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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팔대관풍경구

작성자묵계|작성시간04.10.01|조회수234 목록 댓글 5
 

八大關


八大關風景區는 匯泉灣 주변에 있으며 그 풍광이 수려하기가 짝이 없다. 그윽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 때문에 이곳은 요양이나 피서 또는 관광지로 명성이 높다.


이 풍경구 안에는 중국에서 유명한 도로의 이름을 딴 8갈래의 길이 있기 때문에 ‘八大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팔대관이라 하지만 사실은 10갈래의 길이 있다. 1930년대 초에 청도시정부는 湛山에 특별구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關’字가 붙은 8개의 도로를 만들었다. 나중에 다시 2개의 도로를 증설하여, 신설된 도로에 ‘關’字를 붙여서 ‘十關路’가 되었지만, 습관적으로 ‘八大關’이라 부른다. 八大關에 있는 10개의 도로는 횡으로 7개이며 종으로는 3개이다. 이 10개의 도로는 다음과 같다.


1. 韶關路 - 廣東省 북부의 중요한 城鎭인 韶關에서 따온 이름.

2. 嘉峪關路 - 甘肅省 酒泉의 만리장성 서쪽 끝에 있는 嘉峪關에서 따온 이름. ‘峪’字는 자칫하면 ‘곡’이라 발음하기 쉽지만 ‘욕(중국어 발음으로는 yu이다)’으로 읽는다.

3. 山海關路 -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진시황이 ‘天下第一關’이라 불렀던 山海關에서 따온 이름.

4. 武勝關路 - 河南省과 湖北省의 경계에 있는 雄關인 武勝關에서 따온 이름.

5. 函谷關路 - 河南省 서쪽에 있는 아름다운 雄關인 函谷關에서 따온 이름.

6. 正陽關路 - 安徽省 서북쪽에서 교통의 요지인 正陽關에서 따온 이름.

7. 臨淮關路 - 安徽省 鳳陽현의 濰河 남쪽에 있는 臨濰關에서 따온 이름.

8. 寧武關路 - 山西省 寧武縣의 寧武關에서 따온 이름

9. 紫荊關路 - 河北省 易縣에 있는 古代長城의 관문인 紫荊關에서 따온 이름.

10. 居庸關路 - 北京市 昌平에 있는 만리장성의 요새인 居庸關에서 따온 이름.


이 외에도 八大關風景區에는 匯泉路, 榮城路, 黃海路와 같은 도로가 산재해있다.


1920년대 이래로 전국 각지의 관리들과 귀인들이 八大關에 땅을 사서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청도에 주재하는 외국의 영사관과 교민들도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 따라서 서로 다른 모습을 한 300여채의 건물들이 다채롭게 거리를 메웠다. 이 건물들은 팔대관 거리에 골고루 분포되어 나름대로의 정원을 가꾸고 단장을 했다. 특이한 것은 건축의 설계와 양식이 서로 중복되지 않고 각자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물 주위로는 모두 화원식의 정원을 가꾸어 갖가지 수목과 기화요초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러나 건물의 고도와 면적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서 일반적으로 2층 또는 3층 높이에 면적은 500평방M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든 건물은 부지의 형상에 따라서 합리적으로 설계를 하였으며, 바다를 바라보기에 좋게 지었다.


팔대관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풍격을 갖춘 건물이 일정한 구역에 모여 있다는 것이다. 완전한 통계를 내기는 어렵지만, 이 지역에 분포된 건물은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덴마크, 스페인, 그리스 등 24개 국가의 건축양식을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萬國建築博覽會’라는 별칭을 얻었다. 관광객들이 팔대관의 아름다운 거리에 서면, 마치 이국에 온 것과 같은 생각이 저절로 난다.


八大關의 아름다운 환경과 현란하고 다양한 건물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나 텔레비전드라마를 촬영하기에도 적합한 지역이다. 중국 건국 이전에 만든  몇 편의 영화나 건국 후에 만든 40여편의 영화가 八大關을 무대로 촬영되었다. 또 20여편의 텔레비전드라마를 이곳에서 찍었다. 소련, 독일, 일본 등의 많은 외국영화도 이곳을 촬영지로 선택했다. 따라서 이곳을 ‘천연의 촬영지’라고 부리기도 한다.


팔대관은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안고 있다. 이 지역의 상당부분은 건국 이전에 중국의 중요 관리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국민당의 주요 인물인 宋子文, 孔祥熙, 韓復榘, 沈鴻烈 등이 이곳에 땅을 사서 사저를 지었다. 蔣介石, 宋子文, 汪精衛, 孔祥熙 등의 정부요인들은 팔대관에 거주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요양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중국공산당과 국가의 지도자들 가운데 劉少奇, 朱德, 周恩來, 鄧小平, 江澤民과 같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팔대관을 찾아와 휴식을 하면서 회의를 열었다. 수많은 저명한 과학자나 노동 또는 전쟁 영웅들, 문학가나 예술가들도 이곳에서 요양을 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흥밋거리와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 이러한 건축예술적 가치와 인문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산동성은 이곳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팔대관의 또 다른 특징은 뛰어난 녹화사업이다. 이 지역에 있는 모든 건물에는 화원식의 정원이 있어서 화초와 수목이 울창하다. 그 외에도 팔대관의 거리와 소공원 그리고 공공녹지는 녹화사업이 잘 이루어 진 곳으로 유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 정부는 팔대관의 빈 땅을 모두 보수하여 녹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조성한 6만여평방M의 녹지는 40여곳의 소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녹지에 조성된 대표적인 공원으로는 牧丹園, 芍藥園, 玉蘭園, 櫻花園 등이 있다. 이 공원에는 雪松, 水杉, 杜仲, 麻樂 등의 식물들이 잘 가꾸어져 있다.


팔대관 거리의 녹지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1960년대부터 청도시정부는 자동차도로와 길거리에 식목사업을 계획하고 일반 수종이었던 가로수를 관상수로 바꾸었다. 이 사업이 끝나자, 팔대관 거리에는 각종 특수 품종의 수목이 자리를 잡고, 사계절마다 특색이 있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韶關路에는 양쪽으로 100그루의 碧桃가 서있다. 청도의 봄은 비교적 늦어서 4월 말이 되어야 꽃들이 피어난다. 각양각색의 벽도가 저마다 아름다운 미소를 뽐내는 봄날이 되면, 나무 아래에서는 황금빛 새들이 몰려와 절묘한 소리를 낸다. 그 보다 열흘이 지나면 寧武關의 海棠花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가지마다 만개한 꽃송이가 자동차도로 가운데로 늘어지면 긴 회랑이 형성되고 그 사이로 걷다가 보면 돌아가기가 아쉽다.


여름이 되면 八大關에서 가장 먼저 장관을 이루는 것은 붉은 색의 백일홍이다. 요염한 백일홍 가지가 송이송이 꽃을 달고 땅바닥으로 늘어지면 正陽關路가 붉게 물든다. 百日紅은 ‘痒痒樹’라고도 한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줄기가 마치 신경이 있는 것처럼 민감하여, 손으로 가볍게 상처를 내면, 금방 붉은 나무즙이 솟아나는 것이 상처를 입은 것과 같아서 붙은 이름이다. 백일홍은 아주 오랫동안 피어 있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붉은 꽃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자미화가 피면 반 년 동안은 붉다네(紫薇花開半年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紫微花는 百日紅의 다른 이름이다. 석 달하고도 열흘 동안 꽃이 핀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백일홍이 핀 正陽關路를 ‘꽃길’이라고 한다.


찌는 듯한 여름에는 태양빛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그러나 山海關路, 函谷關路, 武勝關路를 걷는 사람들은 뜨거운 태양열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 원래 도로 옆에는 높고 큰 法桐이 있어서 널찍한 잎이 뜨거운 햇빛을 가리기 때문이다. 法桐의 정식 명칭은 ‘懸鈴木’으로 활엽수의 일종이다. 청도는 중국에서 비교적 일찍 현령목을 심어서 성공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도시의 길거리에 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현령목이 청도의 녹화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嘉峪關路는 오각형의 단풍잎이 물들기 시작하여 녹색이 붉은 색으로 변한다. 갑자기 아름답게 화장한 미인이 등장한 것과 같다. 가을이 깊어지면 居庸關路의 은행나무에 열매가 빽빽하다. 황금색 은행잎에 숨은 열매를 바라보면 저절로 풍성한 수확이 생각난다.


북풍이 불고 백설이 휘날리는 겨울이 되면 뜻밖에 팔대관에는 생기가 넘친다. 臨淮關路의 龍栢나무와 紫荊關路의 雪松이 더욱 푸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면 청송에 백설이 더해져서 마치 벽옥과 백은으로 장식한 보탑을 보는 듯하다. 눈을 좋아하는 아이들과 관광객들이 이 거리에 오면 넋을 잃을 정도라고 한다.


도로마다 특색이 있는 것은 나무 때문만은 아니다. 팔대관의 녹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길거리 사이에 조성된 수 십 곳의 녹지도 각각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특히 正陽關路의 月季園과 黃海路 12호의 芍藥園, 그리고 臨淮關路와 紫荊關路에 있는 櫻園은 절묘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正陽關路와 居庸關路 사이에는 비교적 넓은 공원이 있고, 이 공원에는 400여종의 나무가 있다. 가지가 용처럼 공중으로 치솟은 蟠松, 껍질에 얼룩무늬가 있는 虎皮松, 층차가 분명한 萬峰檜와 같은 나무와 水杉, 玉蘭, 櫻花, 木芙蓉, 菩提樹와 같은 진귀한 식물들이 눈에 띤다.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건축들과 다양하고 독특한 식물들이 어울려 있고, 천연의 해면풍경과 적당한 기후가 더해져서, 팔대관의 그윽하고 고요한 풍경이 조정되었다. 게다가 이곳은 바다의 영향으로 항상 공기가 맑아서 요양과 휴식을 취하기에 더 없이 좋다. 국내외에서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은 그만큼 이곳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팔대관풍경구는 청도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황금의 관광노선이다. 이제부터 八大關에서 반드시 보고 지나가야할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1. 花石樓


팔대관 거리에서 花石樓는 가장 유명하고 큰 別莊式 건물이다. 이 건물은 팔대관풍경구 동쪽 끝에서 太平灣으로 돌입한 해변의 작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은 있기 때문에 팔대관에 있는 다른 건물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띤다. 게다가 유럽의 고성을 본떠서 지었기 때문에 서양의 각종 건축예술이 집결되어 있다. 즉 그리스式에다 로마式의 풍격에다 캐톨릭式의 풍격이 가미된 특색을 갖추고 있다. 건물면적은 4.5畝이며, 총건축면적은753.7평방M이다. 주건물은 원형과 다각형인 작은 건물을 조합하여 지었다. 원형의 작은 건물은 5층이며 꼭대기에는 觀海臺가 있다. 다각형의 작은 건물은 4층이며, 4층의 외부로 사다리가 있어서 觀海臺로 통한다. 양쪽의 작은 건물 뒤쪽에는 여러 개의 불규칙적인 방이 있다. 누각은 모두 대리석을 깎아서 만들었으며, 누각의 외장은 화강암을 깎아서 쌓았다. 돌을 깎을 때 수많은 거위알을 새겨 넣었으므로 사람들은 이 건물을 ‘花石樓’라고 불렀다.


화강암을 깎아서 만든 누각의 계단은 2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아래층은 9계단이고 위층은 6계단이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큰 鐵門이 있다. 계단 밑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단지가 있고, 거기에는 꽃나무를 심을 수가 있을 뿐 아니라 밤에는 불을 밝힐 수도 있다. 花石樓 정원은 정교하게 가꾸어져 있다. 이 정원은 유럽식으로 鵝卵石을 깐 작은 길과 풀밭, 화단, 상록수가 어울려 특색을 이룬다. 우거진 숲과 그윽한 주변 환경에 독특한 花石樓의 모습이 더하여 花石樓는 청도에서 가장 뛰어난 건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花石樓의 주인과 건물이 완성된 시기 그리고 건축의 풍격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건물은 1903년에 독일식으로 완성되었으며, 독일의 교오총독이 휴식을 하기 위해 지은 별장이었으므로, 지친 다리를 쉬게 한다는 의미로 ‘歇脚樓’라 불렀다고 한다. 1984년 화석루가 청도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될 때 간행된 설명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밝혀진 자료와 당사자의 가족들에 따르면, 이 건물은 1931년에 중국으로 망명한 백러시아의 귀족이 지은 것이며, 주인의 이름은 크라시모프였다고 한다. 이 건물이 완공되자, 주변의 우아한 환경과 어울려서 사람들의 주목을 금방 받았다. 그 밖에 다른 이야기도 많다. 독일총독의 별장이었다는 이야기 외에도, 사람들 사이에는 蔣介石이 청도에 와서 교오해방구로 진격을 할 계획을 세우고,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일본이 항복을 한 다음에 국민당의 특무책임자였던 戴笠이 여러 차례 청도에 와서 당시의 스타였던 白光과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戴笠은 청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경으로 돌아가다가 당산에서 사고로 죽었다.


청도가 중공군에게 점령된 다음에 花石樓는 청도시인민정부의 交際處에서 관리를 하면서 국내외의 귀빈들을 접대하는 곳이 되었다. 당과 국가의 지도자였던 董必武와 陳毅가 이곳에서 머물기도 했다. 특히 陳毅는 청도에서 요양을 할 때 ‘처음 청도에 와서’라는 長詩에서 花石樓에 대한 감상을 남겼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화석루의 자태는 영화인들에게도 매력적이어서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텔레비전드라마로 유명했던 ‘신성한 사명’, ‘안개 낀 거리에서의 흉계’, ‘총통의 행동’ 등은 화석루와 그 주변을 무대로 삼았다.


花石樓는 독특한 건축양식과 인문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상동성정부로부터 성급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화석루는 중국의 개방으로 특히 경제사정이 좋아진 청도시민들이 자주 찾는 관광지일 뿐이다. 휴일을 맞아 수많은 인파가 인근의 제1해수욕장을 찾으며 이곳에 들린다. 특히 요즈음의 중국 젊은이들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결혼식을 하기 전에 예복을 입고 야외촬영을 하는 것이 유행인 모양으로, 수십쌍의 신혼부부가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다소 볼썽사나운 것은 아름다운 화석루의 정원에 설치된 꽃길이나 시이소오 또는 땅바닥에 하트모양을 새겨두고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돈을 받는다는 것이다. 원래 어떤 것에도 돈을 받는 중국인들의 모습이긴 하지만, 화가가 그린 그림에 유치원생이 크레파스칠을 한 것처럼, 아름다운 花石樓를 망치고 말았다. 점차 사정이 좋아지면 이런 유치한 모습도 사라지겠지만, 당장의 돈벌이에 급한 모습이 아쉽다.


花石樓에서 제1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도로 옆에는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사실적인 그림에서 커리캐쳐식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솜씨를 뽐 낸 그림을 보고 黙客도 호기심이 생겨 자리를 얻고 앉았다. 그러나 처음 자리를 잡고 앉은 곳에 있던 화가가 갑자기 객을 끌고 옆자리로 갔다. 자기는 화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새로 자리를 잡고 앉으니 먼저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30원을 내니 화가는 자기가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객를 데리고 온 사람에게 지불하라고 했다. 돈을 내자 그들은 반으로 나누어 가졌다. 마침 읽고 있던 《中國流氓史》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화가는 기술자였을 뿐이고, 서너명의 젊은이들은 자릿세를 받는 건달들이었다. 어둡고 긴 중국의 역사가 사람들로 번잡한 화석루 옆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림을 받아든 객은 화석루를 보면서 중국인들의 지혜를 한 번 더 생각했다. 그렇구나! 花石樓의 또 다른 이름은 ‘化石樓’였구나!


2. 公主樓


居庸關路 10호에 있는 公主樓는 전형적인 덴마크식 건축이다. 1930년대에 처음 지은 이 건물은 면적이 721.98평방M이다. 건축의 외형은 높이 솟은 첨탑과 불규칙하게 비스듬한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녹색을 띠고 있다. 그리고 아침해가 비치는 쪽으로 넓고 네모난 平臺를 설치했다. 이러한 독특한 모양으로 이 건물은 八大關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돌을 깔아 만든 작은 길 가에 조성된 화원식의 정원을 통해 누각 내부로 들어가면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궁전과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건물을 ‘公主樓’라고 부른다.


公主樓와 관련된 아름다운 일화가 있어서 소개할까 한다. 1929년 덴마크왕국의 한 왕자가 빅토리아호라는 호화여객선을 타고 청도에 왔다. 湛山海邊에 머물렀던 그는 팔대관해변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1931년 덴마크왕국은 청도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초대영사로 趙亨生을 임명했다. 덴마크의 왕자는 趙亨生에게 팔대관해변의 땅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곳에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덴마크의 고전적 풍취가 나는 건물을 짓게 하고, 그 건물을 덴마크의 공주에게 예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선물을 받을 공주가 청도로 오지 못하여 건물의 이름만 남게되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3. 居庸關路 11호


1940년에 일본이 유럽식 건물을 본떠서 지은 이 건물의 넓이는 752.24평방M이다. 지상2층 지하1층인 이 건물은 지하실까지 돌을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견고하고 장중하다. 1층은 도리크식 돌기둥에 아치를 얹은 담장으로 구성된 長廊이 있고, 2층은 露天 발코니가 전체 면적의 반을 차지한다. 이 건물의 외장은 별다른 장식이 없이 간단하고 명쾌하여 팔대관의 건축물 가운데 EH 다른 맛을 풍기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 居庸關路 11호는 중앙정부의 지도자들을 영접하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 陳雲, 徐向前, 彭眞등의 중앙지도자들과 羅瑞卿, 劉亞樓 등의 고급장성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4. 山海關路 1호


1933년에 프랑스의 농촌에 있는 별장식으로 지은 이 건물의 주인은 청도에 거주했던 프랑스의 상인이었다. 총면적은 702.88평방M이며, 2층으로 평평한 지붕에 붉은 기와를 얹었으며, 담장은 황색이고, 아치형의 문이 달린 독특한 모양이다. 반달형의 테라스와 바로크식의 기둥도 이 건물에만 있는 특유한 형식이다. 건물 주위에는 넓은 화원이 있고, 정원에는 다양한 넝쿨식물이 덮여 있다. 대문의 좌우와 위에는 등나무가 덮여있어서 봄여름에는 꽃이 무성하고 향기가 정원에 가득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다음에 이 건물은 요양소로 바뀌었다. 여러 명의 국가 지도자들과 국제적인 벗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엽검영, 속유 등의 지도자들이 차례로 이곳에 머물렀고, 스위스와 중국 사이의 우호협력회의 주석도 청도에 와서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 그 후로 유럽의 우호국에서 찾아온 많은 손님들이 프랑스풍이 짙은 이곳을 골라서 머물렀다. 그들은 대부분 프랑스의 시골에 사는 기분을 그대로 느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중국의 예술인들과 문화인들이 이곳에 머물렀던 기록이 있다.


5. 山海關路 5호


1933년에 짓기 시작하여 1934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현대의 일본식 별장으로 총면적은 603.84평방M이다. 외장용 벽돌에 녹색을 새겨 넣었기 때문에 햇빛이 비치면 푸른색으로 보이는 것이 특색이다. 정원에는 관목과 등나무가 심어져 있고, 주위를 검은색 철책으로 둘러쌌다. 등나무가 우거지고 검은색 철책과 관목이 서로 어울려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윽하고 종용한 자태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다음에, 이곳도 공산당과 정부의 지도자들이 외국의 귀빈들과 함께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鄧小平, 譚震林 등의 지도자들이 이곳에 머물렀던 기록이 있다. 1957년 여름에는 중공중앙청치국 회의가 청도에서 개최되었을 때, 당시의 중공중앙총서기였던 鄧小平이 회의기간 내내 이곳을 거처로 정하고 지냈다. 특히 수영을 유별나게 즐겼던 등소평은 틈이 날 때마다 가까이 있는 제2해수욕장을 찾았다고 한다.


6. 山海關路 9호


팔대관의 별장 가운데 특히 우수한 건축물로 유명한 이곳은 정원 내부에 귀빈들을 접대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많은 국가지도자들이 찾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청도의 釣魚臺’라고 부른다.


이 건물의 정원 내부에는 2동의 별장이 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미국식 건물로, 면적이 1226.22평방M이며, 주건물은 4층으로, 당시의 팔대관 별장 가운데 비교적 크고 높이도 서로 다른 비대칭형이라서, 현대파 건축예술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담장은 녹색이고 지붕은 붉은 색이며 대형 창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담장에도 창문이 많고, 대형유리로 채워 넣었기 때문에 창틀은 아주 작아서 보는 이들에게 단순하고 명쾌한 느낌을 준다. 정원 내부에는 넓은 건물과 어울리게 넓은 화원에 수많은 나무가 있고, 중국식 발코니에서는 시원하게 휴식을 취할 수가 있다.


이 별장은 주청도미국영사관 소유였다. 태평양전쟁 이전에 짓기 시작하여 나중에 일본에게 빼앗겼다. 일본이 패전을 한 다음에는 미해군의 제7함대사령관 클라크대장이 주택으로 사용했다. 방안에 있는 가구는 모두 미국에서 운반했다. 당시에 미국이 지지했던 蔣介石이 내전을 치르게 되자 클라크는 국민당군정당국으로부터 공경과 감사를 받았다. 한 번은 클라크가 애완견을 잃게 되자, 청도시정부가 현상금을 걸고 신문에 광고를 냈다고 한다. 청도시정부는 이 일로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았다. 클라크가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에 이곳은 미해군의 서태평양함대사령관 베이커리대장이 1949년 5월 인민군이 청도에 들어올 때까지 저택으로 사용했다. 지금 건물에 있는 가구는 모두 원래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다음에 이 건물은 청도시인민정부교제처가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劉少奇, 周恩來, 鄧小平, 葉劍英, 江澤民, 李鵬, 萬里 등의 중앙정부요인들이 이곳에 머물렀던 기록이 있다.


1957년 여름 劉少奇는 청도에서 毛澤東主席의 주재로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상임위회의에 참석하여, ‘1957년 여름의 형식’이라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7월 7일 비행기로 청도에 도착한 劉少奇는 이곳에서 周恩來와 같은 집에 머물렀다.


周恩來는 1957년 여름에 모두 11일 동안 두 차례 이곳에 머물렀다. 청도에 머무는 동안 주총리는 일체의 문서에 비준을 하거나 국가의 사무를 처리하는 것을 잊었다. 그는 오로지 모택동이 대표로 참석한 해군검열활동에만 참석을 한 것 외에는 외출을 삼가고 정원에서 운동을 하거나, 밤새 방안에서 불을 켜고 독서를 했다. 사람들은 민간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周恩來의 행동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1979년 청도를 시찰한 鄧小平도 이곳에 머물렀다. 당시에 이곳에 근무했던 직원들에 의하면, 鄧小平은 우스개 소리를 잘했지만 생활은 아주 엄격하여 오전에는 각종 문건을 처리하고 오후에는 반드시 제2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했으며, 밤에는 브리지놀이를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1983년에는 이 건물 내부의 왼쪽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5성급 호텔에 해당하는 내부시설을 갖춘 이 건물에는 실내수영장과 헬스클럽, 사우나, 볼링장, 당구장 등의 오락시설도 갖추고 있다. 이 신건물이 들어서자 山海關路 9호의 풍경도 색다르게 바뀌게 되었다. 현재는 신건물이 완공되어 최고의 정치성을 띤 임무가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신건물이 완공된 다음에 江澤民, 李鵬, 朱鏞基, 楊尙昆, 萬里, 吳邦國, 田紀雲, 姜春雲, 宋健, 陳慕華와 같은 거물급 정치인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7. 山海關路 13호


중국풍과 스페인풍이 합쳐진 풍격을 갖춘 작은 건물인 山海關路 13호는, 면적이 895.57평방M이며, 지하실을 포함한 3층 건물이다. 벽돌로 쌓은 이 건물의 지붕은 붉은 기와로 덮었으며, 담장은 붉은 벽돌로 쌓았지만, 모서리는 화강암을 깎아서 사용했다. 전체적으로 장중한 모습이 이 건물의 특색이다. 1935년에 지은 이 건물의 주인은 국민당 산동성 주석이었던 韓復榘였다. 1988년에 개조를 하여 산해관로 13호와 연결했다.


韓復榘는 河南人으로 일찍이 馮玉祥의 부대에 투신한 이후로 점차 승진을 거듭하여 馮玉祥部隊의 西北軍에서 軍將이 되었다. 1929년 장개석에게 투항했고 이듬해 산동성정부의 주석과 국민혁명군 제3로군의 총지휘사가 되었다. 그러나 1938년 1월 도망을 가다가 장개석에게 체포되어 죽었다. 한복구는 재임기간 동안 청도시장 심홍렬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어 늘 청도에서 거주했고 나중에는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별장은 汪精衛와도 인연이 있다. 1930년대 중반에 국민당의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왕정위와 장개석이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둘 사이에 모순이 폭발하자 왕정위는 남경을 떠나 청도에 이르러 한복구의 별장에 도착했다. 그는 이후로 ‘대해와 이웃을 하였으니 정치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라고 소문을 피웠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장개석과 끊임없는 협상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재삼 부르자 마지 못하는 척하고 청도를 떠나 남경으로 돌아갔다. 일본 침략을 하자 그는 적에게 투항했다. 1940년 1월, 왕정위는 청도에서 열린 ‘3거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이곳을 찾았다. 얼마 후 그는 남경에 몰래 등장하여 남경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실로 만고에 남을 매국노로서의 악취를 남긴 셈이다.


8. 山海關路 17호


이 건물은 1940년 청도에 주재하는 일본인이 지었다. 평평한 지붕으로 덮인 2층짜리 건물인 산해관로 13호는 벽돌로 쌓았으며, 건축면적은 929.53평방M이다. 건물 내부에는 4개의 방이 있고 그 가운데 하나는 벽에 벚꽃이 새겨진 일본식 방으로 일본인이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있다. 정원에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가산과 연못이 있고 대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운 화원이 있어서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 건물은 문화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중화인민공화국의 10대원수 가운데 6명이 이곳에 머물렀으므로 ‘元帥樓’라고 부르기도 한다.


1949년 청도가 중화인민공화국에 넘어오자마자, 건강이 좋지 않았던 徐向前이 요양을 하러 이곳에 와서 몇 달을 지냈다. 그가 이곳에 머물렀던 첫 번째 원수였다. 1951년에는 중공군의 유일한 정치원수였던 羅榮桓이 청도에 와서 요양을 하다가 이곳에 왔다. 1924년 사립청도대학이 설립되었을 때 羅榮桓은 학생으로 예과에 다녔다. 그는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五四運動’의 주동자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남방으로 가서 대혁명운동에 참가했다. 1927년 秋收起義에 참가한 다음부터 毛澤東을 따라서 井崗山으로 들어갔다. 점차 승진을 거듭한 그는 중공군의 고급장교가 되었다. 다시 청도를 찾은 그는 일찍이 자신이 공부를 하러 다닌 청도대학의 옛터를 구경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중공군으로 6․25동란에 참전했던 彭德懷가 이곳에서 요양을 했다. 1955년에는 劉伯承도 요양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1956년에는 賀龍이 청도를 찾아와 이 건물에 입주했다. 명랑한 성격을 가졌던 그는 사람들과 쉽게 친해졌으며, 일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웃으며 지냈다고 한다. 청도에 있는 동안에 낚시를 유달리 즐겼던 그는 특히 저수지에서 민물고기를 낚는 것을 좋아하여, 늘 해군잠수함학교에 있는 저수지에서 낚싯대를 드리웠다고 한다. 1979년에는 葉劍英이 전국인민대회위원장의 신분으로 청도를 시찰하러 왔다가 이곳에 머물렀다. 葉劍英은 나중에 또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시 이곳을 찾았다.


1960년대에는 毛澤東의 전처였고, 유명한 홍군의 여전사였던 賀子珍이, 요양을 위해 오랫동안 청도에 머무를 때,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1988년에는 중공의 상해시위서기였던 강택민이 당시 청도의 중앙지도자들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서 청도로 왔다가 이곳에 머물렀다.


9. 山海關路 19호(八大關賓館)


匯泉灣의 서쪽에 있는 이 건물은 남쪽으로 太平灣에 이어져 있다. 청도시위원회와 시정부의 정치적 접대센터로 사용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청도의 國賓館’이라 부른다.


1950년대에 지은 이 건물의 총면적은 5만9천평방M이다. 주건물은 5성급호텔에 맞먹는 수준으로 설계된 貴賓樓로서 20개의 서로 다른 풍격을 지닌 별장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청도의 제2해수욕장을 갖추고 있다. 호텔의 주건물은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국가원수가 묵게 될 방과 특실, 그리고 약 300여간의 일반실이 있다. 또 크고 작은 연회실과 다기능실, 술집 등이 20여개나 있다. 실내수영장, 헬스클럽, 볼링장, 테니스장, 해수욕장 등의 오락시설과 체육시설도 잘 구비되어 있다. 그 외에도 행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음악실, 회의실, 연회실 등이 있어서 일체의 현대식 시설이 완비되었다. 행사장에는 전자표결기와 4개국의 언어를 동시에 통역할 수 있는 기기, 영상송신기, 대형 프로젝터가 설치되어 크고 작은 국제회의를 개최할 수가 있고 연회를 곁들일 수도 있다.


중국의 원로급 지도자들 가운데 毛澤東, 劉少奇, 周恩來, 朱德, 葉劍英, 鄧小平, 楊尙昆 등 1세대들과 江澤民, 胡耀邦, 李鵬, 朱鏞基, 萬里 등의 2세대 지도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캄보디아의 국왕과 라오스의 국가원수, 그리고 적도기니의 대통령도 이곳에 국빈으로 머물렀다.


10. 居庸關路 14호


미국식 건물로서 땅바닥까지 창문이 닿는 형식으로 설계되어 간결하고 명쾌한 조형미를 자랑한다. 계단 앞에 있는 石座에 대리석으로 만든 화분이 얹혀 있는 것이 특색이다. 수목이 울창한 정원의 중심에는 화단이 있어서 사계절 내내 꽃향기가 넘친다. 이곳에는 흰색을 칠한 화단의 난간과 짙은 녹색이 잘 어울려서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용관로 14호는 텔레비전 연속극 ‘宋慶齡과 자매들’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송씨자매들의 어린 시절과 미국에서의 생활을 담은 이 드라마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거용관로 14호의 건축양식과 정원의 구조가 미국 본토의 주택과 흡사하기 때문에 이곳이 그 드라마의 촬영지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居庸關路 14호를 ‘宋氏花園’이라도 불렀고, 드라마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 건물을 구경하러 온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웃에 있는 거용관로 11호와 10호인 ‘公主樓’가 일직선상에 있어서 관람을 하기에도 좋다. 짧은 거리에서 아시아, 유럽, 미주의 건축문화와 풍격을 맛볼 수가 있기 때문에 풍부한 문화적 체험을 할 수가 있다.


11. 正陽關路 36호


正陽關路 36호는 원래 靑島의 ‘義聚合’이라는 錢庄의 사장이 소유했던 개인 별장이었다. 義聚合은 청도에서 큰 私營 錢庄으로 옛터는 지금의 中山路에 있는 中信銀行 자리였다. 1945년에 지은 이 별장은 외관은 간결하지만 내부는 상당히 화려하다. 이 전장의 사장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일본과 결탁했던 더러운 매국노였다. 일본이 항복을 한 다음에 국민당의 청도시당국이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1946년 남경의 국민당정부 宋子文이 청도를 시찰할 때, 이 매국노는 청도의 심산에 있던 별장을 팔고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는 宋子文을 찾아가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많은 뇌물을 바쳤다. 뇌물을 받아먹은 송자문은 마침내 그의 죄를 사면해주었다.


1947년 국민당 군대가 청도의 중국공산당 해방구를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장개석은 산동의 중공군을 배후에서 공격할 전략을 세우고 교동지역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장개석은 정양관로 36호를 거점으로 삼고, 청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사령관과 영사를 만났으며, 范漢杰, 李彌, 丁治盤 등의 장교들을 불러서 중공군의 해방구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 때 별장 주위를 군경이 에워싸고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지하조직은, 장개석이 청도에서 활동하는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고, 중요한 군사정보를 파악하여, 국민당 군대의 膠東進出作戰을 사전에 분쇄하는 공로를 세웠다. 장개석은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거리를 산책하다가 시민들에게 발견되어, 비행기를 타고 남경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중공군은 三戶山戰鬪에서 대규모의 국민당군대를 격파하고 장개석의 교동진출을 철저히 분쇄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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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스프링 | 작성시간 04.10.01 청도에 살고있는 저도 이렇게 자세히 기록된 자료를 찾아보지 못햇습니다.지금도 있는 팔대관 안의 '팔대관빈관'은 10년 전에는 청도시의 각종 대소영접과 회의가 있던 곳입니다.화석루는 청도사람도 장개석 별장으로 잘 알고 있더군요.귀한 정보를 얻습니다.잘 계시지요?
  • 작성자하오 펑여우 | 작성시간 04.10.02 청도의 해변처럼 아름다운곳인가봅니다.팔대관이란곳이... 선생님께서 직접 발품을 팔아 다니시면서 자료를 조사하고 쓴글이지요? 첫 인상만큼 글에서도 선생님의 품격이 보입니다.사모님은 지금 한창 입덧하시겠네요.맛난거 많이 사주시고 특히 대구산 사과와 포도 많이 사 드리세요.언제 한번 그 단아하신모습뵐수있길
  • 작성자묵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4.10.02 ㅎㅎㅎㅎ 그 사모님은 입덧을 지나서 지금은 거의 만삭입니다. 잠만 식식잡니다. 단아한 모습은 어디로 갔네요. 암튼 감사합니다. 칭찬을 해주시니~ 사실은 발품만은 아니고 자료를 많이 인용했습니다^8^
  • 작성자하오 펑여우 | 작성시간 04.10.03 훗날 지금 모습을 추억해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시대적 변화와함께 출산율이급격히 감소하면서 생명을 잉태한 아름다운 여인을 볼수 있는 기회가 그다지 많지않음이 ㅠㅠ . 경험에 의하면 ㅎ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갖구 살수 있는 시간 또한 아주 짧았기에... 아름답게 봐라봐 주심이 ㅎㅎ
  • 작성자하오 펑여우 | 작성시간 04.10.03 잠만 식식 잔다구 불만이 좀 있으신가봐요 ㅎ 아가를 위해 자는것인데...착하고 이쁜 아기를 바라신다면 것두 이쁘게 봐 줘야 해요 ㅎ 엄마가 잠잘자야 순한아기 이쁜 아기가 ... 이쁘고 맛난 과일 많이 사주는것도 이쁜아기 얻는 비결 ㅎㅎ ,제가 무슨 선생님같네요 ㅎ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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