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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끝나지 않은 랠리 (하)

작성자도리곰|작성시간17.12.15|조회수223 목록 댓글 15
# 정파가 뭐길래

아침 7시 출근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비록 기상 후 20분 안에 해치우는 출근 준비였지만 셔틀버스 좌석에 앉아 스르륵 눈을 감기 전까진 그래도 나름 생기발랄한 신입사원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래 봐야 로션 몇 방울 찍어 바른 탐크루봉 같은 얼굴이었지만.
40분 안팎의 운행 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앞쪽부터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외모에 신경 꽤나 써서 출근길 남정네들 가슴앓이의 여주인공이 될 법한, 혹은 전생에 우주를 구한 남자의 신부가 되고도 남음 직한, 미스코리아 뺨 때리고 이제 막 서둘러 출근하는듯한 아무리 새침하고 도시적인 우아함을 풍기는 단정한 여자일지라도 버스에서 내릴 땐 예외 없이 하는 행동이 있다. 눌린 뒷머리 기 살리기.
퇴근길 버스에서는 그나마 선택의 여지가 있다. 귀가냐 혹은 약속이 있느냐에 따라 뒷머리의 기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으니.
출퇴근길에서 매일 2시간 반을 버렸다. 그중 8할은 대부분 꿈속을 헤매는 시간이었다. 구내식당 밥이 싸고 맛있다는 같지 않은 이유까지 들먹이며 정신승리의 자세로 회사에 충성하니 다른 유희가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 무료했다.

하늘이 굽어살피셨는지 여자 친구가 나타났다. 덜 무료했다.
하늘이 한눈을 팔았는지 헤어졌다. 인생무상이었다.
회사생활은 슬슬 힘들어지고 재미도 없고 목표의식도 희미해졌다.
회사를 그만뒀다. 통쾌, 무심, 근심의 삼박자가 번갈아 가며 춤을 췄다.

삼박자에 놀아나던 어느 날 집 앞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탁구장이 눈에 띄었다.
두근두근.

퇴사 후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의 폭풍전야를 틈타, 라켓을 쥔 컨트리 보이시절 이래 처음으로 레쓴 탁구에 도전했다. 정파로의 입문!

‘그래, 인생 길지. 언젠가 우연히 반장을 만나게 되면.... 흐흐흐.’

근거 없는 자신감이 미소를 타고 파동이 되어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딱 한 달이었다. 정파 체험의 시간은 그렇게나 짧게 막을 내렸다.

반장을 만나서는 아니 된다.
아직은 아니다.
몇 번의 동창회 기별에도 뒷머리 기 살리던 전 신입사원은 응답하지 않았다.


# 승부는 뒷전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 탁구를 시작했다는데 재미있다고 난리다. 몇 번은 흘려듣다가 그래도 모르니 공수표 하나는 날려 놨다. 조금 더 배우고 나면 한 게임 신청하라고. 아미 시절의 감각과 정파로 지낸 한 달간의 체험에 살짝 기대어 보면 도무지 질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

그런데 아뿔싸.
정파의 맛을 보고 난 뒤 이미 12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음을 잊고 있었다.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대결의 장이 마침내 성사되었다.
역시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탁구장은 있었다. 관심이 생기면 신기하게도 대상이 보인다.

펜홀더 라켓이 참 낯설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번 대결의 순간은 컨트리 보이의 자존심이 30여 년 만에 소환되는 일생일대의 승부처다. 라켓을 만지작만지막 거리며 최적의 그립을 찾아냈다. 그러나 승부욕에 불타던 마음과는 다르게 또렷하게 들리는 경쾌한 타구음과 흰 공의 빠른 움직임은 그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오래된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랬다.
일생일대의 승부는 이기고 지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날은 살찐 탐크루봉이 띄엄띄엄 연명해 왔던 탁구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 순간이다.

‘그래, 이거다. 이거였지. 바로 이거야!’

2015년 4월의 봄은 그렇게 생동감 있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내 잠들었던 땅에서 새싹을 피워내는 ‘잔인한 힘’은 탐크루봉이기도 했다가 ‘도리곰’이기도 했던 그를 탁구의 세계로 사정없이 내몰고 있었다.


# 뭣이 중헌디?

탁구장에 간다고 갔는데 잘못 찾아간 게 확실하다.

‘어디가 끝이지? 작고 하얀 건 분명히 ‘알’이렸다? 그런데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인간? 곰?’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전투적으로 알을 낳고 있는 닭들의 모습이 충격적이자 장관이다.
탁구에 재입문한 뒤 인간의 형상을 제법 갖추게 된 곰은 양계장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곰이 닭에게 끝까지 밀려서야 되겠는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다. 하지만 닭에게 밀린 곰의 꼴이 다소 처량하다.

한 마리 닭이 곰의 언어를 구사한다.

“앗! 영호 형, 오랜만이에요. 진짜 오랜만이다. 형.”

마치 한국인이 있을까 싶은 머나먼 이국땅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지막한 한국말을 또렷이 인식할 때처럼 곰의 귀는 진돗개 귀가 되어 쫑긋해졌다.

“정말 오랜만이네. 여기서 보니 참 반갑고.”

“형, 지금 여긴 그냥 가만히 있으면 탁구 못 쳐요. 여기서 심판 보고 들어오세요.”

“아이고, 고맙네. 알겠어. 한 게임 해야지”

2016년 6월 30일 목요일. (하필 4050 모임이 있던 날)
핑탁에서의 첫걸음은 그렇게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들어 매며 시작되었다.

꽤나 오래전 정파에 처음으로 입문한 그 때 이후로 비교적 최근에 다시금 정파의 맛을 본적이 있긴 하다. 셰이크핸드 전형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정파로의 재입문은 2015년 늦여름이었다.
셰이크핸드 전형으로 바꾸게 된 이유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두 가지만 꼽자면 변화를 추구하기에 늦은 건 아니라는 생각과, 셰이크핸드 전형의 백핸드를 구사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아뿔싸. 포핸드만 두 달 배우다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참으로 정파와는 인연이 없나 보다.
오랜 세월 동안 모으고 모아 고작 3개월 동안 정파에 새끼발가락 한 개를 슬그머니 담가봤다고 해서 뼈대 있는 가문의 곰이 된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게 곰은 자기 공간에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때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초심자라 할지라도 기본기가 튼튼한 동호인이 탁구장에 넘쳐나고 어딜 가든 고수가 즐비하다.

컨트리 보이의 자존심이 훗날 아미의 날개가 되고, 탁구를 재발견했던 탐크루봉의 정파 탐험은 셰이크핸드로의 전향점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성장에 대한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을 게다.
도리곰으로 불리는 지금도 여전히 성장에 대한 욕심이 있다.
그런데 공을 주우러 왔다 갔다 할 때나 게임에서 져서 잠시 마음을 추스려야 하는 그 짧은 순간에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뭣이 중헌디?’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러자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울림이 대답한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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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도리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2.16 오늘 즐겁게 탁구 쳤습니다. 덕분에 더 많이 웃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작은거인 | 작성시간 17.12.17 도리곰 고수와의 겜 넘 잼있어유~ㅎㅎㅎ
    맘대로 받아보는 작은공 정말 친하고싶은 내 칭구입니당.ㅎㅎ
  • 작성자랭보 | 작성시간 17.12.17 탁구 잘치지,매너도 성격도 좋지,말도 이쁘게 하지 어디 하나 버릴데가 없는 영호씨가 글까지 소설가보다도 더 잘 쓰지...
    딸이 있다면 사위삼고 싶어^^
  • 답댓글 작성자꼬맹이^^ | 작성시간 17.12.17 헉~~~사위 삼기엔 이미 늦었고
    곰은 딸이 하나 있고
    랭보님은 아들 둘 있어
    아쉬운대로 사돈을 생각해 봤으나
    곰의 딸이 초등2라 나이차이가
    쉽지않아 이것도 거시기 해서리...
    그쪽으론 그렇고 핑에서
    서로 바라보고 씩~웃으며 쌔리는
    사이가 좋을듯 하옵니다 ㅋㅋㅋ
    랭보님도 탁구 잘 칠거고..ㅋ(잘치고)
    성격도 순한 양이라 좋구..
    말도 이쁘게 하시고..
    글도 잘 쓰시고..
    한 미소 하시니 딱~~이옵니다^^
  • 답댓글 작성자도리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2.18 저의 단면만 보셔서 그럴 겁니다. ^^;
    여튼 저와 자주 한 게임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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