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워진 등짝
황병승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다
작년 이맘때는 실연(失戀)을 했는데
비 내리는 우체국 계단에서
사랑스런 내 강아지 짜부가
위로해주었지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짜부는 넘어지지 않고
계단을 잘도 뛰어내려갔지
나는 골치가 아프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짜부야 짜부야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을 텐데!"
소리치기도 귀찮아서
하늘이 절로 무너져 내렸으면
하고 바랐지
작년 이맘때에는
짜부도 나도
기진맥진한 얼굴로
시골집에 불쑥 찾아가
삶은 옥수수를 먹기도 했지
채마밭에 앉아
병색이 짙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
배시시 웃다가
검은 옥수수 알갱이를
발등에 흘렸었는데
어느덧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 또다시 와서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
간지러워서
백내장에 걸린 늙은 짜부를 들쳐업고
짜부가 짜부가
부드러운 앞발로
살 살 살 등짝이나 긁어주었으면
하고 바랐지
*월간《현대문학》2010년 2월호
오감도와 달리 찌릿찌릿 육감도의 전율이 엄습하는 시
어느덧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 또다시 와서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
간지러워서
등짝을 살 살 살 긁어주는 오월의 햇볕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실연 후 '비 내리는 우체국 계단에서/
사랑스런 내 강아지 짜부가/위로해주'는 오월의 추억이란 이처럼 착잡하기만 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짜부가 어느 집 강아지인지 병색이 짙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 라고 말하는
화자는 분명 짜부가 아닐 텐데 죽음에 이르는 현대인의 병, 아무리 태연한 척 스스로를 달래려 해도 왜 아니겠는가.
오월의 태양은 억장 미어지는 심사를 못 본 체 뒤로 하고 역설적이게도 찬란하기만 한 것이다.
백내장에 걸린 늙은 짜부를 들쳐업고
짜부가 짜부가
부드러운 앞발로
살 살 살 등짝이나 긁어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인 그는 햇볕 안 드는 반지하 단간방에서 아내 금홍이 흐트러 놓고 몸 팔러 나가면 하릴없이 온종일
화장품 뚜겅이나 열어보며 허송세월 하던 저 1930년대의 날개 없는 시인, 이상의 분위기를 연상케한다.
아니 오감도와는 달리 별개의 육감으로 우리를 당혹케 하는 육감도의 전율이 시의 행간 행간에 점철한다. 김영찬(시인 )
황병승 /서울예대 문창과 추계예대 문창과 명지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2003년 《파라21》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트랙과 들판의 별』.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꿈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 하나 때문에
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
나는 야옹 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
나도 모르게 울었다
그러나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지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한 창문만 소리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
머리빗, 단추 한 알, 오래된 엽서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
뒷마당에 꾹꾹 묻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
언젠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
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면.
해질 녘, 어디든 퍼질러 앉는 저 구름들도 싫어
오늘은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를 샀다
입 안 가득 미끄러지는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
뱃속 저 밑바닥으로 툭 떨어질 때
어두운 부엌 한편에서 누군가, 억지로,
사랑해 ······ 하고 말했다.
- 멜랑꼴리호두파이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던 그해 여름
처음으로 커피라는 검은 물을 마시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삐뚤빼뚤 엽서를 쓴다
누이가 셋이었지만 다정함을 배우지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아름다운 치마가 빨랫줄을 흔들던 시절
거울 속의 작은 발자국들을 따라 걷다 보면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놓아둔 흰 자루들
자루 속의 얼굴 없는 친구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스무 살의 나에게 손가락 글씨를 쓴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새들은 무거운 음악을 만드느라 늙지도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젖은 치마가 빨랫줄을 늘어뜨리던 시절
쥐가 되지는 않았다 늘 그 모양이었을 뿐.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었고
처음으로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쥐가 되고 싶었다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 게 싫어
자루 속의 친구들을 속인 적도 상처를 준 적도 없지만
부끄럼 많은 얼굴의 아이는 거울 속에서 점점 뚱뚱해지고
작은 발자국들을 지나 어느새 거울의 뒤쪽을 향해 걷다 보면
계절은 겨울이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시간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조금 울었고 손을 씻었다
조금만 더
- 너무 작은 처녀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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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서성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8.06 한 설문에서 평론가 68명이 15표를 받아, 2000년대 최고시인으로 올랐습니다. 그 뒤로 문태준의 가재미 9표, 김경주 시인이 같은 9표, 아 ! 30년 전 지금 그와 같은 찬사를 받았던 이성복은 4표, 이 젊은 시인을 보고 이상이 다시 나타났다라고 하고, 미래파라고 명명하고 있네요.. 소설도 박민규가 최고표를 받은 것을 보면 우리 문학계 판도는 미래파가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말은 힘찬 서사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요즘 낙양의 지가를 올린다는 정유정은 이름도 못 올리네요 하루키현상, 정유정현상 하면서도요... 몇몇시는 기괴하고 몇몇시는 올린 것보다 더 서정적인 것도 있는데 복사를 허용치 않네요... 새로운 시대가 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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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태수 작성시간 13.08.12 좋은 작품 올려줘서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