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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시 작품방

[스크랩] 구암 허준

작성자태공 엄행렬|작성시간24.08.02|조회수49 목록 댓글 3

<구암 허준> - 1539년(중종 32년) ~ 1615년(광해 7년) 향년 75세

 

 본관은 양천으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2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천 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며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륜(許碖)이다. 어머니는 허륜의 소실 영광 김씨로 적모로 윤씨가 있고 서모로 일직 손씨가 있다. 이복형으로 허옥(許沃)이 있으며 바로 아랫동생인 허징(許澂)은 같은 어머니가 낳은 동복형제로 허준은 허륜의 차남이다. 허륜의 소실 영광 김씨는 허준의 어머니로 김욱짐의 딸로 당대에서도 설명되고 있다.

 

 일단 허준이나 허징은 족보에는 서자로 표기되어 있다. 다만 천민 소생이 아닌 양인 신분의 첩의 소생으로 동의보감 원작이나 드라마 허준에서 묘사된 것처럼 천민 소생은 아니다. 허징도 형 못지 않게 비범한 인물로 서자이면서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시절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의 딸과 결혼까지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허준이 1575년 선조의 어의로 임명되었기에 이때 신분이 면천되어 어머니인 영광 김씨와 허준의 동복동생인 허징 또한 중인 출신이 아닌 반가의 혈족으로 인정받았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허징은 1586년(선조 19년) 문과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학관(學官)을 거쳐 목사(牧使)를 역임했는데, 형 허준의 능력으로 허징의 신분이 면천되어 대과를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본래는 서자나 서얼 모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서자는 양첩 사이에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허준이 10살 무렵인 1550년부터 과거 응시가 가능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허준은 과거시험 잡과 중 의과에 합격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과거는 양반만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는데 법률상으로는 천민이 아닌 모든 사람이면 과거 응시 자격이 있었다. 애초에 과거에 합격해야 양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양반이어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고 말하면 모순이다. 반대로 의과를 포함한 잡과를 중인'만' 볼 수 있던 것도 아니다. 의관 중에서도 유의라 해서 사대부 출신 의관들이 많이 있었다.

 허준이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으나 내의원에 들어오기 전에 허준이 의학으로 명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아버지인 허륜이나 적모 윤씨, 친모 김씨, 서모 손씨, 이복형 허옥 등의 지원 아래 여러 스승을 들여 의학을 배웠다는 추론이 있다. 이를 보면 허준의 집안은 서얼이라고 해서 크게 차별을 하지 않는 당시로써는 꽤나 깨어 있는 집안이었고, 서자인 허준에게도 지원을 해가며 배움의 기회를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선조 대의 관료이자 학자인 미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에 유희춘 자신이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천거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고 1573년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1569년에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내의원에 천거되려면 기본적인 의학 수준 이상을 갖추어야 하고 집안의 배경도 추천의 근거가 되므로 본인 실력과 뒷받침해주는 가문의 배경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추천장을 성 대감에게 받고 유의태가 추천장을 불태우는데 실제 허준은 추천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다.

 1575년부터 선조를 진료하는 의원이 되었고 1578년에 내의원 첨정에 올랐으며(1572년 종4품 내의원 첨정을 거쳐 1573년 정3품 내의원정 에 오름 잘못된 서술.) 1587년에는 어의 양예수와 함께 선조를 치료하여 호피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여 1591년 당상관]에까지 오르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호종을 해서 전후 호성공신 3등에 제수되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에는 류성룡이덕형이항복이원익이산해와 더불어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피난가지 않고 자진해서 조정에 남아 선조를 모셨다. 원작소설인 동의보감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허준 등에서 의료 기록을 빼내서 짊어지고 오느라 늦게 선조에게 도착한 탓에 선조가 분노했다는 내용은 완전히 허구다. 다만 의서는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선조가 피난길에 오를 때 병을 앓아 치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만 이때도 의서를 옮긴 이들은 허준이 아닌 하급 서리들이나 짐꾼들이 했지 허준이 한 것이 아니며 의서를 옮기는데도 결정을 내린 이는 허준이 아닌 당시 수의 양예수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1596년에는 세자 광해군의 천연두를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차관급)에 제수되었다. 또한 이때 선조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 편찬 작업을 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의보감 편찬의 시작이었다. 허준을 비롯해 어의(御醫)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등과 민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의(儒醫) 정작 등 6인이 공동으로 동의보감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발발로 1년 만에 작업이 중단됐다. 이후 1601년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동의보감을 단독으로 편찬하도록 하되 보다 시급한 의학책인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등 3종을 우선 편찬하라고 명했다. 또,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줘 편찬에 고증할 수 있게 했다.

 1600년(선조 33년) 정2품 지중추부사를 겸직하던 수의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진왜란 당시 어가 호종의 공로로 호성공신 3등에 오르게 되고 이때 의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대권으로 정1품 양평부원군에 제수되었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종1품 양평군(陽平君)으로 강격되었다. 참고로 군(君)은 왕의 서자나 당상(堂上)의 위계에게 주어지는 부군(府君)의 관작을 말한다. 종1품상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고 1606년 왕실의 병을 다스린 공로로 다시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제수되었으나, 보국숭록대부는 당상관의 문관이 받는 위계라는 이유로 허준은 의관이므로 관례에 어긋난다고 또 한 번 대간들의 반대를 불러 백지화되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어야 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무마시켰다.

 대간들이 허준을 질투하거나 멸시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허준에게만 이례적으로 특혜를 준 것이기 때문에 대간들의 반대가 유별난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품서용 원칙이 적용되는 잡과 급제자는 정3품 당하관이 승진의 끝인데 허준은 종1품에 제수되고 봉군까지 된 상황에서 정1품으로 진급한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잡과 응시자가 순수하게 잡직으로만 근무하며 정1품을 달성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처럼 허준에게만 특례가 적용된 것은 무엇보다도 선조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며, 재위 내내 유능한 신하들에 대한 심각한 의심병과 열등감 폭발에 시달려서 이순신의 공적을 깎아내리고 원균을 찬양할 정도로 멘탈이 막장이었던 선조의 항구적이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전시에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 대통령 주치의나 국립중앙의료원장에게 대통령이 삼부요인급 의전을 준다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수준으로 9급 공무원이 국무총리까지 승진하는 넘사벽 난이도의 문제조차 넘어서는 것이다.

 당시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중인에서 정1품까지 출세한 허준의 입지전적인 출세 스토리는 화제가 되었다고 하며 백성들 사이에 계속 회자되면서 허준 설화가 전국 곳곳에서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런 허준과 관련한 설화 혹은 전설들이 우리가 아는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면서 어의인 허준은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사실 조선에서 왕이 사망하면 왕의 건강을 책임지던 어의는 사직하거나 형식적으로 귀양을 갔다가 곧 풀려나서 복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1609년 말 1년 정도의 귀양에서 풀려난 허준은 광해군의 어의가 되어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1999년도 작 허준 드라마에서는 선조가 사망하고 그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서 십수년을 귀양살이를 하며 그 기간동안 동의보감을 완성한 것으로 극화되었다. 실제 동의보감은 선조가 살아있던 1596년 선조의 왕명으로 편찬된 것이라서 허준이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도 아니었고, 편찬 과정에 당시 책임자는 태의인 양예수였고, 그 외에 유의 정작(鄭碏)과 김응택, 이명원(李明源), 정예남 등과 함께 편찬하였으니 허준 혼자만의 공도 아니었지만 허준이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속출세하여 허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그가 동료들과 함께 편찬한 동의보감이 허준 개인이 편찬한 것으로 오인받는 요인이 되었다. 1999년작 드라마 허준에서 선조가 사망하고 십수년간 귀양살이를 한 것으로 묘사된 것도 선조때부터 기획하여 광해군이 등극하고 완료된 것을 포함한 것이다.

 사실 허준은 귀양살이에서는 귀양만 살았고 귀양에서 풀려나 삼의사의 수의로 복귀한 1610년 동의보감의 편찬을 완료하여 광해군에게 바친다. 1596년 선조에게 첫 왕명을 받은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허준은 그동안 바쁜 공무로 인해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도 동의보감의 편찬을 끝내지 못했으나 선조 승하 이후 유배로 인해 시간적 여유가 생긴 허준은 이미 사망한 태의 양예수 외에 생존해 있던 유의 정작(鄭碏)과 김응택, 이명원(李明源), 정예남 등 다른 동료들과 동의보감 편찬에 몰두하여 편찬을 마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는 전란 직후라 출판 사정이 좋지 않아 동의보감은 편찬 완료 후 3년 뒤에나 출판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의보감은 당시에 출판된 조선과 중국의 확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서를 참고하고 여기에 내의원의 연구가 더해져 완성된 일종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출판되자마자 조선청나라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지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마다 베이징의 서점에서 동의보감이 팔리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다만 동의보감이 처음부터 허준이 단독으로 시작한 작업은 아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596년 선조의 명으로 당대의 여러 명의들과 공동으로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작업 초반 정유재란(1597년)의 발발로 작업이 중단됐다. 이후 1601년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따로 동의보감의 편찬 작업을 재개할 것을 명한 것이다. 동의보감 편찬은 공동 프로젝트로 시작하였고 여러 명의들이 왕실 서고와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하여 제대로 된 것을 추려내고 자신들의 의학관과 경험을 첨가하여 작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의보감이 허준의 단독 작품인 것처럼 취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란으로 편찬 작업의 참가자들이 모두 흩어지며 초반에 중지됐던 작업을 이후 허준이 허준이 책임자로 임명되어 다른 명의들을 지휘하여 편찬 작업을 완료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초반에 중단되어 무산될뻔한 프로젝트가 허준을 책임자로 하여금 무사히 끝마칠 수 있게 됐으니 동의보감 편찬에 허준의 공이 제일 큰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동의보감이 허준의 단독 저작물이라는 오해가 생긴 것이다.

 허준은 이후에도 각종 의서 편찬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해 의학자로서 나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15년 10월 9일 향년 76세로 사망하였고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 양평부원군 보국숭록대부에도 추증되었는데 그동안 반대했던 대간들도 동의보감 편찬에 공을 세운 것을 인정하여 이때는 반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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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허준

 

태공 엄행렬

 

 

구절양장九折羊腸 같더라도

구곡간성救曲盰城 일념으로

암담할 때 있었지만 꺾이지 않은 의지

 

허다한 암투 견디고 동의보감 완성되자 

준걸한

의술 가진 분 덕에

백세시대 산다네

 

-20240801-

 

  

 

* 구절양장 : 양의 창자처럼 험하고 꼬불꼬불한 산길

(길이 매우 험함)

* 구곡간성 : 나라를 지키려는 믿음직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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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소 담 | 작성시간 24.08.02
    행시도 읽다가 보면
    배움인데
    이렇게 자세하니 무연 글까지 가득 채워 지시니
    아마 역사공부더 덤으로 배움 입니다
    동의보감의 허준 은
    주신 글만큼 알수있었던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태공시인님 ^^
    더워서 계곡에 갔다가
    소나기 내리는 바람에 철수 하고 집에오니 찜통 입니다
    강원도가 이러면 아랫녁은 어떨려나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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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태공 엄행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05
    소담 선생님 사신 곳만 해도
    원주 보다는 훨씬 더 청정지역이겠지요.
    원주야, 한참 차를 타고 가야 만나는 치악산!
    현직에 있을 때 야유회 장소가 그곳이라
    계곡물에 발만 잠시 담그고 내려와
    동료들과 막걸리(동동주)에 파전, 빈대떡, 도투리묵
    실컷 즐기고 돌아온 기억이 어제 같은데
    벌써 30년 가까이 흘렀네요......

    이제 한 열흘 있으면 더위 물러가겠지요.
    모쪼록 잘 이기시길 빕니다.
    소담 선생님!~~~^0^
  • 작성자베베 김미애 | 작성시간 24.08.08
    걸출하고
    대대가 지나도
    우러러 본받을 위인의 삶은
    거룩하도록
    본받고 싶습니다
    하여 존경하는 의암 허준님의 일생
    길이길이 보존될 우리나라의 보고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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