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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적백내전에 휘말린 체코군단 이야기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8.02.26|조회수1,184 목록 댓글 7

1차대전때 "체코군단" 이라고 알려진 부대는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에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지원병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으로서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 후, 연합군을 위해 싸운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 독립 운동과도 인연이 있는, 러시아쪽의 체코군단에 대해 써 보겠습니다.

 

체코인 부대의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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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이 터지고,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영토내의 체코인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편성을 요구하는 체코인들의 진정을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 이 부대는 중대규모에 불과했으나, 망명자들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싸우다 잡힌 체코인 포로들 중의 전향자들, 탈주병중의 지원자들의 보강을 받아 1917년에는 여단규모로 불어났으며 그해 가을, 볼셰비키들의 쿠데타 (소위 10월혁명) 즈음에는 2개사단으로 구성된 군단 (38,500명) 규모로까지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 체코의 독립운동가인 마사리크는 2월 혁명 이후의 케렌스키 정부와 교섭하여 이들을 미래에 독립할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 후에도 부대는 계속 성장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즈음에는 6만명을 헤아렸으며, 1차대전기간중 동부전선에서 최종적으로 4,112 명의 장병이 전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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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리크

 

일단 마사리크가 맺은 협약을 볼셰비키도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용했습니다. 당시 부대는 임시정부 (케렌스키 정부) 시절, 프랑스 참모부에서 파견된 장교들의 지휘를 맡고 있었으나 이들의 수는 십수명에 불과했으며, 현실적으로 부대 전체를 컨트롤하는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볼셰비키 정부는 프랑스, 체코 군단과 협약을 맺어 (1917년 12월) 조속히 이들을 서부전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아르항겔스크나 페테르부르크등 러시아의 유럽지역은 혼란이 극에달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 미국을 경유하여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세웠지요.. 한편 이들의 무장을 보충하기 위해 5만정의 신품 모신-나강 소총이 미국에서 제작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졌습니다.

 

체코군단, 적백내전에 휘말리다

 

당시 우랄산맥 이동以東지역은 사실상 무정부상태로, 각 도시에 모스크바가 보낸 활동가들이 수십명 단위로 결성되어 임시적으로 통제하는 상황이었으나, 실질적으로 도시를 운영하는 세력의 대부분은 제정시대의 하급관리 또는 고용원이었습니다. 한편 시베리아 철도 자체는 구 철도노조가 그대로 소비에트가 되어 옛 철도 관리국의 하급관리들의 보조를 받으며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칼 호수부터는 코사크 부대의 아타만이었던 세묘노프가 인솔하는 백군이 산발적으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여, 때때로 철도 운행이 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무관은 일본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만주리, 대련 경유의 철도수송을 의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수송행렬은 1918년 5월경, 첼리야빈스크에서 큰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의 진상은 아직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은데.. 그중 가장 널리 유포되는 설에 의한다면 그 원인의 일부를 아마 볼셰비키 정부의 부주의에 돌릴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을 실은 군용열차는 첼리야빈스크 기차역에서 몇일간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동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거하여 중앙동맹국으로 돌아가는 독일인, 오스트리아 헝가리인 (이중에는 소수의 체코인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포로들과 충돌이 생긴 거지요... 특히 체코군단 병사들은 보로실로프 공세기간동안 대량의 헝가리군 포로를 잡았으며, 이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헝가리군 포로들과의 충돌에서 상당한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첼리야빈스크의 볼셰비키 당국은 이를 진정시키고자 사태의 주동자들을 붙잡아 연행했는데 이것이 실수였습니다.. 중앙제국 포로들과는 달리 체코군단 병사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체포되는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무력을 쓴다는 것이 통제를 벗어나 그만 첼리야 빈스크전체를 휩쓸어 버렸습니다. 프랑스군에서 파견된 장교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수가 너무나 적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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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는 그들을 무장해제시키려고 했으나 체코군단이 이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으며, 이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순식간에 바이칼호 지역의 제 1 도시인 이르쿠츠크를 점령했습니다. 이 사태를 당시 연합군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치 체코군단이 동부전선을 부활시키기 위한 비장의 카드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동부전선 부활의 촉매가 되리라고 실제로 기대한 것은 영국뿐이었습니다. 프랑스 역시 기대하는 바가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이들을 빨리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던 카이저 대공세를 막는데 관심이 있었으며, 미국또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정부상태가 된 시베리아에서 이들의 수송을 가능하게 하려면 당시 만주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일본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체코군단의 구출을 위한 파병이 무익하다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지만, (심지어 극동 러시아에서의 일본인에 대한 테러사건들조차 일본 육군이 꾸민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미국이 파병을 결정하자 분위기가 급반전, 최종적으로 2개사단, 7만여명 (당시 일본군의 1개사단은 3만 5천명 가량입니다.) 을 파병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체코군의 구출과 더불어 시베리아 극동 3주 (연해주, 흑룡강주, 바이칼주) 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1918년 7월 6일, 체코군의 한 부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 점령하여 연합국의 보호하에 있음을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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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옴스크정권의 수장, 콜차크 제독.

 

한편 제정 러시아의 흑해함대 사령관이었던 콜차크 Aleksandr Kolchak 제독이 영국장군 녹스 Knox 의 청을 받고 이들을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미-일 연합군도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극동 러시아에 상륙했으나, 막상 구조를 받을 체코군들은 영-불군의 지휘하에 옴스크로 돌진했습니다;; 따라서 미-일연합군도 이들에게 끌려다닐수 밖에 없었으며.. 애초에 볼셰비키 정권에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미국까지도 체코군을 구하려다 보니 간섭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버렸습니다. 7월 10일 체코군은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전개해 우랄산맥을 돌파했습니다. 1918년 9월, 콜차크 휘하의 체코군은 콜차크를 수반으로 하는 옴스크 (시베리아 정부) 정권의 수립에 큰 역할을 했으며, 실패로 끝난 황제의 구출작전에도 참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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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위군이 잘나갈 때...

 

옴스크 정권의 수반이 된 콜차크는 우랄 코사크인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한때 그 수는 25만명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해군출신으로 육전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육군출신인 D. A. 레베데프에게 맡겼는데.. 이때문에 망하는 군대의 전형대로, 지휘계통에 관한 심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뭐.. 당시 적위군도 상황이 그다지 좋지는 못했기 때문에 1919년 5월까진 우파(Ufa) 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만, 새로 전장에 도착한 적위군 제 5군의 사령관이 그 유명한 투하체프스키였습니다..-_-;;;

 

옴스크 정권의 붕괴와 체코 군단의 유럽 송환

 

결국 우파는 넘어가고 시베리아 전선도 점점 적위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습니다만, 당시 시베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조직이었던 체코군단은 소중한 인적자원의 소모를 두려워한 프랑스 참모부에 의해 소극적인 활동만을 펼쳤습니다. 옴스크도 마침내 적위군과 대치하게 되었고.. 짧은 열전끝에 소규모의 영-불군과 일본군은 퇴각했습니다. 일본군은 프랑스 참모부에게 "왜 체코군단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는가?" 라고 따졌지만 그 대답은 "콜차크 한명과 수만명의 체코군을 교환할 수는 없다." 라는 대답만이 돌아왔지요. 프랑스의 주의는 언제나 체코군 병력의 보존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군조차 옴스크 정권이 일본의 시베리아 동부 3주의 세력권화를 위한 완충지대일 뿐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유럽지역에서의 미군은 라인란트에 주둔한 16,000명을 제외하면 이미 전원 철수한 상태였습니다.), 이제 사실상 옴스크 정권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19년 11월 14일.. 마침내 옴스크는 적위군에게 넘어가고 남은 옴스크정권의 추종자들은 이르쿠츠크로 쫓겨갔습니다. 이 철수는 아주 무시무시한 것으로 후대에 "죽음의 시베리아 행진" 으로 기억되었습니다.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철수도중에 동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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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일본의 지원을 받는 바이칼 주를 제외하곤 사실상 시베리아에서 백군의 세력은 소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체코군단 역시 이러한 백군편에 계속 남아있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로막는 백군 병사들과 전투를 벌여 옴스크를 탈출한 후, 일본군 특무기관의 보호를 받고 있던 콜차크를 체포하여 안전한 송환의 교환으로서 볼셰비키측에 인도하였습니다... 한때 영국, 프랑스, 일본의 공식 인정을 받은 옴스크 정부를 이끌던 콜차크는 이듬해 2월, 처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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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레닌으로서도 폴란드와의 전쟁때문에 극동에는 신경을 쏟을수가 없었지요.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병은 1922년입니다.) 대부분의 체코군단병들은 1920년 9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1개월간의 휴가를 즐긴끝에 미국을 경유, 유럽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체코군단의 생존자들은 그후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의 요직을 맡았습니다.

 

한국 무장독립운동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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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과 조선 독립운동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훗날 체코슬로바키아의 파시스트 지도자가 되는 체코군단 참모장 Radola Gajda 준장 (48년에 사망) 은 콜차크 정권 (옴스크 정권) 의 붕괴가 확실해지자 옴스크 정권에 대항하여 반란 (1919년 11월) 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후 그와 추종자들은 체코군단 본대와는 별도로 시베리아에서 탈출하면서 아직 수중에 있던 대량의 무기를 독립 운동가들에게 판매한 것이죠. 즉, 엄밀히 말하면 체코군단에게서 구입했다고 하는건 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독립 운동가 분들껜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판매자의 실체를 보니.. 썩 기분이 좋지많은 않네요;;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Czech_Legion

         http://en.wikipedia.org/wiki/Aleksandr_Vasilevich_Kolchak

         http://ww1.m78.com

         http://en.wikipedia.org/wiki/Radola_Gajda

         그 외 기타 등등...         

         

솔직히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 조사해서 쓴 건데... 틀린 부분이 있으면 부디 관대한 지적 부탁드립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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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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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롱기누스 | 작성시간 08.02.26 저 체코군단의 난동사건이 본격적으로 서구권의 개입을 불러왔죠. 일본군만 개입된게 아니라 제가 알기론 서구권 국가들이 체코군단 구출인가 그거 명분으로 침공해왔다네요
  • 작성자중세기사 | 작성시간 08.02.26 오우; 상당히 복잡하네요.저도 그때 다큐에서 체코무기 구입하는 독립군의 얘기를 봤는데 총기 가격이 몇백원 했다고 들었어염. 그당시엔 그나마 싸게 구입할수 있는 경로라고 소개 해서 흐믓해 했는데... ㅜㅜ
  • 작성자타마누님 | 작성시간 08.02.27 ㅎ 그래도 무기는 무기일 뿐이라...
  • 작성자yskwww | 작성시간 08.02.27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서 좋은 가격에 구입해서 잘 썼으면 그만이죠.. 그거 배경까지 따지기엔 그당시 독립군 상황이 그렇게 좋은 상황이었을까요? 그리고 파시스트가 된건 훗날이라고 적으신 거 같은데...
  •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2.28 롱기누스님//그렇지요. 뭐 미국같은 경우는 좀 애매한 구석이 없는것도 아니지만...중세기사님// 제가 알기로도 상당히 염가로 판매했다고 압니다. 타마누님// 그렇지요 ㅎㅎ;; yskwww님// 물론 그렇습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체코군은 형식적으로나마 일본군과 한편이라해도 될 듯한데 저렇게 이해관계가 맞을수도 있구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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