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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김경인,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 평설 / 이송희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1.08.08|조회수284 목록 댓글 1

역설적 이미지로 빚은 ‘이상하도록 아름다운 저녁’

 - 제1회 웹진시인광장 신작시상  김경인,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 에 대하여

 

 

 

이 송 희 

(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2000년대에 들어 우리는 컴퓨터의 가상공간을 통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원리인 ‘이기심’은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강한 영향을 미친다. 현대 사회의 개인적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생존의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는 존재양식들은 경시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모든 저항은 무기력하다는 것이며, 많은 불합리한 일들이 합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경인 시인은 이번 시,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으로 소통이 단절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시민의 모습과 소시민을 대하는 사회의 방식을 통해서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쓸쓸한 풍경들을 진솔하게 그린다.

   다수의 시인들에 의해 제 1회 《웹진 시인광장 신작시상》에 선정된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을 읽으며, “아름다운 저녁” 속으로 들어가 “다정하게, 아름답고 우아한 칼질로” 뱉어졌을 시간들을 기록해 본다. 얼마나 많은 말들이 함부로 살해되었는가. 우리는 그 칼부림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휴지통에 던져진 폐휴지처럼 살기로” 마음먹은 날들이 나를, 우리를 더 구석으로 내모는 것은 아닐까. 역설적인 분위기의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이라는 제목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이기적인 삶의 실체, 폭력과 범죄의 위기에 노출된 현대인들의 불안과 고독, 소외의 이미지들을 끌어내려는 감각적인 의도로 보인다. 몇 개의 역설적 이미지의 단어들로 자연스럽게 개인의 문제를 현대자본주의의 문제로 이어가는 시인의 노련한 솜씨가 돋보이는 시다. 마치 카프카가 그의 소설들을 통해 소수자를 끌어안듯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진정한 소수자의 의미와 사회의 모순구조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너는 나를 뱉어낸다

      다정하게, 아름답고 우아한 칼질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은지 모르는 채

      어떤 의심도 없이 또박또박 나를 잘라내는

      너의 아름다운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한껏 비루한 사람이 되어

      아름다운 저녁 속으로 흩어진다

      푸르고 차가운 하늘에 흐릿하게 별이 떠오르듯이

      내가 너의 문장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글자로 돋아나듯이

      귀는 자꾸 자라나 얼굴을 덮는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에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자

      나는 나로부터 흘러나와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열리지 않는 이중의 창문.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함부로 살해되는 모음과 자음처럼

      아무도 죽어가지 않는 저녁에

      침묵의 벼랑에서 불현듯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처럼

      멸종된 이국어처럼

      나는 죽어간다, 이상하도록 아름다운 이 저녁에

      휴지통에 던져진 폐휴지처럼 살기로 하자,

      네가 내게 던진 글자들이 툭툭 떨어졌다

      상한 등껍질에서 고름이 흘러내렸다

      네가 뱉어낸 글자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자

      그렇고 그런 사람과 그저 그런 사람 사이에서

      네 개의 다리가 돋아났다

      개라고 부르자 개가 된

      그림자가 컹컹, 팽개쳐진 나를 물고 뒷걸음질 쳤다

 

                   -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

 

   기계문명의 활달함으로 인해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한없이 커지고 있다. 거대한 권력집단 속에서 점점 타자화 되어가는 소시민들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더더욱 주변으로 내몰린다. 거짓과 왜곡된 이미지로 스스로를 속이고 타인을 속이고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주의가 불러온 소외와 소통의 부재는 나의 정신과 육체를 소모하게 하는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현대사회의 소외의 문제나 계층 간의 차별에서 오는 고독한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것에서 나아가 현대사회가 낳은 전반적인 문제를 역설적으로 풀어내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사회를 향한 자가진단을 내리게 하는 것 아닐까.

   ‘너’는 ‘나’를 뱉어낼 수 있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은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나’의 생각들은 모두 무시된다. 게다가 그런 일방적인 칼질은 다정하면서도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걸로 위장되기까지 한다. 자신의 행동에 어떤 자책도 의심도 없이 ‘나’를 또박또박 잘라내는 ‘너’의 입술 또한 “아름답다”는 말로 포장된다. 그리고 ‘너’에 의해서 가차 없이 뱉어진 ‘나’는 아무런 저항과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아름다운 저녁 속으로” 흩어진다. 권력의 이기심 앞에 우리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져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아름답고 우아한 칼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저녁”이라는 역설적 이미지는 “너”라는 존재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놓은 위장된 언어이다. 우리는 이 위선의 덫에 걸려들어 어둠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빠뜨려 버린다. 시인은 권력과 위협을 표상하는 “칼질”이라는 행위와, 욕망과 유혹을 표상하는 “입술” 그림자를 지우는 “저녁”의 이미지들로 섬세하게 사회의 내부를 파고든다.

   그러나 ‘너’의 문장 속에서 ‘나’는 지워지지 않는 글자이다. 늘 신경이 쓰이는 존재이기도 하고, 늘 신경이 거슬리기도 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가 ‘나’를 부를 때 내가 “나로부터 흘러나”오면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버리고 ‘나’는 ‘그’의 그룹에 소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너’와 ‘나’ 사이에는 “열리지 않는 이중의 창문”이 가로놓여 있다. 창은 벽 너머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통, 가능성, 바라봄을 상징하는데, 이 시에서의 창 역시 의식세계의 바깥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굳이 “이중의 창문”이라 한 이유는 그만큼 화자와 타인 사이의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소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들은 다른 세계를 사는 존재들이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함부로 살해되는 모음과 자음처럼”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처럼” “멸종된 이국어처럼” 죽어가는 것이다. 더더욱 구석으로 밀려나 잊혀지고 땅 속으로 매몰되는 것이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과 “아무도 죽어가지 않는 저녁” 은 앞의 “다정하게, 아름답고 우아한 칼질”과 “아름다운 입술”, “이상하도록 아름다운 저녁”으로 이어지면서 침묵이 흐르는 저녁을 피로 물들이는 수많은 일들이 ‘나’와 ‘우리’를 위협하고 괴롭히고 있음을 환기한다. “아름다운 저녁” 앞에 “이상하도록”이라는 부사어를 결합하는 시인의 의도가 모순과 폭력, 불안의 이미지로 뒤덮인 오늘의 사회를 여실히 들춰낸다. 폭력이 난무하여 파괴된 인간성이 날카로운 촉수를 들이밀고 있으며, 그럼으로 인해 사회의 불안이 고조되고 가치관의 혼란이 야기됨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침이 오는 현실에 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아무도”라는 부사어는 특정 부류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소시민들이 희생당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폐휴지”로 살기로 한다. 여전히 그가 던진 문자들을 얻어맞으면서, ‘나’는 프란츠 카프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처럼 등껍질에서 고름이 흘러내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고 그런 사람”과 “그저 그런 사람” 사이에서 네 개의 다리를 가진 동물이 태어난다. 그것을 화자는 개라고 부른다. 개가 된 그림자가 “팽개쳐진 나”를 끌고 뒷걸음질 친다. 세상으로부터 ‘나’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해서. 여기서 개는 정신적 속성을 상실한 소시민적 삶의 속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음에도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는 저녁”, “이상하도록 아름다운 저녁”이 된다. 더구나 시인은 “그런 사람”, “그렇고 그런 사람”, “그저 그럼 사람”들로 치부해 버림으로써, 주류와 비주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가진 자와 못가진자의 괴리감을 강한 주제의식으로 부각시킨다.

   이용가치가 사라지고 노동생산물을 빼앗기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소외된다고 보는 마르크스의 개념처럼 이 사회는 거대한 물질만능주의에 취해 인간의 진정성을 바라보지 못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당하는 현실이다. 게다가 요즘은 컴퓨터의 일상화로 인해 저마다 스스로의 세계에 도취되어 상대방과 진정한 대화를 하지 않는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상처받고 자살을 하는 시대다. 이 시는 그러한 알레고리를 역설적 언어로 풀어가면서 현대사회의 모순을 들추며 우리의 반성을 이끌어 낸다.

   “검은 사람들과 더 검어질 사람들이/ 서서히 낯빛을 잃어가는 숲길에”(「숲」)서 발걸음을 멈추고 하염없이 생각에 잠기며, 시인은 무모하게도 이중의 창 저편에서 ‘너’의 대답을 기다리며 두드림을 반복한다. 가면을 쓴 이들이 누군가를 뱉어내고 잘라내고 부수는 현장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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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 시인은

1976 광주출생. 2003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봄의 계단」이 당선되어 등단. 2010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2009 오늘의시조 시인상을 수상했으며, 2010 《서울문화재단》문학창작 활성화 지원금을 받았다. 전남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시집으로 [환절기의 판화]가 있다. 현재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이며, 전남대와 조선대 국문과 등에 출강 중이다. poetry2003@naver.com

  

      _웹진《시인광장》2011.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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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강인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8.08 김경인의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은 10.09.14일자의 [좋은 시 읽기] 2721번 글로서 '지는 해'와 함께 올린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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