나보고 알았다. 소란한 카페 한 쪽에서 조근 조근 담소를 나눈 따뜻한 시간이었다. 인터뷰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생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간간히 눈발이 흩뿌리는 오후였다.
<출처: 시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