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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 전두환과 나의 '오징어 게임' 60년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4.09.18|조회수540 목록 댓글 4

       [콩트]

                   전두환과 나의 '오징어 게임' 60년 

                                                                         

                                                                      박경석

 

전두환과 나는 1964년 진해 육군대학 정규과정 클래스메이트였다. 당시 육군대학 정규과정은 1년제로서 3개월 단기과정에 비해 그 선발이 매우 엄격하였다. 영관장교의 집체 교육이 1년이라면 학과 과목이나 시간 수에 있어서 일반 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2년보다 오히려 긴 편이었다.

1963년에 선발시 선발 기준을 보면 전체 영관 장교 가운데 근무성적 상위자와 군사학교 성적 등 최우수자 중에서 두 번의 심사를 거쳐 100명을 선발하고 다시 50명씩 2개 클래스로 나누는데 나와 전두환 소령은 같은 클래스에 배정됐고 나는 그 클래스의 반장 격인 대표 학생장교였다. 당시 나는 중령 계급으로 전두환보다 상급자였으나 나이는 전두환 소령이 두 살 위였다. 나는 4년제 육사 선배임을 고집했고 전두환은 졸업 못한 선배임으로 자기의 정통성을 고집했다.

 

1년간 사사건건 트러블이 계속됐고 나는 늘 그를 압도했다. 그러나 극렬 대결까지는 안갔는데 마침내 졸업을 앞두고 실시하는 함안 종합야외훈련장에서 일이 터졌다. 실습이 끝나고 교수부장 백문오 대령이 초청하는 학생대표 만찬장에서 누가 뉴스를 전했다. 그 내용인즉 보안사령관 전신인 육군방첩부대장 박영석 장군이 윤필용 장군과 교체되었다는 것이었다. 박영석은 바로 내 위 형이었기에 순간 흥분하면서 "정치군인이 점령하는군" 하고 내 뱉자 전두환 소령이 나에게 대들었다. 전두환 소령은 학생 대표 자격이 없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총애한다고 해 교수부장에 의해 특별히 초대됐다. 서로 티격태격 싸우다가 멱살잡이까지 가는 지경에 이르자 교수부장이 나서서 일을 수습했다. 전두환은 나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여러번 접근을 시도했지만 나는 외면했다.

 

그후, 전두환이 장군이 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위세를 떨칠 때에도 나는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러나 육군의 고위 장군들은 계급과 관계 없이 굴욕적인 태도로 그에게 극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가령 그가 준장일 때 상급부대를 헬기로 방문하면 3성 장군인 군단장은 물론 4성 장군인 군사령관까지도 헬기장에 나가 그를 마중했다. 육군내 장교 간에는 전두환을 황태자로 조롱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었다.

전두환은 나를 껄끄럽게 보면서도 나의 경력과 업적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척했지만 내면으로는 나를 늘 질시하며 경계했다. 육군대학 졸업 후 훨씬 훗날 이야기지만 전두환은 '자기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는데 박경석은 웬 놈의 무공훈장이 그렇게 많으냐'고 술만 마시면 투덜댔다고 한다.

내가 잠시 전두환보다 앞섰던 시절이 있었는데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 시절이었다. 나는 몇 달 후면 장군진급이 예약된 정황이고 전두환 대령은 대령 진급 2년 늦은 후임 대령이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찾아와 간곡히 저녁 식사 대접을 한다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나섰는데 도착해 보니 어마어마한 요정이었다. 아마 내 생애 최고 식사 장소로 기억된다. 물론 미녀들의 시중은 영화에서나 볼 정도의 요염 그 자체였다. 나는 긴장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하겠다고 마음을 정한 탓인지 그가 이야기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그때 내가 한 말들은 '훈계'였을 것이다. 분위기가 냉랭해지면서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 요정에서 벗어났다. 몇 개월이 지났다. 장군진급 1순위라는 대령과장 박경석은 장군진급 명단에 없었고 심사 명단에도 없었던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핵심 5명은 특진 캐이스로 진급 명단에 올랐다. 나는 다음 해, 그 다음 해도 장군과는 먼 퇴역을 앞둔 고참 대령 신세가 되어있었다.

 

12.12군사반란 후,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어 경복궁 경회루 축하 연회장에서 잠시 나와 스칠 때 놀라는 기색으로 "아직도 준장이네요" 하면서 동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며칠 후 나는 뜻밖에 육군소장 직위인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영전됐다. 그런데 이 자리가 선심 쓴 직위가 아니라 함정이었다. 바로 인사참모부 차장은 당연직이 육군공적심사위원장이었다. 얼마 후 12.12 및 518 관련 백 명 가까운 정치군인에게 무공훈장 수여 심사 과제가 나에게 주어졌다. 정치군인들의 충성 테스트의 함정이라고 짐작이 갔다. 나는 반란군에게 무공훈장 수여 결정하여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음을 결심하고 불의의 승진 기회를 박차고 예비역에 편입되는 정의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하였다. 1981년 7월 31일.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에 의해 개정된 인사법에 따라 1년 단축한 만기 육군준장 7년 정년으로 군복을 벗었다.

군복을 벗자마자 전두환은 나를 국영기업체 농업진흥공사(현 농어촌공사)감사로 임명했지만 나는 사표를 내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군사(軍史) 바로잡기 위한 '대장정'의 험로로 결연히 향했다.

 

불편한 관계였던 전두환과 나는 전두환의 대통령 재직중 중요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신극범은 나와 대전고등학교 클래스메이트였고 국방장관 이기백은 진해 육군대학 정규과정 클래스메이트였다. 이런 인간관계에 따라 전두환측은 나에게 갑자기 빈번한 접촉을 시도해왔다. 그들로부터 각각 식사 초대를 받는 자리에서 대통령 전두환의 의중이 전달됐다.

내용은 국군의 날을 기해 거창한 이벤트를 맡아달라는 것과 대통령의 전기 작가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솔깃했다. 예편 후 작가로서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처지에서 그 이벤트는 나의 작가 생활에 좋은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전기 작가는 내심 받아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기 작가를 거부하면 모처럼 나에게 떨어진 호재가 사라질 것이 염려되어 일단 두 프로젝트를 수용하기로 했다.

 

그후, 훗날 이야기지만 전두환의 전기를 쓰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미국으로 출국, 장녀 집에 오래 머무는 동안 딴 작가로 바뀌어 전두환 전기가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나는 이 약속 위반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되어 때때로 나의 양심을 괴롭혔다.

청와대는 내가 집필을 거부한 것으로 판단, 다른 작가를 물색, 천금성 작가로 정했다. 그후 전두환의 전기는 천금성 작가에 의해 '黃江에서 北岳까지'가 동서문화사에서 출간됐다. 천금성 작가는 그후 그 전기에 기술한 '광주 사태' 내용으로 고초를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나 대신 천금성이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그에게도 미안한 마음으로 부담이 됐다.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계획은 한국전쟁 4대 영웅을 선정하고 그 가운데 박 장군이 가장 의미가 크다고 선정한 영웅의 전기를 집필하면 그 영웅의 대하드라마를 국군의 날을 기해 3일간에 걸쳐 KBS 1TV에서 방영케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그 프로젝트에 착수해 군 원로인 전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 전 2군사령관 이병형 장군, 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 박정인 장군과 함께 한국전쟁 4대영웅 선정에 나섰다.

당시는 한국전쟁 참전 장군들이 거의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의견 취합이 용이해 4대 영웅 선정은 선정 심사 당일 심사위원 4명 만장일치로 선정 확정 되었다.

첫째 영웅은 김홍일 장군이었다. 중국 국민정부 정규군 육군중장(국군의 소장급에 해당) 출신이며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였다. 한국전쟁시 모두가 반대하는 한강방어를 주장하며 초전의 위기를 극복하려 힘썼지만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모든 국군 사단이 사실상 궤멸의 위기에 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김홍일 장군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 한강방어를 맡겼다.

김홍일 장군의 한강방어 1주일은 한국전쟁의 절대 위기를 막아냈고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한국전쟁 미군 투입 결정을 성사시켰다. 만약 이 1주일간의 한강방어가 없었더라면 미국의 군사개입이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대한민국의 네 글씨가 한반도의 지도에서 없어질 뻔했다는 것이 내외 군사학자의 일치된 견해였다.

둘째 영웅은 김종오 대령이다. 일본군 출신의 유일한 한국전쟁 영웅이다. 김종오 대령은 춘천 북방의 6사단장으로써 적의 초기 공격을 막아 38선 일대에 배치된 백선엽 대령의 1사단, 유재흥 준장의 7사단, 이성가 대령의 8사단의 궤멸과 달리 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어 춘천대첩의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그 후 9사단장 김종오 소장은 백마고지 전투에서도 승전보를 기록하였다.

셋째는 낙동강전선 불퇴전(不退轉)의 결의로 결정적 위기를 극복하고 공세이전(攻勢移轉)의 승전을 지휘한 워커 장군, 끝으로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 장군으로 결정되었다.

나의 '한국전쟁 4대영웅' 선정 보고서'는 육군본부와 국방부의 동의하에 전두환 대통령에게 제출되었으며 대통령의 최종 승인하에 '한국전쟁 4대영웅'을 전 국민에게 공시하는 국가적 이벤트 작업에 착수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나 박경석을 직접 찍어 한국전쟁 중요 이벤트 책임자로 맡겼던 연유는 육군대학 정규과정 클라스메이트 시절 100명의 학생 장교 가운데 한국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전해 화랑무공훈장 수훈자는 나밖에 없었고 정규과정 졸업 후 육군대학 군단방어 교관으로 선발되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 분석 책임을 맡고 있었던 전력 때문이었다.

국군의 날 이벤트는 성공리에 끝났고 내가 저작한 5성장군 김홍일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얼마 후 청와대 신극범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나를 찾아왔다. 전두환 대통령의 의중을 전하면서 "부엇이든 원하는 직위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정중히 "창작에 전념 하겠다" 고 전두환의 제의를 거부했다. 그 거래가 전두환과 나의 마지막 관계였다.

 

 

軍史 검증 작업 - 陸軍本部 軍史硏究所長 한설 장군 일행.박경석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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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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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관장 | 작성시간 24.09.18 차분히 읽노라니
    당시의 상황을 보는 마음이네요
    군인의 정도가 먼 길을 걸어온
    상대는 死後에도 머무는 자리는
    연희동 골방안에 罪는 값이 있음이죠
    철두철미하신 박 장군님의 자태에
    뭔가의 느낌은 많았으리라 보네요

    갑자기 별을 넷씩이나 달았지만
    그 별은 모두 사라졌음이 현실이지요
    세상은 진실에 굴레는 꼭 있습니다
    육군사에 길이 빛나실 박 장군님
    컴퓨터도 할 줄 몰랐던 인물이
    오죽했겠나요 하물며 모듬이 없어진
    역사의 괴물 無視의 굴레이지요
    맺음하네요 만수무강하십시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9.18
    상세히 읽으셨군요.
    지난 시절은 분노와 눈물의 세월이었죠
    꿈과 같이 흘러갔습니다.
    때로는 자살까지 시도를 했지만 하늘이 구해주셨습니다.
    事必歸正, 지금은 행복합니다.
  • 작성자없이계신이 | 작성시간 24.09.29 박 장군 님! 건강하신지요. 남는 것은 역사의 기록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라도 진실을 밝히는.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9.30
    고맙습니다. 역사를 쓰는 마음으로 이 서재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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