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고향길에서 돌을 베고 눕다.

작성자시골버스|작성시간09.08.06|조회수349 목록 댓글 4

고향에 왔다.  어머님이 아직 살아계신 곳.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야지.  변하지 말아야 알아보고 찾기 쉽지.

 

한국에 왔다.

아내가 몸이 아파 검진도 받을 겸...

허구헌날 아프다기에 엄살을 부린다고 역정을 내었다.

실은 겁이 난거다. 나쁜병이랄까봐...

어느날 울면서 하소연한다. 이러다가 죽을거 같다고...

정말 아내는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정말 나쁜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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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만났다. 

동창이나 동기들이야 많겠지만, 보고싶은 친구는 단 하나다.

워낙 내성적이고 사람만나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친구가 없다.

 

친구와 술을 마셨다.

그친구 소주를 좋아하니 나도 따라 소주를 마신다.

 

친구가 묻는다.

"뭐하냐?"

"먹고놀아."

"너는 맨날 먹고 논다더라??"

"별로 내세울게 없으니까."

"세월좋네.  중국에서 먹고논다니."

"그런가?"

"그렇지.  나도 곧 며느리 볼텐데..."

"........."

"........."

"근데, 뭔 문제가 있냐?"

"문제? 문제랄게 뭐 있냐?  아들놈이 장가보내달래."

"하하하!"

"왜 웃는데?"

"아냐~ 벌써 그렇게 됐나?"

"야~ 시골버쓰야~ 네가 장가를 늦게 간거야, 알아?

우리 친구중에 손자본 애들도 많아."

"그랬구나."

" 사는게 다 그런거지, 모."

 

"그런데 어떻게 됐어?"

"모?"

"동생. 아파서 집에 와있던 동생."

"갔어..."

"응? ?"

"죽었다고..."

"..............."

".............."

"언제?'

"꽤됐어. 술이 원수지 뭐."

 

고향에 있는 단 한명의 친구.

나에게 남아있는 2명의 중학교 친구중의 한명.

너는 나에게 등돌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거라고

아마, 니 부인은 너와 헤어져도 나는 그렇지 않을거라도

다짐하던 친구.

 

그친구에게 바로밑 동생이 있었다.

어려서 부터 음악을 좋아해 중고등학교 때 밴드부를 했고

군대에서 군악대에 있었고 군대제대하자마자 밤무대에서

연주했다.

 

피아노니, 바이올린이니 뭐, 그런 고상한 쪽(?) 보다는 

남들 알아주지 않는 트럼펫, 전자기타, 드럼, 등을 좋아했고

음대를 나오지 않았기에 밤무대가 음악활동하기 좋은 곳이라며

게다가 말술에 절어살던...

 

술, 음악, 그리고 여자...

그래도 순진했던지 군대갔다오고 바로 결혼해서 아이둘을 낳고

그런대로 재미있게 살았는데 어느날 중풍을 맞았다.

그집안 형제들이 본래 술에 절어살던 차라... 

 

20대 후반에 중풍을 맞아 몸을 못쓰더니

같이 살던 아내를 위해 스스로 이혼을 하고

시골로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어머니와 살았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친구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갔더니

그꼴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30초반이었는데...

 

친동생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동생이었고

어려서 자주 싸우고 틀어지고 맨몸으로 개울에 뛰어들고

진흙탕에 뒹굴고...

 

그동생이 죽었댄다.

오래 살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동영상처럼 스쳐지나가는 어린시절의 아름다운 동행(動行)

 

동생은 그렇게 갔다.

 

동생의 죽음을 애써 지우려는 친구를 달래며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한병이나 비운 것 같다.

 

"동생 애들은?"

"내가 키워야지, 뭐"

"애들엄마는 모른대?"

"다른남자한테 시집간 여자한테 뭘 연락해.

좋은남자 만나 행복하게 살면되지.

나중에 조카들이 크면 엄마얼굴이나 보게하지 뭐."

 

흐르는 눈물을 주체못하겠고 그간 죽어간 동무들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2년도 안된 사이에 11명의 동무들이 죽었다.

우리 대선배들 중에도 한 기수에 그렇게 많이 죽지 않았던데...

한국전쟁때 학도병으로 출전한 1,2회선배들은 거의 전멸했다.

그후로 내 고등학교 동기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왜 죽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다들 객사를 했으니 머...

 

죽음이 폭풍우를 몰고오는 검은 먹구름마냥

흉칙한 인상을 쓰며 하늘을 덮는다.

비가 쏟아진다.  태풍이란다.

우산도 싫고 어디 처박혀 있기도 싫어

내리를 비를 그냥 맞으며 걸었다.

 

'고향이 그렇지 뭐...

내가 뭘 바라고 온 것도 아닌데..."

"사는 게 언제는 재밌었냐?

이런 난장을 치다가 가는데 삶인걸 어쩌라고..."

 

신발마닥이 닳아서 그런걸까?

큰크리트로 덮힌 비탈길을 내려오다 미끄러졌다.

이왕 미끄러진 김에 누워버렸다.

일어나 다시 걸어도 또 미끄러질텐데...

얼굴로 쏟어지는 장맛비가 감미롭고 달콤하다.

돌을 주워 베개삼아 머리밑에 괴었다..

 

내머리도 돌이어서 2층석탑이 되었다.

돌을 하나 더 이마에 얹으면 3층석탑이 되겠구나.

거기다가 소형후레쉬를 밝히면 3층석탑등대가 되는거고...

우헤헤헤...

그렇게 웃어본다.  바보스럽다.

 

눈을 감아본다.

 

그랬던가?

보릿고개로 풀이파리 뜯어먹던 어릴 때 여름 어느날.

쏟아지는 비를 먹겠다며 눈감고 입벌린채 비를 받아마시던...

그때처럼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맛이 다르다.  그때는 배가고파서 그랬을까? 달콤하더니...

 

비를 맞으며 아이스케키장사하던 기억도 있다.

우산도 없이 우비도 없이 갑자기 쏟아진 비를 맞으며

아이스케키를 팔다가 도무지 안되겠기에

비를 피한다며 들어간 중국식당.

배도 고프고 짜장면냄새는 내 위장을 뒤집어 놓고...

 

아이스케키 판돈으로 짜장면을 사먹었다.

그것도 두 그릇이나...한 그릇에 5원

그때 아이스케키 하나에 1원 50전이었고

소주병,맥주병을 받았는데 소주병은 1원 맥주병은 1원50전.

펩시콜라병도 받았다.

 

그런데 중국집에서는 돈대신 병을 받나, 뭐??

짜장면 두그릇먹고 아이스케키판돈 10원을 내었다.

아이스케키상점 주인에게 이야기를 했다.

배고파서 짜장면 사먹느라고 돈썼다고...

"그래? 그럼 외상으로 달아놓을께.

내일 열심히 벌어서 갚어."

고마운 분이었다.

그때는 가난했지만, 고마운 분들이 참 많았다.

그분들이 계셨으니 나도 여태까지 살아온 것같다.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갚아야 할 나이인데

그러나 능력이 없어서 여전히 고마움을 주지못한다.

 

그냥 비를 맞은 채 잠들고 싶었다.

예전에 살던 초가집에서 지난 해에 새지붕을 하지 않으면

썩은 초가지붕으로 빗물이 새고

그대로 방안가득 한강을 이루던 그때도 겪었는데

이까짖게 대수랴???

 

이리살아도 저리살아도,

한국에서의 삶이나 중국에서의 삶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난, 도대체 고향에 왜 온거냐?

그리고 중국은 또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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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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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건방진프로필 | 작성시간 09.08.07 " 너는 나에게 등돌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거라고...아마, 니 부인은 너와 헤어져도 나는 그렇지 않을거라고 다짐하던 친구." 캬~ 멋지네요~
  • 작성자bruce | 작성시간 09.08.07 아련한 시절의 이야기 잠시, 뒤돌아보니 눈가에 이슬이 고이는듯 하네요....이토록 아름다운 감성을 가진 시골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실까......??
  • 작성자amigo | 작성시간 09.08.12 참 잘읽었습니다. 아니 참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 작성자bywin | 작성시간 09.09.04 미련없이 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체면과 허례와 한방을 기다리는 수많은 백수족 들이 중국서 결국은, 사기꾼으로 변모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한국에 가면 그래도 밥은 안굶습니다. 가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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