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9:57-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손에 쟁기를 잡고 하는 일은 묵은 땅을 갈아 엎고 씨를 뿌리는 것이다.
목적과 헌신이 분명한 것이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땅을 갈지도 못하고 씨를 뿌리지도 못하는 것이다.
쟁기를 잡은 목적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마음은 다른 데로만 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콩밭에 가있다“는 속담이 있다.
몸은 주인 밭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자기 논두렁에 심어 놓은 콩밭에 가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설렁설렁 일을 하는 둥 마는 둥한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삶의 방향과 목적이 후퇴하고 물러선다는 뜻도 된다.
쟁기를 잡고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그 일을 그만 둘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뒤를 돌아보다가는 뒤로 후퇴하게 되고, 후퇴는 결국 파멸로 끝이 나고 말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우리가 손에 잡은 쟁기는 오직 믿음이요, 오직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의인은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산다.
그런데 어디 뒤를 돌아보며 뒤로 물러가는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8)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 사람의 대표적인 예는 롯의 처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17:3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19:26)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본 사람의 또 한 사람의 예는 데마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미련 때문에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다가 아예 뒤로 가버렸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
베드로 사도는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본 사람들의 결국에 대해 말씀한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0-22)
예수님의 일곱 귀신 비유도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본 사람에 대한 말씀일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지만,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세상 염려와 재물과 향락을 뒤돌아보다가 결실을 못한다는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다.
1.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감정과 욕망으로 주를 따르는 자이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7-58)
이 ‘어떤 사람’을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시 많은 기적(오병이어의 기적, 불치병의 치료)을 행하셨기에,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말은 쉽지만, 주를 따른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안다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셨다.
그는 아마도 이 땅에서의 부귀 영화를 기대하고서 따르겠다고 한 것 같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그의 감정적인 동기와 목적을 꿰뚫고 있다.
순간적인 열정에 따라 경솔한 맹세를 하고 있음을 보신 것이다.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자식 잘 되고 사업 잘 되고 천국까지 간다고 하니까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심지어 예수님이 택한 12제자들도, 누가 크냐?
누가 영광의 예수님 좌우에 앉느냐? 하고 분쟁을 하기도 했다.
가롯 유다는 아마도 로마를 정복하는 구세주로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배신한 경우로 본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대답은 이러하다.
여우도 굴이 있다. 거처가 있다.
공중의 새도 집이 있다. 거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감정적인 고백을 하는 그를 깨우쳐 주는 말씀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여우나 새도 있는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길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예수를 따르며 권력이나 부, 명예를 탐하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깨뜨리는 말씀이다.
예수 믿고 팔자 고칠려고 하는 사람들, 가진 것에 더 가질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믿기만 하면 구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긍정복음 형통복음들을 산산히 부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행하리이다’ 했지만 행하지 않아서 망하고 말았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19:8)
베드로도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했지만 세 번 부인하고 말았다.
돌밭에 떨어진 말씀은 처음엔 기뻐하다가 핍박이 오면 금새 부인하고 마는 경우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하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신다(신8장).
불뱀과 전갈이 있는 그 광대한 광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도 하신다.
내 없는 것, 부족한 것을 채우고, 있는 것은 더 많이 갖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 끝없는 탐욕과 야망의 충족은 바알과 아세라들이 약속하는 것들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부와 권력, 명예에 목말라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부끄러운 것이고, 그 마침은 멸망이라고 하신다(빌3:19).
팥죽 한 그릇을 얻기 위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의 보화와 낙을 얻기 위해 믿음을 팔지 않았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앞으로 받을 영광과 기업을 안다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기 위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길 줄 알면 쟁기를 손에 잡고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군사와 같다는 것을 알면 생활에 얽매여 뒤돌아 보지 않을 것이다.
두 마음을 품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셨다.
재물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2.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세상 일(예법)이 먼저인 자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59-60)
유대인들은 장례를 율법의 제사처럼 중요하게 여겼다.
‘먼저’는 ‘돌아서다’, ‘포기하다’의 뜻이 있다.
부친의 장례로 인해 예수를 따를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서의 일과 관계가 예수를 따르는 일보다 우선되고 앞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를 따르려면, 세상과 일과의 관계에서 결단이 필요하다.
세상은 이러한 결단에 대해 분노하고 견디기 힘들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고난의 가시밭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따를 수가 없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죽은 육체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뜻이다.
장례와 세상 법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고,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세상의 일과 법도보다, 예수의 일을 우선으로 여길 수 있는 자만 주를 따를 수 있다.
우선 순위의 문제는 우리 주님과 온 성경이 강조하는 말씀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믿음생활은 우선 순위를 바꿔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예수께로, 떡(재물)에서 말씀으로, 우선 순위를 바꿔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에서, 예수의 일로 우선 순위를 바꿔가는 것이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는) --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최우선 순위이다.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 갔다.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 갔다.
주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고난의 가시밭길 끝에 영광의 구름이 피어오른다.
불뱀과 전갈이 있는 광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서 가나안 기업이 열린다.
참된 안식과 축복과 영원한 영광이 있다.
3.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혈연이 우선인 자이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9:61)
육신의 혈연에 얽매인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다.
‘먼저’가 내 가족이다. 우선 순위가 가족이다.
‘작별’은 단순한 작별 인사만을 뜻하지 않고 가족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고 있다.
모든 것을 가족과 논의 후에 결정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예수를 좇고자 하는 열망이 한 쪽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집착하고 마음이 쏠려 있고 우선인 것은 혈연이고 가족이다.
가족과 혈연 때문에 사람 때문에 우선 순위를 바꿀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대답은 이러하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보다 우선 순위인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8:29-30)
버린다는 것은 우선 순위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들을 버렸는데 현세에 오히려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 것이다.
부모 자녀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버린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잃고 영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끼고 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애끼다가 뭐 되고, 화가 되기도 한다.
가장 귀한 것도 버리지 않고서는, 우선 순위를 바꾸지 않고서는,
현세에 여러 배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영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모세도 레위 지파를 축복할 때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신33:9)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길이 믿음의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믿음의 길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세상의 법도와 예절보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
부모 형제 자녀보다 우선인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소망하고 전파하는 것이 천국 믿음이요 천국 생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시작 되었고 침노하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고 영원히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먼저 구하고 해야 할 일을, 나중에 구하고 해야 할 일과 뒤바꾸지 말아야 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주님을 따르려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생활에 얽매이고 염려와 근심이 가득 차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 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고 파멸과 멸망에 빠지고 만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고 만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의와 경건과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하자.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향하여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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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대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12.01 다윗은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 했고, 바울은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고 했지요.
우리를 위해 사망을 친히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도 믿음으로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소망으로 나아갑니다.
그래도 부모님과의 사별은 가장 슬픈 상실의 경험이지요.
저는 어릴 때 이 일을 겪고 꽤 오랜 세월을 눈물로 지냈었고,
저의 아내는 얼마전 부모님을 여의고 지금도 슬픈 마음을 말하곤 합니다.
아버님께서 주님만 의지하시고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며 천국을 소망하시도록 기도합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주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jooeun님께 위로와 격려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