雙魚文!
가락국 최초의 王이자 아유타국에서 시집온 허황옥공주를 왕비로 맞 이한 김수로왕의 무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분명히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 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림이 허황옥왕비의 고향인 인도 아요디아 사원마다 그려져 있는 것 은 무엇 때문일까,
쌍어문은 필시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시집온 인도공주가 한국땅에 소 개한 신앙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쌍어문은 그래서 인도와 한국을 연결하는 끈이고, 한국에 자리잡은 인도 신앙의 증거이다. 장유화상이 허황옥 공주의 오라버니라면 아유타국의 왕자 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유화상의 가락국 도착은 인도신앙 내지는 인도종교가 한국 에 도착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 설화가 바로 증거가 된다니 그거 무척 편하군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고려해보셨는지요. 물고기 문양들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전 인류 공통적으로 다산과(多産)과 성(性)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고, 이집트에서는 이시스의 음부(陰部)를 상징하기도 했다지요. 기독교신앙이 들어서기 오래 전 부터 '위대한 어머니'의 상징이었고 말이죠.
예컨데,
<어머.. 쌍어문이얌!! Stele Licinia Amias Terme : 출처, "Ichthys" 항목, Wikipedia>
이런 것은 어떠십니까? "ΙΧΘΥC ΖΩΝΤΩΝ" - '생명의 물고기' 쌍어문양입니다.
가락국에서 기독교도가 들어왔다고는 왜 가정을 안하시지요? 김수로의 즉위는 CE 원년 이후의 일이고, 허황옥의 도착도 족히 CE 40년 이후의 일은 될테니까, 예수 사후에 기독교도들의 일부가 떠돌다가 가락국에 도착했을 수도 있지요. 인도에서 신라까지 교류가 있었다면, 로마에서 인도까지의 교류도 있었으니.. 바로 증거삼아 고대 한반도의 기독교의 흔적으로 삼으면 되겠네용.
아니면 157년 재위했다는 수로왕의 이야기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되나욤? 소호금천씨가 신라왕실의 시조라는 설화나, 왕건의 당숙종의 계보라는 설화는 그 자체만으로 사실이 되면 안될까요?
쌍어문을 어느 신앙의 상징으로 삼기 시작한 사람들은 지금부터 2,800여년 전 '바빌로니아인'들이다. 그들은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생각 하였고, 신전 앞에다 대문을 세울 때 대문 머리에다 쌍어를 그렸다. 그런 생각이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유목민족 '스키타이인'에게 퍼져 결국은 인도에 까지 스며들어 힌두교의 여러 신상(神像) 중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신앙은 자연스럽게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 의 동방전파와 함께 북으로는 네팔→티ꕛ→몽고로 퍼졌고, 동으로는 남중국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황해를 건너서 한국 땅에 도착하였다.
- 이것도 결국 가정이지요.
따라서 인도출신 허황옥 공주가 한국땅 가락국에 와서 김수로왕과 결 혼하여 왕비가 되면서 쌍어 신앙이 한국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 쌍어신앙은 지금까지 한국 땅에 남아있다. 지금도 옛날 가락국(후에 伽倻)의 옛땅이었던 경상남도에 여러 불교사원에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있고, 새로 창건한 김해의 동림사, 김해 장유종선원에 새로운 쌍어문이 등장하였다. 쌍어신앙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선비들이 사용하던 묵(墨)에도 그 려지고, 여인네들의 노리개에도 달리게 되었다.
이천년 전에 한 여인의 국제결혼의 결과는 이렇게 지금까지도 우리 문화속에 살아 숨쉬는 현실을 보여준다.
- 불교상징에 있어서 물고기가 왜 자주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설명이 있습니다. 인도신앙과의 연관성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고, 한반도에서 불교의 토착화 이전에도 이미 물고기는 민간신앙에서 중요하게 다뤄오던 모티프였고, 그러한 민간신앙의 상징들을 불교신앙이 흡수하면서 각 지역마다 특색있게 발전해나간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허황옥의 설화가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허황옥이 한반도에 오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불교에서는 쌍어문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_-a 그럴리가 있겠심까?
아유타국은 어느 곳에 있는 나라였을까?
현재 지구상에 아유타라고 불리는 땅은 두군데 있다. 하나는 인도 갠 지즈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Ayodhia)이고, 또하나는 태국 방콕 근처의 아유티야(Ayuthia) 이다. 그런데 태국의 아유티아는 서기 13세기때 생겨난 도시이므로 허황옥이 살았던 서기 1 세기부터 2세기 사이에는 지구상에 없었던 곳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허황옥의 고향인 아유타는 인도의 아요디아일 수밖에 없다.
- 더 간단한 설명이 있죠. 애초에 설화니까 적당히 뻥을 쳤다고 말이죠. -_-a 오캄의 법칙을 기억하십니까?
인도의 아요디아는 서기전 6세기때 융성했던 도시국가인 코살 (Kosala)국의 수도였다. 인도의 전통종교인 힌두교를 부흥시킨 라마王의 탄생지가 바로 아 요디아이기 때문에 더욱 유명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아요디아는 불교의 교조인 싯다르타왕 자가 출가(出家)하여 처음 공부를 시작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필자가 1985년 처음으로 아요디아를 방문했을 때 도시의 인상은 수천 명의 힌두교도들의 인도 전역에서 참배를 와서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이었다. 뿐만아니 라 아요디아에는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사라유 강에는 멀리서 온 참배객들이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있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간 필자의 눈을 놀라게 한 것은 시내의 사원마다 대문 정면 에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마주보는 물고기 두 마리 는 김해 수로왕릉(首露王陵) 정문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雙魚文)과 똑같은 모양이었다여기에 보태자며 언어상으로 이지역 아요디아지역에 한국말과 유사한언어가 전해져내려오고 있고 몇명단어 특히 엉덩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한국어랑 똑같이 쓰이고 있고 한국어를 하신분이라며 이이야기를 어디서가 한번은 지나가며서 듣게 됩니다.
- 결정적으로, 위에 하신 모든 얘기가 결국, <허황옥 루트>에서 김병모 교수가 한 얘기라든지, 문화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한데, <허황옥 루트>의 내용을 현재 학계가 인정하고 있냐?
전혀 아니거든요. 흥미있는 가설들로 치부할 뿐이지, 역사적 정설로 인정받기에는 치명적인 문제들이 넘 많아요.
예컨데, 그러한 비판 중 하나인 조원영 선생의 글을 하나 인용해보죠.
... (전략)...
물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가락국의 불교 관련 기록이 보이지만 수로왕 당시의 상황을 보면 가야는 삼국의 일반적인 불교 수용의 경우처럼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나 강력한 왕권이 형성된 시기가 아니었다. 즉 기록대로라면 기원 1세기 중반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는 가야가 이제 막 국가를 형성하던 단계였으므로 불교를 수용할 만큼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수로왕 당시 허왕후가 가야에 오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점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현재 가야제국 가운데는 김해 가락국과 고령 가라국에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단편적이나마 전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자료를 분석하면 가야에 불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야 초기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 전래의 시기와 초기 불교의 성격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쟁점이 될 수 있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대체로 가야(伽倻·伽耶·加耶)라는 국명에서부터 불교와의 연관을 찾기도 하고, 문헌 및 고고학적 증거를 통하여 수로왕과 허왕후를 불교와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김해지역의 재야사학자 허명철씨는 ‘가야’라는 국명은 불교와 더불어 수입된 단어라고 주장하였다. 즉 본래 김해지역의 가야시대 국명은 가락국(駕洛國)이며, 가야는 문화적 측면의 국명이라는 것이다. 한자의 뜻으로 ‘가(伽)’는 ‘절(temple)’이며, ‘야(倻)’는 범어의 ‘Gayah’를 음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조어(造語)인데, 이때 가야의 뜻은 인도어로 ‘코끼리’이다. 이 점은 가야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주장했던 정수일교수(이전에 무함마드 깐수란 이름으로 활동)도 동의하였다.
김병모 교수는 가야라는 국명을 고대 인도어와 연관시켰다. 가락과 가야라는 말은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다어이고 그 뜻은 모두 ‘물고기’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락국·가야국은 모두 신어국(神魚國)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김해의 신어문(神魚紋)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영태 교수는 『법화경(法華經)』, 『대승가야산정경(大乘伽耶山頂經)』,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등의 불교경전에서 나오는 지명과의 연관성으로 보아 가야라는 국명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그는 가야는 불교 전래 이후에 쓰여졌던 이름이며 가락은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국호였다고 주장하였다. 국호가 이처럼 불교적으로 바뀐 시기는 질지왕(銍知王) 2년(452) 쯤으로 추정하였다.
... (중략) ...
이러한 주장들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지니고 있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가야라는 국명과 불교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경우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는 허왕후의 출신과 가야지역으로의 도래 과정과 관계되는 내용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믿은 점이 문제이다.
허왕후 이야기는 지나치게 불교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전해오는 대다수의 역사자료와 마찬가지로 「가락국기」가 전해주는 역사적 사실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많은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하여 허왕후 당시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를 지닌 채 『삼국유사』에 수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락국기」는 가야의 국가 이름과 불교와의 연관성에 대한 증거자료로서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가야의 국명과 불교경전을 연관짓는 견해 또한 문제가 있다. 증거가 되는 경전들이 모두 한문경전이라는 점이다. 만약 한문경전에서 그 국명을 따왔다면 가야 불교가 인도에서 바로 건너왔다는 것과 모순된다. 또 관련된 불교경전이 한역된 시기가 「가락국기」에 나오는 불교 전래 연대보다 훨씬 후대라는 사실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법화경』의 경우 406년에 한역되었다.
... (중략) ...
이 기록을 가야불교와 연관지어 보는 견해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수로왕 당시의 가야 상황을 그대로 기록한 설화라는 주장이다. 즉 수로왕의 주술이 통하지 않아 부처님께 청했다는 것은 가락국 시대에 불교가 이미 전래되어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둘째, 만어산의 설화가 가야와 불교의 인연을 강조하는 설화라는 견해이다. 대체로 허왕후가 가야에 입국한 후 불교가 남쪽에서부터 밀양으로 전파된 후에 윤색되었다고 보거나, 후대에 가야에 불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설화라는 견해이다.
이 설화에서는 수로왕의 건국설화가 불교설화에 밀려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가락국의 수로왕이 어쩔 도리가 없어 고민하던 일을 부처가 해결해 주었다고 해서 부처의 우위를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불경에 수록된 설화를 받아 들여 등장인물과 장소를 국내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수로왕 당시의 역사적 사실로 보기가 어렵다.
... (중략) ...
또 현재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불교관계 유물로는 장유암의 장유화상 사리탑·안곡리 삼층석탑 등의 불탑, 김해 구산동 마애불·불암동 마애불·초선대 마애불·진영 봉화산 마애불·장유 유하리 마애불 등의 불상이 있는데 이들은 가야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 모두 고려시대 이후의 유물이다.
... (중략) ...
만약 장유화상이 가야에 불교를 들여올 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면 『삼국유사』 「가락국기」나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야 할 것인데 전혀 언급이 없다. 특히 「가락국기」에서는 허왕후의 추종 신하들의 이름과 그 아내의 이름, 그리고 따라온 노비 수까지도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런데 동생이 함께 왔다면 수행한 자들보다는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삼국유사』가 쓰여진 고려 충렬왕대까지도 장유화상이라는 존재는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장유화상이라는 이름과 그의 활약상은 1800~1900년대 조선 후기의 자료들에서 등장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황옥과 불교를 연관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금관성파사석탑」조의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고 아유타국이라는 존재를 찾는다. 아유타국을 증명하기 위해 고고학적으로는 파사석탑이나 쌍어문의 분포, 그리고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오는 경로 등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에 전하는 파사석탑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金官虎溪寺婆裟石塔者 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許皇后名黃玉 印漢建武二十四年甲申 自西域阿踰阤國所載來 初公主承二親之命 泛海將指東 阻波神之怒 不克而還 白父王 父王命載玆塔 乃獲利涉 來泊南涯 (中略) 然于時海東 未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土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 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 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在阿道訥祇王之世. 法興王之前)至今奉福焉 兼以鎭南倭 具見本國本記 塔方四面五層 其彫鏤甚奇 石微赤斑色 其質良脆 非此方類也 本草所云 點雞冠血爲驗者是也 (下略)→ 금관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 황옥(黃玉)이 동한 건무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양친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으로 향하려 하다가 파신(波神)의 노함을 만나 견디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에게 고하였는데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게 하니 그제야 무사히 항해하여 남쪽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중략) 그러나 그때 해동에는 창사·봉불하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불교가 전래되지 아니하였으므로 해서 그 지방 사람들이 신복치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에도 창사의 기사가 없었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에 이르러 비로소 그곳에 절을 세우고 또 왕후사를 창건하여(아도는 눌지왕대에 해당하니 법흥왕 전이다) 지금까지 복을 빌고 있으며 겸하여 남왜를 진압하고 있으니 본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진 4면의 5층이고 조각이 매우 기묘하며 돌은 조금 붉은 빛의 반문이 있고 질도 좋은데 우리나라의 암석이 아니다. 본초(本草)에 이른바 계관의 피를 찍어서 시험한다 한 것이 이것이다. (하략)
이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면 수로왕 당시에 파사석탑은 분명히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내용이 구전되어 온 설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는 후대에 첨가된 요소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허황옥과 가야불교를 관련지어 보는 이들은 이 기록을 설화적 요소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그 입장은 대략 3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파사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으로서 허황옥이 올 당시에 이미 가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보는 견해(허명철·정수일), 둘째, 이 석탑이 허황옥에 의해 전해지기는 했지만 가야불교와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김영태·삼품창영(三品彰英)), 셋째, 가야국 초기에 불교를 전하는 석탑으로서의 기능은 담당하지 못했더라도 후대에 가야의 불교전래국이 인도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라는 입장(홍윤식)이다.
이 설화는 같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조나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조의 경우와 비슷한 전형적인 탑상연기설화(塔像緣起說話)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물론 허황옥이 불교와 관련이 있는 석탑을 직접 가지고 왔다는 점에서는 두 설화와 차이가 있으나 인도에서 불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는 점에서는 이야기의 구조가 일치하고 있다.
이 설화는 후대에 어떤 계기로 인해 불교와의 관련성을 강조하기 위해 윤색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데, 그 시점은 5세기 중반의 왕후사 창건과 관련 있을 것이다. 즉 질지왕대에 허왕후의 명복을 비는 절을 세우면서 본래 그녀가 불교와 인연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꾸민 연기설화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수로왕과 허황옥의 설화가 「가락국기」에 기록되기 전에 많은 시간이 경과되었으므로 많은 내용의 윤색과 확대과정을 거쳤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중략) ...
이 기록은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오게 되는 경위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허황옥은 인도불교와 관련 있는 실존했던 인물로 이해될 것이다. 허황옥의 출신국인 아유타국의 존재 역시 사실 그대로의 국명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견해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유타국이 기원전 3세기 경에 번영했던 인도 아요디아라는 설이다. 그 근거로는 태양문양, 신어문(쌍어문), 그리고 인도문자와 한국문자의 관련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신어문은 아직까지도 김해지역 유적의 발굴에서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신어문의 공간적 분포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없을 정도로 세계의 넓은 지역에 걸쳐 있고, 시간적으로도 기원전 7세기부터 20세기까지에 걸쳐 있다. 그러므로 신어문을 기원후 1세기대에 한정하여 그것도 인도와 가야만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또 하나 불교의 남방전래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김해 신어산에 있는 동림사와 서림사를 설명할 때에 “동림사는 중국불교인 동역불교의 상징이고, 서림사는 서역불교인 인도불교를 상징한다”고 하고 항상 서림사 수미단 쌍어문을 언급한다.
그렇지만 동림사의 대웅보전 내부의 수미단과 전각 테두리를 보면 여기에는 쌍어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동식물 무늬가 대칭적으로 쌍을 이루고 있어 쌍어문이 어떤 의미를 두고 장식한 문양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남방전래를 강조하는 이들은 동림사의 쌍어문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
- 조원영, "가야(남방) 불교 전래시기 고찰" 中 -
위가 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김병모 교수의 "허황옥 루트"는 재미있는 책이긴 핮디만, 위와 같은 설을 무너뜨리기 위한 결정적인 역사학적 고찰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책이기도 하고요. 결국,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떨어져있는 두 지역 사이에서 관찰되는 몇몇 특색있고 신기한 "유사성"을 근거로, 하나의 가정에 위에 또 다른 가정을 더해나가며 만들어진 '가설'에 불과하니까요.
JFK가 CIA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것이 역사적 정설이 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요.
나머지는 굳이 다룰 필요 없는 내용 같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모드로 나가겠습니다.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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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자료실 작성시간 08.12.07 우라고 생각하시며 됩니다. 그것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 일도 신화에서 흔적을 찾은것입니다. 우리라고 그렇게 못할 법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광대한 영토를 되찾자는 환단고기의 논리도 아니닙다.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조각들을 한번 찾으러 가자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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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WEASS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12.07 자료실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보물찾기"일 수는 있어도, "역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정합성에 따른 연구는 단순한 유사성을 근거로 그것을 바로 "교류의 흔적"으로 단정짓는 어리석음에 몸을 내맡길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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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WEASS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12.07 중국어와 라틴어가 비슷하다고 하셨나요? 그렇다고 해서 중국과 서양이 연결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또 하셨지요? 그런데, "교류를 통해 언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면 중국어의 어문체계가 라틴어와의 교류를 통해 성립되었다는 주장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잖습니까. 단순히 두 언어 사이에 뭔가 유사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가설'조차도 성립시킬 수 없어요. 그것은 언어만 봐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 역사상 고대 중국과 고대 라틴-지중해 세계가 얼마나 정기적으로 교류가 있었고, 그 심도가 얼마나 깊었으며, 그러한 교류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만한 사실이 확인되는지를 따져봐야 하는 문제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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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WEASS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12.07 그런데, 자료실님의 논리, 그리고 자료실님이 되풀이하는 <허황옥 루트>의 김병모 교수의 논리는 근본적으로 그런 역사적 고찰의 단계를 생략한 채 고고학적인 유물에서 보이는 시각적 유사성이라든지, 그 제반 역사적 배경을 확인하는 작업이 결여되어 있거나, 그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들에서 "증거"를 찾는다는지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상 중국어 지역과 라틴어 지역이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가에 대한 고찰이 없이, '유사성'을 근거만으로 그 두 언어가 상호영향에 있었다는 어거지 가설만을 낳는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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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WEASS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12.07 따라서, 건전한 역사적 정합성에 따라 타당하다고 결론 내리기 힘든, 센세이셔널리즘적인 가설들을 근거로 '우리 역사학은 보다 다른 곳을 내다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역사학에 대한 무지'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마치, <티마이오스> 만을 근거로 "아틀란티스를 찾기 위해 고고학자들은 대서양을 내다봐야 한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보기 힘든 아틀란티스를 찾기 위해 대서양 바닥을 다 뒤지고 다녀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