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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멸망의 궁극적 원인 - 제갈량

작성자諸葛武侯| 작성시간04.07.15| 조회수1065| 댓글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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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역풍 작성시간04.07.16 실질적으로 보면 공명의 옆에는 그를 도와주는 인재들은 존재했습니다. 촉의 내부를 안정시켜 주던 동윤, 곽유지 등 또 남방의 일을 맡아주던 장의, 그리고 북벌에서는 양의, 위연 등 결코 혼자만이 그 일을 맡은 것이 아니었죠. 그리고 유비때 부터 시작하여 촉의 안을 봐오던 이가 기간이 짧았다는 것은 너무 관대한 것이
  • 작성자 역풍 작성시간04.07.16 아닐까요. 그리고 불리한 부분을 쏙 뺐다고 말한 것은 너무 심한 말이었군요. 인재부분에 관해서 소교님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위는 촉을 치는데 애를 먹기보다는 촉의 공격을 안정적으로 방어만 하며 촉이 자멸하기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이것은 명제나 사마의 등 여러 신료들이
  • 작성자 역풍 작성시간04.07.16 생각했던 것들이구요. 이것을 소교님은 생각하시지 않으시고 다른 의견을 보여주시는 듯 합니다. 그리고 한 인물에 관해서 수 많은 장점으로 그의 단점을 덮어준다. 이것은 저도 예전에 여러 번 생각해 보았던 부분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을 덮어주는 사람들은 없죠. 조조는 서주 대학살이란 잔혹한 일이 그에게 큰
  • 작성자 역풍 작성시간04.07.16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아직도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손권 역시 그의 말년에 후계자 문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진제 사마염 역시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속의 인물들이 그 장점과 단점에 관해서 이야기되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
  • 작성자 역풍 작성시간04.07.16 들의 장점이 많다하여 그 단점들을 가만히 덮어주고 넘기려는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제갈량 역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역사속의 인물에 관해서 감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단점을 덮을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입은 그들의 단점을 오랜 시간동안 회자하며 말하고 있을 뿐이지, 장점으로 덮어주려
  • 작성자 역풍 작성시간04.07.16 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중에 너무 많이 끼어들었나요--;;;; 제갈무후님과 소교님의 토론인데... ㅋㅋㅋ 지금 적은 의견에 말이 앞뒤가 맞긴 한가--;;;;;)
  • 작성자 小喬 작성시간04.07.16 헤에.. 위가 촉을 단숨에 점령시키지 못한 것은 촉의 수비가 굳건했기 때문이라 들었는데, 그것이 아닌가보네요.. 저도 제갈량의 단점이 많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제가 제갈량을 좋아하기 때문에 ^^; 덮어주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드는것 뿐이예요. 역풍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작성자 무적위연 작성시간04.07.17 뭐가 이렇게 긴거지 ㅡㅡ; 간단히 생각해서 촉과 오나라는 지방에 세워진 나라지만 촉나라는 오나라와는 달리 지방에 안주가 아닌 중원진출을 위해 매달렸어요. 촉나라의 건립 목표이자 존재의 이유인걸료. 이런 상황에서 학교 세우는데 돈 쓰느니 군사 양성해서 중원에 빨리 나가는게 더 필요했던거죠.
  • 작성자 무적위연 작성시간04.07.17 하루빨리 중원으로의 진출. 이것은 갈량이뿐만이 아니라 유선을 비롯한 촉한 전체의 숙원이었던 것이죠. 조조야 어차피 중원을 먹었으니 촉과는 달리 학교 세우고 돈 퍼부어가며 별별 화려한 짓을 할 수 있었던거죠. 촉한이 만일 촉에 만족하고 머물 것이었으면 미친듯이 북벌 하는 대신 좀 더 내치를 다졌겠죠.
  • 작성자 무적위연 작성시간04.07.17 흠...하지만 갈량이의 군략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부족하다고 본답니다. ㅋㅋ 안티 갈량이인 저로서는 촉한의 멸망의 궁극적 원인을 갈량이에게서 찾지만 그 이유는 무후님과는 조금은 다르네요 ㅋ 적어도 인재가 없어서 촉한이 망했다고는 보지 않거든요.
  • 작성자 무적위연 작성시간04.07.17 아, 그리고 조조와 갈량이와의 비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건안문학을 일으킨 조조. 그가 진시황의 아방궁에 비견될정도로 업도를 화려하게 꾸미고 문학과 교육에 힘 쓴 시점이 언제인가요? 중원을 통일하고 천하의 패자가 된 이후입니다. 즉, 이 둘이 비교대상이 되려면 조조가 관도대전이전. 다시말해 원소로주부터
  • 작성자 무적위연 작성시간04.07.17 압력을 받던 시기에 문화나 교육적으로 힘을 쏟았다거나, 아니면 최소한 갈량이가 5번의북벌을 통해 적어도 중원은 몰라도 관중이라도 장악한 시점에서 문화, 교육에 힘을 쏟았느냐 아니었느냐가 되어야 하는데 두 경우 모두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둘의 비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 작성자 오자서 작성시간04.07.17 역시 이 부분도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것 같군요... 전 제갈량 예찬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티도 아니지만 제갈량이 군략에 부족했다곤 생각지 않습니다. 그 때의 상황(아주 열악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요. 보통 한신과 많이 상황이 같다고 비교하시지만 한신이 관중으로 출진할 때와 제갈량
  • 작성자 오자서 작성시간04.07.17 의 경우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사기를 제대로 깊게 본 분이라면 충분히 알수 있는 부분이지요...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사마의의 용병술은 인정하면서 그 사마의가 "천하의 기재"라고 칭송했던 부분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은 모순이랄까... 뭐~ 이 부분도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 작성자 諸葛武侯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4.07.17 사마의의 용병술이라... 글쎄요. 저는 사마의 또한 용병가라 볼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제갈량과 사마의 두 사람은 병법을 아는 전략가이긴 하지만 한신, 조조와 같은 반열의 군략가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 작성자 諸葛武侯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4.07.17 그리고 한신의 경우와 제갈량의 경우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은 오자서님의 말씀이 맞는 듯 합니다. 이전에 제가 한신과 제갈량을 비교했던 바가 있었는데 사기의 기록을 보고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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