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월령 강지화
청령포의 강물은 유리처럼 맑았다. 그러나 그 투명한 물결 위에는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린 왕 단종의 고독이 강물에 스며들어, 지금도 그곳을 찾는 이들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영화 속 단종의 비극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적인 고독과 사랑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발자취를 따라 영월로 향했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편은 절벽으로 막힌, 섬 같은 공간이다. 영월에서 청령포까지의 강폭은 불과 백 미터 남짓이지만, 어린 단종에게는 끝없는 바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해 질 무렵 노산대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단종의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니, 휘둘러 퍼런 강물만 보이고 강너머 앞으로는 첩첩산중 절벽과 산들뿐이었다. 그 속에서 단종은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웠을까.
관음송에 올라앉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울었다는 단종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또한 가슴이 먹먹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의 가지는 마치 단종의 흐느낌을 기억하는 듯했고, 단종 어소 옆 노송은 허리를 굽혀 어린 왕을 품에 안듯 서 있었다. 청령포는 적막했지만 동시에 위로를 품은 공간이었다.
장릉에 이르러서는 더욱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단종의 무덤은 단아하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그 단아함이 오히려 외로움을 크게 전해주었다. 무덤 아래의 홍살문은 성스러움을 알렸지만, 그 붉은 빛은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울린 것은 엄흥도의 충절이었다. 왕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리라’라는 엄명이 내며 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장례를 치른 그의 행동은 권력보다 사람의 도리를 택한 사랑이었다. 정려각은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고, 그곳은 부모가 자식을 끝까지 품는 사랑의 증거였다.
영화 속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단종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난 어미,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서거한 아비. 또래들과 뛰놀며 행복해야 할 나이에 단종은 부모도, 벗도 없는 유배지에 홀로 남겨졌다. 그 나약하고 여린 모습이 엄흥도와 마을 주민의 눈에는 얼마나 애처롭고 안타까웠을까. 식음을 전폐하던 단종이 그들의 따뜻한 밥상에 마음을 열던 순간, 그 속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있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 백성이 어린 왕을 품어주었다. 결국, 단종은 짧은 생애 속에서도 그 사랑 덕분에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은 냉혹하여 결국엔 세조의 사약이 내려졌다. 단종은 역적의 손이 아닌 엄흥도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길 원했다. 단종이 창틈으로 목에 맨 줄을 내밀자, 그 줄을 엄흥도가 당기며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하는 장면에서는 단종도 울고, 엄흥도도 울고, 나도 울었다. 아비가 된 심정으로 지극 정성을 다해 모시고 섬겨 겨우 왕위의 존엄을 지키게 된 어린 단종을, 이번에는 본인의 손으로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해야 했을 때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울림이었다. 며칠을 떠돌며 강물 위에 버려진 단종의 주검을 끌어안으며 “추우시지요. 이제 그만 따뜻한 데로 나갑시다.”라고 속삭이는 엄흥도의 말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마지막 인사였다.
역사에서는 권력의 욕심으로 단종을 없앴지만, 사랑은 그를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단종은 더는 비극의 어린 왕이 아니라, 엄흥도의 다함 없는 사랑과 충정으로 존엄을 지킨 왕으로서 우리 곁에 살아 있다. 단종과 엄흥도와의 만남은 그 어떤 만남보다 가슴 따듯한 인연이다. 청령포의 강물은 여전히 맑지만, 그 속에는 사랑의 기억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단종의 영혼이 따스하게 영월을 감싸고 있음이 마음 깊이 느껴진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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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地平 작성시간 26.06.19 원문에서 결말 부분이 장소의 이야기로 되어있어서 어색했는데, 잘 바꾸었습니다.
다만, 첫 문단이 도착하여 본 모습으로 시작하고, 말미에 영월로 향했다 라는 표현이 거슬립니다.
<나는 그 발자취를 따라 영월로 향했다.> 이 문장은 영화 이야기와 함께 시작부분에 넣든지 아니면 없어도 좋지 않나 싶습니다.
영월이라는 지역, 청령포라는 곳에 서린 단종의 이야기와 영화의 장면이 묘사되어 잘 읽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단종의 영혼이 따스하게 영월을 감싸고 있음이 마음 깊이 느껴진다.>는 사족처럼 느껴져 굳이 없는 것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또한, 마지막을 단종과 엄흥도와의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 오히려 이야기를 너무 좁힌 듯한 느낌입니다.
단종에 대한 연민 사랑은 당시의 민초들과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 모두가 가지는 감정이지 않나 싶습니다. -
작성자월령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9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고민하고 퇴고해 보겠습니다^ ^ -
작성자이운우 작성시간 26.06.19 좋아요. 무슨 상탓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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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월령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9 청주 시의회 소식지에 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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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속리산여우 작성시간 26.06.21 글의 감성이 짧아요. 좀 길어도 좋을듯...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잘 알고 있는데.
작가만의 새로운 표현과 시선이 많이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