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마리우스(Marius)와 술라(Sulla)의 시대(BC120 ∼ BC78)
Gracchus 형제가 어이없이 죽은 뒤 10년쯤 지나 “흙수저” 출신의 사나이가 중앙 정계에 진출
했다.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BC156∼BC86)’다. 우리가 세계사를 공부
할 때 어쨌든 한 번은 보고 지나간 인물이다. 그는 출세의 방편으로 軍에서 주요 활동을 시작
했다. 시골 출신인데다 명문 귀족도 아니고 별로 가진 게 없는 사나이기 때문이었다.
- BC119년 (G. Gracchus가 죽은 지 2년 뒤) : 호민관 취임/특이활동 없음.
- BC115년 : 법무관에 당선
- BC114년 : 에스파냐 총독 취임
- 5년 뒤 누미디아 지역의 ‘유그르타’ 전쟁에서 능력 발휘
(※ 이와 동시대인 BC108년 우리의 “고조선”이 멸망했다. )
♣ 원래 카르타고의 우방이었던 누미디아(지금의 알제리 지역)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공작에 넘어가 로마 편으로 돌아서서 한니발의 패배에 일익을 담당했고 그 후 ‘스키피오 아밀
리아누스’(스키피오 집안에 양자로 들어간 사람)에 의해 카르타고가 완전히 멸망할 때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 역할에 충실했던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 가 BC149년에 죽고 세 아들이
분할 통치를 했다.
그 중에 셋째 아들의 아들 중 ‘유그르타’가 자기 대에 와서 분할 통치하던 4촌의 영토를 병합
함으로써 로마와 갈등이 생겼고 북새통에 이탈리아 商人들이 살해 당한 일과 로마에 와있던
사촌을 암살한 일로 로마가 징계 차원에서 출병한 전쟁이다. 그때 총사령관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한 자가 48세의 G. Marius였다. 당시에 북아프리카의 최 강자였던 카르타고가 사라짐으
로써 누미디아가 지금의 北 아프리카 전 지역을 차지하고 이집트와 맞대고 있었다. 이 싸움이
‘유그르타’ 의 의도대로 장기전이 되어가자 ‘마리우스’는 상관인 사령관 메텔루스’(집정관)에게
제대특명을 얻어 집정관에 출마해 “민회(民會)”에서 당선되었다.
“민회”가 대부분의 선거직을 선출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원로원은 상원(上院)이고
민회는 하원(下院)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초출내기 最高位者인 마리우스는 나이
50에 처음 당선되었고 사회진출의 방편으로 직업 군인을 택해 별까지 달고 여기까지 온 것이
다.
그는 당선 후 연설에서 “나는 시골구석 출신에다 평민출신이다. 후원하는 “클리엔 테스=영어
로는 Client”도 없고 집안 세력도 없다. 다만 피와 땀으로 보낸 군 경력으로 어떻게 국가에
봉사하고 지지부진한 전쟁을 끝내는 방법을 안다. 국가에 봉사하는 것은 학식과 명성과 집안
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해서 “民衆” 의 지지를 얻었다. 同시대에 태어난 “금수저(著者
는 은수저라고 표현)” 출신의 ‘그라쿠스’ 형제와 “흙수저” 출신의 ‘마리우스’는 서민, 실업자
대책에 맞섰으나 그라쿠스 형제는 정치적 해결을 시도하다 죽었다.
지금까지 “로마”는 징집면제의 하한선을 자꾸 내려 “언 발에 오줌 누기”처럼 미봉 책에 그치
다 보니 집 걱정에 질이 떨어지는 프롤레타리아(無産者)출신 병사들 때문에 문제가 많음을
알고 ‘마리우스’는 징병제를 지원병제로 바꿨다. 실상 로마 공화정이 잘 된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모두 10년 이상의 軍 경험자들이라는 것이고 이런 면에서 ‘마리
우스’의 개혁안은 위험요소도 많았지 만 다음과 같은 사유로 잘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 그의 개혁은 “농지개혁”과 무관해서 부유층의 반발이 없었다.
- 억지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하층민과 당당한 “직업”을 갖게 되는 실업 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 ‘그라쿠스’는 “체제 밖 개혁”이고 마리우스는 “체제 안 개혁”이다.
- ‘마리우스’는 “집정관”의 신분이었다. 신분보호나 보장에서 차이가 많다.
- 그러다 보니 지원병들의 상당수인 프롤레타리아와 여타 빈민자들이 ‘마리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된 것이다.
★참고: ‘클리엔테스(Clientes)’의 상대되는 낱말은 ‘파트로네스(Patrones)=보호자’
민회의 승인을 얻어 지휘권을 연장해가면서 ‘유구르타’를 깨부수기는 했지만 박멸하려면
‘유구르타’와 모리타니아의 단절이 필요한데 이는 외교적 수완이 필요했다. 이를 보완해줄
인물이 로마 역사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회계감사관(총무 겸 경리)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였다. 그는 유능한 장군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외교술에 능한
인물이다. 역시 머리와 혀는 중요한 기능 이다.
‘술라(Sulla)’는 ‘마리우스(Marius)’와 달리 귀족출신이다. 그런데 가난했다. 거의 고학에 가까운
생활여건에서 공부했다. 성격도 호방했고 병사들과도 잘 어울리고 위 아래 모두 평이 좋고
생김새도 괜찮았다고 한다. ‘유그르타’와 모리타니아 왕의 연합군은 연달아 로마 군에게 패하
고 그 과정에서 ‘술라’의 협상으로 ‘유그르타’를 배신한(둘 사이는 장인과 사위인데도) 모리타
니아 왕이 ‘유그르타’를 잡아서 바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결국 모리타니아 와 ‘누미디아 왕국’은 독립국으로 남고 말살된 카르타고 지역은 로마의 속주
(屬州)로 되어있어 북아프리카에서 이집트를 제외하고 전 지역은 로마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싸움은 ‘술라’가 마무리를 지었고 공적은 ‘마리우스’가 갖게 되었다.
몇 개의 왕국이 있기는 해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는 어렵기 때문에 좀 살만한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민족이동이라고 했다(현대는 난민문제). 이 문제는 로마가 상대적으로
잘 살기 때문이겠지만 장구한 로마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로마가 침략을 당한 적도 있지
만(BC390년 갈리아 人들이 잠시 로마 市를 점령한 적이 있다.) 정복방식을 택해 정복→도로망
→식민지 건설→사회간접 자본(SOC) 확충과 같은 방식으로 야만족도 스스로 살 수 있게 도와
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와 현재의 프랑스 남부인 프로방스도 같은 방식으로 로마화 되었다. “프로방스”
도 로마의 속주인 라틴어 “프로빈키아”의 프랑스식 발음이다. 로마가 전진하면서 도로를 깔고
SOC를 하는 것을 보면 전 세계역사에서 독특하고도 과학적이며 효과적이고 창의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 반면 우리 조선왕조 역사에서는 지도를 함부로 만들고 이 정보를 퍼뜨리면 대역죄로 몰리
기도 했다. 이유는 적에게 정보가 새어나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것 이다. 진취적인 생각은 없었
던 것일까? 성리학에 따라 商-工業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니 남들
商工業 발전시켜 무기 만들고 군함 만들고 병사들 기를 때 성리학에만 매달려 글만 읽으면
최고인 한심한 사회가 어찌 안 무너질 수 있었겠는가?)
유그르타 전쟁이 끝난 후 북유럽, 독일 등에서 내려오는 야만족(게르만족)과 다섯 번 붙어서
다 패했고 정규군단도 패해 위험한 지경에 놓였다. 이는 로마 군의 질적, 양적 저하를 의미했
다. 지휘관도 신통치 않았다. 이런 위기에서 마리우스는 BC104년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한
마디로 총사령관의 권한을 강화하고 지원제, 재산소유차별폐지를 실시하고 동맹 市와 시민의
구별을 없애서 총사령관-장교-사병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예전에는 재산에 따라 부대 편성이
다르고 깃발도 달랐으나 모두 “은빛 독수리”로 통일시켰고 독수리가 로마를 상징하게 되었다.
현재 유럽사회나 심지어 미주지역에서 보이는 독수리는 모두 로마에서 기원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적 요청이고 완고한 보수파인 원로원에서도 찬성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軍制改革)은 상당히 좋은 영향을 미치고 환영을 받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군단의
私兵化”라는 폐단을 나타냈으며 나중에 Sullah나 ‘폼페이우스’, ‘카이사르’같은 사람들이 나타
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고 비난을 받았다.
어쨌든 마리우스는 BC104년부터 연달아 다섯 차례나 집정관이 되었다. BC103년 ‘마리우스’의
로마 군단은 南프랑스로 진격했고 중부에 주저앉은 게르만족과 전투가 없자 운하를 파는 등
토목공사(SOC)를 벌였다. 이때부터 로마 軍은 어딘가 주둔하면 토목공사를 벌이는 관습이
정착되었다. 이런 오랜 옛날에도 로마人들은 首都 로마市–프랑스 마르세이유–남 프랑스–에스
파냐를 잇는 로마 街道 즉 고속 도로망을 완성시켰다. 로마가 오랜 세월 천하를 휘어잡고 제 1
인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도로망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이후 남하하는 게르만 족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 전쟁은 좀 다른 전쟁의 성격이
다. 보통은 정복전쟁이거나 양국의 갈등, 충돌에서 생기는데 이것은 배고픈 게르만족이 비옥
하고 양식이 풍부한 이탈리아 半島로 이동하는 것을 막느라 벌어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규모
가 다르지만 요즘의 “난민(難民)”문제와 비슷한 느낌이다.
‘마리우스’는 상당한 戰果도 올리고 명성도 쌓았으나 훌륭한 체제개편이라고 했던 軍制개편에
의해 직업군인인 부하들이 ‘평화체제’가 돌아오자 실업자로 변했다 (로마는 常備軍제도가 없
다.). 예전 징병제의 병사는 전쟁이 끝나면 원래의 직업 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리우스는 자신을 충실히 따른 부하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서양사학자들은 법 과 인간
들 사이에 존재하는 義와 情을 무시했고 따라서 ‘마리우스’나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와 병사들 관계를 “私兵化”라고 만 단정했다. 직업 군인 병사들의 실업대책으로 곡물가격의
특혜, 해외 식민도시에 이주할 수 있는 특권을 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원로원은 재원계획도 없는 이 사업의 무모함을 들어 반대했고 이 충돌로 호민관이 죽고 ‘마리
우스’는 민중들의 인기가 떨어졌다. 이때 그의 처가 집안인 「율리아」에서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몸젠’이라는 역사가가 ‘마리우스’를 무식하게 취급했지만 이 아기는 “로마가 낳은
유일한 천재”라고 했다. 그의 이름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다.
그 이후 8년 간 전쟁도 없고 농지개혁, 병사들의 실업자 문제 등등이 해결방안도 없이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同盟市 전쟁”이 터졌다. 이탈리아 반도에는 로마시민인
진짜 로마인이 있고 다른 부족이나 씨족인 ‘이탈리아 人’이 있었다. 이 ‘이탈리아 人’들의 의무
는 비슷하고 권리는 떨어지는데 시민권 문제로 갈등이 커져서 전쟁이 터진 것이다. 이 불평등
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법안을 제출했던 호민관이 살해되자 ‘이탈리아 人’ 여러 부족이 봉기했
다.
‘한니발’이 그렇게도 바랐던 “로마 동맹체제의 해체”가 이런 식으로 생긴 것이다. 같은 로마 군
이었던 장군들과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로마시민 軍” 과 “동맹시 軍”이 되어 피 터지게
싸웠다. 전략, 전술을 서로 빤히 알고 있으니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겠는가? 인명손실도 상당히
컸다.
그러다가 ‘카이사르’의 큰 아버지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민회(民會)” 에서 동맹시
가 원하던 “시민권법”을 통과시켜 BC89년 전쟁이 끝났다. 이 법을 “율리우스 시민권법”이라고
한다. 이 법의 통과로 로마인, 이탈리아인의 구분이 없이 모두 다 “로마시민”이 된 것이다.
진정한 半島 안의 통일된 국가가 되었다.
★한 가지 깨우치고 갈 것이 있다.
아테네나 로마는 당시에 都市國家였다. 도시국가는 시민권을 가진 시민들을 중심 으로 운영되
는 국가다. 국가최고의 결정권이 “민회”에 있었던 것은 두 나라가 도시국가였기 때문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은 “순수한” 시민의 권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폐쇄적이다.
Aristoteles도 아테네 시민권을 갖지 못했다(부모가 다 아테네 시민이어야 함).
◐아테네인이 생각한 동포 : 같은 피가 흐르고 같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
◐ 로마인이 생각한 동포 :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 출신 상관없다.
아테네 사람들의 思考는 한국인의 사고와 많이 닮았고 로마인의 사고 방식은 로마제국을
키워준 바탕이다. 위에 나오듯이 로마연합은 해체되어 명실공히 하나의 국가(시민)가 되었는
데 과거의 동맹도시나 동맹부족의 본거지는 로마의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즉, 그들은 각
지방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를 통합하는 보편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민중파”와 “보수 원로원파”라는 대칭되는 정치개념으로 교대로 쿠데타
와 같은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을 죽였다. 먼저 밀려 났다가 돌아와 정적을 죽인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의 고모부인데도 피해를 입혔다. ‘술라’가 오리엔트에서의 군사적 성공 후 돌아와 정적을 말살했고
政敵 ‘마리우스’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술라’는 잔인할 정도로 자신과 맞섰던 정적과 그 군대에 대해 살육을 감행했다. ‘마리우스’ 派
라고 찍힌 사람들은 해외에까지 쫓아가 살해했고 가볍다고 해도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때 1차
3두정치의 한 사람이고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을 진압한 ‘크라수스’는 치사할 정도로 그
몰수재산을 헐값에 쓸어 담아 로마 제1의 부자가 되었다. 그 점이 내내 도덕적 결함으로 작용
했다.
이 와중에 ‘마리우스’의 처조카이며 ‘마리우스’의 2인자 ‘킨나’의 사위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저)’도 당연히 ‘술라’의 살생부에 올라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카이사르’는 ‘킨나’
의 딸 즉 부인과 이혼하라는 ‘술라’의 명령을 거부하고 소아시아까지 도망갔다.
‘술라’는 법을 어기고 무기한 독재관(딕타토르-영어의 dictator)이 되고 법, 사회 체계, 군사 등
모든 것을 보수파의 입맛에 맞게 개편했다. 모든 것을 원로원 중심에다 富國强兵을 원칙으로
일을 처리한 후 58살에 정계를 은퇴했다. 이런 결단은 나중에 보복을 당하지 않는 훌륭한
조치였다. ‘술라’가 잔인하고 폭압적이기는 했으나 현대의 “개발독재자”들이 ‘술라’의 은퇴
방식을 따라 했으면 천수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술라’는 재물을 모으지 않았다. 그는 공적
으로는 대단히 엄정했으나 퇴근 후에는 희극배우, 작가, 시인들과 어울려 놀았고 말년에 35살
이나 어린 여자와 5번째 결혼했다. 딱 1년간 은둔하고 죽었다.
政敵이나 피해를 본 입장에서는 ‘술라’는 증오의 대상이었으나 옛 부하들과 원로원이 전폭적
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국장(國葬)으로 마르스(Mars) 광장에 역대 왕들의 묘지에 묻혔는데
‘마리우스’같이 부관참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 화장을 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사람을
워낙 많이 죽였으니 후환이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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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형기 작성시간 21.02.06 윤석열과 문재인은 이 글에 나오는 어떤 인물에 대입될 수 있을까? 역사는 흐르고 인간은 역사의 노예인 것을. 권력을 잡았을 때 까불지만, 화무십일홍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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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춘천감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2.06 문재인은 술라나 마리우스와 비교 자체가 될 수 없는 사람이고 윤석열은 아직도 감을 못 잡겠다. 그가 한동흔이나 다른 자기 부하들과 함께 박근혜나 이명박 사람들을(양승태 포함) 두들겨 잡을 때는 저승사자였고 그 와중에 검사 후배는 자살도 했다. 윤석열이 정말로 원칙론에 입각한 법치주의자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적의 적이니까 응원들을 하는데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