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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시 작품방

[스크랩] 견훤

작성자태공 엄행렬|작성시간24.08.09|조회수56 목록 댓글 5

 

견훤(867~936) * 향년 69세

 

<긍적적 평가>

 

 견훤은 한때 고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세웠던 전적도 있었고, 신라의 임금까지 갈아치웠을 정도로 위세가 강력한 패왕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야전 사령관에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전술가적 면모도 갖추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순수하게 육상에서의 군사적 능력만으로 따지면 왕건보다 뛰어나 궁예유금필과 함께 후삼국 시대 최고의 명장이다. 소수의 군사로 남해안을 휩쓸고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것도 탁월한 군사적 업적이라 볼 수 있지만, 2차례 조물성 전투에서도 왕건을 거세게 밀어붙였음도 눈에 띈다.

 특히 걸작이라 할 만한 것은 서라벌 기습과 공산 전투이다. 신라와 고려의 합작에 의해 전략적으로 상주로의 진출이 봉쇄당하고, 북쪽의 고려와 동쪽의 신라, 남쪽의 대야성에 주둔한 김락의 군세에 협공당할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도, 고려군의 약점을 꿰뚫어보고는 신속한 기동전으로 고려군 전선의 간극을 치고들어가 서라벌을 유린하고, 서라벌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왕건을 요격해 그야말로 박살을 내버렸다. 이때 왕건은 거의 한 달간 행방불명이 되기까지 했다. 고창 전투에서도 호족 세력들이 왕건의 편을 들기 전까지는 후백제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물론 해전에서는 왕건을 제압하기가 어려워 나주를 빼앗겼지만, 이것도 나중에 제대로 반격을 개시하여 나주를 탈환하고, 예성강을 기습해 수도 개경을 공격하는 등 고려에 큰 한 방을 먹이기까지 한다.

 다만 아무래도 맨땅에서 시작해서 자수성가했다는 게 보기 좋은 성공 스토리라 그런지, 견훤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상당히 오히려 부풀려진 부분 또한 있다. 견훤의 출생지인 문경과 성장지인 상주는 밖으로는 고구려, 안으로는 독자적 병력을 보유해서 가끔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진골들에 대한 대비책에 고심하던 내물 마립간~소지 마립간 등이 신라 왕실에게만 충성하는 정예 부대를 키워 안팎의 위협을 분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육성한 추풍령 지역에 속했다. 이 일대는 지증왕 왕가가 따로 직할 정예 부대를 양성하기 시작한 경북 서북부 조령 일대와 함께 신라 정예병 부대와 왕궁 근위대에 배타적으로 인력을 공급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견훤이 대단히 어린 나이에 서라벌로 들어간 후 상당히 빨리 승진한 건 물론 본인의 무력적 소양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견훤이 아버지 아자개의 빽, 더 나아가서는 가문의 빽으로 서라벌에 있는 부대에 입대해서 스타트가 남들보다 유리했던 게 어느 정도 작용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진정한 밑바닥 흙수저 성공 스토리는 장보고지만 역시 출발 시점이 견훤보다 불리했던 탓이었는지 이쪽은 최종 커리어가 분명 견훤만 못하다.

 그러나 견훤과 비슷한 시기에 서라벌에 있는 중앙 부대에 입대한 말단 병사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견훤처럼 성공한 사람은 단 하나에 불과했음을 생각해보면, 견훤의 능력과 성공이 그 시대에서 단연 가장 뛰어난 정도였음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서남해로 발령받아 신라 중앙군 부대를 접수한 건 물론 남들보다 유리한 출발이지만, 오히려 불리한 부분도 있었다. 백 년 혹은 수백 년 전까지 전통이 거슬러 올라가는 신라 정예병 부대들을 오로지 자기 커리어와 실력, 인품으로 설득해서 백제 부흥군을 만든다는 과업 자체는 누가 생각해도 어려운데, 김헌창보다는 명백히 신분과 가문 뒷받침이 좋지 못한 견훤이 이걸 자기 능력만으로 해낸 것이다.

 연구에서는 순천에 있는 군부대를 접수한 후 광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광주 호족들을 설득하는 데 상당한 갈등이 있었고, 또 그 광주를 접수한 후에는 전주와 나주에 있는 호족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긴장이 있었던 걸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견훤은 그런 상황에서 주변 모든 해적과 해상 호족들을 제압해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불가능해보일만큼 어려운 과업을 해낸 것으로 그야말로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독선적인 면이 강해서 호족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인 신검 대신에 후처의 아들인 금강을 태자로 삼으려했다가 뒷통수를 맞았다는 평도 있다.

 재능도 상당했지만 그 끈질긴 근성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무려 67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해 왕건과 맞붙어 수차례 승리한 바 있을 정도였으며, 그 오기와 끈기 또한 대단하여 신라로 통하는 요충지인 대야성의 경우에는 20여년이나 끈질기게 공을 들인 끝에 점령하였고, 왕건이 궁예의 신하를 지낼 적에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빼앗아버렸던 나주를 다시 십수년의 공을 들여가며 키운 해군으로 도로 빼앗았으며, 그 여세를 몰아 개경까지 진격하여 고려 왕궁을 공격했으니, 그야말로 근성의 화신이라 불릴 만하다. 육전과 해전 양면에서 고려군을 잘근 잘근 씹어드셨다.

 또한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견훤의 과격한 행보와 드라마 <태조 왕건>의 영향으로 대체로 호방한 성격 탓에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술했듯 순천에서 광주 호족들을 설득하고, 광주를 접수한 후에는 전주 호족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어려웠을 텐데 그걸 해낸 것이며, 말년에는 비록 신검의 쿠데타로 빛이 바라기는 했지만 왕자들을 지방 도독으로 임명하면서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를 시도했다.

 특히 호족들을 휘어잡는 솜씨는 호족들의 지역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도와 개호를 반복하고 미륵 신앙을 이용해 공포정치를 통한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자멸한 궁예를 크게 능가했다. 나주 지역의 지지는 얻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고려해도, 사성 정책과 결혼 동맹으로 철저한 왕권 강화보다 호족간 군신(君臣)의 동맹을 맺는 차원에 머문 왕건과 견줄만 하다.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던 궁예가 결국 중앙 집권화에 실패하여 호족의 대표격인 왕건의 손에 죽었고, 광종 이전의 초창기 고려가 호족 연합적 국가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장 일개 군졸들이 견훤이 고려에 투항해 자신들 앞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사기를 잃고 고려군에 많은 수가 항복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 견훤에게 돌려지는 억울한 비난으로는 이른바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그 이유 중 하나로 청주, 공주, 나주 일대가 처음에는 백제 부흥에 참여하지 않았던 걸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대단히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다. 그곳들만 백제 유민이 사는 지방은 아니었고, 애초에 청주 출신 궁예가 고구려 정체성 초월을 외치며 청주, 공주 일대 호족들에게 크게 대우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궁예가 쓰러지자 해당 지역들이 바로 후백제에게 달려간 걸 보면 알 수 있다. 나주는 광주와 오랜 대결의식이 이유였는데 실은 이 나주마저도 견훤의 후백제를 당해낼 순 없었다. 그렇게 보면 '포용력' 좋다는 왕건도 신라의 여러 명군이 통일신라 정예군을 양성한 경북 서남부는 끝내 포섭하지 못했었고 그 일대는 내내 견훤을 강하게 지지했다.

 게다가 경남 일대는 후삼국시대 내내 후백제가 쥐고 있었는데, 후백제가 내내 살상만 저지르고 '포용'은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견훤이 지나치게 경상도 일대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 옛 백제 일대 포섭이 미뤄진 건 사실이었으나, 군사적으로 봤을 때 그 지역들은 다소 가치가 떨어짐은 부인할 수 없다. 견훤의 대전략은 조령과 추풍령 전체를 장악하여 옛 나제동맹이 고려를 막았던 바로 그 소백산맥 철벽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 신라 왕실이 스스로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듬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궁예와 달리 이렇다 할 공포정치는 펼치지 않았던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고창 전투에서 져서 전세가 크게 밀리게 되지만 그럼에도 그걸로 다 끝난 건 아니었다. 발해 유민이 고려로 대거 유입되어 후백제 못지 않게 양면전선에 고생하던 고려의 북부 국경 방어 부담이 거진 없어진, 견훤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견훤 자신이 후계 문제를 엉망으로 만든 실수가 겹쳐지는 바람에 패배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재평가를 받았다.

 

<부정적 평가>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전술 그리고 결단력과는 달리 장기적인 비전에서는 왕건만 못했다. 완산주를 수도로 삼고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세웠지만, 견훤 자신이 원신라 장군 출신이었기에 쟁패 기준을 주로 통일신라 시대에 맞춘 흔적이 있다. 이 점은 소위 마지막 전국인(戰國人)이라는 항우와도 통한다.

 역량을 주로 신라 지역에 집중했는데, 그럼에도 견훤 본인의 연고지이자 아버지 아자개의 지배지였던 상주시가 자신이 아닌 고려에 붙은 건 아무래도 견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부친 아자개와 화해하지 못했던 원인이 크다. 그리고 경순왕 옹립은 오히려 가장 큰 실수였다. 통일신라 정예군을 양성하는 산실이었던 경북 서남부를 내내 틀어쥐었던 걸 보면, 견훤 자체는 거병 전에도 신라군 내의 기대받는 유망주이자 명장이었음은 분명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라 쪽에서 내분이 벌어지는 순간 계속해서 원신라 지역을 잠식했던 역량 또한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경애왕 다음으로 가장 명분 있고 능력 있는 경순왕이 언제까지나 견훤의 통제를 따르며 감사해줄 거라 생각했던 건 크나큰 오판이었다.

 견훤이 누가 보더라도 단기전에 집착한 걸 두고 견훤 자체에만 원인을 돌리긴 어렵다. 후백제가 경제력 측면에선 잠재성이 큰 옛 침미다례를 잃은 반면, 고려가 옛 신라의 무열왕계 왕실이 거의 수백 년 동안 군사 지역으로 유지해왔던 추풍령 일대를 확보하면서 정예부대와 중요한 요새, 지정학적 유리성을 얻은 걸 보면, 후백제가 처한 판세가 장기전보다는 단기전에 대단히 유리하게 짜여 있던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견훤이 고려와 신라의 연합 전선을 어떻게 해서든 파훼하기 위해 그 포위망을 절묘하게 뚫고 서라벌을 습격해 들어간 것 자체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사실 백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멸망시킨 것도 그렇거니와 가장 최근인 6세기 이후 내내 다툰 상대는 신라였지 고구려가 아니었고, 자연히 백제 부활과 의자왕의 복수를 천명한 견훤의 입장에서도 이들에게 태봉-고려와의 백제고토 쟁탈전보다는 신라 멸망이라는 선물을 안겨줄 필요가 있었다. 역시 외지인 출신으로 나라를 세운 궁예가 미륵신앙과 함께 대신라 강경책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던 것을 보면, 패서라는 홈그라운드의 지원과 용인 하에 대신라 유화책을 펼칠 수 있었던 왕건이 오히려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라벌 습격 당시 저지른 만행들이 도가 지나쳤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경애왕을 살해한 것까지야 그래도 경애왕 하나 때문에 후백제가 7년 동안 골탕 먹은 바 있었으니 그러려니 해도, 경애왕의 애꿎은 왕비를 강간하고 서라벌에서 온갖 약탈을 자행한 건 현대인들의 눈으로 봐도 정말 용서가 안 되는 행위였다.

 이 때문에 인근 호족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려 대세가 완벽히 고려로 넘어가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더군다나 서라벌을 완벽하게 파괴해 신라에 충성하던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마저 신라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잘 구슬려서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도 시도해야 했지만, 서라벌에서 이미 신나게 깽판친데다 비록 개박살나긴 했어도 구원군을 보내준 왕건과 대비되어 신라에 충성하던 호족들의 지지는 고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또 다른 문제는 바로 경순왕. 신라 왕실의 계보는 신덕왕~경애왕 시절에 다시 박씨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는데, 경순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했던 정통성이 있는 김씨였기에 신라 왕실을 와해시키기는커녕 도리어 가장 정통성이 있는 인물을 임금으로 만들어 신라 왕실의 정통성만 끌어 올려준 셈이 되었다.

 물론 서라벌 강습 자체야 고려와 신라의 연합 전선을 끊기 위한 전술로서는 가장 좋은 판단이었다. 서라벌에서 처신만 나름 잘 했더라면 전략적으로도 좋은 판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경애왕을 자살로 몰아넣을 필요도 없었고, 항복만 시켜서 고려와의 관계를 끊게 한 다음 물러나거나 아예 경애왕을 수도 완산으로 끌고 가서 인질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정통성이 매우 떨어지는 인물을, 그러니까 김씨 방계나 박씨 방계 내지 석씨처럼 정상적으로는 왕이 될 수 없는 계통의 인물을 옹립했어야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견훤이 경애왕 제거 후 신라의 새 군주로 세운 경순왕은 할아버지가 문성왕의 외손자이자 경문왕의 사촌인 김인경이며 아버지는 효녀 지은 설화로도 유명한 화랑 김효종, 어머니가 헌강왕의 둘째 딸 계아태후로 효공왕 이후로 단절된 김씨 왕가 중에서는 가장 정통성이 높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후백제군이 서라벌 습격 이후 신라에서 철수하자, 경순왕은 한동안은 후백제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듣는 시늉은 하였지만, 고창전투에서 후백제가 대패하자 보란듯이 후백제와 국교단절을 해 버리고는 고려와의 친교 노선을 강화하여 멸망하는 그날까지 후백제와는 내내 으르렁대기만 하였다.

 그러나 신라에 대한 견훤의 행보를 잘 살펴보면, 단순히 전략안이 부족했다고만 치부하기엔 후세인들이 보기에 뭔가 이상할 정도로 이미 경명왕 시절부터 신라 측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며 기민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과 김씨 족단 반역자들 사이의 오래된 커넥션이 있었을 수 있다는 말. 동서고금 이런 거래가 공짜로 이뤄지는 게 없는 이상, 김씨 족단이 왕으로 세우고 싶어하는 인물을 배제하면서 약속 위반을 하는 건 견훤 입장에선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수 있다. 애초에 경순왕의 외조부 헌강왕 자체가 견훤이 10대 후반 풋풋한 청소년 시절에 모셨던 신라왕이기도 했고. 사실 이 복잡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는 이미 위에서 제시되었다. 후백제는 기본적으로 다면전선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라, 특히 서라벌 통제에 많은 인력과 자원을 쏟아부을 수 없는 상황인 탓이 컸다. 우선 서라벌 공격 자체가 철저한 기습 기동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이 불가능했고, 결국 지금까지의 진군에 소모된, 그리고 앞으로 고려군을 맞아 치를 결전에 필요한 물자는 서라벌 약탈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후백제군의 장렬한 훼이크 기동을 보면 애초부터 모든 건 현지보급으로 때운다는 것이 실제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약탈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학살만 통제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또한 경애왕을 인질로 삼거나, 정통성 없는 왕을 세워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 역시 기본 전제는 완산에서 서라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당장 국왕의 친정조차도 철저한 기습 끝에 간신히 성공시킨 상황이었고, 그 다음에는 고려의 대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공산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놓고 반백제 스탠스를 취했던 경애왕을 살려두기에는 고려군과 싸우는 사이 뒤에서 신라 박씨 왕족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내통설을 긍정할 경우) 김씨 족단을 배신하고 '정통성 없는 왕'을 강제로 옹립하는 것 역시 한창 공산에서 싸우는 와중에 무슨 통수를 맞을지 알 수 없는 자폭행위였다. 내통설을 배제한다 해도 어쨌든 견훤의 입장에서는 동쪽 끝 서라벌을 통제하기 위해 어느 한 집단과는 확실한 손을 잡는 것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줄타기보다는 리스크가 적다고 판단할 만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견훤은 서라벌 습격과 공산 전투로 삼남 일대의 주도권을 잡은 후에도 안정적으로 세력권을 경영하지는 못했다. 당장 나주와 대야성을 군사력으로 탈환해야 했고, 신라 역시 지속적으로 침공해 경북 중북부 지역을 흡수하는 데 몇 년의 시간을 보내다가 그조차도 다 완수하지 못 한 채 고창 전투의 패배를 맞이했다. 즉 후대인들이 보기에는 역사에 남을 악수라 할 만한 이 결정은 결국 서라벌 기습-공산 전투라는 외통수 상황에서 견훤이 그나마 고를 수 있는 차악의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다못해 대야성만 고려군에게 빼앗기지 않았어도 완산-금성을 잇는 거창로의 통제권은 확실해 후속병력에게 서라벌 통제를 맡길 수 있었을 테니, 견훤에게는 조금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후백제의 어정쩡한 시작과 위치였다. 아래에서 다시 '신라 장군'으로서 견훤의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지만, 이런 권신으로서 가장 좋은 선택지는 그 옛날 동탁이 협천자하여 장안으로, 조조가 협천자하여 허창으로 천도했던 것처럼 아예 신라 조정을 통째로 들어서 완산으로 끌고 오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견훤은 서라벌의 주민들을 대거 전주로 끌고 가기도 했지만, 끝내 조정을 이동시키지는 못했다. 이미 '백제'라는 간판을 되살려 써먹은 탓이었다.

 동탁ㆍ조조는 실제로는 한실을 핍박했음에도 공식적으로는 매우 강경하게 한실의 신하로 스스로를 규정했지만, 후백제는 스스로 신라와 동등한 국가임을 주장한데다가 심지어 신라가 '복수'의 대상이었으므로 신라 조정을 이동시킴은 자체로 신라 멸망을 뜻했기 때문이다. 당장 신라를 완전히 병탄할 여력은 없는 상황에서 견훤은 서라벌의 신라 조정을 유지시켜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러자면 남아 있는 신라 조정이 자력으로 자신에게 대항할 가능성, 더불어 자신이 떠난 후 신라 조정이 어떠한 사달로 인해 자멸할 가능성을 모두 차단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처했다.

 이를테면 세상일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경애왕을 죽여야만 한다 해도 그 방식을 달리했다면 상황을 조금은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경애왕에게 모욕을 주며 살해(혹은 자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그럴싸한 정치적 명분, 예를 들어 박씨 왕가의 세습을 규탄하며 김씨 왕가의 '복귀'를 처음부터 출병의 명분으로 주장하고, 경애왕의 주살 역시 김씨 족단과 같은 신라인들 스스로의 손에 맡기며 확실한 공범으로 삼는 방향으로.
하지만 일단 서라벌 공격 자체가 매우 기습적이라 이런 정치적 구호를 내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신라에 대한 복수'를 건국 명분으로 내건 외지인 국왕 견훤으로서는 그런 유연함보다는 구백제계들을 한방에 사로잡을 수 있는 퍼포먼스가 필요했다. 게다가 이 때의 견훤은 이미 환갑이 넘었다. 오로지 개인의 카리스마만으로 무연고지의 호족들을 규합해 국가를 세운 견훤으로서는 반드시 자신의 대에서 신라 병합을 완수하여 후대에 물려줄 필요가 있었는데, 딱 10살 젊은 왕건과 달리 신라를 장기적으로 흡수할 복안을 가지고 온건하게 대응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최대한 힘의 우위로 찍어누르는 길을 포기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다.

 물론 견훤에게도 삼한통일을 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없진 않았다. 바로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몰락했던 즈음인데, 왕조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 속에서 친궁예파 세력의 이탈이 끝없이 벌어졌다.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건의 목에 칼을 겨눈 환선길,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흔암, 서원경 세력의 임춘길, 명주의 김순식 등이 모두 이 즈음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세력들이었다.

 철원군에서는 끝없이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지방에서는 성주들이 후백제에게 투항하는 등 왕건의 쿠데타 직후 고려는 점차 공중분해되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절호의 호기였던 셈. 이런 상황에서 만약 견훤이 '왕위를 찬탈한 역적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북벌군을 일으켜 고려를 공격했다면 승산이 얼마나 되었을까? 하지만 견훤은 이런 엄청난 호기를 흘려보내면서 도리어 왕건에게 즉위 축하 사절단을 보내버렸다. 외부에서의 지원이 없어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왕건의 통치 기반만 안정화하는 데 이바지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과연 이때가 견훤이 왕건을 공격할 만한 찬스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환선길은 어설프게 쿠데타를 일으켜 후백제가 연계할 것도 없었고, 이흔암은 정사의 기록에서조차 쿠데타 시도가 있었는지도 애매해 아예 예방 숙청된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임춘길은 변경에서 반란을 시도했다가 세력 전체가 일거에 제거되었다. 김순식은 후백제로서는 먼 거리라 애초에 시도조차도 불가능했다. 후백제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918년 8월로 환선길과 이흔암이 숙청된 시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고려는 이런 문제들을 덮자마자 혁명 석 달 만에 아자개의 귀부라는 초특급 이벤트를 일으켜 왕건의 지배 체제가 공고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무엇보다 궁예는 미륵부처를 자칭하며 대놓고 불교계에서 숙청을 벌였고 도선대사를 내세운 왕건 정권은 당대 한반도 불교계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당시 고려의 수도는 내륙인 철원이었고, 후백제는 다 망해가는 신라의 대야성조차 뚫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보낸 게 2년 전이었다. 즉, 후백제도 내부 정비의 시간이 필요해 왕건에게 유화책을 썼던 것이지, 반란이 몇 건 있었다고 해서 후백제의 공세가 필승이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또 한가지 견훤의 1차 목표는 바로 신라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우주방어하던 대야성이었다. 때문에 대야성에서 5차례나 전투가 벌어진 것인데, 왕건이 고려의 주인이 된 918년에서 2년 뒤인 920년 3차 대야성 전투에서 마침내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진례성(오늘날의 창원시)까지 진격했는데, 신라가 고려에 구원 요청을 하여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더는 진격하지 않고 물러났지만, 그래도 후백제의 오랜 숙원이던 대야성을 마침내 점령한 것이다.

 후백제는 신라와 전쟁할 때도 대 고려 전선에 상당수 수비 병력을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 1만 대군을 투입했다고 특별히 기록된 걸로 보아서 고려와 화친을 맺고, 대 고려 전선의 병력 일부도 대야성에 보내 총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왕건이 병력을 보내자 무리하지 않고 물러난 것이다. 이를 볼 때 견훤은 고려의 내란 당시 이 혼란을 이용해 고려에 침공하는 것과 신라에 침공하는 것을 저울질 하다가 일단 왕건과는 화친하는 척 하고, 숙원이던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아직 국내가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던 왕건으로서는 견훤과의 화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니, 후백제에 먼저 선공을 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견훤은 고려와의 화친을 이용해 대야성을 점령함으로서 충분히 이득을 본 것이다.

이 부분을 기록한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상극이었다.'고 말하듯이, 애초에 견훤의 화친은 진짜로 고려와 화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철저히 이용해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위에 언급되었다시피 비교적 빠르게 안정된 고려를 치는 도박에 걸기보다 대야성이라는 확실한 이득을 취했으니, 이걸 실책이라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대야성이 그저 그런 신라의 여러 성들 중 하나가 아니라, 뚫리면 자국의 수도인 서라벌까지 위기일발의 상황에 놓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이다.

 거기다 기왕에 고려와 신라 양쪽 중 하나를 고르자면 당장 오늘 내일하는 신라가 만만찮아 보이는 고려보다 더 좋은 선택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후에 견훤은 서라벌에 쳐들어옴으로서 신라가 자기 나라 하나 건사하기도 어렵다는 걸 증명하던 판국이었으니 차라리 대야성부터 먼저 먹고 나아가 신라 전체까지 통째로 먹을 발판을 마련하는 게 고려와 싸우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을만 하다. 여기에 고려는 나주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진짜 정면으로 붙으면 최악의 경우엔 남북에서 고려가 공격해올 수도 있는 양면전선이라는 불리한 지경에 있었다.

 여기서 현대인들이 유념해야 할 것은, 당시는 통일신라가 300년 가까이 한반도 중남부에 군림하고 있던 시기라는 것이다. 즉 국토 전체에 걸쳐 경주를 중심으로 구축된 인프라가 건재했고, 신생국가들인 고려와 후백제 모두 이 기반 위에서 국가전략을 채택해야 했다. 간선도로는 경주를 시종점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는 무주에서 전주로 북진하는 과정에서 간선도로를 아예 새로 닦다시피 해야했고, 그나마 큰 돈 안 들이고 진군할 수 있는 경로가 바로 경주행이었다. 그러므로 건국 직후부터 바로 경주행의 관문인 대야성 공략을 시도했고, 이게 좌절된 이후로는 역시 신라 방면으로 내달리는 태봉-고려를 저지하기 위해 한주로와 삭주로의 핵심 경유지인 상주 지역을 두고 쟁탈전을 벌인 것이다.

 즉 후백제에게 고려를 멸망시키는 북진은 애초에 당면 과제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북진하려면 상주를 확보하고 주 진격로가 될 한주로를 장악해야 하는데, 그 상주는 당장 아버지인 아자개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또 조령-죽령 일대의 방어선이 가로막고 있었다. 웅청주야 백제 유민의식이 강한 지역이라 궁예의 몰락과 함께 후백제를 택했지만 조령 방어를 맡을 중원경(충주)은 삼국시대의 쟁탈지였기 때문에 딱히 어딘가에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정치적 이득을 따져본다면 다름아닌 왕건의 처가 지역이었다. 웅청주의 귀부와 반란을 가지고 고려의 공중분해니 통일의 호기니 하는 말은 현대인의 상식으로 가볍게 의문을 가질 수는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한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 신료 및 호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장남 신검이 아니라 막내 금강에게 물려주려 했던 것 또한 본인의 치명타로 작용해버렸다. 이러한 견훤의 막내 금강으로의 왕위 세습 시도는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까지도 혹평이 쏟아진 일이 되었다. 차라리 제2대 왕은 견신검이, 제3대 왕은 견금강이 왕위를 승계받는 형제 세습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아예 주변에서 반항을 못하게 찍어눌러놨다면 또 모를까. 본인의 선택이 결국 마지막 지지 세력까지 홀라당 날려먹은 꼴이 되었다.

 결국 본인은 아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채 처참히 유폐당하는 속된말로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고, 이후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은 제3자이자 라이벌인 왕건이 이루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왕위쟁탈전 속에 고려로 도주하며 자신의 입장에선 적국인 고려에 그것도 한때 최고 지도자인 왕으로써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고려와 함께 무너트렸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견훤 자체는 신라 혈통 신라 장수, 그것도 보통 장수가 아니라 신라 왕실 근위대의 장교였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백제왕이 된 것도 사실 그에게 있어선 차선책이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다. 때문에 초반에 구태여 긴 관직을 유례없이 늘여 쓰고 백제 왕이란 칭호는 꽤 오래 참은 건, 신라 왕실에 보내는 무언의 시위, 인정 투쟁이었다는 것. 당시 당나라에서는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을 거치면서 각지에서 지방 절도사를 자칭하며 심지어 중앙정부의 공인까지 받아내는 세력들이 일어났고, 멀리 가면 서로마 제국 말기에 야만족 왕들이 중앙 조정을 압박해서 관직을 따내는 시도가 있었는데, 견훤의 행태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신라는 체제의 한계도 있었고 신라 왕실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충성해야 할 견훤이 반란군짓하는 게 얄미웠던지 이런 행동을 받아주지 않았으며, 때문에 견훤이 선택한 차선책이 백제 부활이었다.

 다만 견훤은 후세인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신라 서면 도통'이란 칭호만큼은 백제 왕이 된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자처하였는데, 이는 그의 본심이 백제 왕보다는 당당한 신라 대장군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견훤이 불필요하게 서라벌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옛 백제 영토보다는 신라 영역에 관심이 깊었던 것에선, 그가 백제 왕으로서의 역할에 나름 충실했음에도 내면 한 곳에선 여전히 신라 장수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음이 분명히 보인다. 이는 혈통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 자체를 격렬하게 증오하여 아예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던 궁예나, 나면서부터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강한데다 신라 왕실한테 별로 피해도 혜택도 그닥 본 적 없어 냉정하게 제3자 입장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왕건과는 크게 비교되는 측면이다.

 여담이지만 결국 견훤은 소원 성취는 한 셈이었다.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한 시점의 그는 적어도 서라벌 자체의 실질적인 주인장이나 마찬가지였고, 신라 왕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최고권력자가 되어 있었으니... 이는 백제 왕이라기보다는 통일신라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권신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경순왕의 정통성 문제도 이에 따른 것일 수 있다. 진짜 신라를 이용만 할 생각이었다면 정통성 확실한 경순왕쯤 되는 인물을 왕위에 앉힐 이유가 없다. 신라에 애증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느정도 설명이 된다. 차마 자격 없는 인물을 신라의 왕위에 올려놓을 생각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는 전무후무할 선택지도 백제왕은 어디까지나 차선이었고 백제인으로서 정체성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납득이 가능한 행보다.

 후기신라 몰락과 후삼국의 개막의 근원에는 신라의 지독한 골품제, 특히 진골 절대우위의 독주체제와 이에 불만을 품은 6두품 이하 지식인들의 이탈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지방 호족 출신인 견훤도 이러한 신라 중앙조정과 상층부를 독점하는 진골 귀족세력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 한계를 깨부수고 신라라는 체제 안에서 정상에 서보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을 거라고 예상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신라 왕실은 절대로 견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신라 왕실이 견훤에게 딱히 못해준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0대 중후반 나이에 서라벌 소재 군부대에 입대한 것만 해도 골품제 안에서는 엄청난 특혜였던데다 이후 경과를 보면 불과 20대 중반에 서남해 방수군 비장으로 승진해 부임하는데 이건 그 시대 기준으로도 아주 입지전적인 출세였다. 고려 시대에 꽤 괜찮은 무반 가문 출신이었고 유능하기까지 했던, 최충헌이나 이의방조차도 견훤 같이 빠르게 커리어를 쌓진 못했었다.

 물론 견훤이야 본인 능력이 오늘날 한국군 기준 원스타에 불과한(?) 신라 왕실 근위대장에서 끝나기엔 아깝다고 생각했겠고 그래서 신라군 총사령관인 '도통'으로 임명받고 싶었던 것이며, 온 서라벌을 초토화시키고 귀족들을 압송해가면서도 박씨 왕실을 끝장내고 김씨 왕실을 복귀시키면서 끝내 신라라는 국가의 외형만은 남겨두었던 것은 나름 젊은 시절 추억을 생각해서 베풀어준 아량 쯤으로 봤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앞뒤 상황을 보면 신라 왕실이 그걸로 견훤에게 감사해줄 수는 없었다. 타고난 정체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이러한 행태와 한계는 삼한 재통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삼국사기》 열전은 바로 <견훤 열전>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김부식은 사론에서 궁예와 견훤을 함께 평하고 있는데, "옛적 중국의 항우나 이밀은 뛰어난 재주를 가져도 결국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했는데, 궁예나 견훤 같은 흉한들이 어찌 우리 태조께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모두 우리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모아준 이들일 뿐이다"라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사서를 편찬하는 김부식의 입장을 고려하며 그냥 알아만 두자

* 왕건(877~943) - 향년 6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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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태공 엄행렬

 

 

견줄만한 장수 없고 지략도 갖췄으나

썩어빠진 대신 행태

묵과하는 왕의 처신 

도무지 견디기 힘들어서 칼을 빼어 들었다 

 

훤칠한 그 모습에 모여드는 사람들

칼솜씨는 기본이고 힘 또한 장사기에

호남을 장악하면서

후백제를 세웠다

 

견기에 밝고 전술 또한 탁월함을 보이며

후삼국 가운데 으뜸

승자라고 보였으나

패착은 크나큰 과오 후회한들 늦었지 

 

훤하게 동이 트건

어스름 달이 뜨건

옥살이 같은 하루 술로써 사는 나날

호걸이 감당할 일 아님에

고침 새로 한 영웅

 

* 견기 : 낌새를 알아채거나 기회를 엿봄

* 훤칳하다 : 막힘없이 깨끗하고 시원스럽다

* 패착 : 돌을 잘못 놓아서 바둑에서 지게 된 나쁜 수

-2024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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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태공 엄행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09
    금요일이라 한 수 더 올리고
    지금 퇴근하렵니다.
    다음에는 '궁예' 입니다~~~~~^0^
  • 작성자베베 김미애 | 작성시간 24.08.10 역사는 가르침을 주는 교훈이 되고도 남습니다
    견훤에 대한 긴 역사적 고찰과 태조
    모든 것에 마지막에는 어울려 연합하여
    가장 선한 것으로 맺음을 맺기도 하고요
    더러 아닌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태공 시인님께선 이 시간 무얼 하실까요?
    전 점심 먹기 바로 전
    마늘을 까다 접속했습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태공 엄행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12
    주말, 주일 편히 지내셨겠지요?
    마늘!
    제 집사람도 금요일 퇴근해서부터
    토요일까지 까서 집에 조금 남겨 두고 어디로 들고 나가던데
    베베 시인님께서도 마늘 까셨군요.
    간장 고추짱아찌, 마늘짱아찌 생각
    만드는 방법까지 인터넷 보고 적어놨는데
    재료 사 달라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ㅠㅠ

    또 새로운 한 주 맞았습니다.
    무더위 잘 이기시길 빕니다.
    베베 시인님!~~~^0^
  • 작성자소 담 | 작성시간 24.08.10
    금요일엔
    가까운산 오토켐프장에서 하루를 보냈지요
    그러다 보니 태공시인님의 글을 이제사 봅니다

    책한권을 몽땅 들고 오셨군요
    이렇게 자세한 견훤에대해서
    알려 주시니
    어찌 모르다 하리요
    긴글 읽어 보고 음악도 들어보면서
    태공 시인님의 행시를 읽고 갑니다
    대단하심은 늘 드는 생각입니다 ..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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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태공 엄행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12
    학창시절 때부터 국어는 물론, 국사 과목을 제일 좋아했답니다.
    요즘 다시 찾아 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캠프장 다녀 오셨군요.
    즐거운 시간 가지셨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강가에 텐트 치고
    물고기 잡이 10년까지 하였지요.

    또 새로운 한 주 맞았습니다.
    무더위 잘 이기시길 빕니다.
    소담 선생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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