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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20) 고려군정의회가 본 자유시 사건 전야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09|조회수122 목록 댓글 3

양파 독립군 부대의 대립

(자유시에 정식 고려군정의회가 도착할 무렵)

자유시에서 기관포를 조준하고 이렇게 위협을 한 사람들은 사할린부대가 아니고 오하묵의 자유대대다.

자유대대는 과거 1920년 10월 22일경 께르비에서 걸어서 자유시·마자나바·블라가베셴스크 일대에 도착한 트리피츤 부대를 강제 해산시킬 때 볼셰비키 군대와 함께 철갑차•장갑열차 등의 무력을 동원해 위협한 사실이 있었다.

사할린의용대가 무력을 동원한 경우는 1921. 1월 28일경에서 ~ 2월경 자유시에서 박병길을 처형한 것 외에는 특별히 확인되는 것이 없다.

1915년경 자유시 기차역

(※ 박병길은 1920년경 니항 일본인회 회장이었던 시마다(시마다모토타로, 島田元太郎) 등의 기록을 볼 때, 일본군이 점령했던 니항에서 조선인민회를 조직할 때 가담하여 서기를 지낸 것이 명백하다.)

1920년 니항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 요즘 니항에서 그가 발행한 지폐가 희귀 지폐로 고가에 거래된다고 한다.

요즘 자주 인용되는 러시아의 리인섭은 과거 소련시대 숨겨졌던 자유시 포병부대 지휘관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압친니코프(А. Овчинников), 바라비요프(П.Я. Воробьёв), 비첸카(Биценко) 등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병길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러시아측 기록을 살펴보면, 일본군의 방조로 안드레예브 등이 트리피츤 등을 ‘무정부주의 강도떼’로 몰아 살해한 것은 사실이다.

1921년경 자유시에서 포병부대 지휘관을 한 안드레예브, 1921년경 아무르주에서 경찰서장과 경찰국장을 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군 점령시기 니항 조선인회는 일제로부터 탄압받던 단체가 아니다.

 

사할린 부대와 만주 독립군들은 단지 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오하묵의 자유대대를 기관포를 걸어놓고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은 이르쿠츠크파와 볼셰비키 군대가 자유시 사건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작성한 조작된 보고서에서나 나오는 것일 뿐이다.

 

이르쿠츠크파 자유대대는 수천여명 독립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대방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였고 볼셰비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지나치게 장단을 맞추었기 때문에 결국 자유시 사건 수년 이후 사실상 한국 독립운동에서 제외된 것이다.

 

남한에 온 이범석·김홍일 등은 최소 자신의 행적에 과오라 부를 만한 것을 인정하는 듯한 내용도 있지만 최호림, 이지택, 김낙현 등은 아예 니항사건과 박병길 등에 대해서는 허위로 진술한 부분이 상당하다.

앞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의 자료들이 차례로 공개되어 만주, 시베리아 일대의 친일단체와 공산당이 숨겨온 허위는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지택 등은 니항에 가본 적도 없이 신문보도나 당시 일본 출판물을 보고 니항사건을 진술했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된다.

아니면 남로당 빨치산 총책이었다고 주장하는 000처럼 박정희 시대 중앙정보부 등 반공기관이 써주는 내용을 진술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되지도 않는 ‘000이 니항의 교사였고, 트리피츤은 니항 포병대장, 레비제바는 총독의 양딸, 일제 점령기 니항 조선인회는 독립운동 단체 등등’ 의 허위 부분은 밝혀지게 될 것이다.

 

또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은 자유시에서도 오락가락하던 최진동을 그나마 우호적으로 기록하였다.

000의 추후 행적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자유시 참변 때부터 짐작할 수 있는 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르쿠츠크파의 몇몇이 이렇게까지 허위 문건을 작성해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자유시 사건의 사망자수는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한 수십여명은 아니고, 상해파나 러시아측 기록처럼 수백여명 단위이다.

 

자유시 사건 당시 자유시 일대에 모인 한국 독립군 수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러시아측 기록 등에 따르면 대략 6천명 ~ 7천여명 정도였다.

주변 블라가베셴스크나 마자나바, 벨로고르스크 등 아무르주에 머무르던 인원까지 합하면 더 많았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 거주하던 한국계를 20만여명 정도로 추산할 때 가족이나 지인들 중 한두명은 자유시 주변에 간 적이 있다고 보면 된다.

조금이라도 기록을 남긴 고려인의 회고에서 자유시 사건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까란다리시비리의 자유시 도착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6월 6일경에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등 정식 고려혁명군정의회 간부진이 5월 23일경에 극동공화국 서울 치타에서 출발후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6월 7일경 임시 군정의회 당국(임시 사령관 오하묵)은 그 동안의 사무 집행 전말서를 작성하여 정식군정의회에 인계하였다.

 

자유시에 주둔한 군대는 한인 보병자유대대, 홍범도 군대, 합동민족연대 만으로 이미 임시고려군정의회의 관할에 있었다.

이 무렵 홍범도 장군은 결단을 내려 자유시로 이미 이동해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자나바와 기타 부락에 주둔한 군대는 니항 군대, 총군부 군대, 독립단 군대, 국민군, 다반 군대, 이만 군대(사할린의용대 명의로 있었다) 등 크고 작은 단체 총원 1,400여명으로 일개 연대 정도로 편성된 군대였고 그리고리예프와 박일리야의 지휘하에 재한 바

그중 몇 개의 단체는 처음부터 임시군정의회에 향응코저 하였으나 박일리아의 협박에 의하여 과단치 못하고 또는 마자나바 부근으로 각 촌락 별로 주둔한 군대는 주민에게 무리한 폭행과 약탈을 적행(籍行)하여 민간에 원성이 연기(連起)하고 따라서 지방 로시아 관청에서는 사할린군대의 난폭한 행동을 금지하라고 연일 교섭이 있는터 였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가 본 사할린 부대의 비행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48쪽 및 러시아 정부 문서 등에 따르면)

동시베리아의 고려인들

자유시•마자나바 일대의 군대를 연합시킨다 하면서 실지로는 문란을 일으켜 응종치 아니함은 오하묵 등이 작성한 임시군정의회의 사무집행 전말서에 증명이 있으나 본 정식 고려혁명군정의회에서 사할린의용대의 사정을 이해하여 본 바는

몇몇 악분자의 선동에 고려군정의회의 조직된 본래의 뜻이 군인으로 하여금 이해를 주지 못함이며

또는 민간에 난폭한 행동 있음도 역시 천여명 군인이 일정한 군영이 없이 몇십명씩 부분적으로 각 촌락에 산재하였으니 자연 군율상 완전한 지휘가 시행되기 어려울 것이니 따라서 개인상 동작으로 민간에 다소 폐해가 없지 못할 것이고

더욱히 과거 4~5개월 동안 식주를 지방주민에게 의뢰하였던 군대들이라 자래로 촌민의 불평을 피치못할 사실이 아닌가.

 

그럼으로 몇몇 군인의 악화가 전체 군대에 악평을 줄 것도 면키 난하니 군대에 대한 처리가 연합상 문제는 원리상 중요 문제니 거론할 필요가 없고, 기타 등등의 문란도 다소 있었다.

 

독립군이 이 지대에서 활동하고 이 지대로 망명하는 일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바이며, 이 지방에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다.

 

주민을 의뢰치 아니하고 군대를 수습할 만한 형편에 있는 군정의회의 책임자로 장차 진행할 사업도 중대하다.

그래서 시일상 조급으로 번뇌가 되거니와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은 축약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일반 군인에 대하여 의사를 소통케 하는 것이 중요 방책으로 생각하였다.

 

1921녀 6월 7일경에 자유시에 주둔한 군인전부를 회집하고 당금 시국에 관한 문제와 장차 사업에 관한 방침을 설명한 후에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직통 전보로 마자나바에 주둔한 사할린 군대 군정위원장 박일리야에게 사할린 군대에 대한 정황을 알아보며 군대를 영솔하고 자유시로 오라고 명령하였다.

1919년 일제의 마자나바 학살 추모비 중 하나,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을 다루는 역사책에 반드시 나오는 사건이다.

그러나 박일리야는 전보로 답하기를 명령에 따라 올 것이나, 그동안의 여러 가지 오해된 점으로 군대 전부가 자유시로 이동함은 용이할 것 같지 못하니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가 마자나바까지 오는 것 편할 것이다라고 답하기에 까란다리시비리는 다시 명령하기를 자유시 당지까지 출래키 어려우면 크라스나야라바까지 군대를 출동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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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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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09 최호림, 이지택, 김낙현등은 아예 니항사건과 박병길 등에 대해서 허위로 진술한 부분이 상당하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10 예, 요즘 독립운동관련 도서에서 자유시 참변과 니항사건과 관련하여 최호림, 이지택, 김낙현의 주장들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러시아 측 기록을 대조하면 허위 진술한 부분이 상당합니다.

    1. 트리피츤이 니항 포병대장으로 수년간 일했던 사람이다..-> 친일파인 안드레예브가 포병으로 근무하였고, 트리피츤은 유럽에서 활동한 사람이었음
    2. 박병길은 한인학교 교사였다 -> 알고보니 일본인 상점에서 일한 사람으로. 일본에서 좋게 평가하는 사람
    3. 레비제바는 총독의 양딸이다 -> 관련성 없음
    4. 니항 조선인회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 류소심, 박일리야가 조직한 단체외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칭찬하는 단체가 있음
    5. 께르비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된 사람은 7명이다. -> 재판없이 처형된 수십명을 누락
    6. 트리피츤이 일본인 처형을 지시한 것외에는 확실하지 않는데도.. 줄줄이 허위로 진술하였기에 이 정도면.. 신뢰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7. 사할린의용대가 먼저 자유시를 기습공격하였다...- > 믿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8. 박일리야는 무정부주의자다... -> 이르쿠츠파외에 믿는 사람 없음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10 신룡기2 ㅇㅇ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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