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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배영옥]

작성자초록여신|작성시간11.03.09|조회수192 목록 댓글 1

 

 

 

 

 

 

 

 

 

 

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세로 빛살 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나를 읽고 있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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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옥

1966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9년 『매일신문』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현재 '천몽'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뭇별이 총총 / 실천문학사, 2011.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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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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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금란초 | 작성시간 11.03.10 요즘 시인들은 석사는 기본이가 부다. 내가 아는 언니의 이름이 배영옥이다. 헌데 시인같은 이름은 아닌것 같다. 내 이름처럼.
    오늘밤은 손톱달이 이쁜 밤이다. 그래서 시가 시로 보이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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