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 이성부 (李盛夫) 시인, 2월 28일 별세
1942년 1월 22일 광주에서 태어난 이성부 시인이 간암으로 지난 28일 아침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그는 광주고등학교 재학시절 전국 고교생 백일장대회에서 태풍〈사라호〉를 써서 장원을 한 바 있었고 민중들의 어렵고 고통 받는 삶을 작품 속에서 여러 형태로 그려낸 시인으로,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이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 아래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민중시를 썼다. 1980년대 말 이후에는 산(山)과 산행(山行)을 소재로 한 시를 주로 써 왔다. 1960년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9년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해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에서 홍보부, 생활부, 사회부, 문화부 부장 및 편집국 부국장을 지내고 1997년 사직했다.
1962년 〈현대문학〉에 〈열차〉 등으로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고,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되었다. 〈이성부 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백제행〉(1976), 〈전야〉(1981)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과 서민의 정한을 담아내는 사실주의 시로서, 민중적 차원의 보편성을 획득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산행에 나서, 사회구조의 부조리와 폭력에 대한 절망, 자기학대와 죄의식이 역사의 상처와 만나면서 어떻게 제자리를 찾는가를 성찰하였고, 이후 산에 얽힌 역사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살이를 온전히 담아내는 시를 썼다. 〈빈산 뒤에 두고〉(1989), 〈야간산행〉(1996), 〈지리산〉(2001),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2005), 〈도둑산길〉(2010) 등은 그 결과물이다. 그에게 있어서 '산'은 한국인의 삶과 역사, 문화의 중요한 무대이자 배경이며 삶의 터전이자 의식 형성의 원형적 상징이다. 시집 이외에 산문집 〈산길〉(2002)을 냈다.
현대문학상(1969), 한국문학작가상(1977), 대산문학상(2001), 편운문학상(2005), 가천환경문학상(2007) 등을 수상했다.
우리들의 양식(糧食) (외 5편)
이성부
모두 서둘고, 침략(侵略)처럼 활발한 저녁
내 손은 외국산 베니어를 만지면서
귀가(歸家)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
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食事)와
거기 모인 구릿빛 건강의 힘을 쌓아둔다
톱밥에 잘려지는 베니어의 섬세(纖細)
쾌락(快樂)의 깊이보다 더 깊게
파고들어 가는 노을녘의 기교(技巧)들
잘한다 잘한다고 누가 말했어
한 손에 석간(夕刊)을 몰아쥐고
빛나는 구두의 위대(偉大)를 남기면서
늠름히 돌아보는 젊은 아저씨
역사적인 집이야, 조심히 일하도록
흥, 나는 도무지 엉터리 손발이고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함마 소리, 자갈을 나르는 아낙네가 십여 명,
몇 사람의 남자는 철근(鐵筋)을 정돈한다
순박하고 땀에 물든 사람들
힘을 사랑하고, 배운 일을 경멸하는 사람들
저녁상과 젊은 아내가 당신들을 기다린다
일찍 돌아간다고 당신들은 뱉어내며
그러나 어딘가 거쳐서 헤어지는
그 허술한 공복(空腹),
어쩌면 번쩍이는 누우런 연애(戀愛)
거기엔 입, 입들이 살아 있고 천재(天才)가 살아 있다
아직은 숙달되지 못한 노오란 나의 음주(飮酒)
친구에게는 단호하게 지껄이며
나도 또한 제왕(帝王)처럼 돌아갈 것이다
늦도록 잠을 잃고 기다리던 내 아내
문밖에 나와 서 있는 그 사람
비틀거리며 내 방에 이르면
구석 어딘가에 저녁이 죽어 있다
아아, 내 톱날에 잘려지는 외국산 나무들
외롭게 잘려서, 얼굴을 내놓는 김치, 깍두기,
차고 미끄러운, 된장국 시간(時間)
베니어는 잘려 나가고
무거운 내 머리, 어제 읽은 페이지가 잘려 나간다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
활자(活字)들도 하나씩 기어서 달아나는
뒹구는 낱말, 그 밥알들을 나는 먹겠지
상을 물리고 건방진 책을 읽기 위하여
나는 잠시 아내를 멀리하면
바람이 차네요 그만 주무셔요
퍽 언짢은 자색(紫色) 이불 속에 누워
아내는 몇 차례 몸을 뒤채지만
젊은 아내여 내가 들고 오는 도시락의 무게를
구멍 난 내 바지가랑이의 시대(時代)를
그러나 나는 읽고 있다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철근공(鐵筋工), 십여 명 아낙네, 스스로의 해방(解放)으로 사라진 뒤
빈 공사장에 녹슨 서풍(西風)이 불어올 때
나도 일어서서 가야 한다면
계절은 몰래 와서 잠자고, 미움의 짙은 때가 쌓이고
돌아볼 아무런 역사(歷史)마저 사라진다
목에 흰 수건을 두른 저 거리의 일꾼들
담배를 피워 물고 뿔뿔이 헤어지는
저 떨리는 민주(民主)의 일부(一部), 시민(市民)의 일부(一部)
우리들은 모두 저렇게 어디론가 떨어져 간다.
벼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그 추위를 이기고
다시 돌아온 사람아.
누룩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無力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들 열어 당도해야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고
찢겨지고 피 흘리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면서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 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이제부터 큰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더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어려운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찌 우리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벼랑에서
잘 지냈는가 마음이 먼저 안부를 묻고
그대 몸 위아래 주변을 살핀다
물기 머금은 틈새가 햇볕에 반짝이는 것은
어젯밤 내린 소나기에 그대 놀라 눈을 떠서
아직도 먼 데 하늘 바라보고 있음인가
조심스럽게 그대 몸 어루만지며
그 안에 흐르는 피의 온도를 감지하는
내 손가락의 안간힘의 이 천의무봉이
안쓰럽다고 내려다보는 나의 영혼을 내가 느낀다
내 영혼이 이미 나에게서 빠져나가
저 위 벼랑 끝 한 그루 소나무로 서서
나를 굽어보는 일이 어제오늘 비롯된 것은 아니다
소나무 가지 흔들려 나를 손짓하지만
홈이나 돌기를 더듬어 찾는 내 몸에
아직 길은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은 닳고 문드러져서 소멸을 예고하지만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는 생성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이 어려움이 다하는 곳에서야말로
나는 새로 허리를 펴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리라
모든 생성은 그래서 눈부신 트임이리라
나의 몸이 나의 영혼과 외롭게 싸우는 동안
세계는 저만큼 비켜나서 따로 논다
비로소 나는 완전한 자유에 이르러
날개를 단다 솔 이파리 두어 개 뜯어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사과나무 작성시간 12.03.05 삼가 명복을 빕니다.
-
작성자갈대 작성시간 12.03.08 시인님, 시인님, 시인님! 하늘나라에 가서도 아름다운 시 쓰셔서 별빛으로 반짝이며 저희와 함께 하셔요. 거기선 아프지 않으시길 빕니다. 오래오래 빛날 님의 시들을 사랑합니다.
-
작성자은연 작성시간 12.03.10 푸른 시의 방 회원이, 1,277명. 참 많은 숫자인데...거대한 세계가 사라지는 한 시인의 죽음에, 이리도 무관심하다니..., 가시는 길 먼곳은 아니여도, 동구 밖 까지 배웅한다는 의미에서 댓글이라도 많이 달아드렸으면...시를 쓰는 사람이, 최소한의 시인의 삶에 이토록 무관심하다니...참 쓸쓸하고 무정한 세상.
-
작성자전다형 작성시간 12.03.23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작성자목련화 작성시간 12.03.26 삼가 명복을 빕니다.시를 쓰고 사는 일이 힘든 이 세상에서 시 쓰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좋은 시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