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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블로그]명문 부호 아들,국군포로의 슬픈 최후1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19.03.13|조회수861 목록 댓글 11

울프독의 War History

명문 부호 아들이었던 국군 포로의 슬픈 최후[1]

 

 

 

 

 

이 글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집안 머슴 출신 북한군 군관이 가하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호남 명문 부호 가문 육군 중위의 안타까운 최후를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 본 한 참전 원로 분의 증언을 기록한 것이다..

 

작년 이 블로그에서 월남전 최고의 활약을 한 재구대대 대대장을 역임했던 박경석 장군이 소대장 때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었지만 그래도 인간미가 있었던 북한군 사단장 전문섭의 배려로 풀려났던 일화에 대한 글을 올렸었다.

 

 

박경석 장군 – 연대장 시절의 모습

 

1950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한 박경석 소위는 입교 한 달도 안되어 6.25를 맞았다. 단 세 발의 M1총 사격을 해보고 포천 전선에 투입된 이 생도 2기생은 86명 전사의 대참사를 당했다.

 

큰 피해를 입은 생도 2기 육사생도들은 그 후 동래에 새로 설치한 육군 종합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1950년10월, 이들 전원은 창설된 9사단에 배속되었다. 신설 사단으로서 아직도 엉성했던 9사단은 1950년12월 말, 남한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 10사단을 소탕하는 작전에 동원되었다.

 

소대장 박소위는 혹한의 야간에 무지한 대대장이 내린 1077고지의 북한군을 공격하라는 주먹구구식 공격 명령을 실행하다가 오히려 적의 반격에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다행히 잔인한 포로 학살 행위가 없어 박소위는 평창군 북쪽의 북한군 10사단 사령부로 후송되어 한달 정도 억류생활을 하였다.

 

박경석 장군이 소대장으로 겪었던 북한군 10사단의 남한 침투는 국군 전사에서정밀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전투였으나 그 전사적 가치가 큰 전투였다.

 

1950년12월은 중공군의 공세로 전면 후퇴한 유엔군과 국군은 미처 전선을 정리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중공군에 엎혀서 남하하던 북한군 2군단장 최현은 휘하 10사단장 전문섭에게 전선을 돌파해서 남한으로 침투하라고 명령했었다.

 

상당히 유능했던 북한군 소장 전문섭은 전사단장 이방남으로부터 지휘권을 이어받자 - 숙천의 제 2 민청 훈련소[신병훈련소]훈련 병력으로 급조 된 - 약체 10사단을 단련시켜서 군기 강한 부대로 만들었으나 사단 병력 크기는 불과 4천명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1950년 12월 22일 양구 쪽에서 대담하게 침투를 개시해서 불과 사나흘 후에 남쪽으로 200km 떨어진 평창까지 들어왔다.

북한군 10사단장 전문섭-대장까지 승진


침투 개시일은 12월 11일 설이 있다. 그러나 중공군이 1950년 12월 31일, 서울 점령을 목표로 한 3차 전역을 발령했던 사실로 보아 전문섭의 남하가 국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조공 목적으로 보여서 12월 22일 설을 채택한다.


박경석 장군의 증언으로 북한군 10사단 사령부는 평창군 평창읍 다수리에서 정지해서 여기저기 흩어진 촌가들에 본부를 설치하고 사단 주력들을 계속 남하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 정통 전사만 읽어서는 알 수가 없었던 내용이었다.

평창군 평창읍 다수리- 박경석 장군은 앞에 흐르던 강을 뚜렷이 기억한다.

북한군 10사단은 경상북도 북쪽까지 침투하며 여러 파괴행위를 했는데 이의 난데없는 북한군 후방 침투에 놀란 유엔군은 장진호에서 철수한 미 해병대와 미육군 187공정단, 국군 2사단과 전투 경찰까지 동원한 근 5만명의 부대로서 이를 토벌해야 했었다.

 

문경에서 북한 10사단의 주력이 국군 1개개 대대를 공격했다가 참패하기는 했지만 이들 10사단은 안동까지 남하하며 국군과 유엔군을 흔드는 작전을 계속했었다.

 

북한군 10사단은 2월 초에 불과 1,000명만 살아서 북으로 복귀하였다.

보급이 형편없어서 대형 전과는 못 올렸으나 병력 분산의 목표는잘 달성하였다.

 

말한대로 이 전사는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사지만 북한에서는 크게 선전이 되어있다.

북한군 10사단이 침투했던 강원도 양구-평창과 경북 문경-안동

10사단장 전문섭은 감일성의 졸개 출신 북한군 사단장 답지 않게 국군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다. 박경석 소위는 한 촌가에서 머무르며 북한군 간부들과 자유롭게 지나다가 북한군 10사단이 북으로 철수할 때 석방되어 남한으로 돌아왔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린다.

엉망진창인 전투에서 박소위의 직속 상관인 이태극이라는 무능한 중대장은 도망가버리고 대대는 거의 와해되었다. 10사단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국군 장교들은 세 명으로서 박소위와 그의 동기인 박준승 소위는 북한군 10사단이 북으로 후퇴할 때 석방되어 복귀하였다.

 

그러나 한 명, 패배했던 대대의 작전과장 즉 S-3장인 현영직 중위는돌아오지 못했다. 포로생활 중에 당한 수모를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냥 참고 버티었으면 다른 전우들과 같이 석방되어 부대로 귀대 할 수가 있었다. 수많은 장병들이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자결했던 일은 있었기에 국방사에서 그냥 지나 갈 수도 있는 작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모욕을 참지 못하고 전우들 곁에서 자결을 택한 현영직 중위의 배경에 여러가지로 돌아 볼 그 시대의 특수한 사연들이 있었다.

6.25 전쟁 중인 9월 28일 광주 형무소에서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현준호씨

현영직 중위는 호남의 명문 부호 가정의 아들이었다. 바로 호남 지방의 최초 민족 은행인 호남은행을 설립했었고 간척 사업으로 일군 270만평의 엄청난 농장을 소유했던 현준호씨의 아들이었다.

 

현준호씨는 전남 영암의 부호의 아들이었고 일본 메이지 대학을 다닌 인텔리였다.

현준호씨는 민족 의식이 강했었고 설립한 호남은행에서도 조선어만 쓰도록 했고 일본인들에게는 대출을 해주지 않았었다. 교육 기관 창립에 기부도 많이 했었다.

 

김성수 선생이나 송진우 선생등 민족 인사와도 교류했었던 현준호씨는 그러나 당시 일제가 강압했던 친일의 길을 걸어서 현재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것이 유감이다.

 

현준호 선생의 부인 김희정 여사는 경기여자고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동경 미술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보기 드문 지식인 부부는 자식복도 다복해서 무려 6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북한 공산 정권이 이 집안에 비극을 몰아주었다.

현준호씨는 아프신 아버님을 두고 도망갈 수가 없다고 공산 치하에서 숨어 지내다가 체포되어 학살당했다. 제일 큰 아들 현영익씨도 국회 의사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전쟁을 만나 광주에 피난왔다가 아버지와 함께 공산군에게 희생당했다.

 

현영직 중위는 둘째 아들이었으나 미혼의 몸으로 전투에 나서서 목숨을 잃었다.

집안의 3 부자가 다 공산 침략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셋째 아들인 현영원씨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인재로서 전쟁 발발 때 한국은행 도쿄의 지사에 가있었다. 덕분에 현영원씨는 집안이 결딴난 참화를 피해서 그 후 기업인으로 성장한다.

 

그는 현대상선의 사장을 지냈는데 그의 따님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셋째 아들 정몽헌씨와 결혼해서 사돈을 맺게 되었다. 한때 현대상선의 사장이었으며 현재 현대 엘리베이터의 회장인 현정은씨다.

현영직 중위의 조카 현정은씨

현영직 중위도 생존했으면 집안 배경만으로도 인생이 괜찮게 풀려나갔을 가능성이 컸었다. 그런 그가 장교가 되어 전선에 투입된 과정은 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현영직 중위는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에 군에 소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현영직 중위는 장교지만 육군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지금은 낯선 단어가 된 호국군 사관 학교 출신이다.

 

호국군 : 6.25 전쟁 전 1년 미만 존재하던 국방 예비군 조직이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1949년 1월, 미국 주방위군과 같은 호국군이 창설되었다가 그 해 8월에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해 12월에 더 크고 조직적인 대한청년단 중심의 청년 방위대가 설치되었다.

 

호국군은 각 연대에 배속되었고 간부들은 용산에 있는 호국군 사관학교에서 6주간 훈련을 받고 임관하여 생업에 종사하며 정기적으로 군에서 훈련을 받았다.

 

호국군 사관학교는 말이 사관학교지 그저 신병훈련소나 다름없는 단기 훈련 과정이었다. 1949년 3월에 개소하여 8월에 폐쇄한 이 교육 기관에서 4기까지 약 1,000명의 호국군 장교들을 배출하였다. 북한군 침공에 이들 중 600여명이 재소집되어 전선에서 싸웠다.

 

청년 방위대도 태릉의 육군 사관학교에서 역시 6주 교육을 받은 2기의 간부를 배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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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진격 이대용 장군의 말씀에 의하면 호국군은 헬로 모자라는 개리슨 햇 모양의 군모를 썼었으나 방위대의 소위들은 현역과 꼭 같은 군복을 착용했었다.

춘천 주둔 6사단 7연대에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으러 들어왔었던 방위 소위들은 거의 춘천 각 중고등학교 체육 선생들이라고 했었다. 이들이 춘천대첩에 큰 기여를 했던 춘천 옥산포와 봉의산 진지 구축에 역할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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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군 간부들은 일본군 출신 경력자들이 많았었고 다 생업이 있었다.

부잣집 아들인 현영직 중위가 왜 호국군 간부가 되었는지는 궁금할 것이다.

 

호국군이 설치되었을 때는 지원병 제도였는데 같은 해 12월에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현영직 중위가 징병제가 실시되기 전에 미리 이를 내다보고 이왕 군에 갈 바에는 호국군 간부가 되자고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추측을 할 만하게 하는 분이 있었다.

단지 6 주 코스의 훈련을 받고 장교로 임관했던 호국군 간부 중에서도 6.25 전쟁 때 참전해서 직업군인의 길에 들어서서 나중에 육군대장까지 되었던 박노영 장군[1930년 2월 8일 ~ 2012년 1월 30일]이다.

 

영어를 아주 잘하던 그는 한미 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하고1981년 퇴역, 외교관이 되어 주대만 대사와 주로마 교황청 대사까지 지냈었다. 그 분의 집안도 괜찮은 집안이었었다.

박노영 장군- 그의 이력에 예현 출신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호국군 출신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 사실을 볼 때 부잣집 아들 현영직 중위가 호국군에 몸을 담은 것은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라 비슷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가 간다.

 

말한대로 박경석 소위는 전투에서 북한군의 수류탄 투척에 정신을 잃고 전장에 그냥 유기되었다가 북한군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가마니가 깔린 토굴의 북한군 응급 구호실에서 상처를 치료받고 기력을 회복한 뒤에 사단 사령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 그 곳에서 역시 포로가 되어있던현영직 중위를 만났다.


[출처] 명문 부호 아들이었던 국군 포로의 슬픈 최후 -1-|작성자 동고동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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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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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Taehun Jun | 작성시간 19.03.21 1951년 1월경....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침투한 10사단 사단장이 < 북한측 자료를 근거>로 전문섭이라면,
    김일성 빨치산 계열을 영웅으로 날조된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이 됩니다. < 객관적 자료>에 의한 파악이
    필요합니다. 일본육전사연구회의 <한국전쟁>에는...당시 포로로 잡힌 북한군 장교의 증언으로 10사단장
    이 이방남으로 나와 있습니다. < 이방남이 팔로군> 출신이라 나중에 숙청을 당한 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북한의 자료는 날조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적인 공산주의자는 <팔로군 출신에는 더러 있지만, 김일성
    빨치산 무리들에게는 전혀 거리가 먼 집단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3.28 그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다수리의 인민군들은 인간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내가 찬 야광시계도 '좋다'고 하면서 뺏지 않았고 두달 치 육군소위 봉급 비닐 지갑도 건들지 않았어요.
    신기하게도 우리 두 박 소위에게는 깍듯이 '해방군관 동무'라고 부르며 경칭을 썼어요.
  • 답댓글 작성자울프독 | 작성시간 19.04.02 이방남은 전 사단장으로서 무능했고 사단도 숙천 훈련소 병사들 중심으로 편성한 신설 사단이었습니다.
    너무 한심해서 낙동강 전선에도 투입하지 못했고 훈련만 하다가 북으로 도망갔는데 그런 오합지졸
    부대를 훈련시키고 단련시켜 북한군 사단 중에 장 대담한 작전을 전개했던 전문섭의
    능력도 알아주어야 합니다. 전문섭은 춘천전투때 국군 6사단 7연대와 대결했었던 북 2사단의
    참모장이었습니다,
  • 작성자Taehun Jun | 작성시간 19.04.01 박경석 장군님께서는 혹시.... 6.25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 인민군 13사단 포병사령관>으로 귀순하여
    한국군 군인으로 7사단장, 초대 3사관학교장, 논산훈련소장으로 근무하다가 예편한 <정봉욱 장군>님과
    같이 근무하시거나, 또는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신 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정봉욱 장군님과 인연이
    있으셨으면.... 그 < 후일담을 소개>해 주셨으면 좋은 자료가 되겠습니다.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3.28 잘 압니다.1960년, 내가 소령으로 1군 작전처 근무시 준장 계급의 포병부장으로 정 장군이 있을 때 약 1년간 가까운 거리에서 근무했었습니다. 계급에 차이가 있어 대화는 몇 번 없었습니다. 매우 저돌적인 장군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작전처 기획계장으로 입안한 '소양강 댐 건설후에 미치는 전술적 영향' 을 정 장군에게 브리핑 한 적이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극찬 하더군요. 정 장군이 나를 무척 좋아 한 기억이 있습니다. 가끔 마주 볼 기회가 있으면 큰 소리로 "저렇게 똑똑한 녀석은 처음이야!"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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