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 멸망의 궁극적 원인
서기 263년, 촉한(蜀漢) 염흥(炎興) 원년 한실의 부흥과 재기(再起)를 꿈꾸며 유비가 일으키고 제갈량이 지켰던 촉한은 결국 위(魏)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후주 유선은 검각에 강유가 촉군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천령을 넘은 등애에게 항복하고 말았고, 강유는 종회에게 거짓 투항하여 촉한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촉(蜀)이었으나, 초대(初代)황제가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이자 한실의 종친으로 흥한(興漢)의 꿈을 가졌던 유비였고, 원대한 경영전략과 함께 한으로부터 국권을 찬탈한 위(魏)를 징벌하기 위해 수차례 북벌에 나섰던 제갈량이 촉의 승상으로 있었기에, 우리는 촉이라는 근(近) 천 7백년전의 망국(亡國)을 애도(哀悼)하고 혹은 안타까워한다. 그 아쉬움이 결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주역들에게 비난을 퍼부으면서 가시화(可視化)되었으니,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자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자나 가릴 것 없이 도마 위에 올려지고 있다. 제일 먼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후주(後主) 유선이며, 그에 못지 않은 황호, 황호를 위시한 조정의 간신배들까지도 매도(賣渡)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자로 강유가 첫손을 꼽히며, 제갈량도 이미 수차례 도마 위에 올려졌고, 심지어는 유, 관, 장 삼형제에게까지 칼끝이 돌려지게 되었다. 과연 촉한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필자(筆者)는 그간 수많은 동호회에서 이것을 두고 논쟁하는 것을 보아왔다. 한 인물로 초점이 맞춰져 난도질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각기 관점이 달라 거친 토론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다. 필자는 토론자들간의 격렬한 토론을 싫어하기 때문에 중립을 유지하는 입장이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촉한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을 한 인물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수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주장이다. 후주 유선에서부터 선주 유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도마에 오를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촉한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의미이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촉한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관료들의 사소한 잘못들이 모여서 촉한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필자의 짧은 견해로 여러 사항을 비교, 검토해 보았을 때, 중요한 사실을 하나 인지할 수 있었다. 물론 멸망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뒤엎을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을 적절히 견제하거나 숙청(肅淸)하는 인재가 또한 있기 마련이고, 만일 나라가 뒤엎어졌다면 그러한 자를 제거하지 못한 여러 관리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니 결국 모든 책임은 분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촉한의 모든 관료들의 사소한 잘못들의 중심에 제갈량이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당히 흥미롭고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했을 때부터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촉한 멸망에 일조할 만한 여러 가지 일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제갈량 본인의 의도는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여러 가지 실책이나 잘못된 편견이 조금씩 촉한의 국정을 기울여갔고 결국은 멸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제갈량에 의한 문제점은 대략 세 가지로 꼽을 수 있겠으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문제점이 제갈량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단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에게서 유선을 부탁받고, 국가의 실질적 총수(總帥)가 되었다. 연의에서도 정사에서도 유선은 그저 제갈량에게 의탁하는 모습만을 보일 뿐이다. 제갈량은 국가 경영의 총책임자이면서 군권까지 가진 총사령관으로서, 촉한의 내정, 외교, 군사 등 모든 부문에 대해 권한을 행사하였고,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관여하였다. 비록 당시로서는 유비의 말마따나 ‘사람이 쉰까지 살면 결코 일찍 죽은 것이라 할 수 없는’상황이었으나, 그 덕분에 제갈량은 쉰 네 살에 과로로 인해 병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끝까지 선주 유비의 유지를 이어 촉한의 부흥을 꿈꾸는 대업을 제갈량 자신의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끌어내어 완수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충신이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혹자들에 의해 제갈량의 이른 바 ‘일인독재체제’는 자신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촉한 전체에 상당한 폐를 끼쳤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촉한 멸망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유선은 혹자에 의해 촉한에 있어서 ‘암(癌)적 존재’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아둔한 황제 유선의 무능한 국정 운영 능력에 어떤 사람은 그를 변호한답시고 ‘장판의 싸움에서 유비가 내던져서 머리를 다쳤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변명이나 부정적인 평가가 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유선이 이렇게까지 평가받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제갈량에게 있다고 본다.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된 이후, 기존의 유비의 주축들이 하나같이 몰락해 가는데 형주의 수장 관우의 죽음, 그에 이어진 장비의 어이없는 죽음과, 마초, 황충같은 대들보격 장수들의 죽음이 잇따르고, 유비의 이릉전에 의해 엄청난 국력이 낭비된 뒤 급기야는 유비까지 병사하게 된다. 독립국가체제를 완성한 지 단 3년만에 주축이라 할 만한 인재를 연이어 한꺼번에 상실하고 만 촉한은 이후 마지막 수뇌(首腦)이자 고명대신(顧命大臣)인 제갈량 중심의 비정상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유언에 따라 유선은 제갈량을 상부로 섬기게 되고, 모든 촉한의 관료들이 제갈량에게 충성을 맹세했다(이는 제갈량이 촉한을 대변했다는 의미이다). 제갈량은 승상 겸 대장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고, 따라서 국가의 모든 권력이 승상부로 모아지게 되는데, 이것이 한 조정이 승상 조조에게 권력집중을 한 것과는 다른 것이, 제갈량은 조조와는 달리 정권을 도맡은 후 촉한에 대한 충정으로 일관하였고, 촉한에 해가 될 만한 인물을 조기(早期)에 축출(逐出)하였다. 그러므로 제갈량 생전에는 이러한 체계에 대한 불만도 없었고 문제 또한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조조가 승상이 된 한의 조정이 그러했듯이, 촉한 또한 강력한 전제정권 중심의 체제가 아닌, 신하에게 권력을 집중한 신권주의(臣權主義)를 고수하게 된 것이 문제가 된다. 원래 유선은 유비의 뜻에 의하여 태자 시절 유가(儒家)의 글밖에 읽지 못했다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법가나 행정, 군사 등 국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요소를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유선 개인은 리더십이 결여되어 있었고, 리더십을 후천적으로 계발(啓發)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이런 유선에게 있어서 신권주의는 약(藥)이 아닌 독(毒)이 되어 버렸으니, 제갈량 - 장완 - 비의로 이어지는 승상부의 권력 독점체제는 유선으로 하여금 전제왕권을 행사할 만한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유선은 비의의 수세적(守勢的) 국방정책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고, 강유의 아홉 차례나 되는 북벌 또한 단 한 번도 막지 못했으며, 비의와 강유 둘의 사이를 조율해 주지도 못했다. 또한 마천령을 넘은 기습적인 공격에 당황한 유선은 검각에 강유가 있었고 성도에도 충분한 군사력이 있었음에도 불구, 별다른 저항 없이 등애에게 촉한을 넘겨주고 만다. 한 마디로 집정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제갈량에 의해 점점 무능해질 수 밖에 없었던, 또한 조정에 달리 가까이 할 일가 친척이나 신료마저도 없어 주색에 빠지고 환관 황호에게 집착하게 되었던 유선에 의한 촉한의 멸망은 당연히 제갈량이 떠안아야 할 책임인 것이다.
제갈량은 또한 유비가 촉한을 세울 때까지의 원대한 계책은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촉한을 세운 뒤 통일할 때까지의 원대한 전략은 구상하지 못했다. 중국의 민간인들 사이에는 이러한 속담이 있다고 한다. “촉(蜀) 중에 대장(大將)이 없으니 요화가 선봉이 된다.” 이 속담은 요화가 무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촉(蜀)에 인재가 없었다는 뜻이다. 제갈량은 23년 동안 유비를 보좌하며 촉한을 일으키고 후주 유선을 보좌했지만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했다. 제갈량의 뒤를 이을만한 후계자로 손꼽힐 수 있었던 촉한의 인재로는 마속, 요립, 법정 정도이나, 마속은 한 번의 실패로 참수되었고, 요립은 숙청되었으며, 법정은 요절했다. 장완 - 비의에 이어진 내정 관료와, 강유를 위시한 군부 세력이 후계자가 아니겠느냐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의 제갈량의 후계자는 문무(文武)에 두루 능통하여 촉한의 전반(全般)을 경영할 수 있는 인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강유는 장완 - 비의의 내정에는 그리 두각을 보이지 않았고, 장완과 비의는 수세적 정책으로 일관하여 별다른 북벌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것은 촉한을 유지하려는 제갈량의 기본 목표를 고수한 것이다. 비의 사후 군권을 잡은 강유는 잦은 북벌로 위(魏)와 충돌했고 국력을 피폐(疲弊)시켰다. 이것은 통일 대업을 이룩하려는 제갈량의 유지를 계승한 것이다. 국력을 유지하면서 통일대업을 이루려는 제갈량의 의지가 후계자들에게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들의 무능함을 탓하기에는 또한 제갈량의 책임이 너무 크다. 제갈량은 죽는 그 날까지 모든 일을 자신이 주관하려고 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선제의 당부가 무거워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제갈량의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 말에서 제갈량은 자신의 사후를 계산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자신이 모든 임무를 감당하여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은 좋지만, 죽기 전에 통일 사업을 완수하려는 발상 자체가 도박이라고 할 수 있다. 국력이 열 배는 강한 위(魏)를 상대하면서, 또한 형주를 흡수하여 국력이 촉한에 비해 비대해진 오(吳)까지 견제하면서 자신의 사후 대를 이어 북벌을 감행할 장구한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제갈량이 이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면, 필히 자신의 권력을 분담하여 자신의 사후를 담당할 관료들의 수행능력을 따지고 그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자신의 유지(遺志)를 잇도록 해야 했다.
후계자 양성 문제에 있어서 사후의 국정경영진을 미리 구성하고 관리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새로운 인재의 양성에 있어서도 제갈량의 책임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겠지만, 조조와 제갈량을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 바로 교육정책이다. 건안(建安) 8년 7월, 조조는 이러한 명령을 내리게 된다.
[--전란 이래 15년간, 젊은이들은 인의예양의 기풍을 접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점을 매우 슬프게 생각해 왔다. 지금 각 군국에 명하여 학문을 닦도록 하라. 5백호 이상의 현에는 교관을 설치하고, 향(현 아래의 행정단위)의 준재를 선발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교육을 베풀면, 선왕(과거의 성왕)의 도가 폐하는 일이 없을 터이니, 이는 천하에 이익이 될 것이다.<정사 무제기 중>]
이른 바 “수학령(修學令)”이다. 건안 8년은 조조가 원소를 격파하고 하북(河北)을 점거한 시점으로, 전란으로 피폐해진 중원에 다시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시켜 인재를 양성하려는 조조의 지속적인 “학술진흥 정책”의 일환을 보여주고 있는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조조는 양주목 유복이 학교설립을 추진한 것을 크게 칭찬한 바 있으며, 스스로도 학문을 연구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당대의 건안(建安)문단인 진림, 왕찬, 유정, 완우, 응창 등에 조조, 조비, 조식 3부자를 아울러 “삼조칠자(三曹七子)”라 부를 정도로 조조의 학문적인 위업은 실로 뛰어난 데가 있었다. 조비, 조식도 그런 아버지 조조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아 조비는 위문제집(魏文帝集) 23권을 남겼고, 조식은 후세에 문학사상의 주공(周公) ․공자(孔子)로 불릴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사 삼국지의 저술자인 진수가 태어나고 자랐던 촉임에도 불구하고, 촉서에는 촉에서 행해진 교육정책을 찾을 길이 없다. 특히 제갈량은 정치와 군사 부문에 있어서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고, 또한 명령을 내리거나 통솔, 지휘하는 부분이 다수 있음에도, 조조처럼 지속적이고 구체적인 교육정책을 펼치기는커녕 대강(大綱)의 지침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제갈량이 모든 것을 떠안으려는 것에서 비롯된 문제점이 될 수도 있다. 제갈량 자신이 국정 전반에 관여하느라 학술진흥정책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정책을 주관할 만한 다른 인물이라도 내세웠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촉한에는 사실 내민, 초주, 진복, 허정 등 학문적인 부분에 있어서 인재가 많았다. 이런 이들을 적절히 활용해서 인재를 양성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제갈량은 매양 자신의 뒤를 이을 군 계승자가 없어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제갈량이 무재(武才)를 직접 양성할 수는 없었는가. 정녕 촉의 용장은 위연이 유일했는가. 제갈량 생전 촉나라가 비록 북벌을 여러 번 강행했음에도 진수의 평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듣고 나라 안의 국고가 튼튼하였다 할지라도... 결국 인재양성에 실패함으로써 제갈량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촉에게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들어 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촉한의 멸망을 제갈량 한 사람의 잘못으로 전가하기에는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이 너무 크다. 하지만 그의 업적으로 그를 비호(庇護)하기에는 또한 책임이 너무 크다. 필자의 편협한 소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촉한은 제갈량에 의해 건국되었고, 제갈량에 의해 무너졌다. 촉한은 제갈량과 함께 살았고, 제갈량과 함께 죽었다. 촉한 멸망의 총체적인 원인을 살펴보았을 때, 인재의 견실하지 못함, 후진 양성의 실패, 국력의 유지 실패, 황제의 권력 약화, 간신들에 의한 국력 피폐 등 모든 것은 제갈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제갈량이 강력히 고수했던 신권주의, 강건하게 유지했던 독재체제, 이것은 비록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거꾸로 위(魏)의 유동적이고 창조적인 관료체계와는 달리 경직된 관료체제를 만들어냈고, 상부의 명령만이 절대적이어서 지도자 한 두 사람이 흔들리면 국정 전반이 흔들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를 제갈량이 아닌 그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겠는가. 혹은 제갈량과 이 책임을 공동분담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촉한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후대까지 생각하여 원대하고 장구적인 전략을 구상하지 못하고 생전의 일에만 급급했던 제갈량에게 있는 것이다.
되게 오래 전에 쓴 글인데(작년에 쓴 글... 쿨럭) ㅋ 삼클에서 임관할 때도 이 글을 5일차 훈련에 써서 파장을 일으켰다죠 ㅋ
근데 이 글을 三國志 카페에 올렸을 때는 역시 우수한 답변 글들이... 와와선생(삼클 모개)님도 아마 반론을 해 주셨던 것으로 아는데...
어쨌든 지금 제가 보기엔 허술하고 허접한 논리의 글이지만 여러분들의 생각을 수렴하고 다시 작성해 보려구요 ^^
많은 리플 주시길~
서기 263년, 촉한(蜀漢) 염흥(炎興) 원년 한실의 부흥과 재기(再起)를 꿈꾸며 유비가 일으키고 제갈량이 지켰던 촉한은 결국 위(魏)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후주 유선은 검각에 강유가 촉군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천령을 넘은 등애에게 항복하고 말았고, 강유는 종회에게 거짓 투항하여 촉한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촉(蜀)이었으나, 초대(初代)황제가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이자 한실의 종친으로 흥한(興漢)의 꿈을 가졌던 유비였고, 원대한 경영전략과 함께 한으로부터 국권을 찬탈한 위(魏)를 징벌하기 위해 수차례 북벌에 나섰던 제갈량이 촉의 승상으로 있었기에, 우리는 촉이라는 근(近) 천 7백년전의 망국(亡國)을 애도(哀悼)하고 혹은 안타까워한다. 그 아쉬움이 결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주역들에게 비난을 퍼부으면서 가시화(可視化)되었으니,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자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자나 가릴 것 없이 도마 위에 올려지고 있다. 제일 먼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후주(後主) 유선이며, 그에 못지 않은 황호, 황호를 위시한 조정의 간신배들까지도 매도(賣渡)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자로 강유가 첫손을 꼽히며, 제갈량도 이미 수차례 도마 위에 올려졌고, 심지어는 유, 관, 장 삼형제에게까지 칼끝이 돌려지게 되었다. 과연 촉한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필자(筆者)는 그간 수많은 동호회에서 이것을 두고 논쟁하는 것을 보아왔다. 한 인물로 초점이 맞춰져 난도질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각기 관점이 달라 거친 토론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다. 필자는 토론자들간의 격렬한 토론을 싫어하기 때문에 중립을 유지하는 입장이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촉한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을 한 인물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수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주장이다. 후주 유선에서부터 선주 유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도마에 오를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촉한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의미이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촉한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관료들의 사소한 잘못들이 모여서 촉한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필자의 짧은 견해로 여러 사항을 비교, 검토해 보았을 때, 중요한 사실을 하나 인지할 수 있었다. 물론 멸망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뒤엎을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을 적절히 견제하거나 숙청(肅淸)하는 인재가 또한 있기 마련이고, 만일 나라가 뒤엎어졌다면 그러한 자를 제거하지 못한 여러 관리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니 결국 모든 책임은 분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촉한의 모든 관료들의 사소한 잘못들의 중심에 제갈량이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당히 흥미롭고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했을 때부터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촉한 멸망에 일조할 만한 여러 가지 일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제갈량 본인의 의도는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여러 가지 실책이나 잘못된 편견이 조금씩 촉한의 국정을 기울여갔고 결국은 멸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제갈량에 의한 문제점은 대략 세 가지로 꼽을 수 있겠으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문제점이 제갈량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단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에게서 유선을 부탁받고, 국가의 실질적 총수(總帥)가 되었다. 연의에서도 정사에서도 유선은 그저 제갈량에게 의탁하는 모습만을 보일 뿐이다. 제갈량은 국가 경영의 총책임자이면서 군권까지 가진 총사령관으로서, 촉한의 내정, 외교, 군사 등 모든 부문에 대해 권한을 행사하였고,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관여하였다. 비록 당시로서는 유비의 말마따나 ‘사람이 쉰까지 살면 결코 일찍 죽은 것이라 할 수 없는’상황이었으나, 그 덕분에 제갈량은 쉰 네 살에 과로로 인해 병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끝까지 선주 유비의 유지를 이어 촉한의 부흥을 꿈꾸는 대업을 제갈량 자신의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끌어내어 완수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충신이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혹자들에 의해 제갈량의 이른 바 ‘일인독재체제’는 자신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촉한 전체에 상당한 폐를 끼쳤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촉한 멸망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유선은 혹자에 의해 촉한에 있어서 ‘암(癌)적 존재’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아둔한 황제 유선의 무능한 국정 운영 능력에 어떤 사람은 그를 변호한답시고 ‘장판의 싸움에서 유비가 내던져서 머리를 다쳤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변명이나 부정적인 평가가 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유선이 이렇게까지 평가받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제갈량에게 있다고 본다.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된 이후, 기존의 유비의 주축들이 하나같이 몰락해 가는데 형주의 수장 관우의 죽음, 그에 이어진 장비의 어이없는 죽음과, 마초, 황충같은 대들보격 장수들의 죽음이 잇따르고, 유비의 이릉전에 의해 엄청난 국력이 낭비된 뒤 급기야는 유비까지 병사하게 된다. 독립국가체제를 완성한 지 단 3년만에 주축이라 할 만한 인재를 연이어 한꺼번에 상실하고 만 촉한은 이후 마지막 수뇌(首腦)이자 고명대신(顧命大臣)인 제갈량 중심의 비정상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유언에 따라 유선은 제갈량을 상부로 섬기게 되고, 모든 촉한의 관료들이 제갈량에게 충성을 맹세했다(이는 제갈량이 촉한을 대변했다는 의미이다). 제갈량은 승상 겸 대장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고, 따라서 국가의 모든 권력이 승상부로 모아지게 되는데, 이것이 한 조정이 승상 조조에게 권력집중을 한 것과는 다른 것이, 제갈량은 조조와는 달리 정권을 도맡은 후 촉한에 대한 충정으로 일관하였고, 촉한에 해가 될 만한 인물을 조기(早期)에 축출(逐出)하였다. 그러므로 제갈량 생전에는 이러한 체계에 대한 불만도 없었고 문제 또한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조조가 승상이 된 한의 조정이 그러했듯이, 촉한 또한 강력한 전제정권 중심의 체제가 아닌, 신하에게 권력을 집중한 신권주의(臣權主義)를 고수하게 된 것이 문제가 된다. 원래 유선은 유비의 뜻에 의하여 태자 시절 유가(儒家)의 글밖에 읽지 못했다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법가나 행정, 군사 등 국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요소를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유선 개인은 리더십이 결여되어 있었고, 리더십을 후천적으로 계발(啓發)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이런 유선에게 있어서 신권주의는 약(藥)이 아닌 독(毒)이 되어 버렸으니, 제갈량 - 장완 - 비의로 이어지는 승상부의 권력 독점체제는 유선으로 하여금 전제왕권을 행사할 만한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유선은 비의의 수세적(守勢的) 국방정책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고, 강유의 아홉 차례나 되는 북벌 또한 단 한 번도 막지 못했으며, 비의와 강유 둘의 사이를 조율해 주지도 못했다. 또한 마천령을 넘은 기습적인 공격에 당황한 유선은 검각에 강유가 있었고 성도에도 충분한 군사력이 있었음에도 불구, 별다른 저항 없이 등애에게 촉한을 넘겨주고 만다. 한 마디로 집정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제갈량에 의해 점점 무능해질 수 밖에 없었던, 또한 조정에 달리 가까이 할 일가 친척이나 신료마저도 없어 주색에 빠지고 환관 황호에게 집착하게 되었던 유선에 의한 촉한의 멸망은 당연히 제갈량이 떠안아야 할 책임인 것이다.
제갈량은 또한 유비가 촉한을 세울 때까지의 원대한 계책은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촉한을 세운 뒤 통일할 때까지의 원대한 전략은 구상하지 못했다. 중국의 민간인들 사이에는 이러한 속담이 있다고 한다. “촉(蜀) 중에 대장(大將)이 없으니 요화가 선봉이 된다.” 이 속담은 요화가 무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촉(蜀)에 인재가 없었다는 뜻이다. 제갈량은 23년 동안 유비를 보좌하며 촉한을 일으키고 후주 유선을 보좌했지만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했다. 제갈량의 뒤를 이을만한 후계자로 손꼽힐 수 있었던 촉한의 인재로는 마속, 요립, 법정 정도이나, 마속은 한 번의 실패로 참수되었고, 요립은 숙청되었으며, 법정은 요절했다. 장완 - 비의에 이어진 내정 관료와, 강유를 위시한 군부 세력이 후계자가 아니겠느냐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의 제갈량의 후계자는 문무(文武)에 두루 능통하여 촉한의 전반(全般)을 경영할 수 있는 인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강유는 장완 - 비의의 내정에는 그리 두각을 보이지 않았고, 장완과 비의는 수세적 정책으로 일관하여 별다른 북벌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것은 촉한을 유지하려는 제갈량의 기본 목표를 고수한 것이다. 비의 사후 군권을 잡은 강유는 잦은 북벌로 위(魏)와 충돌했고 국력을 피폐(疲弊)시켰다. 이것은 통일 대업을 이룩하려는 제갈량의 유지를 계승한 것이다. 국력을 유지하면서 통일대업을 이루려는 제갈량의 의지가 후계자들에게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들의 무능함을 탓하기에는 또한 제갈량의 책임이 너무 크다. 제갈량은 죽는 그 날까지 모든 일을 자신이 주관하려고 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선제의 당부가 무거워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제갈량의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 말에서 제갈량은 자신의 사후를 계산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자신이 모든 임무를 감당하여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은 좋지만, 죽기 전에 통일 사업을 완수하려는 발상 자체가 도박이라고 할 수 있다. 국력이 열 배는 강한 위(魏)를 상대하면서, 또한 형주를 흡수하여 국력이 촉한에 비해 비대해진 오(吳)까지 견제하면서 자신의 사후 대를 이어 북벌을 감행할 장구한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제갈량이 이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면, 필히 자신의 권력을 분담하여 자신의 사후를 담당할 관료들의 수행능력을 따지고 그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자신의 유지(遺志)를 잇도록 해야 했다.
후계자 양성 문제에 있어서 사후의 국정경영진을 미리 구성하고 관리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새로운 인재의 양성에 있어서도 제갈량의 책임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겠지만, 조조와 제갈량을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 바로 교육정책이다. 건안(建安) 8년 7월, 조조는 이러한 명령을 내리게 된다.
[--전란 이래 15년간, 젊은이들은 인의예양의 기풍을 접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점을 매우 슬프게 생각해 왔다. 지금 각 군국에 명하여 학문을 닦도록 하라. 5백호 이상의 현에는 교관을 설치하고, 향(현 아래의 행정단위)의 준재를 선발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교육을 베풀면, 선왕(과거의 성왕)의 도가 폐하는 일이 없을 터이니, 이는 천하에 이익이 될 것이다.<정사 무제기 중>]
이른 바 “수학령(修學令)”이다. 건안 8년은 조조가 원소를 격파하고 하북(河北)을 점거한 시점으로, 전란으로 피폐해진 중원에 다시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시켜 인재를 양성하려는 조조의 지속적인 “학술진흥 정책”의 일환을 보여주고 있는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조조는 양주목 유복이 학교설립을 추진한 것을 크게 칭찬한 바 있으며, 스스로도 학문을 연구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당대의 건안(建安)문단인 진림, 왕찬, 유정, 완우, 응창 등에 조조, 조비, 조식 3부자를 아울러 “삼조칠자(三曹七子)”라 부를 정도로 조조의 학문적인 위업은 실로 뛰어난 데가 있었다. 조비, 조식도 그런 아버지 조조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아 조비는 위문제집(魏文帝集) 23권을 남겼고, 조식은 후세에 문학사상의 주공(周公) ․공자(孔子)로 불릴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사 삼국지의 저술자인 진수가 태어나고 자랐던 촉임에도 불구하고, 촉서에는 촉에서 행해진 교육정책을 찾을 길이 없다. 특히 제갈량은 정치와 군사 부문에 있어서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고, 또한 명령을 내리거나 통솔, 지휘하는 부분이 다수 있음에도, 조조처럼 지속적이고 구체적인 교육정책을 펼치기는커녕 대강(大綱)의 지침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제갈량이 모든 것을 떠안으려는 것에서 비롯된 문제점이 될 수도 있다. 제갈량 자신이 국정 전반에 관여하느라 학술진흥정책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정책을 주관할 만한 다른 인물이라도 내세웠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촉한에는 사실 내민, 초주, 진복, 허정 등 학문적인 부분에 있어서 인재가 많았다. 이런 이들을 적절히 활용해서 인재를 양성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제갈량은 매양 자신의 뒤를 이을 군 계승자가 없어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제갈량이 무재(武才)를 직접 양성할 수는 없었는가. 정녕 촉의 용장은 위연이 유일했는가. 제갈량 생전 촉나라가 비록 북벌을 여러 번 강행했음에도 진수의 평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듣고 나라 안의 국고가 튼튼하였다 할지라도... 결국 인재양성에 실패함으로써 제갈량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촉에게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들어 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촉한의 멸망을 제갈량 한 사람의 잘못으로 전가하기에는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이 너무 크다. 하지만 그의 업적으로 그를 비호(庇護)하기에는 또한 책임이 너무 크다. 필자의 편협한 소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촉한은 제갈량에 의해 건국되었고, 제갈량에 의해 무너졌다. 촉한은 제갈량과 함께 살았고, 제갈량과 함께 죽었다. 촉한 멸망의 총체적인 원인을 살펴보았을 때, 인재의 견실하지 못함, 후진 양성의 실패, 국력의 유지 실패, 황제의 권력 약화, 간신들에 의한 국력 피폐 등 모든 것은 제갈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제갈량이 강력히 고수했던 신권주의, 강건하게 유지했던 독재체제, 이것은 비록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거꾸로 위(魏)의 유동적이고 창조적인 관료체계와는 달리 경직된 관료체제를 만들어냈고, 상부의 명령만이 절대적이어서 지도자 한 두 사람이 흔들리면 국정 전반이 흔들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를 제갈량이 아닌 그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겠는가. 혹은 제갈량과 이 책임을 공동분담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촉한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후대까지 생각하여 원대하고 장구적인 전략을 구상하지 못하고 생전의 일에만 급급했던 제갈량에게 있는 것이다.
되게 오래 전에 쓴 글인데(작년에 쓴 글... 쿨럭) ㅋ 삼클에서 임관할 때도 이 글을 5일차 훈련에 써서 파장을 일으켰다죠 ㅋ
근데 이 글을 三國志 카페에 올렸을 때는 역시 우수한 답변 글들이... 와와선생(삼클 모개)님도 아마 반론을 해 주셨던 것으로 아는데...
어쨌든 지금 제가 보기엔 허술하고 허접한 논리의 글이지만 여러분들의 생각을 수렴하고 다시 작성해 보려구요 ^^
많은 리플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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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무적위연 작성시간 04.07.17 압력을 받던 시기에 문화나 교육적으로 힘을 쏟았다거나, 아니면 최소한 갈량이가 5번의북벌을 통해 적어도 중원은 몰라도 관중이라도 장악한 시점에서 문화, 교육에 힘을 쏟았느냐 아니었느냐가 되어야 하는데 두 경우 모두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둘의 비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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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자서 작성시간 04.07.17 역시 이 부분도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것 같군요... 전 제갈량 예찬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티도 아니지만 제갈량이 군략에 부족했다곤 생각지 않습니다. 그 때의 상황(아주 열악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요. 보통 한신과 많이 상황이 같다고 비교하시지만 한신이 관중으로 출진할 때와 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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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자서 작성시간 04.07.17 의 경우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사기를 제대로 깊게 본 분이라면 충분히 알수 있는 부분이지요...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사마의의 용병술은 인정하면서 그 사마의가 "천하의 기재"라고 칭송했던 부분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은 모순이랄까... 뭐~ 이 부분도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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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諸葛武侯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4.07.17 사마의의 용병술이라... 글쎄요. 저는 사마의 또한 용병가라 볼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제갈량과 사마의 두 사람은 병법을 아는 전략가이긴 하지만 한신, 조조와 같은 반열의 군략가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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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諸葛武侯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4.07.17 그리고 한신의 경우와 제갈량의 경우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은 오자서님의 말씀이 맞는 듯 합니다. 이전에 제가 한신과 제갈량을 비교했던 바가 있었는데 사기의 기록을 보고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