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데, 핵심은 연기법의 이치라고 알고 있습니다.
경전에도 연기를 알면 법을 안다고 되어 있고, 자공반떼를 통해서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면 내용이 너무 많고 어려워집니다.
학문적인 내용을 많이 알아야 하는지, 아니면 실제로 중요한 것은 연기법을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문제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법사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A. 예 제가 이렇게 설명을 한번 드려볼게요.
이제 불교의 원리가 사성제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사성제라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처음 고성제는 이 본질적으로 인생이라고 하는 게 괴롭다는 거죠.
근데 이 괴로움이라는 게 단순한 괴로움이 아니라, 우연의 괴로움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적 성격이 괴롭다는 겁니다.
즐거움도 많이 있고, 세상이 아름답다고 예찬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 즐겁고, 어떤 사람에 따라서 괴롭고, 이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질적 성격은 괴롭다는 겁니다.
이게 이제 고성제를 이야기하는 거고.
집성제라고 하는 거는 이제 간단히 이야기를 하면, 왜 괴로우냐?
우리는 욕망을 갖기 때문에 괴롭다는 겁니다. 욕망을 갖기 때문에.
그럼 욕망을 버리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거 아니냐? 맞습니다.
욕망을 버리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근데 욕망이 왜 생기는가 하면 무명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무명이라는 게 뭐냐 하면 연기의 이치를 모르는 게 무명입니다.
우리 공부해 가지고 연기의 이치라고 하는 거는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근데 연기의 이치를 안다라고 하는 거는 그냥 이 머리로 이해해서 아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끊임없이 연기하고 있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우리가 죽을 순간이 돼도 그걸 알고.
그러니까 제가 비유를 흔히 드는데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 하면, 아주 뜨거운 여름에 산에 막 올라 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다가 계곡이 발견돼 가지고 계곡에 물을 한 모금 떠서 먹었어요.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청량하겠죠.
그렇다고 해서 그 계곡물을 아 이게 내가 더울 때 이거 먹으면 좋겠구나 해서 그걸 손에 움켜쥐고 가려는 사람은 없을 거 아닙니까?
이건 뭐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 물을 가져가려고 하면 모르지, 그게 이 사람이 술이 아주 취했거나 무슨 하여튼 어떤 상황에 있어도 이 계곡물이라고 하는 것은 가져갈 수 있는 성격이 못 된다, 계곡에 흐르는 물은 도구가 없는 한 가져갈 수 있는 게 못 된다 이런 것을 알 수 있을 정도.
그렇게 연기의 이치를 자거나 깨거나 무엇을 보거나 항상 알 수 있을 정도로 연기의 이치를 봐야 그게 무명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명에서 벗어나면 욕망을 버리게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연기한다는 걸 확실하게 보게 되면 욕망을 가지지 않게 된다는 거죠. 모든 것은 붙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건데, 그걸 왜 가지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그 무명에서 벗어나는 거고 그래서 무명 때문에 욕망을 갖고 욕망 때문에 우리가 괴로움에 떨어져 있다. 이게 집성제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멸성제라고 하는 것은 욕망을 버리는 것이 가능하냐.
멸성제라고 하는 것은 욕망을 버리는 것이 가능하고 그렇게 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고 실제로 그걸 실현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부처님을 비롯해서. 그게 멸성제고.
도성제라고 하는 건 뭐겠습니까?
그러면 욕망을 도를 닦아서 욕망을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도를 닦아서 어떻게 욕망을 버리느냐?
도를 닦아서 무명을 없애는 길이 욕망을 없애는 길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연기의 이치를, 도를 닦아서 연기의 이치를 확실하게 보게 되면 욕망을 버리게 될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구조거든요.
그러면 불교를 왜 공부하느냐?
이런 원리를 이해를 하면서 도를 닦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도를 닦는 것이 그냥 이런 이치도 모르면서, 무조건 앉아가지고 내가 무명의 연기를 보겠다고 해가지고 앉아만 있으면 연기가 보입니까?
부처님이 이제 어떻게 하면 무명을 없애고 연기를 볼 수 있는지 그걸 부처님이 가르쳐 놓으신 것이 도성제거든요.
그러면 도성제를 실현해 가지고 무명을 타파하려면 부처님이 가르치신 방법에 따라서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인지는 모르지만, 최첩경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려면 부처님이 가르치신 도 닦는 방법을 이해를 해야, 이해를 하고 거기에 따라서 도를 닦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게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구조고 불교를 공부하는 기본적인 목적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를 닦는다?
예전에 중국에 보면 그런 사람이 있었대요.
뭐 지게꾼이 앉아가지고 한순간에 도를 깨쳐가지고 뭐 어떻게 했다 이런 게 나오는데 그건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뭐 그거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전생에 수다원의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전생에 수다원의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거든요. 7번 생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수다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이라면 지금 와서 경전을 다시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생에서 닦았던 부처님이 가르치신 원리의 구조가 머릿속에 들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 지게꾼처럼 이렇게 무지랭이처럼 다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늘 머릿속에는 왜 어떻게 하면 이게 이 세상의 본질이 뭐고 어떻게 하면 이걸 알 수 있을까?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도 머릿속에 늘 그것만 들어 있다가 어느 순간 어떤 계기가 있어서 탁, 도를 보게 되는 거죠.
이제 그런 구조여야만 불교 공부를 하나도 안 해도 도를 깨칠 수가 있고 무명을 깰 수가 있다는 것이지, 그 외에는 부처님이 가르친 방법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아주 어렵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그래서 불교를 공부하는 것이니까 그런 구조 이해 아래에서 불교 공부를 하시는 게 제일 효과적인, 헛된 노력을 제일 덜 들이고.
그러자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초기 경전의 가르침은 적어도 그게 이제 뭐 수행할 때의 난관이라든지 또는 뭐 하여튼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 무슨 우리를 괴롭히는 수행을 방해하는 것들이라든지 이런 거에 대한 다 설명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이제 하나하나가 다 도움이 되겠죠. 그걸 알기 위해서 불교 원리를 배우는 거고 현재 공부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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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무아 작성시간 26.01.29 연기의 이치를 자거나 깨거나 무엇을 보거나 항상 알 수 있을 정도로 연기의 이치를 봐야,
그게 무명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명에서 벗어나면 욕망을 버리게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연기한다는 걸 확실하게 보게되면 욕망을 가지지 않게 된다는 거죠.
모든 것은 붙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건데, 그걸 왜 가지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그 무명에서 벗어나는 거고 그래서 무명 때문에 욕망을 갖고 욕망 때문에 우리가 괴로움에 떨어져 있다.
이게 집성제가 의미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