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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명문장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

작성자정현규|작성시간15.08.16|조회수263 목록 댓글 1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


먹새 그려   먹새 그려

곳 것거 노코 無盡無盡무진무진 먹새 그려
이 몸 주근 에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여 가나

流蘇寶帳유소보장萬人만인이 우러녜나

어옥새 속새 덥가나무 白楊백양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 흰   비 굴근 눈 쇼쇼리람 불제 뉘  먹쟈고
믈며 무덤우희 나비 람 불제 뉘우들 엇지리


<해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셈하며 한없이 먹새 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매어 가나,

호화롭게 꾸민 상여를 많은 사람이 울면서 따라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이 우거진 숲을 가기만 하면

누런 해, 밝은 달, 가랑비, 함박눈, 회오리바람이 불 때에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하리오?
하물며 무덤 위에서 원숭이가 휘파람을 불며 뛰놀 때 가서야 뉘우친들 어떻게 하리오?


► 그려 : 그리어의 준말
► 곳 : 꽃
► 算(산) 노코 : 셈하며. 이 시에서는 잔 수를 세는 것
► 無盡無盡(무진무진) : 한없이. 없는 것이 없음.
► 주리혀 여 : 꽁꽁 졸라매어
► 流蘇寶帳(유소보장) : 호화롭게 꾸민 상여. ‘류소’는 기(旗)나 상여의 꾸밈으로 다는 오색실, ‘보장’은 화려한 포장을 뜻한다.
► 우러 녜나 : 울면서 가나
► 白楊(백양) : 은백양. 버들과의 낙엽활엽 교목, 미루나무.
► 가기곳 : 가기만
► 누른  : 누른 해[黃日]
► 비 : 가랑비. 이슬비
► 쇼쇼리람 : 회오리바람. 음산한 바람, 슬픔을 자아내는 바람.
► 나비 : 잰나비. 원숭이
► 람 : 휘파람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 중 하나가 죽음이다. 인간의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상황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 권주가(勸酒歌, 술을 권하는 노래)로 알려진 정철의 「장진주사」다.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죽을 팔자를 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죽음 앞에서는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매어’ 갈 수 밖에 없는 미천한 사람이나, ‘호화롭게 꾸민 상여를 많은 사람이 울면서 따라가는’ 고귀한 사람이나 결국은 동등해진다. 화자는 이 둘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죽음이 누구에게나 오는 절대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일시적인 향락인 ‘음주’와 인간이 바라는 ‘영원불멸’이 비교되면서 그 ‘불멸에 대한 염원’이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인간의 유한성, 이것에서 오는 허무는 ‘누런 해, 밝은 달, 가랑비, 함박눈, 회오리바람’ 등의 삭막한 소재와 ‘원숭이의 휘파람’이 야기하는 죽음의 비극이 만나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허무의 표현은 반대로 생에 대한 강한 애착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 잔 술’을 권하며 화자는 죽음이 주는 절망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 담담함의 이면에는 죽음⋅허무와 싸웠던 화자의 처절한 삶이 존재하며, 그 아픔이 쌓여서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만한 내공이 쌓였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이것은 곡조에 의해 극대화가 된다. ‘낙시조(樂時調)’는 ‘요임금과 탕임금의 태평성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의 성터[堯風湯日 花爛春城]’로 표현되는 격조이다. 한가롭게 흥청대는 아름다운 창법이 「장진주사」의 노랫말과 어우러져 죽음의 비극은 극복되고 오히려 향락을 추구하는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바뀐다.


- 이상 '꾸마이, 책에 빠지다'에서 퍼옴




<작자 정철(1536~1593) 소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며,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했다. 아버지는 돈녕부판관유침(惟沈)이다.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 :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인 누이와 계림군(桂林君)유(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했다. 이때에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 훗날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 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돼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자(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했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됐고, 맏형은 이때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 가던 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을 했다.

1551년(명종 6)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552년(명종 7) 17세에 문화(文化)유씨(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0(명종 15)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星山 : 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됐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1566년(명종 21)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됐다.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 : 젊은 문관 가운데 뽑아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서재)에 선출됐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다가 1570년(선조 3)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를 끝내고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에 있을 때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인 1578년(선조 11)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 예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했다. 다음 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됐다.

명천(明川)에 유배됐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진 지 사흘 만에 또 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했다.  묘는 충북 진천군(鎭川郡) 문백면 봉죽리 지장산(地藏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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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네모선장 | 작성시간 15.08.20 62년 5월 13일자 만물상을 읽다보니 심산 김창숙옹의 國民葬이냐 社會葬이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데. 거기에 인용된 글이 바로"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여 매여가나 流蘇寶帳에 만인이 울어내나..'이지. 송강이 오늘날 태어났으면 무어라 읊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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