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학인 마가는 제사를 지내는 바라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정당하게 재물을 모아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보시하여
공덕을 구하고, 그 공덕으로 범천에 태어나고자 원하는 바라문입니다.
당시 바라문들은 내생에 범천(브라만의 하늘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해탈의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실천수단은 곧 제사입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쑨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불을 섬기는 제사를 지내는
바라문이지만, 여기 나오는 바라문 마가는 제사를 통해 널리 사람들에게 보시하여
공덕을 쌓는 바라문입니다. 공덕의 완결은 범천(최고의 하늘세계)에 태어나는 데 있습니다.
바라문 청년 마가는 부처님을 찾아 자신의 이상과 수행과정을 설명하고,
부처님께 네 가지 질문을 합니다.
1) 많은 사람에게 공덕을 베풀면 과연 공덕이 있습니까?
2) 누구에게 베풀어야 자신의 재물이 청정해집니까?
3) 완전한 제사란 어떤 형태를 갖추어야 합니까?
4)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제사를 지내면 범천의 세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마가의 질문을 곰곰히 살펴보면, 참으로 젊은이 답게 솔직하고 진실합니다.
마가의 제사가 2,500여년이 지난 오늘 이 시대에도 의미가 있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청정한 재물을 베풀어 공덕을 쌓고, 마침내 그 공덕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나려는 생각이
현대의 다양한 종교에서도 살아있고, 설사 종교의 형식을 빌지 않더라도 남에게 베푸는
보통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불자 입장에서도 보시하는 마음을
깊이 성찰해보면, 우리 역시 본질적으로 마가의 생각과 크게 다름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공부하는 경전(숫타니파타, 큰 법문품, 마가의 경)을 보면, 부처님은 마가가
묻는 것과는 전혀 다른 답변을 합니다. 바라문의 진리에 따르면, 제사의 재물이 청정해지려면
제사를 지내고 제사의 형식에 정통한 바라문에게 재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탐욕을 없애고 마음이 고요하며, 소유를 버리고 유행하는 수행자에게
공양을 베풀어야 제사가 청정해진다고 말합니다.
또한 완벽한 제사가 되기 위해서 어떤 형식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묻는 마가에게
부처님은 탐욕을 버리고, 분노와 타락을 제거하며, 제사를 지낼 때 사방으로
자애의 마음을 보내는 것이 완벽한 제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마침내 마가는 묻습니다.
- 과연 부처님 말대로 그렇게 제사를 지내면 정말 범천의 세계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
거창한 제사의 규모와 완벽한 형식에 묶인 바라문에게 부처님의 말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탐욕과 분노, 타락에서 벗어나 자애의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면 범천에 태어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출가하여 바라문종교와 결별할 수
있는 출가자와 달리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는 마가의 입장을 고려한 것입니다.
마가와 부처님의 대화를 보면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대화를 하는 듯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마가가 진실로 공덕을 쌓아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다면, 그는 왜 2)번이나 3)번, 나아가 4)번의 질문을
계속 이어가야만 할까요?
1)번의 질문처럼 공덕을 쌓는 것이 분명한 진리라면 왜 다시 마가는 자신의 제사가
청정해지는 방법을 물어야 하며, 자신의 제사가 공덕을 쌓아 청정해지는 것이 확실한데,
왜 그는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는 완전한 제사의 형식을 묻고 있을까요?
마가의 네 가지 질문속에는 의혹과 갈등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 스스로 공덕을 쌓아
범천에 태어나는 일련의 인과(因果)관계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가 부처님을 찾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보시에 관한 우리 자신의 생각에도 마가와 같은 내적 갈등과 의혹이 없는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제사나 공덕에 묶여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마가에게 탐욕을 버리라고 말한 부처님의 법문은 강 건너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공덕을 추구하는 자신의 마음속의 허구와 독단을 성찰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입니다.
(2015 2. 05.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