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 35강 마지막 강의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2021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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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 『열반에 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1년 4월 5일 출간)
고따미 장로니의 완전열반(4)
아난다 존자를 위로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고따미 장로니가 완전열반에 들 시간이 다가오자 부처님께서 장로니에게 신통을 보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신통을 보이다.
“여인들이 사성제라는 특별한 법을 아는 것에 대해
어떤 어리석은 이들은 의심하니
그들의 사견이 제거되도록
신통을 보여 주거라.”
부처님 당시에 사견을 가진 사람들은 여자가 수행을 해서 도와 과를 얻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선정이나 신통을 얻는다는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의심을 제거하도록 고따미 장로니에게 신통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신통을 보이면 사람들이 존경을 해서 보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면 보시를 많이 받으려고 저런다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열반에 들기 직전에는 ‘저 분은 보시를 많이 받기 위해서 신통을 나투는 것이야’라고 비난 받을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신통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고따미 장로니는 여러 가지 신통을 보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이들은 믿음이 더욱 굳건해 졌을 것입니다. 사견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사견을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일부 사람들은 ‘마술일 뿐이야, 속임수야’라고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신통을 보인 고따미 장로니는 부처님께 와서 다음과 같이 말씀 드렸습니다.
완전열반을 청하다
“大聖이시여, 저는 태어난 지 어느 덧
백이십년이 지났습니다.
영웅이시여,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지도자시여, 저는 열반에 들겠습니다.”
이 게송을 들으신 부처님은 침묵으로 동의하셨습니다. 그러자 고따미 장로니는 부처님께 공손히 예경 올리고 다른 500명의 비구니들과 함께 비구니 정사로 향했습니다. 부처님과 비구들도 정사 입구까지 배웅했습니다.
완전열반에 드는 모습
“고따미 장로니는 비구니들과 함께 / 자신의 처소로 가서
반가부좌를 하고 / 거룩한 자리에 앉았네.”
이때 소식을 듣고 청신녀들이 와서 울었습니다. 그 중에 나이 많은 청신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고따미 장로니는 다음 게송으로 훈계했습니다.
“딸들이여, 통곡해서 무슨 이익이 있는가?
마라의 올가미를 따라가는 것일 뿐.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니
헤어짐이 끝이고, 동요하고 흔들릴 뿐이네.”
게송으로 청신녀들을 돌려보낸 다음에 초선정에 입정하고 거기서 나와서 차례대로 2선정, 3선정, 4선정에 입정한 다음에 출정했습니다. 그리고 무색계 선정 네 가지에도 차례차례 입정했습니다. 다시 역순으로 내려와서 초선정에 입정했고, 이어서 다시 2선정, 3선정, 4선정까지 입정한 뒤, 그 4선정에서 출정하여 완전열반에 들었습니다.
“제4선정에서 출정해서 적멸했다네.
마치 등불처럼 누출(번뇌) 없이.”
이것이 고따미 장로니가 완전열반에 드는 모습을 게송으로 읊은 것이고 오백 명의 비구니들이 완전열반에 드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백 명의 비구니들도 적멸했다네.
마치 등불처럼 취착 없이.”
이렇게 완전열반에 들자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다비식을 한다고 대중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승가가 모였습니다. 부처님이 계셨기 때문에, 부처님이 완전열반에 드셨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다비식이 끝나자 사리를 발우에 담아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가 담긴 발우를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 큰 나무의 제일 큰 가지가 부러지듯이,
비구니 승가의 제일 어른인 고따미 장로니가 완전열반에 들었구나.
하지만 고따미 장로니는 윤회라는 大海를 이미 건너갔느니라.
번뇌의 뜨거움을 꺼버렸느니라. 모든 고통이 다해 버렸느니라.
그러니 고따미 장로니를 걱정하고 슬퍼할 일이 전혀 없느니라.”
그리고 열반의 법체에 대한 게송도 읊으셨습니다.
열반의 법체
“망치로 쇳덩어리 내려칠 때마다 / 번쩍 하고 밝게 일어났다가
차례차례 꺼지는 불꽃의 거처를 / 알지 못하는 것처럼
바르게 해탈한 이들 / 감각욕망의 거센 물결을 건너간 이들,
동요 없는 행복에 도달한 이들이 간 곳을 전혀 알 수 없다네.”
불꽃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것처럼, 아라한도와 과로 번뇌라는 족쇄(거센 물결)를 이미 건너간 아라한에게 취착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생의 마지막 순간에 집착할만한 업, 업의 표상, 거취 표상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선정에 입정해 있거나 위빳사나 관찰을 하다가 완전임종의 열반 마음이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그렇게 마지막 임종마음이 사라진 뒤, 새로운 물질정신 무더기가 더 이상 생기지 않은 채 물질정신의 연속이 끊어져 버립니다. 바로 그렇게 물질정신 무더기가 완전히 끊어져서 적멸하는 것이 무여열반이라는 적정의 요소입니다.
그 적정의 요소는 적정한 그대로 유지됩니다. 바뀌거나 동요하지 않고 그대로 적정합니다. 또한 그 적정의 요소는 모든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입니다. 그렇게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느껴지지 않은 채 언제나 완전히 행복합니다. 무여열반이라는 적정의 요소에 도달한 아라한 성자는 그 다음에 31탄생지 중 어느 탄생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번쩍하면서 생겼다가 사라져버린 불꽃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그 불꽃은 사라진 다음에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라한의 물질정신 무더기의 연속도 완전열반이라는 죽음 이후에는 완전히 없어집니다. 소멸해 버립니다.
보통 사람은 그냥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생기게 하는 원인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다시 생기지 않는 성품입니다. 단견과는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자아집착을 가진 사람들은 “아라한이라는 개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구나.”라고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어떤 개인(중생)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정신 무더기의 연속만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존재했던 것은 아라한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집성제(갈애) 때문에 거듭 생기고 있던 고성제(물질정신 무더기)일 뿐이었습니다. 계정혜와 바른 위빳사나 실천으로 아라한도와 과에 도달했을 때 이제 더 이상 어떤 삶도 즐기지 않습니다.
다른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 “아니 그렇게 해서 완전히 끊어진다고 하면 아라한이라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으면 “아라한이라는 개인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정신 무더기의 연속이었는데, 그것이 집성제(생겨남의 진리. 갈애)가 없어져서 물질정신의 연속인 고성제(괴로움의 진리)가 소멸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이렇게 고성제가 적멸하면 새로운 생에 태어나야 하는 괴로움도 없습니다. 늙어야 하는 고통, 병들어야 하는 고통, 죽어야 하는 고통도 더 이상 없습니다. 슬픔 비탄도 없습니다. 몸과 관련된 괴로움, 마음과 관련된 괴로움도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생각해야 하는 괴로움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서 생각과 망상이 끊임없이 생깁니다. 수행센터에 와서도 계속 집에서 하던 망상을 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미래를 계획합니다.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못 느낀 좋은 느낌을 느껴야지, 한 번 느꼈으면 한 번 더 느껴야지’ 하면서 느낌을 추구하는 괴로움도 없습니다. 어떤 괴로움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반문합니다.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서 없는 것보다는 천상에 태어나서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천상의 행복을 계속 누리면서 지내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그런 곳이 있다면 좋지만, 그런 곳은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생각으로만 존재합니다. 어느 곳이든지 생기면 사라집니다. 하늘나라는 실은 욕계 천상 탄생지이거나 범천 탄생지이고, 그런 탄생지에서의 물질정신을 변하지 않는 실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도 생기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곳의 천신이나 범천도 수명이 다하거나 업이 다하면 죽어야만 합니다. 미세한 생각이라도 있으면 생각하고 숙고하느라 피곤하고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정신인 고성제가 완전히 적멸해야만 진실로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아라한도와 과의 위력을 통해 갈애인 집성제가 완전히 끊어지고 소멸해야 성취됩니다.
이것을 마하시 사야도께서 게송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라한의 도과지혜 위력 통해 갈애라는
생겨남이 소멸해서 완전열반 임종 뒤에
물질정신 무더기인 괴로움의 진리법이
생겨나지 아니하고 끊어지고 적멸하는
무여열반이야말로 진정 행복이라네.”
고따미 장로니의 완전열반 법문이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다음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 / 사띠확립을 영역으로 삼아라.
깨달음의 일곱 요소도 닦아서 / 괴로움의 종식을 서둘러 행하라.”
“사띠확립을 영역으로 삼아라.”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수행주제를 사용하여 사띠 확립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자신을 섬으로 삼는 것, 스스로를 대해(大海)에서 의지할만한 배로 삼는 것입니다.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에서 자신이 실체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도 스스로의 상속에 생겨서 증가되고 있는 사띠 확립법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일곱 요소도 닦아라.’라고 했는데, 그러면 사띠확립은 언제까지 닦고, 깨달음의 일곱 요소는 언제까지 닦아야 하는가? 사띠확립을 의지처로 해서 닦아나가면 깨달음의 일곱 요소도 늘어날 것이고, 따로 닦을 필요가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깨달음의 일곱 요소도 저절로 갖춰질 것이고 그러면 아라한도와 과로 열반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괴로움이 적멸한 곳인 열반에 도달하고자 하는 바른 열의가 충만하다면 사띠확립 네 가지를 끊임없이 닦기만 하면 됩니다.
다음 결의를 끝으로 “열반에 관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결어
열반과 관련된 법문을, 정성스럽게 경청하고 새긴 청법선업(의도)의 공덕으로
사띠확립을 영역으로 삼아 실천하여, 깨달음의 구성요소 일곱 가지를 계발하여
물질정신 무더기, 고성제인 모든 고통이 완전히 적멸한 곳,
언제나 진정으로 행복한 성품인 열반이라는 거룩한 법을
법문을 듣는 참사람들 모두가
각자 바라는 도의 지혜, 과의 지혜로 빠르게 도달하기를.
사아두, 사아두, 사아두.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라따나 작성시간 21.10.22 제가 울 때는 늘 저를 위해 웁니다 제가 집착하는것이 사라져서 또는 제가 슬퍼서 성냄으로 웁니다 지혜롭게 생각하고 행동하겠습니다
'미세한 생각이라도 생각하고 숙고하느라 피곤하고 괴롭습니다'
괴로움을 괴로움이라 모르는 어리석음이 있어 제 생각이라 집착하고 생각하기를 즐깁니다
잘 관찰해야 겠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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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금강 작성시간 21.10.22 사두사두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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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뇌산삼 작성시간 21.10.22 감사합니다.
사두사두사두_()_ -
작성자그림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10.28 “사띠확립을 영역으로 삼아라.”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수행주제를 사용하여 사띠 확립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자신을 섬으로 삼는 것, 스스로를 대해(大海)에서 의지할만한 배로 삼는 것입니다.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에서 자신이 실체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도 스스로의 상속에 생겨서 증가되고 있는 사띠 확립법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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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그림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10.28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일곱 요소도 닦아라.’라고 했는데, 그러면 사띠확립은 언제까지 닦고, 깨달음의 일곱 요소는 언제까지 닦아야 하는가? 사띠확립을 의지처로 해서 닦아나가면 깨달음의 일곱 요소도 늘어날 것이고, 따로 닦을 필요가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깨달음의 일곱 요소도 저절로 갖춰질 것이고 그러면 아라한도와 과로 열반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괴로움이 적멸한 곳인 열반에 도달하고자 하는 바른 열의가 충만하다면 사띠확립 네 가지를 끊임없이 닦기만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