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소중한 기록문학의 진가
-박경석 에세이 『정의와 불의』를 읽고
송하섭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1. 들어가며
오늘, 대전에서 최대 최고의 작가를 말하라면 나는 박경석 장군을 주저 없이 꼽을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의 양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생존 작가 중에서 최고령인데다가 소설과 시, 그리고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작업을 계속했으며, 현대사 특히 군사軍史를 이해하는데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렇다.
또한 대전에서 문학을 공부한다고 자처하면서 노년에 이른 내가 그를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는 데 대하여 자괴감을 느낀다. 그는 지금은 세종시가 된 연기군에서 출생하여 대전의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고장의 작가인데도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다는 데에서 그렇다. 물론 그는 오랫동안 대전의 문인들과 교류가 없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겠지만 이미 군과 중앙무대에서 창작과 TV 방송 등에서 빛나는 활동을 해 왔으면서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음이 더 큰 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2020년, 국제PEN한국본부에서 개최하는 작가대회의 한 분야 진행을 맡게 되고 박 장군이 주제를 발표하게 되자 생면부지인 나에게 상당한 양의 작품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아마도 자신을 소개하는 데 참고가 되도록 친절을 베푼 셈이다. 장편소설 『오성장군 김홍일』, 『불후의 명장 채명신』, 그리고 시집 『흑장미』였다. 소설은 각각 500쪽이 넘는 분량의 장편이었는데 며칠 만에 다 독파했다. 그만큼 흥미진진한 작품들이었다. 두 권의 작품을 읽으면서 광복군에서부터 국군의 창설, 6.25 전란, 그리고 월남전에 이르기까지의 전쟁사는 물론, 영웅적인 군인들의 활동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 한 차례 만나 그의 일생에 대하여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이번, 90의 노령에 자전적 에세이집인 『정의와 불의』를 발간하였다면서 나를 저택으로 초대하는 바람에 그의 문학적 업적과 생애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그가 우리 고장 대전에서 현존하는 최고 최대의 작가라고 확신하면서 동료 문인들 뿐 안 아니라 시민들 까지도 이를 인식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다.
먼저 방대한 작품의 양이다. 22권의 시집, 장편 13권, 『그날』 이라는 대하소설 6권, 『따이한』이라는 대하소설 11권, 그러니까 30여 권의 소설, 8권의 에세이집을 발간했다. 그뿐만 아니라 장군 회고록 17권을 포함한 군 관계 서적까지 한다면 80여 권의 저서를 발간했으니 그 집필 양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그는 중학교 5학년(현재 학제로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육사에 입학했으나 1개월도 안돼 6.25 전쟁이 발발하여 17세에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 월남전 지휘관까지 생의 대부분을 군에서 보낸 것을 감안하면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원고를 집필하였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내가 만난 그는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90세의 노령인데도 정시에 기상, 정시에 식사, 짜여진 일상을 군인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난관이 닥친다 해도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정신, 군 생활에 있어서 불의에 항거하여 싸웠던 경험담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가운데 그 많은 작품을 쓴다는 것이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도 어려운데 그는 군인으로 장군에 이르렀으니 성공한 군인이라 할 것이요, 수많은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으니 성공한 문인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격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군인으로서의 박경석이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박경석을 특히 이번에 발간한 에세이집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2. 기록문학의 의미
기록문학. 문학이 문자에 의존하는 창조물인 한에는 모든 문학은 기록문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에도 작가의 생활 체험이 가감 없이 표현되는 수필문학이야말로 기록에 더 의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작가의 사상이나 정서가 비교적 덜 투영된 작품을 기록문학이라 정의해 본다. 이번 박경석 장군이 90 연세에 간행한 에세이집에 담겨진 작품들은 그런 의미에서 기록문학의 백미라 할 것이다. 그가 겪은 6.25와 월남전, 그 전쟁의 생생한 현장 설명, 전쟁에서의 성공과 실패, 군 생활을 통한 수많은 군 인사들과의 교류, 한국군의 발전 과정,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의 정치와 군, 이런 사실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이 개입되지 않은 실제 경험들이 고스란히 기록된 자전적인 에세이집인 것이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사실들이다.
그의 문학은 기록의 중요성을 자각하면서 출발한다. 그는 이 책의 첫 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6년제 대전중학교에 입학하여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존경스러웠다. 특히 국어를 가르친 윤종만 선생님은 탁월한 국어학자였다. 윤종만 선생님은 일본 군대에 끌려갔다가 해방된 후 귀국해 교편을 잡았는데,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나에게 애국심과 일본 군국주의의 폐해를 주입한 분이 바로 윤종만 선생님이시다. 이 과정에서 내 문학도 함께 싹텄다.
윤종만 선생님은 우리나라 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국방력 강화가 우리의 살길임을 늘 역설하셨다. 나는 한꺼번에 문과 무에 세뇌된 셈이다. 우리 문중에는 무관이 많았다. 친형이 박영석 장군이고, 공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박원석 장군은 6촌 형이다. 윤종만 선생님은 이순신 장군도 문에 능하여 난중일기 같은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며 나를 부추겼다. 윤종만 선생님은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겪은 일들을 잘 기록하면 훗날 훌륭한 작품 소재가 된다고 하셨다. 『정의와 불의』 P.39-40
중학교 시절의 윤종만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의 인생에 있어 진로를 인도해준 셈이다. 그는 군인이 되었고 작가가 되었는데 작품은 철저하게 겪은 일들을 충실히 기록하는 길을 택했다. 그의 문학에 있어 사실의 중요성에 얼마나 철저했는가 하는 것은 다음의 기록에서도 잘 인식할 수 있다.
나는 현역 시절 필명 한사랑으로 장편소설 녹슨 훈장을 비롯한 문학 작품에서 인민군에 잡힌 국군 포로에 대한 이야기를 혹독한 고문과 총살 등의 잔혹성으로 그렸다. 그 작품들은 픽션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교재나 교양을 위한 글에서 거짓이 되기 때문에 분명히 잘못된 집필이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군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던 나의 저서 지휘관 시리즈(전 3권), 즉 제1권 지휘관의 사생관, 제2권 지휘관의 조건, 제3권 지휘관의 역사관 가운데 생과 사의 분수령은 완전한 허구임을 밝힌다. -- 앞으로 복간될 경우에는 그 부분을 삭제할 것을 약속한다. (위의 책 P.317)
군 교재에서의 허구를 교정하겠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소설 속의 픽션에 대하여 잘못이라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소설은 허구를 창작의 중요한 요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만큼 작품에 있어서도 사실을 중요시했다는 방증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그는 문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탐독하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당시 군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사건 사고, 일부 일본 군대 출신 상관들의 터무니없는 월권 전횡 등을 기록해 뒷날 교훈으로 남겨 개선책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욕 때문이었다” (위의 책 P.333)고 밝히고 있다.
그는 자기 문학의 씨앗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육사 입학 과정에서 당시 실권자 원용덕 준장의 아들과 자신과의 차별, 특히 실권자 아들은 후방에 남고 자기같이 힘없는 사람들은 전선으로 가야하는 부조리 앞에 분노했는데 이것이 자기가 글을 쓰게 된 씨앗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한 글쓰기는 정확성이 생명이라고 믿고 있으므로 그의 문학은 진실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자기가 직접 체험한 군 생활을 소재로 쓰이고 있다. 월남전 참전의 체험이 중심이 된 6권의 전작 장편, 『그날』이나 11권의 전작 장편 『따이한』이 그렇고, 김홍일 장군이나 채명신 장군 이야기도 그렇다.
그는 대화 중에도 나는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부조리의 개혁을 말하는데 거짓이 들어가서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그만큼 역사성을 위주로 하고 있고, 기록에 충실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문학 목표를 “인류애의 구현” “조국에 헌신”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그 목표의 실현을 위하여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에세이집 『정의와 불의』는 더 말해 무엇하랴.
역사의 기록, 이는 소설 창작의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왕조실록, 난중일기, 계축일기 등 역사의 실록들이 얼마나 많은 작품의 소재들이 되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작가 박경석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이 소설 창작의 종점이 아니라 앞으로 무수한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보고와도 같은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번에 발간한 자전적 에세이인 정의와 불의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새로운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군인들과의 갈등으로 더 높은 계급은 달지 못했지만, 그 또한 그의 문학을 위해서는 중요한 소재가 될 것이고, 뒷날 그 분야를 주제로 창작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3. 그의 문학 활동
나는 서두에 오늘날, 그를 대전에서 최고 최대의 작가라 했는데 그의 문학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59년. 현역 장교 시절 필명 한사랑韓史郞으로 시, 1961년 소설로 등단하여 작품을 썼다고 스스로 작가 소개에 밝히고 있다. 1959년, 첫 시집 『등불』을 발간하고 1961년에 『녹슨 훈장』이라는 소설을 발간 발표한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이렇게 작품집을 발간함으로써 등단이 인정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시집은 수주 변영로 선생의 추천사가 실려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베트남 맹호 제1진 초대 재구대장으로 참전하여 전쟁의 진중에서 수필집 『十九番道路』와 『그대와 나의 유산』을 발간하는데 이 두 작품은 대단한 인기를 끌어 많은 독자로부터 팬레터를 받았다고 회고한다.
내가 정글에서 전투 지휘를 계속하는 동안 고국에서는 『십구번도로』가 베스트 셀러가 되어 팬레터가 매주 100여 통씩 배달되었다. 여고생들을 비롯한 여성들의 팬레터가 대부분이어서 나는 총각 장교를 찾아 팬레터를 나누어주느라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그 팬레터를 통해 인연이 되어 여러 장교가 결혼했다고 한다. (위의 책 P.634)
그의 본격적인 창작 활동은 군복을 벗은 후, 40대 후반에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군복을 벗은 때의 상처를 다독이기 위해 1981년 가을 현충사를 찾았다. 정중히 참배한 후, 새 출발의 결의를 굳게 다졌다. 내가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 내면에는 요지경 속보다 더 황당한 정치군인의 실태를 작품 소재로 활용해 진실을 만천하에 밝혀 정의를 되찾아야 되겠다는 결의가 숨어 있었다. (위의 책 P.333)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 연보를 보면 대부분이 1980년대 이후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많은 시집도, 대하소설과 장편도 모두 예편 후에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편들의 제목인 『영웅들』, 『육군종합학교』, 『서울학도의용군』, 『육사생도2기』, 는 물론, 김홍일 장군이나 채명신 장군 등 전쟁 영웅이 주로 다루어지고 있고 이 작품들에는 그의 문학 목적인 숨겨졌거나 잘못 알려진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는데, 시점을 모으고 있다.
1985년에 그의 『오성장군 김홍일』은 KBS !TV에서 3부작 6시간의 장편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기도 했고, 1966년에는 그가 기초한 소령 강재구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방대한 양의 작품들이 발표되었고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도 했는데 정작 고향의 문인들 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문학 활동은 다소 특이한 면이 있다. 중등학교 시절 문예반에 들어가 활동했다고는 하나 동료들과 치열하게 어울리면서 동인 활동을 한다거나 하는 경험은 없었던 듯하고 대학에 들어가 그런 어울림을 가질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육사에 입학하자마자 6.25가 터져 군 생활을 시작했으니 문인들과의 교류도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혼자 책을 읽고, 혼자 글쓰기 공부를 하여 자기의 체험을 중심으로 작품을 창작한 셈이다. 따라서 습작기에 문학인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책의 인세를 돈으로 받지 않고 책으로 받아 지인들에게 나누어주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향의 문인들이나 후배들에게 실질적인 거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군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에서의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전역 후, 많은 작품을, 그것도 주로 단행본으로 시집, 장편소설, 수필집을 발간하면서 문학계에 알려진다. 다른 작가들처럼 여기저기 문예지에 작품을 실어 문인들의 관심을 모은 것이 아니라 단행본으로 승부를 건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늦은 나이에 소수의 문인들과 교류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1981년 7월 31일. 정치군인의 전횡 때문에 군복을 벗고 전업 작가의 새 길을 걷기 시작하자 구상 선생, 서정주 선생을 비롯 선배 문인들로부터 번번이 초청을 받았다. 문인의 모임은 소주잔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때 두주불사의 술꾼이었기 때문에 술자리에 자주 어울렸다. 술자리의 화두 중 가장 인상에 남는 말은 “고향에 가지 말라.” 했다.
서울에서 명성이 있는 작가라도 고향에 가면 냉대한다는 것이었다. 제 딴에는 서울에서 날렸으나 고향에 가면 모두 부러워하고 반길 것으로 생각하지만 모른 척 한다고 했다. 원로 작가 모두가 한결같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귀향하면서 첫째, 고향의 문인들과 될 수 있는 대로 어울리지 말고 창작에만 전념한다. 둘째, 고향의 문인들과 어울릴 경우에는 겸손하겠다. (위의 책 P.394)
이처럼 그는 늦은 나이에 문단의 원로들과 어울리기는 했었지만, 귀향하여 90이 된 오늘도 오로지 컴퓨터 자판기 앞에서 독수리 타자 실력으로 원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귀향하면서 스스로 마음에 다짐한 대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제하면서 금주 금연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다.
4. 나가면서
그의 에세이집 『정의와 불의』 한 권으로 그의 문학을 이야기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나는 그의 장편 2권을 읽은 것만으로 그의 문학을 논하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의 문학의 대강을 자전적 에세에집을 중심으로 살피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조명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 고장 문인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나는 앞에서 그의 기록문학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했다. 그런데 기록은 모든 사실이 기록자의 시각에 의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장성 출신인 박경석의 체험이 그의 모든 작품에 성실히 투영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더러는 다른 시각으로 그 사실을 기록한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은 보다 많은 연구자들에 의하여 분석되고 조명될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이번 우리에게 보여준 『정의와 불의』는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보다는 더 내밀한 진실을 담고 있다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런 자료들이 작품화되기 위해서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 글들은 작가의 체험을 기록한 글임에도 이처럼 흥미롭게 읽힐 수 있는 것은 그의 체험이 그만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삶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그의 군 생활, 사관학교 입학에 이어 발발한 6·25전쟁, 그래서 17세에 소대장으로 전쟁에 참전, 부상과 포로, 탈출에 이은 전투 체험, 베트남 파병 장교로 전투 지휘, 장군에 이르는 과정에서 체험한 군 내부의 실상, 부조리. 정치군인과의 갈등, 파란만장한 작전의 성공과 실패, 전업 작가로의 창작 활동 등 흥미진진한 삶, 그 자체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소재들이다.
물론 이런 소재들이 독자들에게 더욱 감동과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를 표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시 작품과 소설을 창작하면서 대단한 문장력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번 에세이집에서도 그러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앞으로 더욱 건강하셔서 더 많은 작품을 보여주길 기원하고, 이 에세이집에는 그의 작품 연보가 정리되어 있으니 연구자들의 참고를 바란다.
참고 : 송하섭 교수. 단국대학교 부총장 역임
송하섭 교수와 나 - 박경석 서재에서 2023
정의와 불의
숱한 전쟁의 틈새에서
살아남은 것은
나라를 위해
정의의 방패로
불의를 막아냈기 때문
정의와 불의가
혼재한 세상에서
불의 속에서
정의를 끄집어 내기 위해
총처럼 펜을 들고
써내려간 정의
지금도
청년 장교처럼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
빛나는 눈빛
힘찬 목소리
박경석 장군
* 대전문총회장 김명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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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2.07
내가 1959년, 현역 장교 시절 필명 韓史郞으로 등단 이래 2022년 2월까지 62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구체적으로 문학평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특히 너무나 평론 내용이 정확히 정곡을 찌른다. 때로는 과찬의 글에 눈을 감고 과거 집필과정을 회상했다. 피맺힌 '大長程'이었다. 정치 군인과 싸워가며 군인 정치 청산을 위해 글을 썼다. 특히 일본군 출신 장군들의 軍史 왜곡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들이 주는 명예와 달콤한 과자를 뿌리치느라 죽음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래서 일단 그 목표에 접근 했다.
이 과정의 피로가 송하섭 평론가의 평론으로 흔쾌히 사라짐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내 문학 분야 '가보'로 보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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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2.07
1950년 6월 1일, 4년제 정규 육사 입교 후 귀향 전까지 그 긴 세월, 고향을 찾아 문인들과의 담소는 물론 벗들과의 교류가 없었다.
나의 불찰이었지만 바쁜 일정의 계속 때문이었다. 광인에 가까울 정도로 '大長程'을 설정, 군대 일과표대로 집필에 몰입했다.
물론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의인을 만나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내 '미침'에 공감한 의인의 출현 때문에 '미친짓'은 계속되었다.
건강 유지는 금연 금주로부터 시작해 군 일과표를 따르며 하루 1시간의 운동은 단 하루 빠지는 일이 없었다.
九旬은 지났지만 기저질환 없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盡人事待天命' 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