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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

5. 10.(두 아들 이야기)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9.05.10|조회수50 목록 댓글 2

두 아들의 이야기 (눅 15:11~32)


  예전 교회에서 있던 일입니다. 고 3 수능시험을 치는 날입니다. 수능 시험 당일에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위해 교회에서 특별 기도회를 합니다.  특별 기도회가 금식 기도회가 되었습니다.  금식 기도회를 하자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자녀들은 어렵게 시험 치는 데 자신들은 밥을 먹을 수 없다며 금식을 하면서 기도회를 하는 것입니다.

  저도 같이 기도에 동참했는데, 금식한다고 혼났습니다.  점심 때를 넘기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예요. 내 자식도 아닌데, 이렇게 금식까지 해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기도는 안 되고 순대국밥만 머릿속에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5시 정도 되어서 부모님들은 수능 시험이 끝났다고 나가십니다. 밥 먹으러 나가는데, 아직도 남아계신 부모님들이 있는 거예요. 물어보니 자신의 자녀들은 한 과목 더 남아서 기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 배고파 살겠는데.. 한 시간 더 기도.. 도저히 못 참아서..

   기도하시던지 말든지.. 저는 교회 나와서 순대 국밥집으로 바로 달려 갔습니다.

   국밥을 먹으면서 마음이 안 편한 거예요.  끝까지 같이 남아서 기도해야 하는데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국밥은 다 먹은 것 같아요.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는데.. 그 사랑은 부모님의 그 사랑의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말입니다.

 

  자녀의 대한 부모의 사랑..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사랑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아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영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둘째 아들(눅 15:11~24)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날은 둘째 아들이 자신의 몫의 재산을 달라고 아버지를 조릅니다. 좋은 사업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금이라고, 누구를 돕기 위한 기금이라고, 명분을 내새워 달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놀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아버지. 아들을 타일러도 보았지만 이 아들은 막무가네 입니다.

  유대인들은 재산 상속을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든 것도, 죽은 것도 아닌데 재산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명분도 없이 말입니다. 이 아들은 한 마디로 불효자입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받자 몇 일 뒤 해외로 나갑니다.  돈 쓰기 좋고, 놀기 좋고, 즐기기 좋은 곳으로 갑니다. 지금의 괌. 피지. 라스베가스, 마카오 그런 곳입니다. 가서 즐기고 노는데,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만 것입니다.

  재산을 다 허비하고 이제 자신의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나라에 흉년까지 들어서 경기가 안 좋아 일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일거리를 찾다가 찾은 것이 남의 집에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들에 있는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 치는 일은 힘들 뿐만 아니라,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서 이 일을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돼지는 종들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낮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돼지를 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둘째 아들은 지금 자신의 신분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배고픔이 문제였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를 먹고자 하는데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어서 먹지 못했습니다.

  돼지도 마음껏 쥐엄 열매를 먹는데, 돼지 먹는 그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된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종이 되어, 쥐엄 열매도 못 먹는 거지 인생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배고프면 먹는 것 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때 떠오를 것이 아버지 집에 양식이 많은 품꾼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 품꾼들이 배불리 먹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의 집에 품꾼들은 배불리 먹었는데, 자신은 여기서 굶어 죽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지금 이 아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품꾼이라도 되어 자신의 허기라도 채우고자 가는 것입니다.  즉 배고픔으로 아버지에게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사랑을 알아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 시달리다 도무지 못살아서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가는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는데, 가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고, 집 멀리서 배외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달려옵니다. 보니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아버지와 관계가 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품꾼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있어 아들은 죄를 지어도 여전히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보다 이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이 더 기뻤던 것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자신을 아들로 보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 앞에 감동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불효자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고,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던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아들을 자신의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고생 고생하다가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불쌍한 아들로 보고 있습니다.

  20절에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종들을 시켜 제일 좋은 옷, 손에 가락지,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엽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 앞에 돌아온 것 그 것 한가지만으로 기뻐하십니다. 내가 어떤 모습인가? 내가 어떤 처지인가? 내가 어떤 신분인가? 아버지에게 있어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다는 그 자체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24절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십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을 찾는 것입니다.


 

2. 첫째 아들(15:25~32)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가장 잘 안다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은 이 사랑을 이해하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하나님만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여 주는 대상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원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었습니다(눅 15:1,2).

  네델란드 화가 렘블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보면 2가지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2가지 반응입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모습으로 끌어 앉고 있습니다.

  그런데 탕자를 보고 있는 형의 보습은 아버지의 모습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곧게 서서 두 손을 굳게 모으고 위에서 아래로 동생을 내려다보는 정죄하는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큰 아들에 있어 관심은 동생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동생을 향해서 본문 30절에“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합니다. 형은 동생을 더 이상 동생으로 보지 않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을 “이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일 수는 있어도 나는 그를 동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했다는 것입니다. 형의 관심은 아버지의 마음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왜 기뻐하시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형을 “또 다른 탕자, 제 2의 탕자”라고 합니다. 형 또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은 재산을 다 탕진한 동생의 죄 밖에 보지 못합니다. 즉, 죄 지은 자를 동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본문 32절에 말씀하십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라고 말입니다. 탕자는 바로 네 동생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가문에 죄인인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데, 형이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세리와 죄인은 바로 너희의 동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너희의 동생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에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 이 땅에 잃어버린 동생을 받아들이는 형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정죄의 눈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품을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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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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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허칠선 | 작성시간 09.05.10 사랑하는 주님, 허물많은 저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오늘까지 보호 하시고 인도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거룩하고 온전하신 사랑으로 나 또한 이웃을 내 몸과같이 사랑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닮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째 아들같이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자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힘들고 괴로울때는 항상, 언제나 둘째 아들같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로 온전히 돌아가는 자 되게 하소서. 저를 주님의 크신 이름과 크신 영광을 위해 영원까지 인도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앞에 설때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서게 하소서. -아멘-
  • 작성자아지랭이 | 작성시간 09.05.14 말씀속에서 ,, 저는 둘째아들도 됬다 첫째 아들도 됬다 수없이 주님 속섞이는 자녀임을 알고,,오직 사랑의 주님 포용의주님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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