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2장
11.한국군 최초의 군사교리
주월한국군 제1진 전투부대인 맹호사단은 1965년 10월, 베트남의 간선도로인 1번도로와 19번도로 교차 요충지인 빈딩성의 성도(省都) 퀴논항에 상륙했다.
첫 상륙한 보병 제1연대와 기갑연대는 퀴논 북서쪽 1번도로와 19번도로를 연한 정글지대에 일제히 분산 배치되었다.
당시 맹호사단 제1진, 2명의 연대장과 6명의 대대장 모두 6.25한국전쟁에서 무공훈장을 수훈한 전투경험자이며 미국 군사학교에서 유학을 마친 엘리뜨 장교로 엄정한 선발과정을 거쳤기에 누구나 할 것 없이 긍지가 대단하였다. 특히 이들 지휘관 모두 해당 지휘관을 성공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자신 만만한 기개로 야전근무에 임했다.
사단장 채명신 소장의 경우, 6.25한국전쟁시 백골병단을 지휘 적측 깊숙히 침투하여 유격전을 전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쟁영웅이고 이미 제5사단장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나 또한 2년 전에 제1사단 재15연대 제2대대장직을 끝냈었다.
주월한국군의 최초 배치는 대대 단위로 할당된 전술책임지역 (TAOR - Tactical Area of Responsibility)에 한결같이 대대단위로 주둔지를 정했다. 주둔지는 민가와 멀리 떨어진 정글지대이므로 지원 시설이나 편의시설이 있을리 없었다. 다만 미군이 헬기로 휴대식량(C레이숀)과 음료수를 운반해 줄 뿐이었다. 도착과 동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각각 개인 판쵸우의를 2매씩 연결해 주거시설로 삼았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야전근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장병 어느 누구나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해외 첫 전투부대 원정군으로서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쳤기에 명예로운 긍지를 한껏 뽐내고 있던 터라 이런 고생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첫 밤부터 가끔 쿵쿵거리는 포성과 멀리서 들려오는 기관총의 연발음이 몹시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날이 새자 헬기로 사단장 채명신 소장이 대대 주둔지에 도착했다. 뜻밖에 사단장이 대대에 도착하자 대대 장병은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다.
도착하자 부리핑 받기도 전에 사단장은 대대의 각 중대를 대대 전술지역내에 광범위하게 산개 중대별로 전술기지를 만들어 분산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일반적으로 대대단위로 주둔하면서 그 기지에서 주어진 임무에 따라 출진해서 작전에 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대별로 분산 배치한다는 것에 의문이 갔다.
사단장의 첫 명령은 간단했다.
첫째, 중대는 사주방어 형식의 방어진지를 구축, 적의 공격으로부터 48시간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대비와 함께 탄약 등 모든 보급품을 준비하라.
둘째, 각 중대기지는 모두 포병 지원화력의 엄호를 받도록 배치하되 일부 불가능 할 시는 대대 화력으로 엄호할 수 있도록 하라. 필요하다면 대대에 야전포병 1개 포대를 직접지원토록 한다.
뒤늦게 헬기로 도착한 연대장 김정운 대령과 나는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쉽게 납득이 안가 명확한 답변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는 명령에 죽고 산다는 명제 앞에서 무엇을 주저하랴. 나는 큰 소리로
"네.알겠습니다. 즉각 시행하겠습니다" 고 대답했다. 사단장은 이어서
"박 중령이 중대 전술기지를 완성, 1주일 내에 다른 부대가 표준으로 삼을 수 있도록 시범을 준비할 수 있겠는가?"
그것 또한 막막하였다. 그러나 사단장의 의사타진은 명령과 같다고 생각을 굳히고 더 힘차게 입을 열었다.
"네. 1주일 내로 중대전술기지 시범준비를 완성하겠습니다"
그때서야 사단장은 얼굴에 웃음을 띠며
"한국군 유일의 재구대대장이 아닌가. 귀관을 믿는다"
그 말을 남기고 헬기를 타고 대대를 떠났다.
연대장과 나는 얼굴을 맞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연대장이 떠난 다음 나는 즉시 제9중대장 용영일 대위를 불러 제9중대 전술기지 시범 준비를 지시했다. 용 대위는 책임감이 강하고 재치가 뛰어나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범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갔다. 나는 시범에 필요한 실탄, 철조망, 대인지뢰 등 필요한 보급품을 차질없이 지원했다.
당시 보급품 수급체계는 한국에서와 달라서 필요한 보급품은 품목, 수량에 관계없이 요청하는대로 미군 헬기가 적시에 운반해 주었다.
예측한대로 사단장의 중대전술기지 설치 안에 대해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모든 지휘관이 내가 최초에 의문을 품은 것처럼 회의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장 채명신 장군의 중대전술기지개념은 확고했다.
이무렵 미군사령부에서도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 설정에 대해서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의 전략개념은 3단계로 구분된 공세이전(攻勢移轉)을 위한 것이었다. 그 3단계 전략은 다음과 같다.
제1단계 : 여단 또는 연대, 대대 기지를 확보한다.
제2단계 : 기지의 방어를 위하여 105mm곡사포 사정거리 이내에서 작전을 전개하며 월남군과 연합작전하에 원거리 전투정찰과 공격을 결행한다.
제3단계 : 월남군이 필요로 할 때 기동타격부대를 지원하며 본격적인 방어로 이행한다. 이와 동시에 해안선 기지의 안전이 확보되면 내륙으로 이동하여 기지확보를 목표로 작전을 전개한다.
이 3단계 전략개념을 미군 당국은 탐색 및 격멸전략 (Search and Destory Strategy) 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한국군은 중대별로 전개시켜 놓고 어떻게 적을 섬멸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회의하며 은근히 연대나 대대 단위로 기지를 설정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채명신 장군은 오히려 미군의 전략개념을 회의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채명신 장군의 전략개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제1단계 : 전술책임지역 방위를 위한 거점을 구축하는데 목표를 두고 부대를 배치하되 중대단위 전술기지를 설치하여 기지 주변의 전투정찰과 탐색을 실시.
제2단계 : 공세로 이전할 발판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전술책임지역 내의 적의 지배지역을 수복, 평정 후 안정에 성공하면 전술책임지역 밖으로의 공격태세 완비.
제3단계 : 대부대작전을 전개하여 전술책임지역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며 경계선 밖에 있는 적을 격멸시키는 한편 월남정부의 평정계획을 지원.
이 3단계 전략개념에 의거 재구대대 제9중대의 중대전술기지 시범은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고 이 모델을 참고로 하여 맹호사단 청룡여단 각 대대는 중대별로 전술기지 구축에 들어갔다.
채명신 장군의 중대전술기지 설치에 대한 일반지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적의 연대규모 공격에 48시간 이상 지탱할 수 있도록 진지를 구축하고 소요되는 탄약과 식량을 비축한다.
둘째, 중대전술기지는 포병의 지원화력 사정권 내에 설치하며 기지와 기지간의 간격을 야간 매복과 탐색으로 보강한다.
셋째, 기지는 모든 작전행동과 월남당국에 의하여 추진되는 촌락작전계획을 지원하는 거점으로 활용한다.
채명신 장군의 전략개념에 의한 중대전술기지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채명신 장군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베트남 도착 1개월 내에 완성되었다.
미군 당국은 물론 월남군 당국도 우려의 눈초리로 수 많은 중대전술기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미군측이나 월남군 측에서 '아마 머지 않아 한국군의 중대기지가 적군에 의해 유린 될 것' 으로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대대 아니 연대까지 기습을 받고 종종 큰 피해를 입고 있는데 한국군의 중대 쯤은 베트콩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미군사령관 휘하를 벗어나 한국군 소장이 멋대로 독단 행동를 한다고 질투의 눈초리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위태스러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한국군 중대전술기지에서는 가끔 놀랄만한 전과마저 계속 올리고 있었다. 베트콩은 한국군의 중대 쯤은 단숨에 기습으로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대전술기지 설치 후 약 보름이 지나자 넓은 평야지대에 드믄 드믄 산개되어 있는 중대전술기지에 배트콩의 야간 기습이 강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트콩의 장담과는 달리 중대전술기지에 도달하기 전에 한국군 매복병에의해 발견되어 사살되기 일쑤였다.
한편 한국군에 의해 당하기만 하고 있던 공산군 측은 분대규모에서 소대규모로 점차 기습병력을 증가하면서 재차 야간 기습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공산군측은 결전의 태세로 전환, 복수의 칼을 갈고 더욱 강도 높은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월맹군 측은 맹호의 사단사령부나 연대본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맹호의 1개 중대 전술기지에 눈독을 드리고 만반의 준비를 서둘렀다. 바로 두코에 배치된 맹호사단 기갑연대 제3대대 9중대가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두코는 중부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국경지대 부근에 있는 월맹군의 호치민 루트상 중요한 요충지이다. 미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부득이 한시적으로 1개 대대를 보냈었다.
제9중대 전술기지에 야간공격을 감행한 적은 월맹군 제308사단 88연대 제5대대 예하의 4개 중대와 공병특공대의 3개 중대로 도합 증강된 2개 대대 규모였다.
밤새도록 혈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맹호 용사는 미군의 포병화력과 전차화력의 지원을 받으며 끝까지 방어에 성공, 월맹군을 통쾌하게 격퇴시켰다.
전투 결과 확인된 적의 시체 187구 외에 도주하면서 운반해 갔을 시체와 부상병들을 추산하면 적의 손실은 3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집계되었다. 아군의 손실은 전사 7명과 전상 42명이었다. 일방적인 대승이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그때까지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개념의 효용성에 반신반의하던 미군 당국은 종전의 태도를 바꾸고 그 합당성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미군측은 중대전술기지를 회의적으로 보던 것을 청산하고 화력기지 (Fire Base) 라고 명명하고 그 전술적 운영에 대한 연구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내가 이 두코전투의 승첩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채명신 장군이 창안한 전략개념이 실전을 통해 입증된 한국 최초의 군사교리라는 점이다.
두코전투 이후 공산군은 이 치욕의 대패를 만회하기 위해 해병의 짜빈동 중대전술기지에 대공세를 가했으나 역시 공산군은 참담한 패배를 맞았다.
이와같이 중대전술기지에서 이어진 한국군의 승첩과 함께 한국군 특유의 재구대대 야간침투작전의 성공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재구대대는 제9중대와 제11중대를 투입하는 야간침투작전을 결행하여 한국군 뿐만 아니라 미군도 시도하지 못한 야간 작전의 성공으로 새로운 군사교리를 창출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한국군의 군사교리는 국내 언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시카고트리븐을 비롯한 외신에 보도 됨으로써 한국군의 위상이 일시에 1류군대로 인식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중대전술기지개념과 야간침투작전의 한국군 군사교리를 습득하기 위해 1968년 여름에 당시 자유중국(지금의 대만) 장개석 총통에 의해 한국군 교수단의 초청이 있었다. 이에 두코전투시 해당 대대장 최병수 대령과 야간침투작전 지휘 당사자인 박경석 대령(나)이 자유중국에 파견되어 육군대학을 비롯, 전 자유중국군 영관급 및 장성들에게 한국군 군사교리를 강의 했다. 이는 건군 사상 최초의 한국군 군사교리의 외국 전파로 각별한 의의가 있다.
특히 채명신 장군이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3년 8개월 동안 한국군은 단 한번 패배없이 전승을 기록했다. 이에 반하여 후임 이세호(육사2기) 사령관이 1969년 5월에 부임하자 리더십의 난맥으로 맹호사단은 19번도로변 '안캐패스' 전투에서 치욕의 상처를 입었는가 하면 한국군 철수 무렵, 백마사단은 베트콩에 의한 피습으로 주월한국군의 전승 기록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특히 여기에 남겨 둘 것은 이세호 후임 주월한국군사령관은 일본군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부임 이후 폭압적 리더십을 구사하면서 사사건건 예하 사단장들과 의견 대립을 이어갔다. 그 결과 1965년부터 쌍아놓은 채명신 장군의 리더십으로 일사불란했던 주월한국군의 조직 체계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리더의 리더십은 조직의 성공과 실패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확인 할 수 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이관장 작성시간 24.08.01
당시의 맹호의
작전에 박 장군님께서
전선 지휘의 애로는 수 없겠지요
퀴논에 주둔한 맹호사단 사령부
1969년 저의 소속 포병대대는
155m 628대대이었는데
저는 s-3포탄 상황병이었습니다
기억에 포탄지원은 미국측이
아낌없이 해 준 것으로 기억나네요
금일 주신 글 읽노라니
더욱 장군님의 철저하신
군인정신에 감탄의 마음
전하옵니다 강녕하십시오. 이미지 확대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8.03
함께 같은 개념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음을 확인 합니다.
모든 주월 한국군이 잘 싸웠습니다.
특히 채명신 장군 휘하에서 싸웠음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세기의 명장이었습니다.
이세호 사령관 이후의 주월한국군은 안캐패스에서 봉로만에서 한국군의 치욕을 남겼습니다. -
작성자장태순 작성시간 24.10.01 장군님의 이글을 읽고
두코작전에 참전한 병사로
기억이 새롭습니다.
중대전술기지 아주
견고했습니다.
저는 최후 발악 시점에
우리 분대가 탱크 앞 세우고
진입 중, 적이 던진 수류탄에
뒤따르던 분대장이 부상당해
후송 갔고, 제일 마지막에 철수했습니다.
오작교작전 때는 매일 수색
정찰, 기동해서 너무 힘들었고,
부비트랩 폭발로 3명 전사,
10여명 중경상자가 발생,
'절체절명의 순간'
이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 졌습니다.
강건하십시오.
장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