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국수
날이 더워지면 시원한 막국수가 생각난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막국수 집이 여러 곳 있다. 봉평 막국수며 평창 막국수란 이름을 단 식당이다. 가격이 비싼 편은 아니나 맛이 별로다.
담백한 메밀 맛이 아니라 맵고 달달한 전형적인 도시 맛이다. 디딜방아로 찢고 맷돌로 갈아만든 투박한 식감의 메밀국수와는 거리가 멀다. 춘천막국수를 찾아 집을 나선다.
소양강 둑길을 한 시간여 걷다가 소문났다는 인근의 막국수 집을 찾았다. 삼복더위가 아직도 멀리 있는데 한여름 더위 못지않은 불볕더위가 극성이다. 올여름 무더위가 어떨 것인지 걱정스럽다. 점심을 먹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춘천시가 지정했다는 명가 간판을 단 식당 외관은 의외로 깔끔하지 않다. 어느 방송국 어떤 시간에 방영되었다는 자기자랑이 식당 문과 벽체에 붙어 있다. 막국수의 진미는 정갈함과 담백함에 있는 것이 아닌가. 화려한 홍보문구로 포장된 도시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이 먼 곳을 찾아온 것은 아닌데. 강변이 바라보이는 창가에 앉는다. 식탁 위에 놓인 차림표를 보니 묵이며 부꾸미 같은 음식도 있다. 그중에 메밀나물이 눈에 띈다. 아니 메밀나물이라니. 지금도 메밀나물을 반찬으로 차려내는 집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예전에 대서(大暑) 무렵까지도 가뭄이 지속되어 모내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마른 논이나 밭을 갈아 메밀을 심었다. 메밀은 아침저녁 맺히는 이슬만 먹고도 자라는 구황작물이라 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마른 땅에 씨를 뿌리면 며칠 지나지 않아 붉은색 싹이 올라왔다.
가뭄에 지친 농부들 마음에 메밀 새싹은 그런대로 위로가 되었다. 어린 메밀 순은 나물이나 국거리로 이용했다. 나물은 아린 맛이 났다. 메밀은 달포만 지나면 꽃을 피웠다. 휘영청 달밤이면 소금을 뿌려 놓은 듯 별 무리가 내려앉은 듯 하얗게 일렁였다. 꽃은 특유한 향이 있다. 습한 곰팡이 냄새에 삭은 된장처럼 쿰쿰한 향기를 풍긴다. 강아지는 물론이고 염소마저 메밀밭은 피한다. 아리고 쓰린 농부의 한숨이 녹아들어 꽃조차 썩은 냄새가 난다고 했다.
메밀은 담백한 맛을 지녔다. 배고프던 시절, 잔칫상에는 늘 메밀 묵이 올랐다. 메밀가루는 거칠었다. 맷돌에 갈거나 디딜방아에 찧어 채로 쳐서 가루를 얻었다. 껍질이 듬성듬성 섞인 메밀 묵은 주근깨가 드문드문 박혔지만 희끄무레한 이웃집 점순이 얼굴을 닮았다. 희읍스름하고 탱탱했다. 평소에는 손님이 왔을 때나 해먹는 귀한 음식이자 이웃 간 품앗이 음식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문을 받으러 오는 기척이 없다. 이곳도 식탁 구석에 주문용 키오스크가 자리하고 있다.
주문 기기를 더듬거리며 막국수 곱빼기 한 그릇을 시켰다. 그제야 단정한 옷차림의 아가씨가 차가운 메밀차를 가져다 놓으며 시간이 좀 걸린단다. 주문을 받은 후 만들기 때문이란다. 식탁 깔개 종이에 식당 내력과 막국수 설명이 적혀 있다. 막국수 연원을 뒤적거려 본다.
막국수가 왜 막국수인가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껍질째 막 갈아 만들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아무렇게나 막 해서 먹는 국수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막노동이나 막걸리에서 보듯 막국수에 막이란 접두어를 붙여 이름으로 삼은 것은 서민들의 음식이라서가 아닐까.
춘천막국수는 특별한 서사가 있다. 춘천 지방을 근거로 활동하던 의병들이 화승총을 구하고 화약을 제조하는 데 메밀을 이용했단다. 화전민인 의병 가족들이 감자나 메밀을 도시에 내다 팔면서 메밀을 재료로 한 막국수가 춘천에 성행하였다는 것이다. 춘천막국수는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백성들의 아픈 역사가 스며있는 음식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손님들이 들어온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부들도 있다. 중국집이나 피자집이 아닌 막국수 집에 온 어린아이들이 어쩐지 반갑다. 식당에 혼자 들어가 음식을 먹는 것은 어색하고 민망하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종업원이 밑반찬으로 어린 열무김치 두 포기에 메밀나물 한 접시, 신맛을 강하게 풍기는 배추 백김치가 육수 주전자와 같이 미리 나왔다. 먼저 나물에 젓가락이 간다. 아삭한 식감에 들기름 향이 난다. 옛날에 먹어본 아린 나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아려서 피하고 어른들은 눈물 나서 안 먹던 나물. 입맛이 변한 탓인지 나물 맛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다.
좀 더 기다리니 드디어 춘천막국수 곱빼기가 나왔는데 그렇게 양이 많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작은 양의 사리 세 개가 담긴 대접의 국수 위에는 고춧가루와 겨자, 들깨가루 등이 버무려진 양념과 함께 삶은 달걀 반쪽이 얹혀 있다. 벽에 붙어 있는 안내판이 시키는 대로 반 컵 정도의 육수를 부은 다음 젓가락으로 풀어 헤치듯 가볍게 비빈다. 비비는 국수 사이로 조그맣게 토막 썬 메밀 묵이 드문드문 보인다.
구수하고 담백한 메밀국수는 목이 미어져라 먹어야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겨울철 긴긴밤 허기진 배를 채우려면 한 번을 먹더라도 숨이 막히듯 먹어야 먹는 그 느낌이 오는 것이니. 첫 젓가락질로 느낀 맛은 조금은 실망이다. 요즘 식당 음식이 대부분 그렇듯 달고 매운맛이 막국수 특유의 구수한 맛을 가려버렸다.
메밀국수는 시원한 동치미나 열무 김칫 국물에 말아먹는 음식이다. 시큼하고 새콤한 동치미나 열무김치 국물에 꼭 더한다면 들기름을 가볍게 두르고 먹어야 담백한 메밀 맛을 즐길 수 있다. 막국수라길래 차가운 듯 슴슴한 메밀 맛을 기대했지만, 아니다. 짜고 달고 매운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도시 손님의 입맛에 맞추려다 유명 막국수도 맛이 변한 것일까.
다른 집에서 먹어본 막국수보다 유난히 하얗고 부드럽다. 정말 순 메밀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느끼며 설명문을 다시 읽는다. 메밀껍질은 식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식약처 지침에 따라 알갱이만으로 국수를 만들었다는 설명이 보인다. 아 그런가.
막국수 맛은 기대와 달랐다. 그러나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고향의 메밀밭이 여러 번 떠올랐다. 붉은 싹을 틔우던 메밀, 달빛 아래 하얗게 숨을 죽이던 꽃밭, 허기를 달래주던 묵과 국수까지. 음식의 맛은 변해도 그 음식에 스며있는 기억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초여름 햇살 아래 화단에 채송화가 무리 지어 핀 도로를 따라 걷는다. 올여름에도 막국수가 먹고 싶을 것이다. 국수 맛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마음 한켠에 남아있는 가난하고 슴슴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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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덕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6 new
김작가님이 사시는 동네는 막국수 집이 없나 봅니다
한국 들어오실 때 언제 한번 막국수 집 가십시다
그곳 날씨는 막국수 생각날 정도로 따습지요? -
작성자오영록 작성시간 26.06.24 주소가 빠졌어요.. 이선생님..한번 봬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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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덕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6 new
무슨 주소요?
아 막국수 집!
이 카페에서 광고도 비방도 안 될 듯해서 ㅋ
오시인님은 세상 바쁘신 것 같던데~~ -
작성자byungjo3 작성시간 26.06.25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처럼 잔잔하게 펼쳐지는 소금을 뿌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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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덕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6 new
춘천 가는 길에 김유정 마을에 들러 메밀꽃 냄새를 맡고 가는 것도 좋습디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