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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의 몰락-충주 탄금대 전투(1592년 4월 28일)

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시간11.07.20| 조회수3982|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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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YunHan 작성시간11.07.20 안타까운 역사군요.
    이 글을 통해 보니, 예전에 학교에서 배운 '적들이 짧은 막대기를 들고 싸우니, 우린 언덕 위에서 긴 막대기를 들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 고 하다가 패했다는건 말도 안되는 얘기같군요. 그런 얘긴 어디서 나온건지;;;
    그림은 무슨 게임 화면 같은데, 어떤 게임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 제피아세라스 작성시간11.07.23 엠파이어즈 돈 오브 더 모던월드(Empires; Dawn of the modern world)랑 라이즈 오브 네이션스(Rise of nations)입니다.
  • 작성자 부비트랩 작성시간11.07.20 음......
  • 작성자 VOCALOID 時代 작성시간11.07.20
    그냥 예로,

    '기병들이 가장 발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 에서 싸웠다면 어땠을까용..
  • 답댓글 작성자 gksmf 작성시간11.07.21 그래도 고니시군이 신립보다 쪽수가 많아요..
  • 답댓글 작성자 VOCALOID 時代 작성시간11.07.21 글죠....더 큰 피해는 줬을 지는 몰라도...수십년간 통일되지 못 해 주구장창 싸웠던 나라하고 200년 간 그리 큼직한
    전쟁(북방지역은 아니지만..)은 겪지 못 한 나라간의 전쟁인데요 ㅎㅎ;

    진짜 무슨 롬토의 버서커가 아닌 이상..........
  • 작성자 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7.21 Yunhan:막대기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창검이 일본군보다 짧았으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 인것 같습니다.
    부비트랩:??
    라티움:조선의 능욕을 더 보시길 원하십니까? 조선의 반격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VOCALOID 時代:남한강 이남에서 새재 이북 사이에서 기병활용이 가능해보이는 곳은 수안보-단월역-충주목 일대인데 잔도 출구(단월역)로 빠져나오는 일본군을 기병으로 강습하여 밀어냈다면....,
    gksmf:고니시 군도 고니시 군이지만 고니시 군 뒤에 가토 군도 오고 있었습니다. 한 하루 정도 차이 났지요.(신립이 그것을 알았을진 모르겠지만.)
  • 작성자 Balian de Ibelin 작성시간11.07.21 탄금대 전투같은 경우는 워낙에 많은 견해가 존재하는터라...신립의 무용은 누구도 폄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전술적 측면으로 따져본다면;;; 헌데 제승방략체제로 집결한 충청도 병력중 신립이 운용할 수 없었던 병력이 저렇게 많았다는건 처음보는 내용이네요...실제로는 저 병력이 참전을 했을 가능성도 생각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프로이스의 기록을 따져보았을때...(물론 참수한 조선군의 수가 8만이었다는것은 허구일지라도...)우리가 알고 있는 "8천의 조선군"보다는 참전병력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나옹 작성시간11.07.21 일본측 기록으론 조선군이 자기들보다 숫자가 많고 자기들은 지쳤기때문에 움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측도 조선정예병으로 충주로 온걸 알고 있었습니다.
  • 작성자 Balian de Ibelin 작성시간11.07.21 다른 내용의 글을 읽어보면 8천의 조선군중 기병이 4천을 되었을 것이나, 그중 신립이 정예로 육성했던 함경도 기병대 같은 궁기병은 소수였고 나머지는 겨우 말에 오른채 냉병기만 다루는 수준이었다는 글을 본 기억도 나고...사실 조선활의 사거리를 따져봐도 4천중 대부분이 궁기병이었다면 일본군에게 저렇게 처참하게 괴멸되었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헌데 탄금대 전투때 고니시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는지요?
  • 작성자 찰목합 작성시간11.07.21 신립의 군사들이 약졸이었다거나 기병에 불리한지형이었다거나 하는건 그냥 사실을 축소시키려는 의견들 같습니다 조선최고의 정예군이 무참하게 깨지니 필요한 변명정도요
  • 작성자 찰목합 작성시간11.07.21 기병전에 자신있는 장수인데 최적의 장소를 골랐을거라 생각합니다 깨지니까 말이 많은거고 단지 본인이 기병전에 경험이 많다고 정면대결로 간걸 보면 장군보다는 돌격대장,선봉정도의 역할이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 작성자 부비트랩 작성시간11.07.21 제국의명장// 아.... 김여물이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로다 싶어서 말입니다 ㅎㅎㅎ;;;
  • 작성자 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7.21 Balian de Ibelin:이 글에서 소개된 충청도 조선군 수는 탄금대 전투 직후인 1592년 5월에 조사된 병력 입니다. 그런데 저 병력이 투입되지 않았으니 충주병사 신익이 청주에서 병력을 모은 채 보내지 않았습니다.(당시 신익이 모은 군대 수가 얼마 였는지 왜 병력을 안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다른 도 지원군은 충주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립이 활용할 수 있는 충청도 조선군은 기껏해야 충주목 인근 병력 뿐이었고 전투 당일 김여물도 편지에 [8도에서 우리를 도와주러 오는 이 없다.]라고 한탄했습니다. 따라서 탄금대 전투 당시 병력은 8천~1만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작성자 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7.21 Balian de Ibelin:조선군 기병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가면서 창을 덜 쓰고 활을 많이 쓰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탄금대 전투 당시 일본군을 활로 공격할 수 있어도 일본군을 격파하려면 기병 돌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전력의 상당수였던 궁기병도 돌격해야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궁기병이 활쏘며 적 공격을 피하는 전술은 꽤 넓은 장소에서 해야하는데 이 전투 당시 일본군은 3면에서 포위하여 조선 궁기병의 기동성을 제한시켰습니다. 고니시 군의 피해는 전사자 500명이란 말이 있긴 한데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 작성자 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7.21 찰목합:최소한 신립의 군대는 상주 전투의 농민병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정예병도 아니었지요. 그리고 충주 일대 지형을 보면 넓은 평지에 논이 많긴 하지만 기병 운용이 불가능해보일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장과 군대를 운용하는 지휘관의 재량이 문제인데 확실히 신립이 북방에서 돌격장으로서 활약은 했으나 전략가로서 활약을 한 적은 없어서 대국적인 판단능력이 떨어진 듯 합니다.
    부비트랩:전쟁은 수많은 인재들을 희생시키지요. 신립이 패전지장이긴 했으나 살아서 다시 조선 기병을 지휘했다면 전공을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 작성자 가이우스율리우스카이사르 작성시간11.07.24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신립이 김여물의 말을 듣고 조령에서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 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7.24 전황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본군은 조령 뿐만 아니라 추풍령(구로다 나가마사의 3번대)으로도 진격하고 있어서 신립이 조령을 막아도 일본군의 서울 진공을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가토의 2번대는 조령과 죽령을 선택해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령은 우회로가 있으니 이화령과 계립령(하늘재)가 그 루트 입니다. 고니시는 이미 황산잔도에서 좁은 길목을 막던 조선군을 우회하여 격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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