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우리가 조선하면 생각하는게 성리학과 선비이고, 조선의 양반들은 체면과 체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이미지가 강하죠.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관념이나 모습들은 구한말때나 되어서야 생겨난 것들이고, 조선이 성리학적인 모습이 일반사회에까지 정착되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16C나 가서야 일입니다.(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조선초기에는 조선 중후기에가서는 생각도 못 할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데 오늘 소개할 내용은 그 조선초기에도 참 황당한 사건입니다.
태종조에 황상(黃象)이라는 무장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황희석의 아들로, 황희석은고려 말 부터 활약하던 무장이었는데 요심의 적이 쳐들어왔을때 이지란과 같이 활약했던 인물이며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훗날 조선개국2등공신에 올랐습니다.
아무튼 황희석의 아들이다 보니 나름 편하게 잘 살았을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왕자의 난때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딱히 없고 단지 태종1년에 금주령을 어긴죄로 귀양 갔다는 기록(하지만 황희석의 아들이라 원하는 곳으로 가는 수준)이 있을 뿐이었죠.
그래도 또 태조5년에 실시한 무과회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선발되었고, 다음해에 호군방을 설치하였는데 그곳의 방주(房主)가 되기도 하였죠.
여기서 또다른 무장이 등장하는데, 김우(金宇)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김우는 황상과는 달리 좋은 집안은 아니었는데 2차왕자의 난때 참여하여 공을세워 공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이 사람도 참 전형적인 조선초 무장답게(?) 깽판을 치고 돌아다니는데, 강계병마사직을 끝내고 수도로 돌아오는데 이 사람이 데리고 다니는 매가 하도 많아서 돌아오는 길의 닭과 개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탄핵이 올라올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공신이기때문에 이 사람을 비호하였습니다.
아까말한 황상의 기생 첩으로 가희아(可喜兒)란 인물이 있었는데 나라의 정재(呈才)때 춤을 추는데 불려가기까지하는 정도였죠(당연희 외모도 뛰어났겠죠).
기생이었던 가희아가 예전에는 김우하고도 그렇고 그런 사이였었는데, 김우가 그때를 못잊었는지 이 가희아를 납치할 계획을 세웁니다.
가희아가 동짓날에 궁에서 연회할때 참석하고 밤에 황상의 집으로 돌아가자 당시 좌군총제였던 김우가 갑사(甲士)가운데 기병과 보병 30명을 뽑아서 황상의 집을 포위하고 가희아를 납치하려고 수색하였지만 가희아를 찾지 못하고 옷만 가지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밤에 이렇게 생긴 아저씨들 30명이 집에 쳐들어왔다는 거 ㅎㄷㄷ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다음날 가희아가 말을 타고 저자거리를 지나는 도중에 김우가 다시 하급관리와 자신의 종을 보내서 납치를 한 것입니다.
끌려가는 와중에 황상이 그 소식을 듣고 눈이 뒤집혀서 몽둥이를 들고 말을 타고 그 뒤를 뒤쫓자,
이번에는 김우가 갑사 10명과 자신의 노비20명을 이끌고 역시 몽둥이를 가지고 달려가서 저자거리에서 대판 싸움이 난 것입니다.
아무튼 기생을 두고 싸운 것만으로도 혀를 찰 일인데 고관대작에 있는 그것도 '무장'들이 대낮에 수도 한복판에서 거의 시가전 수준으로 난투극을 벌였으니 당연히 귀에 안들어갈 수 가 없었죠.
근데 여기서 묘한건 태종이었습니다.
김우는 어쨌든 공신이었기때문에 비호하였고, 황상은 파직하고, 명에 따르기만한 죄없는 갑사들은 저멀리 수군에 충군시키는 처벌을 하였는데.
처음에 보고가 들어갔을때 우리가 용의눈물이나 정도전에서 본 이미지 대로라면 "감히 수도 한복판에서 왕의 명도 없이 사적으로 군사를 움직여? 이건 역모에 해당하는 일이야!" 이런 반응이어야하는데
오직 왕실을 위한 군대만 있을 뿐이오라고 소리치는 장면 ㅎㄷㄷ
그런말은 한마디도 안나오고
"요즘 내가 얼굴을 아는 그 기생이 궐에 안나오는데, 이거 분명히 고관이 첩으로 데리고 살면서 안내놓는 거니까 조사 좀 해봐봐!"
예. 애초부터 그 둘이 싸운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관심사는 그 기생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후에 가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7년뒤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홍씨(洪氏)를 혜선 옹주(惠善翁主)로 삼았으니, 보천(甫川)의 기생 가희아(可喜兒)였는데, 처음에 가무(歌舞)를 잘 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얻었었다"
태종 14년 1월 13일 무자
예 결국 태종이 차지하였습니다 ^^;;
나중에는 가이옹주(加伊翁主)라고 바뀌는데 아시다시피 태종도 만만찮은 호색한이었고, 그것때문에 원경왕후(세종엄마)가 속앓이를 많이 했지요. 2차왕자의난때 태종의 말이 혼자 집으로오자 말타고 달려오기까지 하는 한 성깔 하는 사람인데 참;;
사실 양녕이 호색한 호색한하는데 누굴 보고 배웠겠습니까. 다 윗사람보고 배우는 거지요. 양녕이 어리사건때문에 폐세자가 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양녕이 마지막에 반항할때 태종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세자가 내관(內官) 박지생(朴枝生)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手書)를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通)하게 하면 성예(聲譽)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걸 풀어서 해석하면
"자기도 민가기생 뺏어다가 잘만 끼고 살면서 왜 나는 안되는건데?.......
이 글을 받은지 단 사흘만에 충녕대군이 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는 걸 보면 태종으로서도 이건 진짜 안되겠다 싶었나 봅니다. 사실 뭐 자업자득이지만요.
참고로 위에 나왔던 황상은 말년에도 또 기생첩때문에 곤욕을 치르는데(이쯤되면 이 사람도 참 인생이 기구하네요)
세종10년(1428) 모친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동료 장군이었던 이순몽이 자신의 기생첩 월하봉과 사통하는 것을 듣고는 반인과 노복을 거느리고가서 현장을 들이쳐 두사람의 머리카락을 싹싹 밀어버렸다고 합니다.
토전사에서 이순몽 난봉질(?) 소개할때 이걸 소개했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기도 ㅎㅎ
이 일이 조정에 들어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황상은 모친상중에 월하봉과 동숙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발각되어 장 백대에 처하고 직첩을 회수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일부 신하들이 황상의 죄를 가중해야한다고 소를 올렸는데, 예전에 김우와 첩을 가지고 다투었던 일까지 거론했더니 가희아(가이옹주)일을 들먹인거여서 되려 태종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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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나아가는자 작성시간 20.08.09 잘 읽었습니다. 역시 왕이 최고군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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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배달민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8.09 정치던 뭐던 모든방면에서 최후의승자는태종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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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TheWitcher 작성시간 20.08.09 기생 첩의 남편이 저리 왔다갔다 하는 거 보면 확실히 정상적 결혼관계라기 보다는 남성의 소유물 수준이었군요. 양반 첩은 그러지 않을 거 같긴 한데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ㅎㅎ 좋은글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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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배달민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8.09 전근대 사회니까 그런감도 있는데, 혼란하면서 유교가 사회에 완벽히 뿌리내리기 전이니까 더 그런듯 합니다(이방석 기생첩들을 공신들이 나눠가진 사례도 있으니). 황진이 같은 케이스가 조선사회가 안정되고 난뒤에 발생하는걸 보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