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영법사와 저녁을 먹고 7시 40분쯤 <사명당의 집>을 나섰습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상쾌합니다. 멀리 시야가 맑고 깨끗합니다.
가로등에 비친 가로수의 잎새들이 방금 옷을 갈아 입은 듯, 연록색이
더욱 청명해 보입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젊은 남녀들이 짝을 지어
청계천 쪽으로 걸어갑니다. 젊은이들 답게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이 모두 낮에 내린 비의 은덕입니다.
차를 몰고 굴다리 안에 들어서니, 거사님들의 줄이 평소보다 길었습니다.
오늘도 오신 거사님들의 수가 100여명쯤 됩니다. 지난 겨울에는 보통
7, 80여명이 모였는데, 4월 들어 100여명이 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백설기 200편을 한 사람에 2개씩 드리는데 거의 남는 것이 없습니다.
급기야 봉사자를 위해 남겨놓은 것마저 백발거사님이 내 놓았습니다.
거사봉사대 여러분들의 마음이 고맙습니다.
오늘은 백설기 200편, 바나나 240개, 커피 100잔, 둥굴레차 100잔을
보시했습니다. 보살행을 해 주신 분은 모처럼 벨기에에서 온 최지은(뮤리엘)님,
퇴현 전재성 박사와 을지로 봉사대 해룡거사, 백발거사, 병순거사님입니다.
해룡거사는 뮤리엘과 안면이 있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6, 7년 전 뮤리엘이 처음 을지로 따비에 찾아온 때를 생각하니,
지난 세월이 참 빠르게 느껴졌습니다. 전화로는 분명히 한국말을 서투르게
하는 외국인인데, 아무리 둘러봐도 외국인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여성인
뮤리엘이 자기 소개를 해서 겨우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3년만에
다시 왔지만, 세월이 흘러도 다시 만날 수 있는 이 인연이 고맙습니다.
퇴현거사는 오는 수요일 하와이로 가족을 만나러 갑니다. 한 달 쯤 있다 올
예정인데, 그동안 율장을 번역 하느라 피곤했던 몸을 편히 쉬다 오길 바랍니다.
백 번, 천 번 보시해도 하나도 보시한 것이 없는 도리가 무주상 보시입니다.
야부선사는 이 도리를 안횡비직(眼橫鼻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눈은 옆으로
놓이고 코는 아래로 똑바로 서 있다는 말이니, 평상한 이 도리는 보여줄 것도
따로 감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참고 견디는 보살행을
꼭두각시의 꿈이요, 거북의 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보시행이
털끝 하나도 얻을 것 없는 이 빈 도리 위에 서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