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11]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대적의 유혹과 공격은 달라진 게 없다. 하나님 외의 것을 택하는 것으로 내가 틈을 열어주면 그들은 합법적으로 그들의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들 핑계 댈 것이 없다.
예수께서 사단의 유혹을 받으시는 성경의 내용이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 자세히 나온다.
동굴 안(내면)으로 사단(대적)이 찾아와 예수님을 유혹한다. 여기서의 사단은 아직 살아있는 또다른 나로 보자.
“오래 전부터 당신을 찾았는데! 이제는 당신을 살펴본지가 정말 오래 되었소. 당신이 세례를 받은 때부터이지요.” 대적은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신 이후부터 지켜보기 시작한다. 물세례는 세상의 기준으로 혼탁했던 혼의 의식의 영역이 씻겨져 의지적으로 혼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의식이다.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고 의지를 알게 되면 저들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돈과 음식과 향락밖에는 이해하지 못하오. 희생, 고통, 순종이라는 말은 그들에게는 죽은 말이오. 이 땅과 이 근처보다도 더 죽은 말이란 말이오. 그런 말들은 이 먼지보다도 한층 더 메마른 것이오.”
대적은 하나님의 것을 모방하고 변개시켜 죽은 말로 만들고 언어의 혼잡을 만들어 놓았다.
생명, 감사, 평화, 자비, 은혜 등 성부 하나님의 속성인 에온들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 나왔다.
에온들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가 이들을 통치하신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이 내 안에 계실 때 에온들의 정확한 의미가 알아지고 그들을 행동으로 옮기면 그들은 힘을 얻고 폭넓은 활동을 한다. 하나님께 있던 근원과 본래 의미를 정확히 찾아 알고 부를 때 힘과 능력이 되어 살아있는 말로 역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자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자비라고 한다. 자비라는 속성이 살아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자가 예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자비란 것이 이 땅에 존재하는구나 라고 안다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의 존재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그들을 위해 고통을 당할 만한 자격이 없소.” 복음을 전면 부정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바로 앞에 있는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다. 지금도 성탄절의 의미를 왜곡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잊게 만들려는 대적의 계략이 있다. 부인해야 할 것은 나이다. 나를 부인하지 않는 자들(내가 여전히 옳다 하는 자들)이 예수를 부인하게 된다.
3절)
대적은 예수님의 육신의 주리심을 겨냥하여 먹는 것으로 유혹한다. 대적은 우리들이 영에 집중하지 못하게 눈에 보이는 현상에 시야를 한정지으려 한다. 그놈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알면서 말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의 하늘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기적을 행하기 전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영혼의 존재를 감추어 왔고 하나님의 것으로 돌아가야 할 의무를 감추어 왔다. 물세례 이후 더 높은 하늘의 신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4절) “입 다물어라.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씀을 하시니 대적은 분노를 폭발시킨다. 왜 그런지 뒤에 가 보면 안다.
대적은 세상 것들을 가지고 갖은 세상의 논리로 입이 닳도록 말했으나 예수께서는 명쾌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육적인 것으로 공격하는 대적에게 예수님은 영적인 것으로 대적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육의 양식이 아닌 영의 양식이다. 대적은 영적 존재이면서 육적으로 살려 한다(이미 영의 세계에서 자기들의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육을 입고 있으나 영적 존재가 되길 원한다.
‘모든 말씀’은 기록된 말씀뿐 아니라 꿈과 환상, 사람, 환경, 물건 등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하시는 말씀이다. 내 영혼을 살리려는 호의로 하시는 말씀을 가지고 혼은 잠잠히 머물러 영까지 먹게 되면 영혼이 깨어나 육을 지배하며 살게 된다. 나에게 보게, 듣게, 만지게, 만나게 하시는 모두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먹지 않아도 산다고 한다. 그분의 말씀으로 살게 된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의 모형이다.
“알겠소. 당신은 이 세상의 필요한 것들을 초월했고, ‘나’를 사용하는 것에 혐오감을 느낀단 말이지요..”
반대로 말해 보면 먼저 나에게 혐오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없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대적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생각부터도 나란 악으로 시작하는 나의 정체를 보니 정말 부끄럽고 말도 할 수 없음을 느끼지 못하고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초월한 하늘의 영적 삶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필요한 것들을 초월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부인하고 다른 영혼들을 위해 채워지길 원하셨다.
“인간적인 것(나)을 초월하는 목적에서 완전하기를 원한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하면서 너희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동의하는 겸손을 가지기만 하여라.”
이러한 겸손에 대해 신명기에서 말씀하신다.
[신명기 8:1~6]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모든 말씀)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이 말씀을 예수는 믿었기에 유혹이 유혹이 되지 못했던 것. 무엇을 믿음? 하나님께서 영혼을 번성케 하시고 천국을 번성케 하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을)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사십 일 금식)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예수님도 사명적으로 훈련을 받으심,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예수 스스로 자신을 내어드림)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마음 중심의 순종을 보심)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시험하신 것도 나를 하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펼치시는 관심임을 알아야 함)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너희가 살고 번성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게 하기 위해서)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이 말씀으로 대적이 열받아 떠나감)
5, 6절) 스스로 높아져 있는 지금 주의 종들의 모습
“그렇다면 이리 와서 하나님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시오. 사제들도 얼마나 정신과 육체 사이에서 타협하기를 거부하지 않는지 보시오(세상과의 타협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결국 그들도 사람이지 천사가 아니거든요. 정신적인 기적을 하나 행하시오.. 내가 당신을 성전 첨탑으로 데리고 갈테니 그 위에서 놀랄 만큼 아름답게 변모하시오. 그런 다음 천사들의 무리들을 불러 날개들을 서로 얽히게 해서 당신의 발을 놓을 발판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당신을 큰 마당에 내려가게 하라고 말하시오. 사제들이 당신을 보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오. 사람은 아주 잘 잊어버리고, 특히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는 더 그러하니까 때때로 그런 표시가 필요하오.”
대적은 실제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지 못했다. 예수는 오직 하나님께서 가라 하실 때 가고 멈추라 하실 땐 멈추었다. 사제들이 정신과 육체 사이에서 얼마나 갈등조차 하지 않는지 보라면서 그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존재라 한다. 무조건 은혜로 다 될 것처럼 유혹한다. 사람인 너희들이 지금처럼만 하면(교회 출석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적당히 세상 기준에 맞춰 살면)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천국에 갈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희생하고, 고통 받고, 순종하는 의지의 영적 싸움의 과정을 간과하게 만든다. 예수님이 변화되는 모습의 기적을 일으켜 사제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라고 유혹한다. 한 순간의 기적으로 우리가 변모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덕행과 인격의 삶이다.
6절)
‘기록되었으되’하며 대적도 기록된 말씀인 성경(로고스)을 말한다.
[시편 91: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성전 높은 곳에 교만으로 서게 함과 육체의 허영과 만족을 불러일으키며 세상의 권력으로 땅에 내려앉게 유혹하는 것이다. 시편 구절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환난을 당하지 않게 높이 들어 올리신다는 뜻인데도 대적은 앞뒤 거두절미하고 한 구절만 떼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해석한다.
7절) “‘주님이신 네 하나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떠보다’는 ‘어떤 이의 능력이나 됨됨이 따위를 헤아려 보다’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따르지 않고 자기의 뜻을 구하고 자기의 뜻에 하나님을 끼워 맞추려 하는 것이 잘못된 것. 자기 뜻을 구하다 안 되면 하나님을 부정하든가 실망하거나 한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인 우리가 어찌 그분의 능력이나 됨됨이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잘 되게 하셔도 하나님, 안 되게 하셔도 하나님이신 그분은 우리의 판단이나 의심에 어떤 영향도 없이 그렇게 하나님으로 계신다.
8, 9절)
대적은 사제들은 여전히 권력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성전은 장마당과 타락의 장소로 남아있을 것이라면서 그들을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방법) 밖에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 안의 숨겨왔던 것을 말한다. “그러니 이리 와 내게 경배하시오. 내가 당신에게 이 세상을 주겠소.”
“잠깐만 내게 경배하시오! 경배를 받고 싶어하는 갈망을 내게서 없애 주시오! 나는 그것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소. 그러나 그 갈망은 그대로 내게 남아서 나를 불태우고 있소. 이 극심한 갈증이 내 지옥이오. 오, 착한 당신, 그리스도여, 잠깐만, 다만 한순간만!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한 순간의 기쁨을! 하나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맛보게 해 주시오. 그러면 일생동안 당신의 계획을 위해 당신에게 충실하고 노예와 같이 복종하겠소. 잠깐만! 다만 한순간만, 그러면 다시는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소!” 사탄은 무릎을 꿇고 간청한다.
10절)
반대로 예수께서는 일어나신다. 그분의 얼굴은 무섭게 준엄하고 힘차다. 그분의 눈은 불꽃을 내뿜는 사파이어 같다. 그분의 목소리는 천둥소리와 같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하였다” 하고 말씀하실 때, 사단은 저주받은 자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격노를 폭발시키며 펄쩍 뛰어 사라진다.
사단이 가지고 있던 처음 문제인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교만과 탐심이 끝까지 자신을 지옥으로 끌고 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나에게 말씀하셨던 처음 문제, 빼내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신다면 긴장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그것이 하늘로 올라가야 할 나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무겁고 둔중한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만, 한순간만”하며 세상 것에 한눈 팔다가는 다만 한순간이 영원이 될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 이 급박한 때이다. 지금은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을 놓치면 안 되는 영적으로 예민해져야 하는 때이다.
예수님도 우리가 삼위를 정확히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나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한다는 선포는 대적에게 저주가 된다. 내가 저주한다고 입술을 더럽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적은 자신이 영원히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기록되었으되’
성서에 기록된 것을 말씀하심은 예수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으로 살고 행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말씀대로 그대로 말하고 행하니 그대로 되는 역사, 하나님만 나타나고 그놈은 쫓겨 사라지는 것을 본다.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에게 가르침과 본을 주시기 위해 같은 육신으로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동굴에서의 일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도 보았지만, 사탄은 항상 호감이 가는 외모를 가지고 보통 모습으로 나타난다. 만일 영혼들이 주의 깊고, 특히 하나님과 접촉을 하고 있으면, 그들은 조심성 있게 접근하는 이 모습을 알아차려서 재빠르게 마귀의 계략에 저항한다. 그러나 만일 영혼들이 하나님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을 사로잡고 귀를 먹게 하는 관능적인 경향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져서, 그들을 하나님과 결합시키고 하나님의 힘을 마치 파이프로 흘러들여 보내듯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기도의 도움을 이용하지 않는 영혼들은 외모 속에 숨어 있는 함정(친숙한 나의 모습)을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그래서 거기(나)에 빠진 다음 거기(나)에서 빠져나오기는 매우 어렵다.
내가 허용하는 만큼 들어오는 대적을 알아차리는 길은 하나님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일에 꾸준하지 않고 집중하지 않으면 오랜 세월을 나로 살아왔던 강한 자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었음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나님이 비추시는 빛을 보지 않고 어둠으로 살아왔던 나에게 집중되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탄이 영혼들에게 도달하기 위하여 더 일반적으로 쓰는 두 가지 길은 관능적인 유혹과 탐식이다. 마귀는 항상 인성의 물질적인 면(육)에서부터 시작한다. 물질적인 면을 부수고 굴복시킨 다음에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우선 도덕적인 면(혼)을 공격하는데, 그의 교만과 탐욕으로 생각을 공격하고, 다음에는 정신(영)을 공격하여, 거기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까지도 없앤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대신 다른 인간적인 사랑들을 갖다놓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그가 추구하는 향락에 이르고 거기에 점점 더 몰두하기 위하여 사탄(나)에게 송두리째 빠져들어간다(인간적인 것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까지 없앰).
물질로 유혹해도 생각으로 공격해도 더 나아가 인간적인 것으로 교묘하게 공격해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분야에서 자신을 부인하신 것이다.
[눅 11:27,28]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내가 공동체 안전한 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가짜인 나와 싸워 진짜 나를 지켜가는 자가 복이 있다 하신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너희들도 보았지. 침묵과 기도이다.
[마가복음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교만과 탐욕으로 공격하는 생각을 쳐내고 하나님을 부르고 생각하는 것.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과 결합되어져 있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생각과 말, 행동이 하나님 뜻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기도이다.
사탄과 토론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는 논리에 능하기 때문에 그가 이길 것이다. 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는 없다(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고, 종이나 나무가 아닌, 마음에 쓰여지고 새겨진 이 이름과 이 표를 사탄에게 보여야 한다. 내 이름과 내 표(하나님 뜻대로 삶)를 말이다. 사탄이 자기가 하나님과 같다고 암시할 때에만(속뜻을 드러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써서 대꾸를 해야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은 견디어 내지를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기에 대적은 견딜 수 없다. 예수의 삶 모든 행동의 출처가 하나님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미 영적 세계에서 패한 존재로 자신의 결말을 아는 대적이 최후의 발악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이고 이를 들을 때마다 생명과 상관없는 대적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위는 예수처럼 살 때 가능하다.
[눅 4: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 4: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눅 4: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 권위를 의미하는 단어 ‘엑수시아’는 ‘에크(로부터)’와 ‘우시아(존재,본질)’의 합성어로 ‘~은 옳다, 합당하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를 나타낸다.
말씀을 죽어있는 문자로 만들 건지, 살아있는 권위로 만들 건지는 나의 삶에 달려 있다. 하나님만이 선이시고 그분만이 옳고 합당하심을 알고 믿어 그분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에게서 말씀의 권위가 서게 된다.
말씀의 가치와 권세는 그분께서 가지고 계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말씀이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그렇게 사는 나이다. 바로 살아있는 자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으나 우리를 살리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그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면 싸움이 끝난 다음 승리가 오고, 천사들이 승리자의 시중을 들고 사탄의 증오에 대하여 보호해 준다. 천사들은 그를 하늘의 이슬로 위로하고, 충실한 아들(예수 자신이 아닌 그분이 보시는 우리)의 마음에 정신의 애무가 되는 축복과 더불어 듬뿍 부어주는 은총으로 위로한다.
사탄을 이기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하나님의 음성을 주의 깊게 듣고 반응하는 것), 하나님과 그분의 도움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기도의 힘(우리 연약한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을 나타내실 것)과 주의 자비(하나님께서 육신의 연약함에 대해 엄격하시지 않고 감안하신다는 것, 우리가 감당할 만큼의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탄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세상(나)을 초월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란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나를 알면 적을 아는 것이고 적의 속성을 알면 나를 알게 되므로 이런 자는 백번을 싸운들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게 아닌, 넉넉하게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 백전백승‘하는 것이다.
11절)
예수께서는 피곤하셔서 앉아 머리를 뒤로 젖혀 바위에 기대신다. 기진맥진하신 것 같다. 땀을 흘리신다. 그러나 천사들이 날개짓으로 동굴 안의 숨막힐 듯한 공기를 갈고, 깨끗하게 하고 시원하게 한다. 예수께서는 눈을 뜨시고 빙그레 웃으신다. 나는 예수께서 무엇을 드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천국의 향기로 영양을 취하시고, 그것으로 원기를 회복하신 것 같다.
해는 서쪽으로 사라진다. 예수께서는 빈 배낭을 집어드시고, 날이 빨리 어두워지는데 그분의 위로 날아다니며 아득한 빛을 내는 천사들이 모시는 가운데, 동쪽으로, 아니 그보다도 동북쪽으로 향하신다. 예수께서는 여느 때의 얼굴 표정을 다시 찾으셨고, 다시 자신 있는 걸음을 옮기신다.
그리스도의 시를 통하여 당신의 생애를 경험하고 있을 하르파조와, 자신과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자들이 있는 동북쪽 대한민국을 향해 미소 지으시며 자신 있게 오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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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나의 주 나의 하나님 작성시간 18.12.23 말씀을 듣고 그것을 완전한 소화로 씹고 삼켜 그것의 맛을 더하여 솜씨를 낸 음식을 먹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혼,육으로 구성된 존재이지요. 사실 천사도 사단도 흡모하는 것은 우리가 육을 입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을 너무나 탐하고 호시탐탐 우리의 육을 타고 들어 공격의 틈을 노리지요. 그럼 인간의 답은 육을 초월하고 영으로 예민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의 영이 원하는 소망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그럼 우리의 자유가 어디에 이르느냐, 창조된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창조된 피조세계를 움직이는 내 안의 신성의 능력이 즉 하나님의 권능이 나로 살아지는 믿음의 백성이 -
작성자나의 주 나의 하나님 작성시간 18.12.23 되어 자아는 다 허물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고 예수의 믿음이 활동하시는 사탄아 물러가라 명령에 모든 어둠은 사라져야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통치되어집니다. 이제 님의 영역에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으로 그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낼 것을 예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예수님 처럼 ... -
작성자순전 작성시간 18.12.23 사탄은 항상 호감이 가는 외모를 가지고 보통 모습으로 나타난다. 만일 영혼들이 주의 깊고, 특히 하나님과 접촉을 하고 있으면, 그들은 조심성 있게 접근하는 이 모습을 알아차려서 재빠르게 마귀의 계략에 저항한다. 그러나 만일 영혼들이 하나님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을 사로잡고 귀를 먹게 하는 관능적인 경향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져서, 그들을 하나님과 결합시키고 하나님의 힘을 마치 파이프로 흘러들여 보내듯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기도의 도움을 이용하지 않는 영혼들은 외모 속에 숨어 있는 함정(친숙한 나의 모습)을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그래서 거기(나)에 빠진 다음 거기(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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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순전 작성시간 18.12.23 빠져나오기는 매우 어렵다.
사탄과 토론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는 논리에 능하기 때문에 그가 이길 것이다. 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는 없다(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고, 종이나 나무가 아닌, 마음에 쓰여지고 새겨진 이 이름과 이 표를 사탄에게 보여야 한다. 내 이름과 내 표(하나님 뜻대로 삶)를 말이다. 사탄이 자기가 하나님과 같다고 암시할 때에만(속뜻을 드러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써서 대꾸를 해야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은 견디어 내지를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