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벽 연대기。윤의섭。
내 지향점은 늘 북반구로 향한다 자성에 이끌리듯이
그곳에 거대한 절벽에 서 있다 시간을 뚫고 솟은 망각의 벽
한 귀퉁이에 강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은하를 탁본하여
남에서 북으로 천구를 가로지른 삼백 억의 태양이 흘러간 흔적이 새겨 있다
나는 안다 북벽의 뿌리와 마천루 사이는 고단한 영혼으로 채워야 할 여백이라는 것을
작은 틈바구니에 겨우 둥지를 튼 이 간빙기가 단 한 줄 그어진 퇴적층인 것을
북벽을 생각하면 이미 북벽에 이른다
미래를 꿈꾸자 모든 과거가 생겨나듯
1. 고생대
새벽에 일어난 P씨는 밭으로 나가 살충제를 뿌렸다
벌레는 죽여야 할 존재였다 P씨는 새참을 먹고 다시
흙을 다져주었다 오후에는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P씨는 연립주택에 살고 있다 반지하에 사는 동생네가
반찬거리를 갖다 주었다 P씨는 밭을 김매다
죽은 배추벌레를 발견했다 저녁에 동생네 집에서 반주를 걸친
P씨는 어두운 계단을 걸어 현관 앞에 섰다
감지기로 자동 점등된 백열구 불빛이 P씨에게
뿌려졌다 신화 시대에서 그리 멀리 오진 않았다
2. 성스러운 시간
그녀를 안고 깊은 잠에 빠진다
삼십 년 전에도 그녀의 품에서 잠든 적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천 년 전에도 그녀와 깊은 잠에 빠진 적 있다
그녀와 잠든 순간만큼은 언제나 똑같다
깨어나보면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아침에 늘 혼자 깨어난다
하루 동안 새하얗게 늙어도
아침이면 생의 처음으로 돌아와 있다
늘 그녀의 품에서 죽었다 살아난다 불멸의 시대다
3. 미래계
산 너머 깊은 골에 손바닥만 한 땅뙈기가 있다
약초를 심어놓고 가끔 찾아간다
지나가는 바람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장소에
갈 때마다 영혼을 조금씩 떼어놓고 온다
비 피할 움막을 지어놓고 책도 한 권 갖다 놓았다
심심할 때 읽으라고
내 모든 기억까지 옮겨지면
거기서 느릿느릿 산보하라고
서툰 산길을 다져놓았다
하루는 땅뙈기가 조금 움직인 듯했다
땅은 어디론가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긴 여정이 끝나는 날
세상엔 손바닥만 한 땅뙈기만 남을 것이다
영혼이 거니는 신전만 남아
잊혀진 인류를 명상할 것이다
늙은 까마귀가 날아오길래 나는 약초 잎을 부리에 물려준다
4. 先캄브리아기
ㅡ지구의 나이는 대략 47억 년 정도인데, 최초의 생명체가 야트막한 웅덩이 속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27억 년 전이다.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식물의 가장 오래된 화석은 약 25억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헝클어진 머리는 가장 진화한 형태의 前頭葉이다
오랜 사색의 결과로 나무는 지층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로 결정했다
태어난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나무의 몸을 입는다 나무는 죽음 이후에도 산다
25억 년을 그렇게 온통 빛을 빨아들이며
자신의 존속에 대해 계절마다 해탈하며
바람이 스치는 게 아니라 바람 속을 헤엄치는 거라네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몸속에선 억겁이 흐르고 있다네
5. 天長地久,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옥상에 올라 불타는 노을을 본다
옥상에 올라가 불타는 하루저녁에 몸을 담근다
옥상에는 시들어 죽은 화초가 박제된 채 화분에 꽂혀 있다
불사조처럼 죽어야 사는
불사조처럼
*
당신은 별빛의 화석이다
별은 죽을 때 가장 반짝이고/당신은
가장 빛나며 가장 먼 저편으로부터 간신히 찾아온
지울 수 없는 상흔이다/그러나 슬퍼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화석이므로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문학과 지성사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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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땡삐 작성시간 08.03.26 좋은글 올려 주셔서 행복하게 맞이하는 일터 입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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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무진 작성시간 08.03.26 "북벽의 뿌리와 마천루 사이는 고단한 영혼으로 채워야 할 여백이라는 것". 성스러운 시간 편과 마지막 부분이 가장 여운이 남습니다. 당신은 별빛의 화석이고 나는 당신의 화석이므로 슬퍼하지 않는다. 이 시인의 시를 몇 편 더 읽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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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사(黃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03.27 몇편 더 간추려서 올리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