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감이 강했던 채명신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명성이 한국은 물론이고 자유 우방국 모든 나라에서 떨치고 있었다. 주월한국군이 연전연승을 거듭할 수록 함께 최명신의 이름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학생으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국민이 채명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유명해지고 있었다. 아마 이런 현상은 건국 이후 처음 보는 신기한 경우였다. 채명신 본인 스스로는 자중하면서 모든 영예는 전공이 있는 부하 장병에게 돌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채명신을 찬양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채명신의 이름이 떨칠수록 긴장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청와대였다. 그리고 주변 권력을 쥐고 있었던 김종필을 중심으로 활개를 치고 있었던 정치군인 육사8기생 전역자들이었다. 그들은 채명신으로 하여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가 권력의 중심이 뒤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첫 단계로 주월한국군 사령관 경질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후임 이세호는 일본군 출신인데다 박정희와 동기생인 육사2기생이라 채명신보다 훨씬 선배였다. 더구나 이세호는 군에서 독단과 아집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여하간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교체는 많은 말이 오갈 정도로 여러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그후 이세호에 의한 주월한국군은 급속도로 퇴조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아울러 주월한국군의 명성 또한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새로 형성되기 시작한 한국형 리더십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채명신은 1969년 5월 경북 대구에 있는 제2군사령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당시의 2군은 야전군에 비해 한 계급 격이 떨어지는 직위이기에 모두 또다시 놀랐다. 개선장군에게 주어지는 직위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채명신 자신은 2군사령관 직위에 만족한다고 했다. 야전군에 비해 전진을 털어낼 수 있는 재충전 기회라고 자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 연례적으로 실시하는 대통령 지방 순시에 즈음하여 청와대 조상호 의전수석비서관으로부터 채명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 지방 순시에 동행하기를 바라는 대통령의 의중을 전하면서 동행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채명신은 즉각 대통령의 뜻에 따라 동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방 순시는 충청북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도지사의 도정브리핑이 시작되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100% 달성이라는 내용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하는 내용이었다. 문제점을 제기하거나 감히 요망사항 같은 것은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보고내용이었다.
추청북도에서의 도정보고를 끝내고 다음 차례인 충청남도 시찰을 위해 유성온천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각하 오늘 기분이 좋으시겠습니다. 충청북도의 브리핑을 들으니 모든 사업이 일사천리로 100% 달성이라니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면서 대통령의 눈치를 살폈다. 대통령은 채명신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듯
"응 ,모두 열심히 하고 있구만."하고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각하,제가 생각하기에는 일사천리로 100% 달성했다는 것도 좋지만 비전을 제시하면서 중앙정부의 지원을 요청하고 또 잘못된 문제점의 시정책 등이 제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것이 바로 각하께서 시찰하시는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채명신이 바른 소리를 하자 공감한 듯
"채 장군 여기 잘 왔어. 채 장군 말이 맞아. 문제점 파악을 위해 다니는 것인데....,"하며 말을 흐렸다.
다음날 충청남도 차례가 왔다. 충남 도정보고에서는 전날 밤 이야기가 전파된 탓인지 충북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도정 브리핑을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전라북도,전라남도 도정보고에서도 충남 도정보고와 같은 브리핑으로 획일화되고 있었다.
채명신은 약삭빠른 관료들의 행태에 대해 딱하게 생각했다. 채명신은 군대에서 소신껏 보고 하는 것이 관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 순시가 잦은 편이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열차 편으로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대구역에 마중 나갔다. 대구역에는 구자춘 도지사를 비롯하여 국회의원,대구시장과 지방 유지들이 플랫폼에 나와 있었다. 이때 대구역에는 대통령을 보기 위해 많은 시민이 몰려와 플랫폼이 혼잡하였다. 이때 군중을 정리하기 위하여 경찰국장 서재근 경무관이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관 한 명이 경찰국장에게 반말로 호령하는 것이었다. 채명신은 그 광경을 보고 경호원에게
"어이 이리와, 경상북도 경찰국장 직위가 위냐,네 직위가 위냐?. 네가 뭔데 경찰국장에게 반말로 이래라 저래라 해!."
채명신의 질책에 경호원은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를 슬그머니 피했다.
이윽고 열차가 도착했다. 박 대통령이 대구에 오면 꼭 들러 식사하는 식당이 있는데 그날도 모든 일행이 그 식당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이효상 국회의장 등 많은 고위 인사가 참석했다. 채명신은 낮에 있었던 경호원의 횡포를 생각하며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여보 경호실장, 경호실 되게 세더군."하고 힐책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니 경호실장은 얼굴을 붉히며
"사령관님, 뭐가 잘못됐습니까?."하며 채명신에게 다가왔다. 채명신은 대구역 플랫폼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대통령은 채명신의 말을 듣더니
"그래 맞았어, 청와대에 있다고 월권 많아,"
그 말을 듣고 박종규 경호실장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경호실장이 돌아와 채명신에게
"그 새끼 반 죽여놓고 왔습니다"
채명신은 그 말을 듣고 웃고 말았다.
◇채명신에게 좁혀오는 모함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일부 저항은 있었으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부정부패 척결과 경제정책의 효과로 생활수준 향상의 기미가 보여 비교적 긍정적으로 혁명정부를 보고 있었다. 문제는 3선 개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대학가는 시끄러워지고 거리는 데모의 열풍으로 바람잘날 없는 시국으로 변해갔다. 3선 개헌으로 대통령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다시 정권욕에 사로잡혀 유신을 기치로 들고 나오면서 집권 연장을 꾀하기 시작했다.
대구까지 내려온 박정희 대통령은 채명신 2군사령관과 다시 만났다. 대구에 내려올 때마다 만나는 그 식당 별실에는 단 둘만이 남아 대화가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술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다. 혼자 마시다가 박정희는 채명신에게 권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무엇 때문에 단주를 했는지 밝히지 않으면서 어느 경우도 술을 먹지 않는다. 박정희는 억지로 채명신에게 술을 권하면서 술잔이 술을 따랐다. 그러나 채명신은 먹는 시늉만 했지 교묘히 술을 피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술 기운이 어느 정도 오르자 채명신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채 장군, 김대중에게 정권을 맡겨서 앞으로 잘 될까?."하고 채명신에게 질문했다. 채명신은 이미 박정희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다. 벌써 독대하자고 할 때부터 어떻게 나올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각하, 바뀌면 혼란이 오겠죠. 경제 또한 지금처럼 잘 되겠습니까?. 각하의 뜻은 100% 동감입니다. 그러나 각하 스스로 정권 연장하겠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요. 이미 3선 개헌 때 대통령에 마지막으로 출마한다며 눈물까지 흘리신 각하가 아닙니까?.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박정희는 긴장하는 눈치였다. 얼굴색까지도 변했다.
"채 장군 그래서 나도 고민이야."
채명신은 그말이 끝나자
"각하, 정치도 대의명분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채명신이 말을 이으려고 하자
"그래,그래. 그래서 고민이야"
박정희는 연약한 모습까지 보이며 정치에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더 진지하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각하, 미국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루즈벨트 대통령은 4선까지 했습니다.국민의 뜻이라면 예외가 있는 법이지요. 각하, 약속을 지키십시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리셨다가 다시 추대되는 그날까지 참으셔야 됩니다. 각하. 만일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정권 연장을 한다면 각하 생명을 끊는 것입니다."
채명신은 지나쳤다고 생각되었지만 어차피 할 말은 다 해야겠다고 생각한 끝에 한 말이었다. 그 말을 한 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었을 때 채명신은 그날을 회상하며 그때 한 말을 무척 후회했다고 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속죄했다고 했다.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정치 생명을 끊는다는 것이었는데...여하간 그 말에 대해 두고두고 채명신은 후회하고 있었다.
그날은 그것으로 끝내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런데 항간에는 더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채명신 2군사령관은 그 휘하 조직인 종합대학교 ROTC 단장에 월남전에서 인연을 맺은 그의 심복을 배치하여 대학생을 선동해서 차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종합대학교 ROTC 단장은 대령 임기가 끝나 예편을 앞둔 ROTC 단장이 대부분이었다. 채명신 2군사령관은 참신한 대령급으로 교체하기로 인사방침을 바꿨다. 그래서 월남전 영웅으로 대체해 대학생들에게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겠다는 의도로 ROTC 단장을 교체하고 있었다. 1차적으로 연대장으로 전공을 올린 양창식 대령을 서울대 ROTC단장으로, 성균관대 ROTC 단장에는 대대장으로 전공을 올린 박경석 대령을 임명하였었다. 항간의 소문은 터무니 없는 모략이었다. 그래서 이들 ROTC 단장을 감시까지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후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사안이 채명신의 목줄을 조이는데 영향을 주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주변에서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제정으로 정권연장 기도가 가시화되면서 채명신에 대한 모함은 하루하루 더 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주로 육군의 상층부와 공화당내 영남세의 음모였다.
◇갖은 모함의 늪에서
대구의 한 식당에서 헤어진 뒤 두 달지나서 다시 박 대통령은 대구로 내려와 채명신과 그 식당 별실에서 독대했다. 몹시 고뇌에 찬듯 연거푸 술잔을 기을였다.
"여보 채 장군, 아무리 생각해도 집권을 연장해야 되겠어. 욕을 먹더라도 내가 십자가를 메야겠어."
"각하, 십자가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요"
"응 그래,채 장군 기독교 신자지. 그건 맞아"
그말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일어섰다. 작별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몹시 우울한 하루였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1970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경주 관광호텔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박 대통령이 직접 건 전화였다.
"웬일이십니까?."
"나 경주에 왔어,지금 경주에 올 수 있나?."
"예, 가겠습니다."
채명신은 무슨 일인가 싶어 채명신은 급히 승용차로 경주로 달려갔다. 호텔에 도착하자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갔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박 대통령은
"채 장군 오해하자마." 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박 대통령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둬 달 전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이 채명신 장군 비행이라면서 서류를 가져왔는데 거기에는 강남에 땅이 많고 스위스 은행에 비밀구좌가 있고 별별 비행이 다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ROTC 단장을 월남전 심복으로 교체해 학생소요를 부추긴다는 내용까지 들어있었다..고했다.
박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다만 "그래 알았다"고했는데 그후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이 채명신을 위시해서 직계 가족 친인척, 측근 인사 등 모두를 샅샅이 조사를 했는데 근거 없는 모략으로 결론을 내린 사실을 다시 보고해 왔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누가 조사하라고 했느냐"고 김계원에게 다그치자 "그래 알았다"고 한 박 대통령의 말이 조사하라는 것으로 알고 조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쇼크를 받아 경주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채명신은 박 대통령의 말을 다 듣고
"정식 조사지시를 했어야 합니다. 월남에서 피를 흘리고 싸우고 있는 장병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렇고 군인생활을 통해 부족한 점과 과오는 많았지만 양심과 소신껏 살려고 애써 온 나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서도 철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고 말하니 박 대통령이 매우 미안한 표정을 하기에 채명신은 더 이상 말을 삼갔다. 그무렵 박 대통령은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여서 채명신이 보기에 안쓰러웠다고 했다.
이러는 동안 채명신의 육군중장 정년인 1972년 5월 30일이 가까워져 왔다. 장군은 정년 일자 전에 진급 통보가 없으면 자동적으로 예비역에 편입되게 되어 있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채명신은 이제 군대생활은 끝을 향하고 있다고 감지하고 있었다.
여러 정보기관에서는 채명신을 감시하고 있었고 2군사령관 관할에 있는 ROTC를 통해 학생을 선동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리고 채명신이 대통령에의 야망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당시 시중의 여론은 채명신 장군에 대한 지지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사람들이 모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박정희 보다야 채명신이 낫지 하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채명신은 추호도 꿈에서도 그런 야망은 갖고 있지 않았다.
채명신은 이런 사태에 대해 변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타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없이 군복을 벗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채명신은 명예로운 군대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면서 5월 30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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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단 작성시간 14.02.04 당시의 채명신 장군의 국민적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음을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읍니다. 박정희는 군인이며 정치가요 제 2인자는 용납 못하는것이 독제자의 생리인것을.... 역시 유신에 대한 충고와 조언은 집권자앞에는 용납이 않되는 것 주변의 모략과 중상에 의연하게 군복을 벗으신 채장군의 명예로운 퇴역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보범적인 참 군인의 최후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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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권남 작성시간 19.09.07 채명신 사령관이 주월 사령관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마치고....
귀국하기 몇개월 전의 어느날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과 최세인 장군은 술자리에 마주 앉았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에....
( 이봐...! 최 장군....!
금년안에 채명신이가 들어올거야..
2번 타자로 최장군이 주월사를 맡아주면 어떨까...?
아무리 생각해도..
최장군이 적임자인데,
어때..?
가기 싫다면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네...!
" 최세인 장군은,
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각하...!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래..!
채명신이 에게도 최장군과 교대할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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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권남 작성시간 19.09.07 그날 밤...
사실상의 주월 사령관 임명으로 생각한 최장군은...,
자신의 직계 참모들에게 전화 통화를 시작했는데....
모두 들어라~~,
우리가 몇달안에 월남으로 가게되었다.
모두들 준비해라...!
...
부하 참모들은 어안이 벙벙했는데..
평소에 입이 무겁고
절대 경솔하지 않은 최장군이 아닌가..?
박정희 대통령과는 두주불사..
자주 술자리를 나누고..
그래...
각하의 명령이 떨어진거야..!
거의 모두는 그렇게 판단들을 했고..
심지어는 일부 보안사 간부들에게 인사를 받기도 했는데~~~,
........
무슨 이유인지...?
그것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이세호 장군으로 바뀌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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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권남 작성시간 19.09.07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최세인 장군과 단독적인 술자리를 은근히 피했고..
미안해서 였을까...?
무슨 까닭 이였을까...?
........
결국은,
최세인 장군을 제 ㅣ 야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데..
최세인 사령관은 절대 기뻐하지 않았다.
......
결국은 많은 부하들에게
본의 아닌 거짓말이 되어버렸고..
꿈에 부풀었던 주월 사령관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니~~,
...
그래서 일까...?
1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는,
야전군을 뒤흔드는 지휘를 하는데...
1군 휘하에 전속되는 모든 연대장들은..
모조리 10킬로 구보를 테스트 한다.
낙오하는 육군 대령 연대장급 들은,
내가 신고를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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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권남 작성시간 19.09.07 그 통에...
숱한 배불뚜기 연대장들은,
ㅣ군 사령부로 전출 명령을 받자 마자,
구보 연습을 해야만 했다.
제 1 야전군 휘하의 연대장 진출은 성공한 군인이 분명하지만,
부임 초장부터 뜨거운 불벼락?을 받는 것이다.
최 사령관 자신도
육군 대장의 계급장을 붙인채...
지휘봉을 꼬나들고
사령부의 참모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수시로 달렸고.....
.,......
가급적이면..
월남전의 이야기를 피했다고 한다.
......
몇개월 동안...
최세인 장군과
채명신 사령관의 흐뭇하게 나누었던 희망가는 궁금하기만 하다.
언젠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찿아가면..
채명신 사령관 님께 여쭙고 싶다.
최세인 장군이 취소된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