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우리들의 도시/ 기형도

작성자임현정|작성시간14.08.26|조회수288 목록 댓글 4
겨울, 우리들의 도시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풀리지 않으리란 것을, 설사
풀어도 이제는 쓸모 없다는 것을
무섭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외투 깊숙이 의문 부호 몇 개를 구겨넣고
바람의 철망을 찢으며 걸었다.

가진것 하나 없는 이 세상에서 애초부터
우리가 빼앗을 것은 무형의 바람뿐이었다.
불빛 가득 찬 황량한 도시에서 우리의 삶이
한결같이 주린 얼굴로 서로 만나는 세상.
오, 서러운 모습으로 감히 누가 확연히 일어설 수 있는가.
나는 밤 깊어 얼어붙은 도시 앞에 서서
버릴 것 없어 부끄러웠다.
잠을 뿌리치며 일어선 빌딩의 환한 각에 꺽이며
몇 타래 눈발이 쏟아져 길을 막던 밤,
누구도 삶 가운데 이해의 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숨어 있는 것 하나 없는 어둠 발뿌리에
몸부림치며 빛을 뿌려넣는 수천의 헤드라이트!
그 날에 찍히며 나 또한 한 점 어둠이 되어
익숙한 자세로 쓰러질 뿐이다.
그래, 그렇게 쓰러지는 법을 배우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온몸에 시퍼런 절망의 채찍을 퍼붓던 겨울 속에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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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선옥 | 작성시간 14.08.27 여름이 끝나갈 즈음 이 시를 읽으니 도시의 겨울이 생각이 나네요...
    때론 화려하거나... 때론 외롭고 슬프거나...
    괴롭고 절망적이지만 살아가야 하는... 아니 살아지는 삶의 모습이 떠올라요...
  • 답댓글 작성자이민숙 | 작성시간 14.08.27 선옥씨의 시에 대한 감상은 그 생김새의 주인은 아닌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만나 얼굴을 맞대는 것과 우리의 존재를 서로 마음으로부터 나누는 것은 전혀 다른 어떤 색채와 냄새가 있다? 시 읽어주는 한 사람이 늘어서 무지 반가운 한 사람으로부터~ ㅎㅎ
  • 작성자이민숙 | 작성시간 14.08.27 쓰러지는 법을 배우며 살아남는 삶의 한가운데에 서서 우리가 빼앗을 것은 무형의 바람뿐.....그 한없는 빈털털이의 겨울이 지금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다. 아니 수만 년 전부터 나에게 왔고 그렇게 지나갔다. 겨울이여 또 오고있는가? 그래서 이리 마음이 설레이는가? 텅 빈 설레임에 치가 떨리는가?
  • 작성자양미자 | 작성시간 14.08.28 이쯤에서 참 의미있는 시군요. 익숙한 자세로 쓰더지더라도 반동처럼 다시 또 익숙한 자세로 일어서서 가려고요. 개콘의 한마디처럼 "아이고 의미없다" 주변에서 아무리 놀려대도 쓰러져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곧 추워지고 눈도 올텐데. 아. 눈오는 겨울밤. 올해도 한 해를 다 털어 뭔가를 맹그러놓고 빈털털이로 자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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