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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조선의 인구동향..(펌)

작성자Daum Bark|작성시간07.02.15|조회수1,043 목록 댓글 44
조선 초기 500만 명을 넘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인구는 조선 중기 현종(顯宗) 때인 1669년에 겨우 500만을 넘었다. 그러나 돌림병과 역질이 돌 때마다 인구가 크게 줄어 30년 전의 인구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영조(英祖) 중반기에 인구 700만을 돌파한 조선의 인구는 순조(純祖) 17년(1817)에서야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조선 초기인 태종(太宗) 4년(1404) 4월 25일 호조(戶曹)에서 각 도의 전답과 호구 수를 보고한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 시절에 충청도는 1만 9,561호에 인구는 4만 4,476명, 전라도는 1만 5,703호에 인구가 3만 9,151명, 경상도는 4만 8,992호에 인구는 9만8,915명, 풍해도(황해도)는 1만 4,170호에 인구는 2만 9,441명, 강원도는 1만 5,879호에 인구가 2만 9,238명, 동북면은 1만 1,311호에 인구가 2만 8,693명, 서북면은 2만 7,788호에 인구가 5만 2,872명으로 조사됐다.

연산군 9년(1503) 2월 9일에는 한성부에서 "정월부터 2월 5일까지 도성(서울) 안팎의 출생자는 120명, 사망 470명이라는 보고 자료가 발견됐다.
중종14년(1519)에는 가구수 754,146호 인구 3,745,481명으로 조사되었다.

인조 17년(1639)에는 44만 1,827호에 152만 1,165명과 효종 5년(1654) 가구수 62만 8,603호 인구 204만 7,261명으로 이는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영향 때문이다.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현종개수실록 10년(1669) 12월 29일의 기록에 의하면 한양과 지방의 호수는 134만 2,074호이고, 인구는 516만 4,524명으로 집계되었다.

현종 13년(1672) 10월 30일 실록에 의하면 호수는 117만 6,917호이고 인구는 469만 5,611명. 이 중 남자가 254만 1,552명, 여자가 215만 4,059명이었다. 3년 전에 비해 인구는 무려 46만 8,913명, 호수는 16만 5,157호나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신해년(1671)의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조선시대에 전염병이 어느 정도로 맹위를 떨쳤기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다'는 표현을 썼을까. 조선시대에는 종기도 목숨을 거두어가는 시절이었으니, 전염병이라면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숙종(肅宗) 44년(1718) 1월 15일 충청도 각 고을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을 앓는 자가 2,140명, 사망자 642명, 함경도 각 고을에 염병(장티푸스)을 앓는 자가 4,570명, 사망자 1,243명. 숙종 45년(1719) 1월 2일 충청도에서 각 고을마다 염병을 앓는 자가 1,643명, 사망 240명(온 집안이 몰사한 경우가 4호). 평안도에서 염병을 앓는 자가 8,348명, 사망 1,380명이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당시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피해가 더욱 컸음을 알 수 있다.

1821년(순조 21)에서 1822년 사이에 유행했던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평양에 수만 명, 서울에 13만 명으로 전국으로 따지면 수십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정조(正祖)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823년에 전염병이 돌았던 적이 있다. 이해 전국의 사망자는 모두 12만 8천여 명이었다('정조실록' 23년 1월 13일).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천연두·장티푸스·콜레라는 3대 전염병으로 이 세 전염병은 번갈아 등장하여 대학살을 자행했다.

1859년(철종 10)에서 1860년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의 사망자는 40만 명이었다. 서양 중세의 흑사병(페스트)만 무서웠던 것이 아니다. 특히 정조 23년 유행한 전염병에는 정치인들의 죽음이 눈에 띈다. 1월 7일에 김종수(金鍾秀-좌의정)가, 18일에 채제공(蔡濟恭-영의정)과 서호수(徐浩修-판서)가 죽었다. 김종수는 노론의 영수,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였고 서호수는 이 시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소론 서명응(徐命膺)의 아들이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각 당파의 거두들이 죽고, 그로부터 7개월 뒤에는 정조가 종기 때문에 죽었다.
당쟁의 지도가 일순 바뀐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질병에 의해 역사가 바뀐 것이다. 어쨌거나 전염병은 조선 후기 민간인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처럼 돌림병이 시도 때도 없이 돌았으니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숙종 1년(1675) 10월 27일 실록에 의하면 '서울과 8도를 합하여 호수가 123만 4,512호이고 인구가 470만 355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42년 후인 숙종 43년(1717) 11월 14일 실록에 의하면 전국의 호수 총계는 155만 7,709호, 인구는 683만 9,771명으로 나타나 있다. 온갖 전염병과 기근, 괴질과 역질이 차례로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42년 만에 호수는 32만여 호, 인구는 213만여 명이 늘었다.

영조 8년(1732)에는 가구수 171만 3,849호에 인구 7,273,446명이었고, 영조 23년(1747) 12월 28일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서울의 호수는 3만 4153호, 인구는 18만 2,584명이며 8도의 호수는 172만 5,538호, 인구는 734만 318명(남 353만 9,107명, 여 380만 1,211명)이었다. 이때 비로소 인구가 700만을 넘게 된다.

그러나 정조 1년(1777) 실록을 보면 호수가 117만 5,371호, 인구는 723만 8,523명으로 오히려 영조 시절보다 호수는 55만, 인구는 11만 명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각종 전염병이나 기근으로 인한 떼죽음의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정조 시절에도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계속했는데, 이때도 질병과 기근이 반복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순조 17년(1817) 12월 29일엔 전국의 호수가 163만 718호, 인구가 790만 3,167명으로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된다. 그러나 순조 28년(1828) 섣달 그믐날 기준 인구조사가 있었는데 가구 152만 7,608호 인구664만 4,408명(남:332만 5,221명. 여:331만 9,261명)으로 다시 가구와 인구가 줄었다.

이는 순조시대에 전국에 걸쳐 대형 화재와 홍수 그리고 전염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10년 가구수 280만 4,103호 인구 1천 331만 3,017명으로 조사되어 1천만 시대에 접어들었다.

조선시대의 인구를 전공한 학자들 의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통계는 실록의 기사를 그대로 신봉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오늘과 같이 정교한 인구센서스를 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과세대상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16~ 60세까지의 장정만 계산되고 노인과 어린이, 노비와 여자들이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과세대상에서 빠지기 위해 고의로 누락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인구통계는 '공인기록'이라기보다는 '참고자료'의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아래는 논문중의 일부발췌입니다..

<조선시대의 인구 변동과 경제사>
Ⅰ. 서론

Ⅱ. 자료와 방법론

Ⅲ. 조선시대의 인구 증가

Ⅳ. 농업의 변화와 인구의 성장

Ⅴ. 한국사에서 인구통계학적(人口統計學的) 해석이 갖는 의미

Ⅵ. 결론


조선시대의 인구사를 연구하다 보면 인구 통계학적 측면에서 볼 때 현존하는 자료들이 매우 불확실하다는 사실에 부딪힌다. 그래서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보다는 인구변화의 추이를 밝히는데 있다. 인구와 사회?경제는 서로 상호 작용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인구 이동의 방향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이든 증가 또는 감소한 것이든 간에 특정시기의 정확한 인구 통계수치보다 중요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호구총수를 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3년에 한번씩 작성된 인구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호(戶)를 단위로 작성되었으며, 모든 가구원을 호적단자(戶籍單子)에 기록했다. 호적단자의 사본은 호주(戶主)가 보관했으며, 각 군(郡)의 호적색리(戶籍色吏)에게 확인을 받았다. 이에 의거하여 호적색리는 각 호구를 호적대장(戶籍臺帳)에 기록했으며 작성된 호적대장 가운데 한 부는 군으로 한 부는 한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호적 제도는 인구 통계의 자료를 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세(科稅)의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수천 부의 호적대장이 서울로 보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것은 매우 적다. 1850년 이전의 호적대장은 단지 244책만이 규장각도서목록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약간의 호적대장과 호적단자가 당시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주요 문서 외에서 발견되었지만, 그 수가 늘어날 것 같지는 안다. 발견된 호적대장 가운데 단지 2책만이 경상도 지방 이외의 것이다.

전국의 호구 총수는 1639년부터 계속 작성된 호적에서 추론된다. 지방별 호구총수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으며, 1789년에 작성된 『호구총수』는 촌락을 단위로 호구를 기록하고 있다. 1637년 이전의 호구 총수는 단지 몇 년간의 기록만이 실록에 있을 뿐이다. 이 『실록』과 『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는 총계수치는 1637년 이전의 기록들은 때때로 오차가 많이 난다.

병력은 인구수에 비례합니다... ^^

아래글도 옮긴 겁니다.. 잘 이해하는 듯한 내용으로 보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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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군대에 대해서 조금 더 보면...

조선의 군포軍布제도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그 윤곽이 잡히는데요...

아시다시피 군포란 군역면제를 위해서 내는 일종의 세금입니다...

보고서에도 나와있지만 농병일치제와 상비군과는 개념자체가 아예 다릅니다...

농병일치제 때는 군역을 진 병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에 이득입니다...

왜냐면 그숫자만큼 군포가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상비군제도에서는 군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국가에 손해입니다(경제적측면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상비군'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이해해야합니다....

지금이야 상비군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 '군대'하면 당연히 '상비군'常備軍-항상 갖춰진 군대-

를 떠올리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상비군은 당연한게 아니었습니다....

상비군이란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즉 군인업무만 하면 먹고살 걱정없는 급료가 나온다는 것이지요...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다함은 군대활동 이외에 그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상인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벌고 농부는 농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처럼 군인은 군사일을 하면서 돈을 법니다

그 군인월급은 누가 주느냐....바로 '국가'가 줍니다...

즉 상비군이란 국가가 대놓고 돈을 꼬라박지 않으면 키울래야 키울수가 없는 조직입니다...

생산성은 제로인데 소비만 하는 집단이지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말입니다...그렇다고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간단하게 군인들 먹여야죠 입혀야죠 재워야죠 무기들려줘야죠 훈련시켜야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돈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60만 상비군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의 숫자를 먹여살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 경제력이 없다면 60만이나 되는 인원을 먹여살릴 가망이 없죠....

즉 '국가'가 있다고 무작정 '군대' 그것도 '상비군'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인구가 대략 천만정도로 추정되는데....그중 10만 병사를 '상비군'으로 키우자...

그것도 이전에 이미 있던 군대에 10만을 더 키우자는 것이죠...

과연 조선경제가 어떻게 될까요...더군다다 당시는 여자는 거의 노동력이 되지 않던 농경사회인데...

이것을 중세로 환원시켰을때 이런 상비군을 갖출 능력이 되는 국가는 몇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비군을 최초로 갖춘 나라가 프랑스인데...덕분에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이자 절대왕정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끝내 상비군을 가지지 못했던 영국에서는 왕권이 크게 제한되었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옵시다....

조선은 구한말 신식군대를 키우기까지 계속 농병일치제였고...

상비군은 제 보고서에도 나와있지만 몇몇 장교들 뿐입니다...

실병력인 사병은 그냥 농부이지요....또 그 사병들이 실제 '병사'가 아닙니다...

단지 '군역'에 올라있을 뿐이지요....오늘날 입대대상자가 모두 군인이 아니듯이....

군역을 15만이나 잡은 것은 그 15만이 모두 군포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5만이 진짜 상비군이었다면 조선의 재정은 애저녁에 거덜났겠죠....

또 이 군역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백골징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계속 군역에 남아있거나 군역대상이 아닌 어린아이, 여자 들도 올라와있고

이웃이 도망가면 그 이웃에 징수되는 등...행정체계가 그렇게 꽉짜여진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즉 군역이라는 것은 세금징수의 수단일뿐 군사력이나 국방력문제와는 사실 그닥 연관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군포가 부담이된 농민들이 오히려 그냥 군역을 지겠소...(군대 갈게)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자 국가가 그것을 막습니다-_- 니들 먹이고 재우고 훈련시킬 장소 마련할 수 없다면서

군에 자원입대(?)하겠다는 농민들을 뜯어말리고 억지로 군포를 내게 합니다....이것이 조선의 군역입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나타나는데...

임란때 선조의 명을 받은 신립이 받은 군대는 실병력이 아닙니다....

선조가 무슨 식권마냥 쪽지하나를 달랑 줍니다...

'충청도 병사 XX명을 징병할 수 있는 권리증서'를 말이지요...

그 식권을 들고 털레털레 충청도로 내려갔더니...'우린 군포냈는데요?'라며 뻗대거나

이미 도망간 사람이 태반이었죠...그래서 억지로 잡아다가 창들리고 군복입힌 것이

당시 신립의 조선군입니다...그런 훈련안된 부대다 보니 신립이 병사들 도망가지 말라고 배수진을 친 것도

어느정도는 이해는 됩니다....(그래도 문경새재를 버리다니...-_-)

이런 시스템이기 때문에 거칠고 수렵을 잘하던 북쪽사람들, 특히 함경도 출신 병사들을

조선의 정예라고 하는겁니다...지금이야 각도어디서 모이던 훈련을 받으니까 상관없지만

당시엔 그런 훈련을 받지 못하고 가니까 남쪽 농부들보다는 드센 북쪽 포수와 나무꾼들이 주력이 될 수 밖에 없죠...

이것은 세조때 함경도 이시애의 난때 조선군에게 공포로 다가옵니다...

그 무시무시한 함경도 병사를 상대로 남쪽 병사로 막으라니까...-_-

뭐 이시애에게는 재수없게도 당시 하필이면 강순, 남이라는 명장이 관군에 속해있었다는 것이 불운이지만....

어쨌거나 이런 조선군의 상황은 그래서 진법陣法에 그렇게 목메게 만듭니다...

강한 함경도 무사를 중심으로 활은 조선인이라면 모두 기본이니...

강인한 함경도 병사를 돌격하는 갑사로 세우고 그걸 방어할 방패병 하나 엄호할 사수하나 식으로

3인 일조로 진법을 세우고 그 진법의 운용과 발전에 조선군은 대단한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것도 이런 농병일치제라는 상황때문이지요...그래서 조선군은 평지에서의 돌격이나 공격은 약한 반면

산지나 성을 끼고 하는 방어전에는 다른나라들도 인정할 정도로 대단한 효율성을 보여줍니다...

이런 각나라 군대의 특성도 농병일치제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지요...

여담으로 그래서 평지에서의 돌격과 공격이 장기인 여진과 만났을때 둘의 작전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조선군은 어떻게든 산이나 요새에서 농성하려고 하고 여진은 어떻게든 평지로 끌어내려고 하고...

참고로 '기마민족'이라는 것은...등자가 발명되기 이전 말을 타고 활과 칼을 쓰는 것은 '특수기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마병의 특수 산지(?)인 민족을 기마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등자가 발명된 이후에는 딱히 그 의미가 없어집니다...뭐...그래도 어느정도 차이는 있어서...

기마술은 다른나라보다 특출난 조선군의 장기이기는 했지만...아쉽게도 조선의 주적인 여진도 기마가 장기라...

그럼 조선의 상비군인 장교들은 어떨까요...그들은 제대로 녹을 받았을까요?

그들또한 월급이 밀리기 일쑤였고....결국 기방이나 뒷골목 양아치(왈패라고 합니다)세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들을 '별감'이라고 해서 일종의 뒷골목의 실세로 군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국가 의장활동이 있으면 호출되곤 했지요
(정조나 영조 행차를 그려논 기록화에 보면 노란 초립에 빨간 옷입은 사람들 보이시죠? 그들이 별감입니다..)

사실 조선의 무관이란 의장대와 경찰 정도의 성격이 강합니다...간간히 반란 진압할때

일종의 특수병과로 돌격병이 되기도 하고...

이것이 조선의 군대입니다...즉 군역이 15만이라고 '조선이 15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군역을 잡은 것은 사실상 당시 존재하는 모든 남성 장정들의 수라고 해석해도 될거고요...

그 이유는 세금이었죠...

참고로 임란, 정유재란 합쳐 총 투입된 조선군의 수는 대략 9만명 정도입니다....

총력전을 펼친 시기에도 동원력이 9만이었는데...10만을 상비해놓자...

물론 10만을 동원할 능력은 될겁니다...하지만 그것을 유지하자는 것은 얘기가 다르죠...

그것에 대해서는 서인인 성호 이익이나 서포 김만중 조차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보고서에 넣었는지는 모르겠는데....찾아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또 조선은 임란 호란 등의 국가가 총동원된 방어전을 빼고 역사상 통틀어

대략 원정군은 1만...많아야 2만이 넘지 않는 숫자 밖에 동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조선의 군사력이죠..

즉, 그 당시의 군대와 국제상황을 모르고 현재상황에 비추어서

조선은 군사력이 약하니까 약한나라다....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른 다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조선 군역을 실제로 믿고 전체 조선군이 15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요...

또 경국대전에 씌여진 법제를 따르는 것도 무리고요...

군포나 군역의 의미, 상비군, 농병일치제, 조선의 실제 군사행정 등...그런 면을 감안하시고 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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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Daum Bark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5.14 수군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외로 하죠.
  • 작성자전상용 | 작성시간 07.02.20 그리고 저도 대한민국 60만군대가 죄다 전투병이 아니라는 것인 알고 있습니다 기본중의 기본이니까 ㅡ.ㅡ;;;그래서 저 172400명중 비전투 관련 병과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고요 하지만 군마라고 써 있는 것과 다른 기록을 보면 저 병력도 전원 동원한 것도 아니고 비전투병력이 죄다 기록되 있지 않은 것은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충무공 장계 이야기를 꺼내는 거구요 그리고 현대 방식으로 인구대비 군사수 얼마 모을수 있다는 것이 과거에도 통할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때 당시는 지금과 동원 방식도 다르니까 그리고 비전투 병력중에 가끔가다 여자들도 나옵니다
  • 답댓글 작성자Daum Bark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5.09 말이라는 것이 100필이면 병력이 100이 아닙니다... 예비군마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말이라는 동물이 의외로 섬세해서 너무 지치게 하면 탈진해서 죽게됩니다. 그래서 수시로 말의 피로도를 봐가면서 말을 바꿔줘야 합니다. 보통 1인 기마당 2~3필 정도 필요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기마당 보인이 몇씩 붙는데 이게 또 죄다 전투병이냐..아닙니다. 물론 불리해지면 창과 칼을 들겠죠? 허나 기본적인 일은 기병의 보조입니다. 이외에 별개의 보병들이 있었고요. 따라서 10만 기병군단이라는 말은 어패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료를 원사료를 보고 제꼴리는대로 해석 내놓는 사람이 하나둘인가요??^^
  • 작성자Daum Bark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5.09 따라서 원문도 보아야 하지만, 관련 논문으로 상당히 다양한 의견을 보고 자신이 직접 찾지 못하는 부분도 보아야 논문이 되는 겁니다. 논문을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이라고 여기나요??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한문이라는 것은 상당히 해석하기에 따라서 말 바꾸기가 쉬운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문장도 주석이 여러개가 나오곤 하죠. 더구나 고대나 중세의 사료를 지금의 데이타 보듯이 보면 안됩니다. "비류직하 수천척"이라고 하여 가보니 쫄쫄 샘물이 흘러내리는 폭포를 묘사한 구절도 많습니다. 뭐 삼국지에서 적벽에 조조가 80만 대군을 모았다는 것이 자치통감에도 있는데, 이를 믿을 사람 있나요?? 그러니 논문을 봐야 합니다....
  • 작성자앨런비 | 작성시간 07.09.27 왜 리플이 2~3달뒤에 달려있는지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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