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팔정도의 논리

정견(sammā-diṭṭhi) 이야기 ①

작성자아위자|작성시간22.01.19|조회수269 목록 댓글 16

정견(sammā-diṭṭhi) 이야기 ①

 

 

‘法(dhamma)에 대한 진리’가 ‘사성제(四聖諦)’다. 말하자면 ....... ‘모든 法(dhamma)은 苦(dukkha)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심의식의 고짜라(gocara)인 法(dhamma)이 ‘모두 苦(dukkha)’라면 ....... 善法(kusalā dhammā, 중생들에게 이익이 되는 법)도 苦(dukkha)라는 지적인가? ...........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사성제(四聖諦, =明)도 法(dhamma)이다. 비록 선법(善法)이고 진리이지만 .......... 집착이라는 ‘不善法(akusalā dhammā)’이 개입하면 <苦(dukkha)>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 ‘사성제라고 부르는 法(dhamma)’이다.[☜땟목의 비유]

 

---------------------------

 

불교의 수행자는 ‘심의식’을 공부하거나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심의식의 고짜라(gocara)인 法(dhamma)’을 공부하거나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 진정으로 심각한 문제는 ....... 그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은 이후에 발생한다.

 

선가(禪家)에서는 “금가루가 비록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눈에 넣으면 병이 된다.”라는 지적을 통하여 ‘땟목의 비유’를 설명한다. ...... 진정으로 심각한 문제는 ....... 그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은 이후에 발생한다. ‘심의식’이라는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 <식과 명색의 호연연기 ‘관계’>를 지니고 있는 <識(viññāṇa)>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깨달음’은 도리어 병이 된다.[☜micchā-vimutti(삿된 해탈)]

 

여기에서 ......... ‘심, 의, 般若(paññā, 慧)’[☜'심의식' 상황을 유지하면 안된다는 말]라는 상황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 처음부터 그러한 상황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Pubbe kho Susīma dhammaṭṭhitiñāṇaṃ pacchā nibbāṇe ñāṇanti.[SN. vol.2. p.124.] 
쑤시마여, 法住智(dhammaṭṭhitiñāṇa, 法의 상태에 대한 智)가 먼저이고 涅槃智(nibbāṇe ñāṇa, 열반에 관한 智)는 나중이다.

 

‘법주지’라는 <‘法(dhamma)에 대한 智[=法智]’가 ‘과거의 수행자나 미래의 수행자와 현재의 수행자’에게 공통된 智>라는 ‘앎과 봄’을 먼저 지녀야만 ....... 般若(paññā, 慧)에 의한 ‘열반지’가 가능해 진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점을 ‘아위자’식으로 설명한 것이 <智집멸도[법주지]→苦집멸도{열반지}>의 순서이다. 이 순서를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하면 ........

 

법주지 ------ 아빈냐(abhiññā, 洞察智)라는 行을 파악한 智.[☜팔정도 단계, 智집멸도 단계
열반지 ------ 아빈냐로써 ‘法(dhamma)에 대한 위빠사나(vi-passanā, 分觀)’.[☜3전12행 단계, 苦집멸도 단계]

 

여기에서 .......... <法(dhamma)에 대한 위빠사나(vi-passanā, 分觀)>라는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요약하면 ... <行(saṅkhāra)을 法(dhamma)으로 보아서[=集하거나 滅하는 대상으로 보아서] ........ 즉 ‘일체행[=dhamma]은 無常, →일체행[=dhamma]은 苦(dukkha), →일체법[=모든 dhamma]은 無我, →涅槃寂靜’의 순서>로 ‘자신과는 분리하여 觀(passanā)’하는 것이 위빠사나다. 이러한 것이 <위빠사나와 열반의 관계>이다.

 

※참고로 <行(saṅkhāra)과 관련된 수행이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ā, 止)’이고 法(dhamma)에 관련된 수행이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bhāvanā, 分觀)’>이다. 따라서 <반야의 영역(paññā-vacara)을 개발하는 것은 ‘위빠사나’>이다.

 

※참고로 <‘외입처인 法(dhamma)으로부터’ 我의 획득(atta-paṭilābhā)>과 관련한 경문을 소개한다.

‘Tayo kho 'me Poṭṭhapāda atta-paṭilābhā, oḷāriko atta-paṭilābho, manomayo atta-paṭilābho, arūpo atta-paṭilābho. Katamo ca Poṭṭhāpāda oḷāriko atta-paṭilābho? Rūpī cātummahābhūtiko kabalīkārāhāra-bhakkho, ayaṃ oḷāriko atta-paṭilābho. Katamo manomayo atta-paṭilābho? Rūpī manomayo sabbaṅga-paccaṅgī ahīnindriyo, ayaṃ manomayo atta-paṭilābho. Katamo ca arūpo atta-paṭilābho? Arūpī saññāmayo, ayaṃ arūpo atta-paṭilābho. [DN. vol.1. p.195] 
뽓타빠다여, 세 가지 我의 획득(atta-paṭilābhā)이 있다. <①거친 我의 획득, ②意成된 我의 획득, ③無色인 我의 획득>이다. 뽓타빠다여, 무엇이 ‘거친 我의 획득’인가? 色을 지니고, 四大所造이며, 物質食을 하며 사는 것, 이것이 ‘거친 我의 획득’이다. 무엇이 ‘意成된 我의 획득’인가? 色을 지니고, 意成이며, 모든 수족이 갖추어졌고, 根이 결여되지 않은 것, 이것이 ‘意成된 我의 획득’이다. 무엇이 ‘無色인 我의 획득’인가? 色을 지니지 않고, 想成인 것, 이것이 ‘無色인 我의 획득’이다.

 

<위빠사나와 열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 는 ......... <위빠사나와 반야의 관계>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사성제'는 '원시불교 최고 수준의 반야'이기 때문이다.

 

Dve'me bhikkhave dhammā vijjābhāgiyā. Katame dve? Samatho ca vipassanā ca. Samatho bhikkhave bhāvito kam attham anubhoti? Cittaṃ bhāvīyati. Cittaṃ bhāvitaṃ kaṃ atthaṃ anubhoti? Yo rāgo so pahīyati. Vipassanā bhikkhave bhāvitā kam atthaṃ anubhoti? Paññā bhāvīyati. Paññā bhāvitā kam atthaṃ anubhoti? Yā avijjā sā pahīyati; rāgupakkiliṭṭhaṃ vā bhikkhave cittaṃ na vimuccati avijjupakkiliṭṭhā vā paññā na bhāvīyati. Imā kho bhikkhave rāgavirāgā cetovimutti avijjāvirāgā paññāvimuttī ti.[AN.1, p.61]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은 明(vijjā)의 일부이다. 무엇이 둘인가? samatha(止)와 vipassanā(觀)이다. 비구들이여, 사마타를 닦으면 어떠한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心이 개발된다. 心이 개발되면 어떠한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貪(rāga)이 제거된다. 비구들이여, 위빠사나를 닦으면 어떠한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paññā(반야, 慧)가 개발된다. 반야가 개발되면 어떠한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無明이 제거된다; 貪(rāga)에 오염된 心은 해탈하지 못하고, 無明에 오염된 반야는 개발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貪에서 벗어나 心解脫이 있고 무명에서 離貪함으로부터 慧解脫이 있다.

 

위 경문에서 거론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도움을 받아 심해탈과 혜해탈을 이루어 머무는 <正見(sammā-diṭṭhi)>이 바로 ‘무학의 正見’[=다쌍가(dasaṅga, 열 가지)에서의 정견, =苦집멸도]이다. 반면에 ‘학인의 正見’은 아땅가(aṭṭhaṅga, 여덟 가지)에서의 정견으로 智집멸도이며 ‘올바른 作意(yoniso manasikāra)’의 도움을 받는다.

 

위와 같은 <正見의 스펙트럼>은 다른 덕목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아땅가(aṭṭhaṅga, 여덟 가지)는 ‘계정혜’로 구분할 수 있다.] 단지 무학[=아라한]에게는 <무학의 ‘계정혜’에서 正智(sammā-ñāṇa)와 正解脫(sammā-vimutti)이 추가>되는 것뿐이다.

 

결국 .......... 우리에게 ‘보여 지고 있는 法에서(=diṭṭh’ eva dhamme, 見法에서)’[☜혹은 ‘sandiṭṭhiko dhammo(現法에서, 지금 여기에서,)] 위 모든 수행을 하라는 말씀. 특히 ........... 사성제를 갖추고서 ’보라!‘는 말씀. 그러한 見(diṭṭhi)이 正見(sammā-diṭṭhi).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혜정 | 작성시간 22.01.22 고맙습니다
  • 작성자아위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1.22 오늘 본 ..... <오래된 '동영상'> ........... 감동!

    https://www.youtube.com/watch?v=zHgcG2HWFus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첨부된 유튜브 동영상 동영상
  • 작성자이크벨 | 작성시간 22.01.25 대단한 법문입니다. 주신 문장 하나하나 곱씹어 보고 있지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불교를 수학공식처럼 착착 들어맞게 법문을 펼치는 분은 아위자 선생님이 최초일 듯...........
  • 작성자이크벨 | 작성시간 22.01.25 심해탈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인, 부동심해탈은 아라한의 해탈인데,
    이 부동심해탈도 혜해탈이 전제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작성자이크벨 | 작성시간 22.01.25 한편, 심해탈과 혜해탈의 관계에서
    심해탈을 한다고 혜해탈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겠죠.
    그럼, 혜해탈을 성취하면, 심해탈이 자동으로 따라오나요?

    혜해탈과 양면해탈의 구분.....이게 무척 궁금하네요.
    불교에서 혜해탈은 사선정의 기초위에 성취되므로 혜해탈에 색계사선의 심해탈도 정도는 따라오는거 같습니다.
    불교에서 양면해탈은 혜해탈에 더해 구차제정을 모두 성취할 때 쓰는 용어라고 보면 될까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