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한두기의 추억.
제주를 사랑했지만, 유난히 마음이 오래 머물던 곳은 동한두기였다. 이름부터 바람이 묻어나는 곳. 여름 낮이 길게 늘어지는 하지날이면, 그곳은 낯술과 낮술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지금 마셔도 괜찮아”라고 제주가 먼저 말해주는 것 같은 날. 햇빛은 아직 높고, 바다는 이미 느슨해져서, 시간의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지면 풍경은 조용히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저 멀리 한치 낚는 배들의 불빛이 바다 위에 점점이 떠오르고, 그 불빛들이 물결에 비쳐 흔들릴 때마다, 바다는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반짝였다. 그 앞에서 나는 좋은 친구와 소주를 마셨다. 취하지도 않는 소주였다. 아니, 어쩌면 취해도 괜찮은 나이였는데 취할 이유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밤새 우리는 미래를 설계했다. 특별한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밤들은 “우린 잘 될 거야”라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젊음은 그렇게 근거 없이도 용감했지. 계획은 거창했고, 웃음은 자주 터졌고, 새벽은 느리게 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우리는 미래를 만든 게 아니라, 미래를 믿는 연습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병을 진단받고, 나는 너무 빠르게 제주를 떠나왔다. 섬을 떠나는 속도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의 속도 같아서, 뒤돌아볼 틈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동한두기는 ‘추억’이라기보다 ‘향수’에 가깝다. 손에 잡히지 않는 곳. 가까이 가면 오히려 더 멀어지는 곳. 나는 그곳을 기억한다기보다, 그곳에 남겨진 내 시간을 그리워한다.
이번 휴직기간에 다시 한 번 제주를 가고 싶다. 예날 같은 마음은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바다를 봐도 같은 속도로 걸을 수 없을 때가 있고, 같은 소주를 마셔도 같은 무게로 웃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도 괜찮다. 제주가 주는 건 ‘복원’이 아니라 ‘회복’일지도 모르니까.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나를 데리고 그 바다에 다시 서는 것.
동한두기에서 나는 아마 예전처럼 밤새 미래를 설계하진 못할 것이다. 대신 아주 작은 미래 하나만 정할 것 같다. “오늘은 여기까지 걷자.” “저 불빛을 보고 숨을 길게 내쉬자.” “해가 지는 걸 끝까지 보자.” 지금의 나는 거창한 설계보다, 무너지지 않는 하루를 더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그건, 생각해보면 더 성숙한 미래다.
해가 지면, 다시 저 멀리 한치 배의 불빛이 바다를 비출 것이다. 그 불빛은 예전과 똑같이 흔들릴 것이고, 나는 그 흔들림을 보며 조용히 생각하겠지.
꿈은 아득해졌지만, 바다는 아직 여기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제주가 보고 싶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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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경나무.(1999)부산73. 작성시간 26.02.08 마음을 내려놓아보세요.해답이 보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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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weetLord(보호자) 작성시간 26.02.08 칼잡이님 덕분에, 새로운 지명을 알아갑니다.
문학작품 같은 에세이. 모든게 그리움이던 시절, 그 청춘을 거슬러, 내 맘의 안식처 같은 곳. 제게는 어디였나, 저희에겐 어떤 의미였나 돌아봅니다…
언제고 제주를 가게 될 때. 칼잡이님의 그 곳, 동한두기도 걸어볼께요.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그 곳이 저희에겐 어떤 추억으로 남아줄까요…?
휴가에 꼭 다시한번 다녀오셔요… 그 걸음 응원합니다! -
작성자엘라1953女2014울산 작성시간 26.02.08 칼잡이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하루하루를 더 소중히 여기는 성숙한 미래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마리에(보호자)72 작성시간 26.02.09 엘라님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시지요.
엘라님을 자주 뵐수 있어서 너무 기쁘네요 ㅎㅎ 칼잡이님의 글이 엘라님을 카페로 자주 부르실듯 합니다 ㅎㅎ 늘 건강하시고 온라인이지만,오래오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엘라1953女2014울산 작성시간 26.02.10 마리에(보호자)72 기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