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 OST 추노
1584년 3월 8일, 온성부사 신립(穩城府使 申砬)이 변방의 일에 대해 조정에 아뢸 것과
모친에게 문안드릴 일로 서울에 내려오니
선조 임금이 그를 인견(引見)하고 술을 내렸으며
그리고 금(錦-비단) 2필과 단(緞) 2필을 하사하였습니다.
3월 27일, 북도 병사 신립이 배사하니 임금이 인견하여 술을 내리고
또 남단(藍緞)·철릭(天益)·낭자(囊子)와 호초(胡椒) 한 말과 환도(環刀)·궁대(弓帒)·통개(筒介)·
장편전(長片箭)·수은갑(水銀甲)·투구 등을 하사하였습니다.
1587년 9월 왜구(倭寇)가 전라도 손죽도를 공격하여 전라좌수군(全羅左水軍)을 격파하고
흥양(興陽)까지 침입하였으니
역사는 이 사건을 정해왜변(丁亥倭變)이라 기록 하였는데
이때 신립(申砬)은 전라우방어사(全羅右防禦使)로 명을 받아 왜구를 토벌(討伐)하러 남하하였으나
그가 도착했을 때엔 이미 전라도 자체의 힘으로 왜구를 저지하여
왜구가 물러가버린 뒤라 회군(回軍)을 하였는데
그가 돌아가던 길에 양가(良家)의 처녀를 취하여 첩(妾)으로 삼아
촌사(村舍)에서 이틀 밤을 묵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신립은 탄핵(彈劾)을 받아 파직 되었으나 곧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로 임명되었습니다.
1588년 5월 20일, 남병사 신립(南兵使 申砬)은 군대를 이끌고
고미포(古未浦)의 적호 부락(賊胡部落)로 쳐들어가 정벌하여
각위(各衛)가 여진족 20명과 말 3필을 참획(斬獲)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1588년 10월 초, 신립(申砬)이 가을파보(加乙波堡)의 수졸(戍卒)이
보장(堡將)을 모욕했다 하여 참수(斬首)하고 계문(啓聞)하니
사간원에서 싸움에 임하여 적과 맞선 시기가 아니면 참형(斬刑)을 쓸 수 없는데
신립이 함부로 집행했다고 세 번이나 탄핵하여 마침내 10월 15일에 그를 파직 시켰습니다.
그러나 사간원은 신립을 국문하라고 계속 간했으나 임금이 신립을 변호하였고
얼마지나지 않아 1589년에 동지(同知)에 임명했다가 평안병사로 임명하고
1591년 2월 6일에 한성부판윤으로 임명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이무렵 일본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 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확대되고 있었으니
이때 신립은 군비확충(軍備擴充)을 주장하였으나
수군을 없애고 육군(陸軍)을 강화하여 육전(陸戰)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자는
수군전폐론(水軍全廢論을 주장하였으니
수군전폐론은 이순신(李舜臣) 등의 상소로 인해 받아들여지진 않았으나
육전 중심으로 일본군을 격파하는 방어전략은 조선의 방어전략이 되었습니다.
1592년 3월, 임금은 대장 신립과 이일을 여러 도에 보내서 병비(兵備)를 순시(巡視)하도록 하니
이일은 양호(兩湖-충청도와 전라도)로 가고, 신립은 경기와 해서(海西-황해도)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시하며 점검한 것은 궁시와 창도(창칼)에 불과했으며
군읍(郡邑)에서도 모두 형식적으로 법을 피하기만 하였고
수령들은 신립이 잔포(殘暴)하다고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대접하는데에 신경을 써 그 비용을 대신의 행차와 같이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신립의 용력과 무예를 믿을 만하다고 여겼고
신립 자신도 왜노(倭奴)들을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조정도 그것을 믿었습니다.
1592년 4월 1일, 지방 점검을 마친 신립이 유성룡(柳成龍)을 찾아 사재(私宰)로 오니
유성룡이 신립에게 말하길
“멀지 않아 변고가 있으면 공이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할 터인데,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 왜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의 어렵고 쉬움이 어떠하겠소?”
이에 신립은 대단히 가볍게 여기고 대답하기를
“그리 걱정할 것이 없소이다.”
라고 하니 유성룡이 걱정하며 말하길
“그렇지 않소.
그전에는 왜적이 다만 칼 · 창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鳥銃)과 같은 장기(長機)까지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오.”
라고 하자 신립이 말하길
“비록 조총이 있다 해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소이까?”
라고 하자 이에 유성룡이 말하길
“나라가 태평한 지가 매우 오래 되었으므로 사졸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과연 급변이 생긴다면 항거(抗拒)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오.
내 생각으로는 몇 해 뒤에 사람들이 자못 군사 일에 익숙해진다면
난을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지금으로는 매우 걱정이 되오.”
라고 했으나 신립은 돌이켜 깨달은 것 없이 돌아갔습니다.
1592년 4월 18일 4경(四更-새벽1시~3시),조선조정(朝鮮朝廷)은
일본군(日本軍)의 침입에 대응(對應)하여 경장(京將-도읍에서부터 파견나온 장군)들을
경상도(慶尙道)에 파견(派遣)하여 침공(侵攻)하는 일본군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7일뒤인 1592년 4월 25일 오후, 경상도에 파견된 경장들은 보잘것 없는 군세(軍勢)로
일본군의 대공세(大攻勢)를 맞이하여 경상도에서 밀려나고 있었으니
경상좌방어사 성응길(慶尙左防禦使 成應吉)은 경상좌도(左道)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등청정)의 대군(大軍)과의 싸움을 피하며 도주 했으며
경상우방어사 조경(慶尙右防禦使 趙儆)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전)의 대군에게 밀려
금산-추풍령 방면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고
조방장(助防將) 유극량(劉克良)은 대재(竹嶺-죽령)를, 변기(邊璣)는 새재[鳥嶺-조령]를
수비(守備)하였으나 그들의 군세(軍勢)가 일본군을 막을 정도로 충분한지 알 수 없었고
강계부사 변응성(江界府使 邊應星)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임명되어 내려갔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어 일본군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고 있었습니다.
4월 21일, 이일(李鎰)이 문경(聞慶)에 이르러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듣고 급히 장계(狀啓)했는데,
“오늘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 감히 당할 사람이 없으니 신은 죽음을 각오할 따름입니다.”
라는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로부터 4일뒤인 4월 25일, 그가 지휘하는 조선군은 상주 북천 전투(尙州 北川 戰鬪))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에게 전멸(全滅) 당했습니다.
이로서 상주에서 문경(聞慶)까지 이르는 길을 지킬 조선군은
방어사 변기(防禦使 邊機)의 군대를 제외하고 없었습니다.
하지만 변기의 조선군은 편성된 기록조차 없을 정도로 보잘것 없었을 뿐더러
(변기의 조선군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어쩌면 변기가 방어사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그가 전사할 때까지 편성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빈약(貧弱)한 군세(軍勢)는 종사관 이경류(從事官 李慶流)가 상주의 조선군을 돕기 위해
이일에게 지원되었다가 북천 전투에서 전사함으로서 더욱 약해졌습니다.
결국 변기는 충주의 조선군과 합류하라는 도순찰사의 명령을 받아
원래 목적이었던 조령 수비(鳥嶺 守備)를 포기하고 충주로 북상하였고
그의 목적지 충주에는 서울에서 편성되어 남하한 도순찰사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한편 상주 북천 전투에서 패배한 이일은 함창(咸昌)을 지나 문경까지 정신없이 도망쳤는데
도망치는 과정에서 적의 추격을 유도할 지휘관복(指揮官服)따위를 모두 벗어버리고 와서
문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야말로 평복차림 이었습니다.
그는 문경에서 종이와 붓을 구하여 패전장계(敗戰를 써서 조정에 보내고
조령에서 일본군을 막으려고 하다가 신립이 충주로 온다는 말을 듣고
충주로 갔습니다.
(연려실기술-조야기문에 의하면 신립이 변기와 이일을 충주로 호출했다고 하지만
변기에 대한 기록은 없고 이일은 군대가 전멸하여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에
변기의 경우 확인할 방법이 없고 이일의 경우는 이일이 직접 찾아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편 상주 북천 전투가 아직 전개되지 않고 4월 18일에 서울에서 7명의 경장(京將)들이
경상도 방어를 위해 파견된 이후,
대간이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검독(檢督)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계청하였습니다.
이때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유성룡(柳成龍)을 체찰사로서 보낼 것을 청하니
선조 임금이 따랐고 추가로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임명된 도체찰사와 부체찰사는 곧장 출전할 군관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4월 19일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런 변란이 심한 때를 당하여 평상시의 법규만 지켜나갈 수 없다.
무릇 사대부로서 죄를 입어 파직되고 산직(散職)되었던 사람들을 모두 들어 써서 대기하도록 하고
무신(武臣)으로 상복을 입고 집에 있던 자들을 모두 기복하도록 하라.”
라고 하여 군관 인력 확보에 도움을 주었고
이무렵에 임금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생각하고 아까워하여
그를 풀어주고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장소를 정하여 유배보냄, 조선시대 유배 방식 중 군역을 맡기는 방법도 있음)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사수 김여물(士秀 金汝岉)은 소년 시절부터 영특하고 힘이 세어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잘하였습니다.
그는 20세에 진사, 30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풍채가 준수하여
당시의 호걸들로서도 그를 앞설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591년에 정철이 숙청될 때에 그와 같은 일파로 몰려서 옥에서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의주에 부임하였는데 의주는 명나라와의 접경지역이기에
사신의 왕래가 서로 잇달았으므로
옛부터 의주목사는 오직 연회(宴會)와 기악(妓樂)을 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김여물은 그러한 전통에 개탄하고 분발하여
전일의 폐단을 모두 개혁하고 병장기를 수선하여 군사를 훈련시켰는데
이때에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그것을 가지고 모함하여 잡혀와서 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1592년 4월 중순, 김여물이 아직 옥중에 있으면서 일본군이 바다를 건넜다는 말을 듣고
같이 갇혀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손자병법孫子兵法 허실편虛實篇 6장)에 이르길,
[군사는 적을 따라서 승리를 이끌어내고 물은 형세를 따라 흐름을 다스린다.
兵因敵而制勝 水因形而制流-병인적이제승 수인형이제류]
라고 하였는데,
장수가 군사 쓰는 법을 몰라서 왜적(倭敵)으로 하여금 배를 버리고 상륙(上陸)하게 한다면
그 세력이 빠르게 돌진(突進)하여 반드시 당해낼 수 없을거요."
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조선 조정이 이일로 하여금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책을 만들어서,
[적을 상륙시킨 뒤에 맞아 치라.]
라는 전략론(戰略論)을 세웠고
당대의 명장이라 불리던 신립은 수군전폐론(水軍全廢論)을 주장하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통찰력이 있는 말 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변방 장수들은 이일이나 신립의 주장을 추종하여
바다 가운데서 막는 전략을 쓰지 않았고
그 결과 일본군은 무혈상륙(無血上陸)하여 내륙(內陸)으로 신속하게 진군하여
각 고을이 기왓장처럼 잇달아 풀어져서 관병(官兵)은 곳곳에서 달아나 붕괴(崩壞)되자
비로소 사람들은 김여물이 병법을 잘 아는 줄을 깨달게 되었던 것 입니다.
김여물이 어명을 받아 출옥(出獄)하자마자
바로 행장(行裝)을 꾸리고 길을 떠나려 하였으니
(이일이 4월 18일에 출전명을 받고 3일 뒤에 출발했기 때문에
김여물의 출옥 시기와 출옥하자마자 떠나려고 했던 그의 행적을 이에 맞추면
그가 이일 휘하 군관으로서 출전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 항상 무장을 갖추어 마치 적군이 쳐들어온 것 같은 준비를 해두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때 유성룡이 어명을 받들어 용사를 모집하면서
김여물을 청하여 일을 의논하고 그의 능력에 탄복(嘆腹)하여 말하기를,
라고 하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 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여 유성룡은 그를 참모관(參謨官)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추가로 명을 내려 조정 관원들이 각각 전마(戰馬) 한 필씩 내어
곧 출정할 군대를 지원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과 노력으로 체찰사 유성룡과 부체찰사 김응남은 중추부(中樞府)에서
한자리에 앉아 떠날 준비를 하려고,
군관(軍官)에 응모(應募)한 자 80여 명의 명단(名單)
(실록에는 장사壯士 8000명이 모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을 써서 입궐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한성부판윤 신립(漢城府判尹 申砬)이 갑자기 밖에서 들어와 말하기를
(조선왕조실록에는 유성룡과 김응남이 신립을 찾아가 계책을 물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들으니 적병이 이미 밀양(密陽)을 지나 곧 새재[鳥嶺-조령] 밑에 이를 것이라 하오.
조정에는 이일(李鎰)만 홀로 고군(孤軍-지원이 없는 군대)으로 전방(前方)에 있게 하고
뒤에서 응원할 장수를 보낼 계책이 없으니 사세(事勢-일의 형편)가 심히 위급(危急)하오.
체찰사는 비록 내려가더라도 싸움터의 장수는 아니오.
적세(敵勢)가 만일 급하지 않다면 뒤에서 모든 장수를 감독할 것이지만,
지금 적이 벌써 가까이 왔는데 어찌 맹장(猛將)으로 하여금 밤낮없이 먼저 달려가서
이일의 군사를 응원하게 하지 않는단 말이오?”
라고 하니
이에 유성룡도 그렇게 여기고 답하기를,
“공의 말은 옳으나 단지 갈 만한 무장(武將)이 없는 것을 어찌 하겠소.” 라고 하자
신립이 말을 받아,
“국사가 당장 위급한데 누가 못 가겠소?
비록 소인(小人)이라도 가라면 감히 어찌 사양하겠소?”
하였습니다.
이에 유성룡이 탄식(歎息)하면서 말하길,
“공이 나라에 바친 충성(忠誠)은 남이 따르지 못하는 바이오.
이것은 큰 일이니 즉시 들어가 아뢰겠소.”
하고 임금에게 청대(請對)하여 아뢰었습니다.
이에 임금이 신립을 불러 출정(出征)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니 신립이 사양(辭讓)하지 않아서
마침내 그를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임명하였습니다.
순변사 신립은 임명되자마자 궐문(闕門) 밖에 나가 한참동안 군관을 불러 모았으나
그에게 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반면 유성룡이 군관들을 모집하자 군관들이 그에게 모여드니
이에 신립은 크게 화가 나 뜰에 모여있는 군관들에게 소리치기를
“너희들은 어찌 수월한 것만 원하고 괴로운 것은 싫어하느냐!
나에게는 왜 응모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느냐!” 하며 말하고
이내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군관이 한 사람도 응모하지 않으니 괘씸하오!"
라고 하고 김응남을 가리키며 말하길
"저 영감을 대감께서 부사로 데려 가봤자 어디에 쓰겠소? 소인이 부사로 데려가 쓰겠소."
라고 말하니 유성룡은 군관들을 원하는 신립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대답하길
“다 같은 나라 일에 피차(彼此-너의 일과 나의 일)가 있겠소?
내가 모집해 둔 사람을 공이 먼저 데리고 가면, 나는 뒤에 갈 것이니 다시 모집하여 가겠소.”
라고 말하고 군관의 명단을 그의 앞에 던졌습니다.
이에 신립이 명단을 들고 나가서 유성룡이 모집한 군관들을 자신의 군관들로 삼으니
졸지에 지휘관이 바뀐 군관들은 모두 실망하였고
유성룡의 참모관이었던 김여물도 신립의 군관이 되어 그를 동행하긴 했으나
역시 마지 못한듯이 얼굴빛이 좋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신립은 인력(人力)을 확보하여 먼저 출발하게 되고
유성룡은 다시 준비하여 나중에 출발하기로 되었으나
결국 유성룡은 출정하지 못했고
그 일은 나중에 유성룡이 임금에게 공개적으로 비난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592년 4월 22일, 임금은 신립이 출정할 때 친림(親臨)하여 인견하고
"적세(敵勢)가 이와 같으니 경의 생각에는 이 적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니
신립이 대답하길
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변협(邊協)은 매양 왜인은 가장 대적하기 어렵다 하는데, 경(卿)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조판서 이헌국(刑曹判書 李憲國)은
신립이 여름철에 왜적을 섬멸하기 편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신립이 패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예전에 변협(邊協)에게서
왜적들은 여름철 초목(草木)이 무성할 때면 숨어서 총을 쏘기 때문에 싸우기가 쉽지 않고
반드시 가을과 겨울에 나뭇잎이 떨어진 뒤라야지만
섬멸하기가 편리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신립을 전송하면서 보검(寶劍)한 자루를 하사하고 이르기를,
“이일(李鎰) 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卿)이 모두 처단하라.
중외(中外-서울과 지방)의 정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紫門監-자문군기시紫門軍器寺의 다른 명칭, 조선 초기에 무기를 생산하고 보관하던 곳)의
군기(軍器)를 있는 대로 사용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신립(申砬)은 떠날 때 병조판서 홍여순이 직책도 못하고 군사들에게 인심을 잃었다고 아뢰니
임금이 노하여 김응남으로 대신하게 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유성룡이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은 맡은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군졸들의 원망이 많다고 아뢰어 임금이 그를 경질하여
김응남으로 대신케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신립이 빈청(賓廳)에 나가 대신들에게 하직하고 섬돌을 내려오는데,
그의 머리 위에 씌워져있던 사모(紗帽)가 홀연히 땅에 떨어져
보는 사람들에게 불길한 느낌을 심어주었습니다.
신립이 출정한 뒤에 임금은,
“변협은 진실로 양장(良將)이라 내가 항상 이 사람을 잊지 못한다.
변협이 있었던들 내가 어찌 왜적을 걱정할까?”
라고 하며 못미더워했습니다.
여기에 신립이 출정하여 용인(龍仁)에 이르러 적세가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적세(敵勢)가 심히 성해서 실로 막아낼 일이 어려우니
오늘의 일은 민망(憫惘)하고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
라고 장계하였는데 거기에 신(臣)이라고 써야할 양식마저 무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서울에서는 신립을 간성(干城-국가를 지킬 장군)으로 믿었다가
이런 장계가 올라오니 모든 사람이 신립도 걱정할 정도로 막강한 적세에 겁을 내었고
또 신립이 딴 마음을 품거나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불안해했습니다.
1592년 4월 22일, 신립의 조선군이 한양을 출정하니
그의 군대는 도성의 무사(武士)·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성분은 명예와 전공을 위해 자원한 양가의 자제와 정예병들도 있었으나
가혹한 핍박과 강요를 못이겨 마지못해 활과 화살통을 차고 온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서울 인근 고을에서 거둔 군사들까지 포함하니 그 수가 약 8000여명 이었다고 합니다.
이날 도성 사람들이 모두 저자를 파하고 나와서 구경하였습니다.
이때 식자(識者-지식인)들은 군에 응모한 자는 모두 시정의 악동(惡童)들인데,
나라가 태평무사(太平無事)한 지 오래 되어
군사(軍事)에 관한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 하였습니다.
그러한 걱정들을 뒤로하고 신립의 조선군은 용인을 거쳐 충주로 남하하였습니다.
당시 신립의 조선군은 서울과 경기도의 쓸 만한 병사들을 데리고 남하하고 있었으나
신립에게 보내질 군대는 그들 뿐만 아니었습니다.
강원도의 조선군도 신립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명령을 받았고
선전관 민종신(宣傳官 閔宗信)이 선조 임금의 명을 받고 전라도에 내려가
전라감사 이광(全羅監司 李洸)에게 신립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전달하여
전라 조방장 이유의가 지휘하는 1000명(연려실기술에는 2000명이었다고 기록 했습니다.)의
전라도 조선군이 출발했으며
신립이 싸울 전장(戰場)인 충청도에선 충청도의 조선군을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이
신립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로서 신립은 무려 25000명에 달하는 충청도 조선군을 동원할 수 있었으나
충청병사 신익(忠淸兵使 申翌)은 청주(淸州)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모아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忠淸道觀察使 尹先覺)은 기록에 남을 만한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립이 실질적로 활용할 수 있었던 충청도 조선군은 충주목사 이종장의 군대 밖에 없었습니다.
1592년 4월 26일, 신입이 군사를 충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군관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이일(李鎰)이 이르러 꿇어앉아 부르짖으며 죽기를 청하자 신입이 손을 잡고 묻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하였소?”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하니
신입이 쓸쓸한 표정으로 의기가 저상(沮喪)되자 김여물(金汝岉)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銳鋒)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要塞)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적세(敵勢)가 극히 커서 교전(交戰)하기 어려우니
조령은 천험(天險)이나 만약 굳게 지키지 아니하면 적에게 점령당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조령에 이르러서 산중에 군사를 매복(埋伏)시켰다가
적이 골짜기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양쪽 언덕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쏘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고
만약 그 칼날을 당하지 못한다면
물러나 들어가 경성을 호위하는 것도 또한 한 가지 계책입니다.”
(이 당시 조령에는 문경 3관문 같은 방어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김여물은 매복작전을 제안한 것 입니다.)
라고 말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逆襲)으로 공격하자고 제안했으나
신입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에 맞아 들여서 철기(鐵騎)로써 치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라고 하며 충주로 돌아가니
이일이 말하길
“이번 왜적은 경오(庚午-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교역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을묘년(乙卯年-1555년 을묘왜란)때의 왜적과는 비교가 안 되며
또 북쪽 오랑캐 같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이미 험한 곳에 주둔하지 못하여 넓은 들판에서 싸움을 하게 되어 당해 낼 도리가 만무하니
차라리 물러가 서울을 지킵시다.”
라고 하니
신립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네가 패군(敗軍)하고 또 다시 군중(軍中)을 놀라게 하여 요동(搖動)시키니
군법에 의하여 마땅히 목을 벨 것이지만,
적이 이르거든 공을 세워 속죄(贖罪)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바다를 건너온 적은 능히 달리지 못한다.
배에서 내린 적은 거위나 오리처럼 걷기가 어렵고,
길을 두 배로 빨리 달려온 적은 개ㆍ돼지와 같이 계략(計略)이 없는 법이니,
평평한 큰 들판에서 단판 싸움에 때려부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산 험한 고개에 두 길로 갈라서 지킬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
충주에 진(鎭)을 치고 일본군과 맞서싸우고자 하니
그것은 배후에 달천강과 남한강을 두고 적을 상대하는 배수진(背水鎭) 이었습니다.
배수진 은 초한시대에 항우의 파부침주(破釜沈舟) 고사(古事-항우가 거록전투鋸鹿戰鬪를 치룰때에
자신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자 건너온 배들을 모두 가라앉히고 가져온 솥도 모두 부수고
주변의 집들로 모두 불태우고 군사들에게 3일분의 식량만 준 뒤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진秦나라군과 결사적으로 맞서싸워 진나라군을 격파한 일)에서
최초로 활용되었고
한나라 명장 한신이 정형전투(井陘戰鬪)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조나라 군을 상대했을 때
사용하여 대승리를 거두면서 유명한 전술이 되었으나
실제로 한신의 승리는 매복,기습(寄襲),기만(欺瞞) 등 복합적인 전략(戰略)의 산물(産物)이었고
배수진은 승리로 이끈 일부 였습니다.
그런데 신립은 배수진과 기병돌격 이외에 다른 전술을 준비하진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신립이 선택한 전장인 충주성 인근과 탄금대 주변은
인가와 논이 많고 길이 좁으며 습지가 있어서 기병 운용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광흥주부 이운룡(廣興主簿 李雲龍-무과급제한 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30세의 무장이었습니다.
그는 출정하기를 자원해서 신립의 막하에 있었습니다. )이 신립이 배수진 치려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죽을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고 울면서 말리니
신립이 화를 내며
“그 망녕된 말로 사기(事機)를 그르치는구나!”
라고 하고 곤장(棍杖) 30대를 쳤습니다.
이운룡은 곤장 맞아서 흐르는 피를 씻고 군무(軍務)를 계속 수행했으나
탄금대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기 전까지 전투에 투입되지 못했습니다.
이운룡 외에도 이종장 또한 충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을 반대하고
김여물이 제안한 조령 방어를 찬성하였으나 신립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신립의 조선군은 충주에서 일본군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신립은 이일,변기(혹은 이종장)를 선봉장(先鋒將)으로 삼았으며
용추(龍湫) 물가에 탐정군을 보내 척후활동을 하게 하였습니다.
4월 27일 저녁,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ㆍ안민(安敏-종사관 박안민
과 동일인물인지 알 수 없는데 척후활동을 한 군관 이름에는 안민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등이 달려와서
“적이 이미 조령을 넘었습니다.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하고 고하자
신립이 이날 저녁에 직접 충주성을 나가 정찰하고 돌아와서
그들을 거짓말로 여러 사람을 의혹(疑惑)시킨다 하여
끌어내어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며 말하길
"세 번 호령하면 북을 치며 오위(五衛)의 군사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까닭없이 군사를 놀라게 하는 자를 베는 것은 손자(孫子)의 병법이요,
사지에 놓여야만 마침내 산다는 것은 한신의 기이한 계략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친애하고 신임하는 한 군관[軍官-신립의 일가 조카였다고 합니다.]이
몰래 와서 적이 이미 영을 넘었다고 말했다가 신립에게 참수 당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1592년 4월 27일,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은 이날 밤에 조령을 넘었다고 기록 했습니다.
(4월 28일 새벽에 일본군이 문경에서 출발했다는 일본측 기록 서정일기을 참고하면
27일 저녁에 새재 이북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일본군 선봉부대나 정찰대 였을 것입니다.)
이때 충주 이남에서 새재 이북 사이(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용추 물가로 추정 됩니다.)에는
조선군 척후부대(斥候部隊)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척후장 고언백(斥候將 高彦伯)이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연려실기술에는 충주목사 이종장과 순변사 이일이 탄금대 전투 당일에
전방에서 척후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기술했기에
이들 휘하에서 고언백이 척후활동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고언백은 일본군 선봉대와 교전을 벌여 적병의 수급을 획득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18000여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선군 척후부대는 일본군의 견제를 받게 되어
4월 28일 탄금대 전투 당시 전방에서 고립되었습니다.
그로인해 그들은 조선군 본진에 척후 정보를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선군 척후부대는 탄금대 전투가 전개되는 동안에
패산(敗散-싸움에서 져서 흩어짐)하였습니다.
1592년 4월 28일 새벽 4시,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 주력은 문경에서 출발하여
조령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조령이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조령에 조선군이 매복하고 있는지 주의깊게 살폈으나
아무리 살피고 정찰해도 조선군이 발견되지 않았고
산새들이 길목에서 날아다니니
마침내 그들은 조령에 조선군이 없는 것을 기뻐하며 신속하게 조령을 통과 하였습니다.
조령을 지난 일본군은 안보역을 지나 충주 단월역을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충주에 조선왕이 보낸 회답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동래성 전투때 처음에 왜적이 울산 군수 이언함(李彦諴)을 생포해서
강화협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공문을 주고 그를 풀어주었고
상주가 함락될 때 (기재잡기에는 왜적이 밀양에 이르렀을 때로 기록하였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통역관 경응순(景應舜)란 자를 잡아
도요토미의 글과 예조에 보내는 공문 한 통을 전하면서 말하길
“동래에 있을 때 울산 군수를 생포하여 서계(書契)를 주면서 놓아 보내었더니 지금까지 회답이 없다.
조선이 강화(講和)할 뜻이 있거든 이덕형(李德馨-
이덕형은 1591년에 선위사宣慰使 로서 일본 사신을 접대했는데 그 사신이
이덕형의 풍채를 보고 흠앙하는 마음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 보고 하여
당시 일본 사람들에게 존경과 명성을 얻었습니다.)을 시켜 4월 28일에 충주에서 우리를 만나게 하라.”
라고 하여 강화협상을 시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엔 고니시 유키나가가 기대했던 협상의 가능성이나 실마리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언함은 적중에서 돌아와 죄를 받을까 겁내어 스스로 도망쳐 왔다 하고
그 글을 숨기고 전하지 않았으며
경응순은 비록 조정에 보고하여 이덕형과 함께 일본군과 협상하려고 서울에서 출발하긴 하였으나
이날엔 아직 충주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고
결정적으로 일본군은 충주성 북쪽에 결진한 대규모의 조선군을 확인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1592년 4월 28일 정오(낮12시), 일본군은 충주 단월역(丹月驛)에 도착하였습니다.
고니시의 일본군에게 있어서 충주의 조선군은
조선침략을 시작한 하고 난 뒤에 대적하였던 조선군대 중에서
가장 많고 가장 강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일본군은 신립의 조선군이 조선이 선발한 가장 정예군이며
그 수효는 대략 수만명(프로이스의 일본사는 그 수를 80000명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으로 판단하여
긴장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긴장한 병사들을 격려하였습니다.
"후퇴는 비겁하다!
그것은 적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것으로 이는 명백한 패배의 표시이다!
이미 우리는 커다란 명예와 위신을 걸고 조선인으로부터 많은 땅을 탈취하였고,
조선 국왕의 도시인 서울을 얼마 후에 함락시키려고 하는 지금에 이르러
이때까지 승리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
이제까지의 싸움과 마찬가지로 승리의 행운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고니시의 간결한 격려에 마침내 일본군은 용기를 내어 이 전투에 운명을 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탄금대에 이르러 전투가 임박해지자 고니시는 병사들에게 전투 대열을 갖추도록 지시하니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막상 부딪쳐서는 조선군이 놀라게 하지 않도록 아무 깃발도 올리지 말고
의기(意氣)를 잃은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진격하라.
추후에 깃발을 일제히 펄럭이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한편 신립의 조선군도 고니시의 일본군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조선군은 고니시의 일본군 수효를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대략 수십만(200000~600000명)으로 판단하였고
또 예전에 침입하던 왜적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인 신립은 일본군이 내륙 깊숙히 쳐들어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진격속도를 과소평가하여
아직 그들이 상주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장계를
일본군이 쳐들어 오기 직전에 보낸 상태였기에
갑자기 맞이하게될 일본군을 보자 당황했습니다.
4월 28일 오전, 일본군이 민가에 불을 지르며 전진하니
조선군은 적이 이미 영(嶺)을 넘어온 것을 알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간담이 떨어지지 아니한 이가 없었으며
조령을 넘어 수안보로 내려오는
일본군의 기치창검이 조선군에게 목격되었는데 창칼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수안보를 지나 단월역에 이르자 모든 상황이 분명해졌습니다.
신립의 조선군은 충주성 북쪽의 탄금대에 포진하고 일본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은 조령를 방어하자는 자신의 제안이 거절 당한 후부터 반드시 패할 것을 알고
아들 김류(金瑬)와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서 종에게 주어 보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3도에 근왕(勤王)하는 군사가 한 사람도 없어 우리가 소매를 떨쳐 나섰는데도 돕는 이가 없다.
남아(男兒)가 나라 일에 죽는 것은 직분이거니와
단지 국치(國耻)를 씻지 못하고 장한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된다.
-아들 김류에게 전하는 편지]
일본군이 탄금대를 향해 전진하여 바야흐로 결전이 임박하자
신립이 창황하여 급히 장계를 올리고자 김여물을 보고 지으라 하니
김여물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팔에는 활을 메고 허리에 전통(箭筒)을 찬 채로 붓을 놀리자
삭삭 바람 소리가 나며 장계가 작성되었습니다.
그가 다 쓰고 붓을 던지니 그 장계의 양식이나 내용은 한 자도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에 군중(軍中)에서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였습니다.
탄금대에 결진한 조선군은 기병대를 준비하여
충주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짓밟아버리려고 하였습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는 단월역에서 군대를 좌군,중군,우군,예비대으로 나누어
좌군은 달천 방향으로 진격시키고
우군은 소오 요시토시의 지휘하에 충주성 방향으로 진격시키며
중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하에 탄금대에 배치된 조선군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예비대는 충주성 및 후방 지역에서 작전을 실시하였습니다.
고니시의 일본 중군의 선봉대는 소규모 병력으로 편성된 채 탄금대의 조선군을 향해 나아갔고
그들 뒤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중군 본대가 전진하였습니다.
그들은 깃발을 숨기고 마치 오랜 행군에 지친 것처럼 꾸몄습니다.
한편 고니시가 격려하기 전의 일본군 못지 않게 겁을 내던 조선군은
다가오는 일본군이 생각보다 수가 적고 지쳐 있는 모습을 보자
언월진(偃月鎭)을 형성하고 일본 중군을 향해 기병 돌격을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겁에 질려있던 조선군이 그 소규모 일본군 선봉대를 보고
용기와 전의를 되찾고 공격을 감행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의 정확한 규모와 병종 비율(兵種 備率)을 확인할 수 없으나
임금이 신립의 군대에 전마를 징발하여 준 것과
신립이 평지전(平地戰)을 주장하며 기병으로서 적을 짓밟겠다고 말한 것을 볼 때
조선군의 주력이 기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군이 활쏘기를 중요시하고
활을 제외한 병기를 능숙히 다룰 병력이 부족하며
이 전투에 참가했던 신흠이 조선 기병의 돌격을 치사(馳射)라고 기술한 것을 통해
궁기병(弓騎兵)이 전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신립이 철기(鐵騎)로서 적을 짓밟겠다고 한 발언(發言)을 통해
창검(槍劍)으로 무장한 중기병(重騎兵) 전력도
이날의 조선군에 포함되어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양쪽 군대가 이미 접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조선군 앞의 일본군이 깃발들이 펄럭이고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감추었던 모습을 드러내며 조선군의 양쪽 끝을 향해
맹렬히 총격(銃擊)을 퍼부었습니다.
조선군은 갑작스럽게 맞이한 엄청난 사격과
기병돌격에 적합하지 못한 전장지형으로 인해
돌격 성과를 내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조선 기병들은 다시 태세를 가다듬고
다시 일본 중군을 향해 돌격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일본 중군은 굳건한 대열 유지와 격렬한 사격으로
조선군을 격퇴하였고
조선군은 돌격이 성공하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나자 점점 불안해져갔습니다.
이무렵 신립은 언월진에서 어려진(魚麗陣-기병대 사이에 보병대를 배치하여 공격하는 진)으로
전환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은 그것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조선군의 기마돌격을 막아내며 조선군을 격멸할 준비을 하였습니다.
고니시의 중군은 총포로 무장한 병사들이 전열 앞에 배치하여
조선군의 공격과 반격을 사격으로 제압하면
대도로 무장한 병사들이 전진하여 조선군을 탄금대로 밀어내면서 전진하였고
소오 요시토시가 지휘하는 일본 우군이 조선군의 좌익을 공격하여
조선군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일본 좌군은 달천을 따라 진군하여 조선군의 우측과 배후를 노렸습니다.
마침내 소오 요시토시의 일본 우군이 조선군 좌익을 돌파하여 조선군을 무너뜨리기 시작하고
달천 강가에서 진격해온 일본 좌군은 조선군의 우익을 공격하여 포위망을 형성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일부 일본군은 조선군의 배후로 돌아서 그 포위망을 완성하려고 하였습니다.
전세가 여기까지 몰리자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니
일본군의 돌입으로 진형이 변화되어 군사들이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후퇴를 알리는 징이 울리고 깃발이 눕혀지자
그들은 싸움터를 버리고서 발을 날개처럼 하여 앞다투어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려고 했는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퇴로는
달천강을 건너는 것과 탄금대 동쪽 산길로 도주 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달천강으로 도망치는 경우는 그 강에서 얕은 여울을 찾기는 쉽지 않는데다가
일본군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좁혀왔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급한 마음에 강물에 뛰어 들어 도강하려다가 익사하였고
혹은 뒤쫓아온 일본군의 칼에 찍혀 강을 피와 시체로 덮히게 하였습니다.
또 어떤 병사들은 신립이 깃발을 잡고 말을 탄채로 달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그대로 쫓아가다가 강물까지 뛰어들기도 하였습니다.
일본군이 조선군을 탄금대에서 3면으로 포위하여 공격했을 때,
조선군은 더이상 장수들과 군관들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공황과 혼란에 빠져 있어
전세를 뒤집을 방법이 없었고 오로지 탈출 밖에 길이 없었는데 그것은 쉽지 않았으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니
순변사 이일은 동북쪽 방면 산길을 따라 도망치다가 일본군 2~3명을 만났으나
활로써 사살하여 수급 1개를 베고 탈출하였으며
척후장 고언백은 충주 전방에서 탄금대의 조선군 본진보다 먼저 일본군과 맞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탈출하고 나중에 탄금대에서 탈출한 조선군 50여명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그외에도 군관 신흠,군관 이충(李忠), 신립의 측근이었던 기마종복 3명 등이
탈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종복들은 탄금대 전투 다음날 저녁에 도성에 도착하여 탄금대 전투 패배를 알렸습니다.)
일본측 기록인 서정일기와 일본사는 충주의 조선군을 수만의 대군으로 기술하였지만
실제 참수한 수는 그에 미치지 못하고(물론 참수한 수가 실제 살육한 수보다 덜 미치지만)
무엇보다 적을 전멸시켰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생각보다 많은 조선군이 살육의 사지(死地)을 빠져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조선군 장수들과 군관들과 일부 조선군 병사들은
구명하는 방법을 찾지 않고 순국하는 길을 택했으니
충주목사 이종장은 그의 아들 이희립(李希立)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으며
광흥주부 이운룡은 전투전에 신립에게 탄금대에서 싸우는 것을 반대하다가 곤장을 맞은 뒤에
피를 씻고 진영에서 군무(軍務)를 보다가 조선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일본군에게 돌격하여 맹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원래 조령을 지켜야 할 임무를 받았던 조방장 변기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종사관 박안민(朴安民)도 싸우다가 마침내 강에 투신자살 하였습니다.
(박안민은 4월 27일에 정탐보고 했다가 신립에게 참수 당한 안민과 이름이 같으나
박안민은 고위급 무관출신이라 척후장 안민과 동명이인이거나
동일인물이라도 척후문제로 참수 당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니시의 아들(고니시의 4번째 아들, 세례명은 루이스Luiz,
일본명은 與七郞여칠랑-요시치로)이 첫 출전했는데
당시 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무사(武士) 였습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최초로 적병의 수급을 베는 전공(戰功)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요시치로는 조선군 지휘관으로 보이는 기마 장수을 생포하고 그를 살려주려고 했으나
그 장수는 이것이 명예가 걸린 문제이므로
자신은 풀려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조선 장수는 자신의 목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머리를 자르라는 손짓만 하여
일본군은 마침내 그의 뜻대로 그를 참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비장하게 순국한 조선군 장수는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을 지휘했던 도순변사 신립과 종사관 김여물 이었습니다.
그들은 활의 명수이자 뛰어난 기수였기 때문에 활로서 많은 일본군 병졸들을 쓰러뜨리고
이리저리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만의 무용(武勇)으로 전투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일본군은 이 용장들을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신립은 김여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살고 싶은가?”
김여물이 웃으면서 대답하길
“어찌 내가 죽음을 아끼겠소?”
이라고 하고 일생의 마지막 무용을 발휘하니
그들은 탄금대에서 손수 적 수십을 죽였으나
그러한 공적으로도 패배의 치욕과 영향을 씻을 수 없었기에
그들은 전투에서 죽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본군에게 사로잡히거나 참수되어 적의 명예를 드높히고 조선의 명예를 깎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강에 투신함으로서 그들의 마지막 전투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들의 용맹은 전설을 만들었으니
일본 군기물(軍記物-전쟁소설)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에 의하면
김여물은 이날 갑옷 입고 거기에 흰 천을 두른 상태에서 창과 도끼를 가지고
고니시의 일본 중군을 향해 돌격하여 일본군 갑병(甲兵) 8~9명을 쓰러뜨리며
맹렬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그의 7척 장신에 장비처럼 갈라진 수염에 온 몸에 피가 난 상태에서
검황색 말을 타며 싸우는 모습이 일본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나
빈틈을 노린 아라가타칸자에몬(荒御田勘左衛門-황어전감좌위문)의 창에 의해
낙마(落馬)되고 곧이어 몰려온 일본군 병졸들에게 참살(斬殺)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탄금대에 신립과 그의 군사들이 탄금대를 12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며
활로써 일본군과 상대했다는 이야기와
신립이 일본군 장수 2명과 자기 외조카와 함께 강에 투신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서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뱃사공이 탄금대 인근 강물에서 시신 한 구를 발견했는데
그 신원을 확인할 수 없고 다만 그의 시신에서 발견된 옥관자가 신립의 것으로 판명되어
옥관자와 시신을 관에 넣고 운구하던 도중 관이 멈추었다가
기침 몇 번 하여 다시 움직였다고 전합니다.
1592년 4월 28일 저녁, 탄금대에는 더이상 조선군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서정일기는 이날 일본군이 3000명의 조선군을 참수하고 수백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술 하였으며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이날 조선군 8000여명이 전사했다고 기록 하고
이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 병사들의 증언을 빌려
이날 조선군의 하급자 중에는 약간 비겁한 자들이 눈에 띄었으나
상급자들은 매우 용감했다는 평가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충주성으로 입성하였고
충주성안에 있는 조선인들을 도륙(屠戮)하였습니다.
이때 충주성 안에 조선 백성들은 오직 신립과 그의 군대를 철썩같이 믿고
피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종전 후, 유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신립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언행을 회상하고
당시의 그를 선조임금이 그와 빗대엇던 백기가 아닌
백기에게 의해 패사한 조괄(趙括-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장군으로서
병법이론에 대해 잘 알아서 그의 아버지이자 조나라 명장이었던 조사趙奢도 인정하였으나
대인관계와 병법활용을 잘 하지 못하여
장평전투에서 진나라군에게 포위되어 450000명의 군사를 잃고 사살射殺당했습니다..)에 비겼으며
그로부터 약 200년뒤에 다산 정약용은
탄금대를 지나가다가 신립의 탄금대 전투를 회상하고
과탄금대(過彈琴臺)라는 시를 지으니
정약용은 신립을 선조임금이 그와 빗대언던 한신이 아닌
한신에게 패사(敗死)한 조나라 진여(陣餘-항우와 유방이 싸우던 시기에
조나라 성안군成安君으로서 조나라에 쳐들어온 한신의 한나라 군대를 정형井陘에서 맞이하여
광무군 이좌거廣武君 李左車의 책략을 유학의 도리로서 거절하고
200000명의 군대로 한신을 공격했다가
그의 배수진 전술과 매복,기습 책략에 말려 전사했습니다.)에 비겼습니다.
영애도진지척개 嶺隘度盡地倜開 험준한 재 다 지나고 대지가 확 트이더니
강심용출탄금대 江心湧出彈琴臺 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 나왔네.
욕기신립여론사 欲起申砬與論事 신립을 일으키어 얘기나 해보았으면
계문납구계위재 啓門納寇溪爲哉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을까.
회음약재성안허 淮陰若在城安墟 회음이 만약 성안에 잇었던들
적치개과정형래 敵幟豈過井荊來 적의 깃발이 무슨 수로 정형을 통과했으리.
아방위조계용한 我方爲趙計用漢 그때 우리가 조(趙)이면서,한(漢)의 꾀를 썼으니
결주색검진불재 刻舟索劍眞不才 뱃전에 표했다가 칼 찾으러 나선 멍청이로세.
마기지수입수거 碼旗指水入水去 기 휘둘러 물 가리키며 물로 뛰어 들었으니
만부용명양가애 萬夫用命良可哀 목숨바쳐 싸운 군사들이 그 얼마나 가련한가.
지금인화야심벽 至今燐火夜深碧 지금도 밤이 되면 도깨비불 출몰하여
공사행인간담최 空使行人肝膽催 길손들 간담을 섬뜩하게 만든다네.
1600년 3월 한식절(寒食節), 윤계선(尹繼善)이란 사람이 충주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날 탄금대에 가서 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동풍(東風)은 따뜻하게 불어오고,
달천의 물은 맑게 출렁이며
수많은 백골(白骨)은 널리고
꽃다운 풀은 더욱 푸르렀다.]
그는 그날 충주에서 자면서 꾼 꿈을 바탕으로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과 그의 군사들과
전쟁동안 국가를 위해 순국한 수많은 영웅들을 다룬 소설 달천몽유록을 써서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1592년 4월 23일~4월 28일 전황도
붉은색 실선은 일본군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 군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4월 23일:인동-4월 24일:선산,장천-4월 25일:상주-4월 26일:함창-4월 27일:문경-4월 28일:충주)
보라색 실선은 일본군 2번대 가토 기요마사 군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4월 23일:신녕,장기,연일,감포-4월 24일:의흥-4월 25일:군위-4월 26일:비안-4월 27일:다인-4월 28일:하풍진,당교,용궁,문경)
주홍색 실선은 일본군 3번대 구로다 나가마사 군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4월 23일:거창,현풍-4월 2?일:지례-4월 28일:성주,개령,김천)
파란색 실선은 도순변사 신립 군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4월 22일:서울-4월 2?일:용인-4월 26일:충주-4월 28일:탄금대)
하늘색 실선은 경상우방어사 조경 군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4월 23일:금산,거창 신창,지례-4월 28일:금산-추풍역)
초록색 실선은 조방장 유극량 군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4월 28일:죽령)
갈색 실선은 전라도 지원군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전라 조방장 이유의는 4월 말에 연산까지 진출,전라 방어사 곽영은 함양에서 금산으로 이동중)
황금색 원은 충주병사 신익의 군대를 나타냅니다.
(4월 말:청주)
충주 탄금대 전투 상황도(1592년 4월 28일 오후 12시~저녁)
충주 탄금대 전투에 대한 또다른 해석
(조선군 좌익을 북면을 기준으로 판단하느냐
남면을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위치가 달라지고
이에따라 소오 요시토시 군의 위치해석도 달라집니다.
제 글은 조선군 좌익을 남면(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봄) 기준으로 판단하여 해석했으며
동아일보측의 이 전투도도 조선군 좌익을 남면 기준으로 판단하였으나
소요 요시토시 군의 위치를 정반대로 배치 하였습니다.)
참고자료: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연려실기술
재조번방지
징비록
프로이스의 일본사
서정일기
상촌집
난중잡록
서애집
정만록
임진전란사
손자병법
사기열전-회음후(한신)열전,백기열전,인상여,염파열전
사기본기-항우본기
이충무공유사
국역 제승방략
달천몽유록
다산시문집
동아일보
산하님의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 http://www.dcn.or.kr/e5/10270
번동아제님의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 대한 잡설] http://lyuen.egloos.com/4952497
지도제공:규장각한국학연구원,동아일보,산하님의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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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7.21 Balian de Ibelin:이 글에서 소개된 충청도 조선군 수는 탄금대 전투 직후인 1592년 5월에 조사된 병력 입니다. 그런데 저 병력이 투입되지 않았으니 충주병사 신익이 청주에서 병력을 모은 채 보내지 않았습니다.(당시 신익이 모은 군대 수가 얼마 였는지 왜 병력을 안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다른 도 지원군은 충주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립이 활용할 수 있는 충청도 조선군은 기껏해야 충주목 인근 병력 뿐이었고 전투 당일 김여물도 편지에 [8도에서 우리를 도와주러 오는 이 없다.]라고 한탄했습니다. 따라서 탄금대 전투 당시 병력은 8천~1만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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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7.21 Balian de Ibelin:조선군 기병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가면서 창을 덜 쓰고 활을 많이 쓰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탄금대 전투 당시 일본군을 활로 공격할 수 있어도 일본군을 격파하려면 기병 돌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전력의 상당수였던 궁기병도 돌격해야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궁기병이 활쏘며 적 공격을 피하는 전술은 꽤 넓은 장소에서 해야하는데 이 전투 당시 일본군은 3면에서 포위하여 조선 궁기병의 기동성을 제한시켰습니다. 고니시 군의 피해는 전사자 500명이란 말이 있긴 한데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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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7.21 찰목합:최소한 신립의 군대는 상주 전투의 농민병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정예병도 아니었지요. 그리고 충주 일대 지형을 보면 넓은 평지에 논이 많긴 하지만 기병 운용이 불가능해보일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장과 군대를 운용하는 지휘관의 재량이 문제인데 확실히 신립이 북방에서 돌격장으로서 활약은 했으나 전략가로서 활약을 한 적은 없어서 대국적인 판단능력이 떨어진 듯 합니다.
부비트랩:전쟁은 수많은 인재들을 희생시키지요. 신립이 패전지장이긴 했으나 살아서 다시 조선 기병을 지휘했다면 전공을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
작성자가이우스율리우스카이사르 작성시간 11.07.24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신립이 김여물의 말을 듣고 조령에서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7.24 전황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본군은 조령 뿐만 아니라 추풍령(구로다 나가마사의 3번대)으로도 진격하고 있어서 신립이 조령을 막아도 일본군의 서울 진공을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가토의 2번대는 조령과 죽령을 선택해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령은 우회로가 있으니 이화령과 계립령(하늘재)가 그 루트 입니다. 고니시는 이미 황산잔도에서 좁은 길목을 막던 조선군을 우회하여 격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