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루판, 자유를 향한 지하수로 (地下水路)
뜨겁다. 정말 뜨겁다.
최고 단열재라는 두꺼운 흙벽돌로 지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고 일어나 밖에 나오면 열기가 빈틈없이 달라붙는다. 마치 이슬람여인의 차도르가 온몸을 감싸듯, 뜨거움은 그렇게 달라붙는다. 하루 중 최저온도인 아침 - 해 뜨기 전 온도가 35도. 7.8월 평균온도 47도를 맞추자면 한낮은 55도를 웃돌아야 한다.
연한 핏빛을 띤 화염산은 불타고 있었다. 저 불타는 산을 삼장법사인들 어찌 넘을 수 있었을까, 손오공이 구해온 芭蕉煽이 있었기 망정이지. 실제 7세기 중엽, 현장스님은 이 화염산을 넘기전 高昌古城에서 얼마간 쉬면서 몸을 추 수린 다음 넘었다고 한다. 남북으로 길게 누운 화염산 밑으론 잘 닥은 도로가 있고 이 도로에서 보면 다 보이는 것이 화염산 인데 구태여 입장료 내고 안에 들어갈 필요 없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고집스럽게 여기까지 왔는데, 입장료 아껴?”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터! 하는 마음으로 들어간 화염산 조망대, 그렇다! 조망대에서 보면 산 밑까지 가는 길이 희미하다. 낙타 두어 마리가 관광객을 등에 얹었는지 저 멀리서 아른거린다. 이 땡 빛에 누가 걸어서 가랴만,
가만있자! 그렇다면 한번 걸어서 가봐? 어름으로 왕복3km는 될 듯. 그렇다면 중무장을 하여야 한다. 챙 넓은 모자. 목덜미 감싸는 수건. 팔 토시. 장갑, 휴대용 작은 배낭엔 물 두병....., 아차, 선그라스는 필수! 마치 전투에 임하는 군인이 중무장 하듯 하고 나선 길은, 작은 자갈과 흙, 모래가 뒤 석인 고비지대라 빠른 발걸음을 허용치 않으나 밖에서 기다리는 일행을 생각하면 늦출 수도 없다.
뜨겁다. 정말 뜨겁다. 그러나 덥지는 않다. 연 강우량 16mm. 습기란 생명과 바꿀 만큼 귀하다. 작은 배낭을 메었고 결코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일행이 기다린다는 초조감으로 걸었으나 윗옷이 등에 달라붙지 않는다. 아래 역시 같다. 속바지.겉바지 조차도 다리에 휘감기지 않는다. 우리네와 같이 땀 닦을 일은 없다. 목에도, 팔에도.... 땀 흐르지 안 는다. 물 귀한 것만큼이나 귀한 구름 한줌 없는 하늘에선 착오 없이 빛살을 퍼붓고 있다. 뜨겁게, 뜨겁게...
그러나 걸어야 한다. 저 산 밑까지는! 걸어가서 무언가 사진 한 장 박아야 하지 않겠나? 짐작보단 먼 길, 그렇게 걸어서 산 밑 도착. 산은 서서히 시작 되는게 아니고 수평에서 갑자기 가파르게 오른다. 그런데, 어? 저게 뭐지?
“해발 0 m.” 수준점이다, 아하! 그래... 알겠다. 사방이 높은 산인, 盆地의 도시 투루판은 평균고도가 5m 내외. 열기가 빠져 나가지 못하여 기온이 이리 높은 것을.
남북으로 길게 누운 화염산 남쪽, 산허리 조금 터진 길을 비집고 돌아들면 산의 딋편- 화염산의 동쪽이다. 거기엔 다시 돌과. 모래. 흙이 뒤석인 고비산이 있고 화염산과 고비산 사이 가파른 언덕에 숨은 듯이 있는 것이 화염산 千佛洞! 어떻게 만들었는가는 중요 하지 않다. 왜 이 자리에, 여기에 만들 마음을 먹었을까? 그리고 이 자리는 어떻게 찾았을까? 또한 그들은 무엇을 갈구하며 천불 부처님을 모셨을까?
사람 사는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가는 길목이라면 이해되지만, 하기야 돈황의 막고굴과 천불동, 난주의 병룡사 석굴, 쿠처 천불동.... 모두가 이해되지 않는 자리에 있으니, 여기라서 특별히 더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석굴의 부처님은 異敎徒들에 의하여 훼손 되고, 약탈당하고, 더러는 세월의 힘과 무관심의 합작으로 씻겨 지고.....모를 일이다. 부처님의 慈悲는 그 마저 용서 하시는가? 그렇다면 부처님! 힘들게 만든 그들의 원력은 어찌 하실 런지요? 凡夫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불타고 있는 산에 오르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뒤돌아서면 高昌古城. 交河고성과 함께 1,600년을 이겨온 옛모습은 – 지금 UFO를 타고 어느 은하계 한 점에 와있는가? 아무리 비오지 않는다 하드라도, 새벽하늘에선 이슬조차도 없단 말인가! 이슬만 맞아도 저 흙기둥이 1,600년을 온전히 견뎌 내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 많던 佛像은 어디가고 佛塔을 세웠던 토대와 지붕 없는 건물의 벽면만, 아직도 건재한 城壁과 함께 기이한 모습으로 낯선 탐방객을 맞이한다. 古蹟地마다 흔한 낙타도, 탐방용 무개차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없는 것이 아니라 이글거리는 해 볕 아래 누가 나돌아 다니겠는가! 모두 그늘로 자취를 감춰 버리고 용광로 고성을 오롯이 우리일행만 돌아다닌다. 아랍 부호들이 극장을 통째 전세 내어 혼자서 감상 한다더니, 마치 우리가 그 모양 세다.
타는 해 볕 아래 풀 한포기 없다. 없는 것이 당연한줄 아는데, 저건 뭐? 완벽한 보호색을 띤도마뱀이다. 반갑다. 살아 숨 쉬면서 동행 한다니 반갑다. 영하 20도 까지 내려가는 겨울엔 저 흙담이 훌륭한 잠자리가 되겠지만, 당장은 뭘 먹고 살지? 재빠르게 기어가는 모습을 보면 낯선 이방인 때문인가, 먹이를 포착 하였는가?
7세기 후반 천축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스님도 여기까지 오느라 氣盡하셨는가? 고창고성에서 쉬시고 여비까지 받아 가든 길을 계속 하였는데 돌아 올 때는 독립국의 지위가 없어지고 唐나라에 합병 되었다고 하니 榮辱의 무상함이 새삼스럽다.
阿斯塔那 古墳郡 (아사탑나고분군, 아스타나구무현)은 세월의 흐름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 3,800년전의 遺骸. 주검 앞에서 누군들 경견 하지 안으리!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罪스럽다. 널길은 비스듬히 경사저서 10여m, 내려서면 지하 3m 지점에 널방이 있고 한가운데 內外분이 나란히 누워 있다. 몽골계 남성과 서양인 여성, 그들 말로는 海洋人. 郡이라니 많은 유해가 발굴 되었을 거고, 대부분 우루무치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는데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유해가 지금 보고 있는 곳이라 한다. 수분만 빠저 나가고 유골은 하나 뒤틀림 없이 그대로다. 무릎의 잔주름까지. 貴族墳이니 지금 눈앞의 유해도 당시는 떵떵거리던 유력자 였으리라만 지금은 한낱 탐방객의 예의 없는 눈앞에 누워있을 지언정.. 권력도,명예도,재산도.... 결국은 다 저렇게 되는것을! 살아 숨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남은 날이라도 보다 겸손하게 살다 죽어야지 - 마음먹지만 졸부가 언제... 작심 삼일인데.
뜨겁다. 정말 뜨겁다. 빼꼼히 들어난 콧날이 해 볕에 읶는듯 하다. 도대체 비오지 않는 이곳에 까마득 옛 사람들은 어떻게 생명을 부지 해 왔을까?
해발 4,000 이상의 고산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다지만, 만년설은 끊임없이 물을 흘러 보내 준다지만, 천산산맥의 끝자락은 마을에서 25km, 焉敢生心! 물길을 어떻게 마을까지 끌어 온단 말인가? 혹, 한줄기 물이 흘려 온다 한들 마을까지 오기나 할까? 중간에 다 말라 버릴 것을. 눈 녹은 물이야 끊임없이 흘러내리지만 地表水는 말라버리고 오직 지하수만 있는 땅. 그러나 산 생명은 살아야 한다. 어떻게?
地下水脈은 고요히, 평탄하게 흐르지 않는다. 지하 깊숙이 들어갔다가 지표 쪽으로 오르기도, 좌우로 요동치기도 한다. 해설판에 그렇게 표시 되어있다. 지표와 가장 가까운 수맥이 지하 80m. 2,000년전 그 옛사람들은 이 지점을 어떻게 알았을까? 지표와 가장 가깝다는 곳에서 수직으로 파고 들어가 좌우로 연결하고 500m 쯤 떨어진 곳에서 다시 수직으로, 또 좌우로 연결....이렇게 하여 동굴을 만들고 25km를 끌어 마을로 물을 가져 왔다니,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다. 물은 아래로 흐르도록 수평을 잘 맞추었고 마지막은 지하 10m에서 끝이다. 이렇게 끌어온 물을 다시 지상으로 퍼내어 沃土를 만들고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에게 공급 하였으리.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은 이런 지하 물길이 여덟 개나 되며 서로 합치기도 하고 홀로 물길을 이루기도 한다는데 합친 전부의 길이가 3,000km. 동굴의 높이는 쪼그려 앉은키 보다 조금 높다. 전시장에서는 바로 그 지하 10m 까지 내려가서 지금도 흐르는 물을 마실 수는 있다지만, 선인들의 땀을 생각하면 쉽게 넘어 갈까? 이른바 坑八井박물관. 중국 고대 3대공사중의 하나. 처절한 생명의 흔적이다. 타지마할,이집트 피라밋,병마용갱...처럼 한 개인의 어리석은 욕망충족을 위한 시설이 아니고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명일념의 흔적이다. 敬畏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함께한 동행인에게 물었다.
“어때요? 대단하지요?”
“그럼요! 어떻게 저런 공사를? 지금 하려해도 힘 들 텐데 ...” 사실 그럴 것이 기계에 익숙한 현사람 들로서는 蓋覆식이 아닌 굴착 식으로 저 높이의 터널을 뚫기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경탄을 금치 못하는 그와 다시 나눈 대화.
“왜 저렇게 힘든 공사를 하였을까? 물 있는데 가서 살면 될 텐데 ...”
“물 있는데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그들도 어쩔 수 없어 파겠지요?”
“함께 살자 하면 안 되나?”
“누가 함께 살도록 두나? 노예 삼을려고 하겠지?”
“그렇다면, 이 물길의 이름을 [자유를 향한 지하 물길] 이라 붙여도 되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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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희 작성시간 15.09.24 오랜여정 수고하셨습니다. 중국의 여름은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무더위가 극심기도 하지만 그늘을 찾느라 가리고 마시고 고생하던 기억들이 남아있는데 그처럼 햇볕뜨거운 악조건하에서 탐험가투혼으로 긴 여정을 무사히 종료하신걸 감축드립니다. 아쉬운 점은, 기상악조건 설명에 가려져 여행중 보고 겪은 해피했던 스토리가 빠진것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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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9.25 어허! 읽으셨네! 評주시어 감사 합니다. 흔히 기행문 하면, 어디가서 무엇 보았는데 어떻드라..., 어디는 어떻게 갔는데... 주로 이런 류 입니다. 일률적인 그런 글이 싫어 현장에서의 느낌 위주로 써 보았습니다. 그러자니, 자연 현장을 설명 하여야 하고 현장설명후 관자의 느낌을 적어 보았습니다. 소중한 평을 주시어 다시 한번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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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암 작성시간 15.09.25 다녀오셨군요. 글까지 올리시고... 더운 열기를 뚫고 화염산을 걸어 천불동 까지 걸으셨다니, 그 고집
또한 누가 말리겠어요. 수고 많았습니다. 느낌도 좋고 다 좋은데 좀 지루한 느낌을 ....? ㅎㅎㅎ 즐거운 한가위 되시요. -
답댓글 작성자김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9.26 소암 선생님이 보셨군요! 어느 누구의 댓글 보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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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행운 - 김태진 작성시간 15.10.22 한없이 겸손해지는 여행지을 다녀오신걸 진심으로 경외를 표 합니다.
좋은 추억 오랜시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