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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7.21 Yunhan:막대기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창검이 일본군보다 짧았으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 인것 같습니다.
부비트랩:??
라티움:조선의 능욕을 더 보시길 원하십니까? 조선의 반격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VOCALOID 時代:남한강 이남에서 새재 이북 사이에서 기병활용이 가능해보이는 곳은 수안보-단월역-충주목 일대인데 잔도 출구(단월역)로 빠져나오는 일본군을 기병으로 강습하여 밀어냈다면....,
gksmf:고니시 군도 고니시 군이지만 고니시 군 뒤에 가토 군도 오고 있었습니다. 한 하루 정도 차이 났지요.(신립이 그것을 알았을진 모르겠지만.) -
작성자 Balian de Ibelin 작성시간11.07.21 탄금대 전투같은 경우는 워낙에 많은 견해가 존재하는터라...신립의 무용은 누구도 폄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전술적 측면으로 따져본다면;;; 헌데 제승방략체제로 집결한 충청도 병력중 신립이 운용할 수 없었던 병력이 저렇게 많았다는건 처음보는 내용이네요...실제로는 저 병력이 참전을 했을 가능성도 생각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프로이스의 기록을 따져보았을때...(물론 참수한 조선군의 수가 8만이었다는것은 허구일지라도...)우리가 알고 있는 "8천의 조선군"보다는 참전병력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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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7.21 Balian de Ibelin:이 글에서 소개된 충청도 조선군 수는 탄금대 전투 직후인 1592년 5월에 조사된 병력 입니다. 그런데 저 병력이 투입되지 않았으니 충주병사 신익이 청주에서 병력을 모은 채 보내지 않았습니다.(당시 신익이 모은 군대 수가 얼마 였는지 왜 병력을 안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다른 도 지원군은 충주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립이 활용할 수 있는 충청도 조선군은 기껏해야 충주목 인근 병력 뿐이었고 전투 당일 김여물도 편지에 [8도에서 우리를 도와주러 오는 이 없다.]라고 한탄했습니다. 따라서 탄금대 전투 당시 병력은 8천~1만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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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7.21 Balian de Ibelin:조선군 기병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가면서 창을 덜 쓰고 활을 많이 쓰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탄금대 전투 당시 일본군을 활로 공격할 수 있어도 일본군을 격파하려면 기병 돌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전력의 상당수였던 궁기병도 돌격해야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궁기병이 활쏘며 적 공격을 피하는 전술은 꽤 넓은 장소에서 해야하는데 이 전투 당시 일본군은 3면에서 포위하여 조선 궁기병의 기동성을 제한시켰습니다. 고니시 군의 피해는 전사자 500명이란 말이 있긴 한데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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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7.21 찰목합:최소한 신립의 군대는 상주 전투의 농민병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정예병도 아니었지요. 그리고 충주 일대 지형을 보면 넓은 평지에 논이 많긴 하지만 기병 운용이 불가능해보일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장과 군대를 운용하는 지휘관의 재량이 문제인데 확실히 신립이 북방에서 돌격장으로서 활약은 했으나 전략가로서 활약을 한 적은 없어서 대국적인 판단능력이 떨어진 듯 합니다.
부비트랩:전쟁은 수많은 인재들을 희생시키지요. 신립이 패전지장이긴 했으나 살아서 다시 조선 기병을 지휘했다면 전공을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