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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낸다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02.04.22|조회수1,666 목록 댓글 12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낸다
- 시가 태어난 자리, 또는 시작 과정(詩作過程)

강인한


며칠 전입니다. 대개는 저녁 일곱 시에 일과가 끝나는데 그 날은 저녁 햇빛이 비낀 다섯 시 무렵에 일과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요즘은 해가 짧아져 일곱 시면 벌써 밤이지요. 입동이 이틀 전이었고, 예년 같으면 가을 기분이 한창인 절기인데도 날씨는 초겨울처럼 춥고 스산하였습니다. 교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스스스 하는 맑은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운 어디에도 계곡이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정문 건너편에 노란 은행나무 몇 그루가 저녁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금빛으로 빛나고 있을 뿐, 물이 흐르는 계곡은 아무 데도 없는 곳이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황금빛으로 샛노랗게 위용을 자랑하는 듯한 은행나무들 곁에서, 비탈에 선 나무의 무성한 은빛 잎새들이 팔락거리며 바람에 반짝반짝 빛나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은사시나무였습니다. 은수원사시나무라고도 하지요. 어떤 시에서 나는 그 나무를 소재로 삼은 적이 있습니다. 시에서 은수원사시나무라고 쓰기엔 왠지 내키지 않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시인들의 시 속에 곧잘 등장하는 초목이 생각납니다. 애기똥풀꽃. 한두 사람도 아니고 많은 이들이 너도나도 그 애기똥풀꽃을 시에 등장시키는 것을 보고서 무척 식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래 전에는 쥐똥나무, 물푸레나무가 그렇게 시 속에 많이 나오는 게 무슨 유행이듯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많이들 쓰게 되면 진부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은사시나무의 잎새들이 바람에 불려 서로서로 몸 부딪는 소리가 마치 물소리처럼 스스스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맑고 조촐하게 들리는 소린지, 그 스스스 하는 물소리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아마도 나무의 깊은 뿌리에서 길어 올린 깨끗한 물줄기가 가지의 그 이파리까지 올라와 싸늘하게 부는 바람과 만나서는 그윽하고 투명한 물소리를 내는 게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낸다."
문득 그런 시구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영감(靈感)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무척 신선한 느낌으로 그 말은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은사시나무의 물소리'를 마음속으로 굴리며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 속에서 앉아서도 그 생각만을 굴리다가 가지고 있던 서류봉투의 겉에다가 나는 몇 줄을 끄적거렸습니다.

엊그제가 입동이던가
코트 깃을 여미며 퇴근하는 길에
가까운 데서 물소리가 들렸다
이상도 하여라, 여긴 골짜기가 아닌데
누가 물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일까
금빛 눈부신 은행나무 곁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는 사물이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거나, 그에 대한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 정서가 읽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시인은 바랍니다. 더러는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를 웃길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흥분시켜 세상을 보는 흐려진 눈을 닦아주고, 시인 못지 않게 공감의 진폭을 넓혀 현실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서정시 속에 심오한 사상이나 철학을 담고자 노력한다면 그는 차라리 시를 쓰지 말고 철학적 산문을 써야 하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는 범상한 대중들이 잊고 사는 높고 깨끗한 정신 세계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고결한 삶의 자세, 의연한 가치의 추구는 바람직하지만 설익은 형이상학적 세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꼴불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심오한 철학을 풀어서 글로 표현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눈이 밝아야 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구체적인 표현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주관적인 정서를 펼쳐내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독자에게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시인이 자기 지식이나 사상을 설교해서는 안 되고 또한 설득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자기의 깊은 사상을 독자가 몰라본다고 깔보거나, 자기만의 철학을 독자가 몰라도 나는 상관없다는 태도로써 현세를 초월하며 사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사실 시인이 아닙니다. 철학자, 혹은 사상가 그도 아니면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시는 눈물입니다. 눈물이 98 퍼센트의 수분과 염분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시에는 의미나 관념 외에 최소한의 정서가 함유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정서가 함유되지 않은 시는 눈물이 아니라 맹물입니다.
은사시나무 잎새가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물소리로 유추하는 것은 철학이나 사상으로 가능한 게 아닙니다. 새로움에 눈뜨고자 하는 자신도 모르는 열망과 순수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자세― 관조(觀照)의 심경이 마주쳤을 때 그것은 가능합니다. 버스 속에서 몇 줄 적어놓은 시상은 아직은 시가 될 수 없는 원석(原石)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 날 밤에 그 몇 줄을 토대로 나는 초고(草稿)를 이렇게 썼습니다.

엊그제가 입동(立冬)이던가
코트 깃을 추스리고 퇴근하는 길에
가까운 데서 물소리가 들렸다
이상도 하여라 여긴 골짜기가 아닌데
누가 물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일까
고개 돌려 바라보니
금빛 눈부신 은행나무 곁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잊고 지내었구나
뿌리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한 줄기의 그리움이
저렇게 스스로 깊어져서
바람에 볼 비비며
잎새마다 부서져 물소리를 내고
나를 부르는 것을.

물. 물의 함축적 의미는 얼마든지 다양합니다. 물은 항상 수직을 지향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이나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나 그것들이 지향하는 것은 수직의 하강일 것입니다. 또한 물은 신화적 의미에서 생명의 시원(始原)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른봄의 빗소리를 좋아합니다. 그 속삭이는 듯 차분한 방문은 나를 영원한 모성의 세계에 들게 하는 까닭입니다. 때로 그 물이 세상에 범람하여 죽음을 불러오는 수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물이란 순리와 평화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물소리는 어떤 것일까요. 연암(燕巖) 선생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밤에 물소리가 더욱 선명하고 크게 들린다 하였습니다. 그것은 밤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가 더욱 밝아지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물은 실재하는 사물입니다. 그러나 물소리는 그 사물과 다른 사물이 부딪쳤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겠지요. 사실 물 자체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물이 없이 물소리만 독립해서 나타나기는 어렵습니다. 물과 또 다른 사물이 있어야만 물소리가 생성되게 마련입니다. 물소리가 들린다는 건 비록 보이지 않을 때에도 물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나는 내 시 속에 '물소리'를 많이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그 물소리는 대체로 흘러간 것, 흘러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이미지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은사시나무의 잎새들이 내는 물소리,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물을 물소리가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부재의 사물을 증명하는 허상으로서의 한 현상이 내 눈을 번쩍 뜨게 한 겁니다. 아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을 저 은사시나무가 실재하는 그리움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다음날 아침 나는 초고를 다듬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그리워하는 그 물소리와 마찬가지로 나의 그리움 역시 그러한 물소리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겁니다. 그래서 다음의 구절들이 마무리로 붙여졌습니다.

내가 잊고 있는 부끄러운 사랑도
뿌리 깊이 묻혀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대가 무심히 내다보는 유리창에
물소리로 들릴 것인가.

그리고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물소리가 그대를 부를 때」라고. 여기서의 '그대'란 구체적인 대상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닙니다. 은사시나무의 물소리가 '나'를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나'와 상대되는 개념으로서의 '그대' 일 뿐입니다. 독자들은 옛날의 연인을 쉽게 떠올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게 틀린 생각이라고 고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읽어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해서 일단락을 본 시를 인터넷의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연의 구분 없이 썼던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읽는 호흡과, 읽으면서 떠올릴 이미지의 선명성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연을 구분하는 게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발표한 시는 1연이 "가까운 데서 물소리가 들렸다", 2연이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3연이 "그리워하는 것을"로 각각 끝나게 하고, 그리고 나머지가 4연이 된 것입니다. 4개의 연이 3행, 5행, 7행, 4행으로 이루어졌는데 3연의 7행이 다른 연들에 비하여 너무 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첫 연의 서술이 단순한 산문적 진술인 것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날 밤에 다시 고쳤습니다. 은행잎의 금빛과 은사시나무의 은빛이 허술하게나마 대비적 이미지가 될 수는 있으나 흡족한 게 아니었습니다. 금빛이란 말 대신 '노란'이란 형용사를 쓰고 '은빛' 그리움으로 강조해 보았습니다. 3연의 끝 행에서"그리워하는 것을"을 지우고 그냥 "물소리를 내는 것을"로 처리해도 같은 뜻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눈부신 노란(금빛) 은행나무'와 '한 줄기의 은빛 그리움'의 대비, 첫 연의 '나'와 끝 연의 '그대'의 대비, 그리고 복선으로 숨은 '바람'의 수평적 이미지와 '물(한 줄기의 그리움)'의 수직적 이미지의 대비, 존재하는 현상과 부재하는 사물과의 대비― 이러한 대비적 구성을 나는 마음속으로 가늠해 보았습니다. 아울러 어딘가 맺히는 듯한 가락을 유연하게 다듬고자 끝에다가 "물소리로 물소리로 흐를 것인가"의 반복을 덧붙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아직도 미흡하지만 이제 더 손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파블로 네루다의 말처럼 이 작품은 그렇게 '내게 찾아온 시'입니다. 마지막으로 퇴고를 마친 졸시를 여기에 옮겨 봅니다.


물소리가 그대를 부를 때


엊그제가 입동(立冬)이던가
코트 깃을 세우며 퇴근하는 길
가까운 데서 물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상하여라 골짜기도 보이지 않는데

누가 나를 부르는 걸까
고개 돌려 바라보니
눈부신 노란 은행나무 곁
은사시나무가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잊고 지내었구나
뿌리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한 줄기의 은빛 그리움이 스스로 깊어져서
바람에 볼 비비며
잎새마다 부서져 물소리를 내는 것을

내가 잊고 있던 부끄러운 사랑도
뿌리 깊이 묻혀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대가 무심히 내다보는 유리창에
물소리로 물소리로 흐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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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박선희 | 작성시간 19.09.05 귀를 더 크게 열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이명숙 | 작성시간 20.01.10 감사합니다.
  • 작성자우니꽃 | 작성시간 21.04.08 구체적 상황에서 완전한 시 한 편이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가르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물머리 | 작성시간 25.01.11 일상 속에서 불현듯 찾아온 시상을 보듬고 다시 한 켠 물러나 조금 더 틀 잡고 살을 붙여 약간은 추상스런 느낌에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로 구상으로 그리고 그 위에 지나간 시간들의 기억을 흔적을 곱게 덧칠하고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전체에서 거스름으로 보이는 부스러기들을 걷어내고 혹은 부족한 가락을 덧붙이고 참 곱고 곱게 시를 낳으시네요

    제게는 너무 먼 곳의 시작으로 느껴져 부럽고 안타깝고 슬프네요
    그 작업의 성격이나 과정이 저의 경우에는 매우 다르고 곱지 않습니다.
    고쳐보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박포 | 작성시간 25.05.16 배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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